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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파행(琵琶行-비파의 노래)/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
비파행(琵琶行)은 <長恨歌>와 함께 816년, 45세 때에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가 지은 대표적인 서사시(敍事詩)이다. 당나라 때 이미 크게 유행하여 "어린이도 <장한가(长恨歌)>를 읊조릴 수 있고, 오랑캐도 <비파행(琵琶行)>을 부를 줄 안다"(童子解吟長恨曲, 胡兒能唱琵琶篇.)고 하였다. 원나라 후세에 여러 사람에 의하여 희곡으로 각색되었다. 비파(琵琶) 연주를 시로써 표현한 부분은 가히 발군(拔群)이라 오늘날까지도 비파행을 중국의 명시로 손꼽는 이유이다. 고전(古典) 시들 중 명시를 뽑으면 몇 수가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백미라 할 만한 시가 바로 '비파행'이다. 안타까운 처지인 사람을 동정하고 감정이입(感情移入)하는 시인의 마음을 잘 표현하였다.
서문(序文)에서는 시를 지은 계기를 설명한다. 백거이가 배를 타고 가다 시골에서는 듣기 힘든 세련된 도시풍 비파 연주를 듣고 반하여 여인을 가까이에 부른다. 여인의 속사정이 있어 들어보니, 과거엔 잘나가던 기녀(妓女)였으나 지금은 장사치의 부인이나 되어 시골로 은퇴하여 쓸쓸하게 살아가는 처지에 한(恨)을 품고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화자인 백거이는 여인의 구슬픈 비파 연주에 감동한데다, 사실 자기도 좌천(左遷)되어 시골에 내려온 처지라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자신의 모습도 슬퍼지고 안타까워 울었다는 내용이다.
백거이가 정말로 비파행에서 묘사하는 상황을 겪었을지는 알 수 없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갈린다. 그대로는 아니었을지라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으리라는 사람도 있고, 가상의 상황을 시로 지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중국(中國)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 사람들은 구강장강대교(九江长江大桥) 옆에 비파정(琵琶亭)을 지어, 백거이가 여기서 비파행을 지었음을 기렸다.
비파행(琵琶行)은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 전문가들조차 다르게 해석하는 이유는 옛 문학인 데다가 하필 시(詩)라 백거이가 시어를 압축해서이다. 압축된(생략된) 시어가 뭐냐고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래 번역에서는 김경동 교수의 아래 논문의 해석을 적극 따랐는데, 김 교수는 해석이 분분한 비파행의 일부 구절에 대해서 기존과 상당히 다르게 주장했다.
◇ 비파행 서문(琵琶行 序文)
元和十年 予左遷九江君司馬. 明年秋 送客湓浦口
원화[당나라 憲宗 李純(805-820 재위)의 연호] 10년(815) 나는 구강군九江君[1] 사마司馬[2]로 좌천(左遷)되었다.
이듬해(816) 가을 분강의 포구[湓浦口]에서 손님을 보내는데
聞舟中夜彈琵琶者. 聽其音 錚錚然有京都聲.
배에서 밤중에 비파 뜯는 사람이 있었다. 소리가 높고도 맑아 서울에서나 듣던 소리였다.
問其人 本長安倡女 嘗學琵琶於穆曹二善才 年長色衰 委身爲賈人婦.
누구인지 물으니 "본래 장안 기녀로 일찌기 목씨와 조씨, 두 스승(善才)[3]들에게 비파를 배웠습니다만,
나이가 들어 미색이 쇠하자 상인의 부인이 되어 몸을 의탁하였나이다." 하였다.
遂命酒使快彈數曲. 曲罷憫然 自敍少小時歡樂事 今漂淪憔悴 轉徙於江湖閒.
다시금 술을 시키고 서둘러 몇 곡 타도록 했더니만, 연주가 끝나자 처연하게
'어릴 적에는 기쁘고 즐겁게 살았으나 지금은 시들고 초췌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하였다.
予出官二年 恬然自安. 感斯人言 是夕始覺有遷謫意.
나는 관직을 나와 2년 동안 스스로 편안하게 있었는데[4]
이 사람 말에 느끼는 바 있어 이날 밤에 비로소 폄적된 뜻을 깨달았다.
因爲長句歌以贈之. 凡六百一十六言 名曰琵琶行.
그리하여 긴 구절로 노래를 지어 선사하니, 모두 616자로 이름하여 '비파행'이로다.
※ 瑟瑟 : 차고 바람 사나움에 쓸쓸하다.
◇ 琵琶行 - 비파의 노래
1
尋陽江頭夜送客 심양강두야송객
심양강에서 밤에 손님을 보내는데
楓葉荻花秋瑟瑟 풍엽적화추슬슬
단풍잎, 물억새 꽃에 가을이 소슬하네.
主人下馬客在船 주인하마객재선
주인主人[5]도 (손님과 함께) 말에서 내려 손님 배에 같이 타 [6]
擧酒欲飮無管絃 거주음주무관현
술을 들어 마시려는데 음악이 없네.
醉不成歡慘將別 취불성환참장별
취하였으나 기쁘지 않고, 떠나보내야 하나 서글퍼서
別時茫茫江浸月 별시망망강침월
이별할 적에 아득히 강에 달이 잠기더라.
忽聞水上琵琶聲 홀문수상비파성
홀연히 물 위로 비파 소리 들리는데
主人忘歸客不發 주인망귀객불발
주인은 돌아감 잊고 손님은 가질 않네.
2
尋聲暗問彈者誰 심성암문탄자수
소리 찾아 나직히 "누구 연주요." 물으니
琵琶聲停欲語遲 비파성정욕어지
비파 소리 멈추되 대답을 저어하네.
移船相近邀相見 이선상근요상견
배 옮겨 다가가 만나보고자 하니
添酒廻燈重開宴 첨주호등중개연
술 더하고 등불 켜 잔치 다시 열었네.
千呼萬喚始出來 천호만환시출래
천번 만번 부르니 비로소 나오는데
猶抱琵琶半遮面 유포비파반차면
여전히 비파를 안고 반 정도 얼굴을 가리었더라.
轉軸發絃三兩聲 전축발현삼량성
굴대 감고 현 튕겨 두세 번 소리 내는데
未成曲調先有情 미성곡조선유정
아직 곡조 이루지 않았는데도 이미 정이 있네.[7]
絃絃掩抑聲聲思 현현엄억성성사
현마다 가리고 누르니 소리마다 생각이 있는 듯하고
似訴平生不得志 사소평생부득지
평생토록 뜻 얻지 못함 하소연하는 것만 같네.
低眉信手續續彈 저미신수속속탄
고개 숙이고 손에 맡겨 계속 연주하니
設盡心中無限事 설진심중무한사
마음속 다함없는 것들 악기 속에 담겼네.
輕攏慢撚撥復挑 경롱만연발부조
가볍게 누르고 느리게 쓰다듬어 다시 타니
初爲霓裳後六幺 초위예상후육요
처음은 예상이요 나중은 육요로다.[8]
大絃嘈嘈如急雨 대현조조여급우
큰 줄은 뚜웅뚜웅 마치 소나기인 듯,
小絃切切如私語 소현절절여사어
작은 줄 띠잉띠잉 재잘거리는 말인 듯하네
嘈嘈切切錯雜彈 조조절절착잡탄
뚜웅뚜웅 띠잉띠잉 여러 소리 섞이니
大珠小珠落玉盤 대주소주락옥반
큰 구슬 작은 구슬 옥쟁반에 떨어지는 듯하네.
間關鶯語花底滑 간관앵어화저활
꾀꼴 꾀꼬리 소리 꽃 밑에 미끄러지고
幽咽泉流氷下灘 유열천류빙하탄
졸졸 흐르는 샘물이 얼음 아래 지나기 힘든 듯하네
氷泉冷澁絃凝絶 빙천냉삽현응절
얼어붙은 샘물이 막히듯 현도 멈추는데
凝絶不通聲暫歇 응절불통성잠헐
멈춰도 통하지 않아 잠시 소리가 그치네.
別有幽愁暗恨生 별유유수암한생
깊은 근심 남모를 한 다시 생기는데
此時無聲勝有聲 차시무성승유성
이때는 소리 없음이 소리 있음보다 낫네.
銀甁乍破水漿迸 은병사파수장병
은병이 갑자기 깨져 물이 쏟아지듯
鐵騎突出刀槍鳴 철기돌출도창명
철기병 뛰쳐나가 창칼 소리 나는 듯하네.[9]
曲終抽撥當心劃 곡종추발당심획
곡 끝나자 손 거두어 가슴 쓸어내리니
四絃一聲如裂帛 사현일성여렬백
비단 찢듯 4줄이 한 소리 내네.
東船西舫悄無言 동선서방초무언
동쪽 배와 서쪽 배 잠잠히 말이 없고
唯見江心秋月白 유견강심추월백
강물 한가운데 밝은 가을 달만 보이더라.
3
沈吟收撥揷絃中 침음수발삽현중
시름에 잠겼다가 비파를 거두는데
整頓衣裳起斂容 정돈의상기렴용
옷을 정리하여 일어나서[10] 용모를 가다듬더니.
自言本是京城女 자언본시경성녀
스스로 이야기했네. 본디 서울 여자로
家在蝦螞陵下住 가재하마릉하주
집은 하마릉[11] 근처에 있었는데.
十三學得琵琶聲 십삼학득비파성
열세 살에 비파 배워 다 이루었고
名屬敎坊第一部 명속교방제일부
이름이 교방[12] 제1부에 있었지요.
曲罷常敎善才服 곡파상교선재복
곡 타고 나면 스승[13]들이 탄복하고
妝成每被秋娘妬 장성매피추랑투
화장 하면 매번 추랑[14]이 질투했네요.
五陵年少爭纏頭 오릉년소쟁전두
서울의 귀하신 자제들이[15] 앞다투어 들은값을 주니[16]
一曲紅綃不知數 일곡홍초부지수
한 곡에 붉은 비단 셀 수가 없었지요.
鈿頭銀蓖擊節碎 전두은비격절쇄
전두[17]와 은비녀 박자 맞추다 부서지고
血色羅裙翻酒汚 혈색라군번주오
핏빛 비단 치마 술에 더럽혀졌지요.
今年歡笑復明年 금년환소부명년
올해도 즐겁게 웃고 이듬해도 그러하니
秋月春風等閒度 추월춘풍등한도
가을달 봄바람도 헛되이 보냈지요.
弟徒從軍阿姨死 제주종군아이사
후배기녀 군에 가고 기생어미 저승 가고[18][19]
暮去朝來顔色故 모거조래안색고
저녁 가고 아침 오니 미색은 옛것이 되었네요.
門前冷落車馬稀 문전랭락거마희
문 앞이 적막하여 수레며 말(馬) 탄 손 없으니[20]
老大嫁作商人婦 노대가작상인부
나이 들어 시집가 상인의 아내가 되었지요.
商人重利輕別離 상인중리경별리
상인은 이익을 무거이, 이별을 가벼이 여겨
前月浮梁買茶去 전월부량매다거
지난달엔 부량[21]으로 차(茶) 사러 떠났네요.
去來江口守空船 거래강구수공선
(남편이) 떠난 후[22] 강어귀에서 빈 배만 지키니
遶船明月江水寒 요선명월강수한
배 둘러싼 달은 밝고 강물은 차갑지요.
夜深忽夢少年事 야심홀몽소년사
깊은 밤에 문뜩 어릴 적 꿈을 꾸고는
夢啼粧淚紅闌干 몽제장루홍란간
꿈 때문에 울었더니[23] 화장한 얼굴에 붉은 눈물이 줄줄 흘렀나이다.[24][25]
4
我聞琵琶已歎息 아문비파이탄식
나는 비파 소리 듣고 탄식하는데[26]
又聞此語重喞喞 우문차어중즉즉
또 이 이야기 들으니 거듭 우울해졌네.
同是天涯淪落人 동시천애륜락인
우리 모두 머나먼 곳에서 영락해버린 사람이니,
相逢何必曾相識! 상봉하필증상식
꼭 서로 알아야만 만나겠는가!
我從去年辭帝京 아종거년사제경
나는 지난해부터 황제 계신 서울을 떠나
謫居臥病潯陽城 적거와병심양성
심양성[27]에 귀양 와 살며 병들어 누웠다네.
潯陽地僻無音樂 심양지벽무음악
심양 땅은 외지고 음악도 없고
終歲不聞絲竹聲 종세불문사죽성[28]
일년 내내 악기 소리 듣지 못하였네.
住近湓江地低濕 주근분강지저습
사는 곳 분강에 가까워 낮고 습하니,
黃蘆苦竹遶宅生 황로고죽요택생
시든 갈대와 고죽[29]이 집을 둘러싸 자랐네.[30]
其閒旦暮聞何物? 기간단모문하물
그 사이에 아침 저녁으로 무엇을 들었던가?
杜鵑啼血猿哀鳴 두견제혈원애명
두견새 피 토하고 원숭이 슬피 우는 소리라네.
春江花朝秋月夜 춘강화조추월야
봄 강에 꽃피는 아침, 가을 달 뜨는 밤
往往取酒還獨傾 왕왕취주환독경
이따금 술 가져다 또다시 혼자 기울였네.
豈無山歌與村笛 기무산가여촌적
촌스런 노래며 시골 피리 소리가 어찌 없으랴마는
嘔啞嘲哳難爲聽 구아조찰난위청
조잡하고 시끄러워 듣기가 괴롭더라.
今夜聞君琵琶語 금야문군비파어
오늘 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었는데
如聽仙樂耳暫明 여청선락이잠명
신선의 음악을 듣는 듯하여 귀가 잠시 맑아지네.
莫辭更坐彈一曲 막사갱좌탄일곡
사양 마시오, 다시 앉아 한 곡 타기를
爲君翻作琵琶行 위군번작비파행
그대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다.
5
感我此言良久立 감아차언양구입
(여인이) 내 말에 감동하여 한참을 서 있는데
却坐促絃絃轉急 각좌촉현현전급
다시 앉아 운지를 달리하니 현이 더욱 팽팽해져.[31]
凄凄不似向前聲 처처불사향전성
애절하고 애절하여 이전 연주보다 더하니
滿坐聞之皆掩泣 만좌문지개엄읍
모두들 다시 듣고 (얼굴을) 가리어 흐느끼는데.
就中泣下誰最多 취중읍하수최다
그 자리에서 누가 가장 많이 눈물 흘리는가?
江州司馬靑衫濕 강주사마청삼습
강주사마[32]의 푸른 적삼이 축축해졌더라.
◇ 비파행(琵琶行) 백거이(白居易)
원화 10년(815년)에 나는 구강군 사마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가을, 손님을 분포구에서 배웅하는데, 어느 배에선지 밤에 비파를 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어보니 '쨍'하는 맑은 서울 가락이었다. 그 사람에 대해 물었더니, 본래 장안(長安) 기생으로, 일찍이 목(穆)·조(曺) 두 선재에게서 비파를 배웠으며, 나이 들고 태깔이 이울어서는 상인의 아내로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술을 내고 속히 두어 곡을 타도록 했다. 곡이 끝나자, 가련하게도 고개를 떨구고, 젊었을 적 즐거웠던 추억들, 지금 실의에 빠진 초췌한 모습으로 강호에서 옮다니고 있는 신세타령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방 관원으로 쫓겨 나온 2년을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내왔었는데, 이 여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려, 이날 저녁 비로소 귀양살이 맛을 느끼었다. 그래서 장구가를 지어 여인에게 선사했다. 모두 616자, 이름하여 《琵琶行(비파행)》.
- 원화元和 : 당나라 憲宗 李純(805-820 재위)의 연호이다.
- 구강군九江郡 : 지금은 강서성 구강시.
- 사마司馬 : 州, 郡의 太守의 보좌관. 한직이었다.
- 좌천左遷 : 백거이는 "무원형(武元衡)을 찌른 자객을 조속히 체포할 것"이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재상의 미움을 사서 "사치스럽고 행실이 나쁘다"는 죄목으로,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 벼슬로부터 구강군사마로 좌천되었다.
- 분포구湓浦口 : 지명. 九江 서쪽에 있다. 湓江이 長江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 선재善才 : 당나라 때 비파 선생을 일컫던 말.
- 장구가長句歌 : 七言詩를 가리킨다.
- 616 字 : 원문에서는 612자라 했는데, 역문에서 바로 잡은 것이다. 모두 88구.
1
심양강 어귀에서 밤에 손님을 배웅하려니,
단풍잎, 갈대꽃, 가을바람 쓸쓸한데.
주인은 말을 내리고 손님은 배에 올라,
술을 들어 마시려 해도 풍악이 없구나.
취했어도 흥이 안 나 쓸쓸히 작별하려니,
작별할 때는 아득한 강물에 달이 젖는구나.
문득 물 위로 들려오는 비파 소리,
주인은 돌아가길 잊고 손님도 안 떠난다.
- 심양강潯陽江 : 長江은 여러 이름이 있는데, 九江市 부근을 흐르는 것을 심양강이라 한다.
2
소리 찾아 살며시 묻는다, 타는 이 누구냐?
비파 소리 그치고는 머뭇대고 말이 없다.
배를 가까이 옮기고 보기를 청하면서,
술을 더하고 등불 돌리고 상을 다시 차린다.
천 번 만 번 부르니 비로소 나오는데,
가슴엔 비파를 안아 얼굴을 반쯤 가리웠네.
축을 돌리고 줄을 퉁겨 두세 번 소리를 고르는데,
곡조를 채 이루기 전에 정이 앞선다.
줄줄이 낮게 울리니 소리마다 슬퍼서,
한평생 못 이룬 뜻을 하소연하는 듯.
아미를 숙이고 손에 맡겨 속속 타니,
마음 속 덧없는 일을 모두 얘기한다.
- 축軸 : 현악기의 줄(絃)을 조이거나 늦추어 음을 조절하는 장치(peg). 줄마다 한 개의 축이 있다. 중국의 비파는 네 줄(四絃), 따라서 네 개의 축이 있다.
슬쩍 쓰다듬어 지그시 비틀고 눌러 퉁기니,
처음은 '무지기와 깃옷', 뒤는 '록요' 가락.
굵은 줄 둥덩둥덩 소나기 쏟아진다.
가는 줄 소곤소곤 귀엣말 속삭인다.
- 무지기와 깃옷/록요 : '무지기와 깃옷'은 곡명. 록요도 곡명. 錄要, 六要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 유행했다.
둥덩둥덩 소곤소곤 뒤섞어 타니,
큰 진주 작은 진주 옥쟁반에 구른다.
꾀꼴꾀꼴 꾀꼬리 소리 꽃 아래 매끄럽다.
흐느끼는 샘물 소리 얼음 밑에 답답하다.
차가운 샘물 얼어붙듯 줄은 응결되고,
응결되어 막히니 소리 잠깐 끊인다.
별달리 깊은 시름 맺힌 한 생겨나니,
이때 소리 없는 것은 있는 것보다 낫다.
은병이 갑자기 깨지더니 물이 솟구친다.
철기가 졸지에 튀어나와 칼이 부딪친다.
곡이 끝나 발목(撥木)을 거두어 복판을 그으니,
넉 줄은 한 소리, 비단을 찢는 듯.
동쪽 배 서쪽 배 소리 없이 조용한데,
오직 강 가운데 가을달만 하얗구나.
- 발목撥木 : 현악기의 줄을 퉁기는 데 쓰는 조각. 당나라 때에는 도끼(斧) 모양의 발목을 써서 비파를 탔지만 지금은 손가락으로 그냥 탄다.
3
생각에 잠겨 발목을 내려 줄 안에 꽂고,
옷깃을 여미며 일어나 자세를 고친다.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는 서울 계집,
하마릉 아래에 집이 있었어요.
나이 열셋에 비파를 배워 익히니,
이름이 교방에서 첫째로 꼽혔어요.
연주가 끝나면 선재님도 탄복했고요,
화장을 마치면 추랑이도 시새웠어요.
- 하마릉蝦蟆陵 : 당나라 서울 長安의 春明門 옆 道政坊이란 동네에 있던 지명. 名妓와 名酒의 산지로 유명하다. 한나라 정치가이고 유명한 학자였던 董仲舒(동중서)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으며, 또 한나라 武帝 劉徹이 宜春園으로 나갈 때면 언제나 여기서 "말을 내렸다"(下馬)고 하여 下馬陵이라고 부른 것이 후세에 와전되었다는 설도 있다. 蝦蟆는 두꺼비.
- 교방敎坊 : 배우와 기생을 교습시키고 관리하는 관아. 714년, 당나라 현종 때 처음 이 제도가 설치되어 1723년 청나라 세종 胤禛(윤진) 때까지 존속되었다.
- 추랑秋娘 : 미녀의 대명사, 당나라 때에 杜秋娘(두추랑)이란 金陵(지금의 남경시) 출신의 명기가 있었고, 李太尉의 첩 謝秋娘이란 미녀가 있었다.
오릉의 귀공자들 해웃값을 다투어,
한 곡조에 붉은 생초가 수도 없었어요.
자개 박은 빗치개 장단 맞추다 깨고요,
핓빛 비단 치마 술 엎질러 더럽혔어요.
금년도 웃음 속에, 또 명년도 마찬가지,
가을달 봄바람을 등한히 보냈어요.
- 오릉五陵 : 장안 북쪽 渭河 北岸에 있는 한나라 고조 유방 이하 다섯 임금의 능묘. 한나라 때 정치, 경제의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국의 호족과 거부를 오릉 부근으로 이주시켰다. 그 뒤로 부자 마을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랍동생 병정 가고 양어머니 세상 떠나,
저녁이 가고 아침이 와서 용색(容色)이 이울자,
문전도 쓸쓸하게 찾아온 손님이 드물어,
나이 든 몸이 상인의 아내로 시집갔어요.
상인은 이문만 알지 이별은 모르니,
지난달에 부량으로 차 사러 떠났어요.
- 부량浮梁 : 지금의 강서성 景德鎭. 茶市로 유명하였다.
떠나간 뒤로 강 어귀에서 빈 배만 지키니,
배 둘레에 달은 밝고 강물은 차갑군요.
밤이 깊어 홀연히 젊었을 적 일을 꿈꾸다가,
꿈에 울어 화장한 얼굴 붉은 눈물 주르르."
- 붉은 눈물淚紅 : 화장이 씻겨서 눈물이 붉어진 것이다.
4
나는 비파 소리 듣고 벌써 탄식했다가,
다시 이 얘기 듣고는 연방 '쯧쯧' 소리.
하늘 끝에서 유랑하는 다 같은 신세니,
만나면 그만이지 옛사람 아니면 어떠랴!
"나는 작년에 서울을 하직한 뒤로,
귀양살이 심양 고을에 몸져 누워 있소.
심양은 후미진 고장이라 음악이 없으니,
일년 내내 풍류 소리 듣지 못하오.
- 심양潯陽 : 지금의 九江市. 본래 晉나라 때는 심양군이었는데, 隨나라 때는 九江, 唐나라 때는 심양으로 바뀌었으며, 당시 江州의 首邑이었다.
거처는 분강 부근 낮고 습한 땅,
우거진 갈대 참대 집 둘레에 자라 있소.
그 사이에서 아침저녁 들리는 거라고는,
두견이 피를 토하고 원숭이 슬피 울 뿐.
- 분강湓江 : 강서성 瑞昌縣 淸湓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九江 성 아래에서 북쪽으로 바뀌어 長江에 들어간다.
봄 강 꽃 아침이나 가을 달 저녁이면,
가끔 술잔을 들어 혼자 기울여 보오.
초동의 노래나 목동의 피리야 없을까만,
시끌시끌 지절지절 귀에 거슬리오.
- 꽃 아침花朝/달 저녁月夕 :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가리킨다. 음력 이월 보름은 온갖 꽃의 생일이라 하여 '꽃 아침'(花朝)이라 부르며, 팔월 보름은 '달 저녁'(月夕)이라 하여 민속놀이가 있다.
오늘 밤 그대의 비파 연주를 들으니,
신선 음악 듣는 듯 귀가 번쩍 트이오.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만 타시게,
그대 위해 《비파 노래》옮겨 보리니."
5
나의 이 말에 감동하여 한참 섰다가,
물러앉아 줄을 조이니 줄은 팽팽하구나.
처절함이 먼저 소리와 또 다르니,
다시 듣는 사람 모두 눈물을 가린다.
중에서 누가 가장 눈물 많이 흘리는가?
강주 사마 푸른 옷이 젖어 있구나.
- 푸른 옷靑衫 : 원문에는 靑衫, 이것은 당시 하급 관리의 제복이다. 백거이 자신을 가리킨다.
∘ 시에서 묘사한 상황
백거이(白居易)는 815년 구강군(九江郡)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이듬해(816) 손님이 찾아왔다가 돌아가는데, 백거이는 배웅하고자 같이 말을 타고 심양강에 가서 배에 같이 탔다. 배 안에서 환송연을 여는데 음악이 없어서 아쉬워하는 차에 놀라운 솜씨로 비파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있는 배에서 나는 소리라 백거이 일행은 배를 움직여 그 배에 다가가, 연주자에게 나와달라고 요청하고 부랴부랴 잔치 준비를 다시 하였다. 한참을 부탁하자 얼굴을 비파로 가린 여자가 나와 백거이네 배로 옮겨 타더니, 자리에 앉아 비파를 연주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를 소개했다.[33] 자기는 본디 장안 사람으로 한때 장안에서 이름난 기녀였으나, 나이가 들자 상인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백거이는 그동안 벽촌에서 제대로 된 음악을 듣지 못해 괴로웠다.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게 뛰어난 비파 연주를 들어 감탄하고, 여인의 처지에 안타까워하며, 자신도 좌천되어 이렇게 되었음을 새삼 느끼고는 슬퍼했다. 그리하여 여인에게 <비파행>이란 이름으로 시를 쓸 테니, 다시 자리에 앉아 연주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여인도 감격하여 다시 자리에 앉아 더욱 애절한 곡조로 연주하니 배 안의 청중들이 듣고 모두들 흐느끼는데[34], 백거이 자신이 제일 많이 울었다는 것이다.
[1] 구강군九江君 : 오늘날 장시성 주장시(九江市)이다.
[2] 사마司馬 : 지역의 군(軍)을 담당하는 관리. 별 할 일이 없어 중앙에서 좌천된 벼슬아치들이 주로 받는 한직이었다.
[3] 선재(善才) : '비파를 가르치는 사람'을 뜻한다. 당나라 때 조선재(曺善才)라는 사람이 비파를 잘 다룬 데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4]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백거이는 구강군 사마가 된 뒤로, 비파행을 짓기 전에도 여러 번 분노하는 내용으로 시를 썼다.
[5] 주인主人 : 백거이 자신을 가리킨다.
[6] 직역하면 '주인(백거이)은 말에서 내리고 길손은 배에 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손님은 배 타고 떠나고 백거이는 배 밖에 있어야 하는데, 뒷 내용을 보면 백거이도 배 안에 같이 타서 잔치에 참가했다. 김경동 교수는 이 부분에 한시의 고전적인 압축법이 사용되었다 보고, '주인과 손님이 함께' 말에서 내려 배에 탔다는 뜻으로 시어를 복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7] 비파로 제대로 뜯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음악의 감정이 느껴진다는 극찬이다.
[8] '예상霓裳'은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준말로 곡의 이름인데, 역시 백거이가 쓴 장한가에도 예상우의곡이 언급된다. 육요 또한 곡의 이름이다.
[9] 쇠소리에 부딪혀 나는 소리를 빗댐.
[10] 상대가 벼슬아치 사대부들이므로 예를 갖추려는 동작이다.
[11] 옛 장안, 즉 오늘날 시안에 있는 지명. 화평문(장안성의 남문)에서 동쪽으로 8백 미터쯤 떨어졌다. 비파행에서 언급한 덕분에 덩달아 유명해졌다. 본디 하마릉에 기녀들이 모여 살았다 하므로 여인도 여기 출신인 것이다.
[12] 원래는 궁에서 음악을 관리하는 부서를 가리키지만, 기루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여인은 본디 궁에서 관할하는 교방 소속이었던 듯하다.
[13] 직역하면 선재지만 여기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여인에게 비파를 가르쳐준 목씨, 조씨를 가리키는 듯하다.
[14] 당나라 시가에서 기녀나 재능 있는 여자를 가리키는 통칭. '추랑'이 이런 뜻으로 쓰인 대표적인 예문이 바로 비파행의 이 부분이다.
[15] 오릉은 당나라 다섯 황제들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또한 권력을 뜻하는 비유로도 사용했다. 그리하여 '오릉년소'라고 하면, 수도에 사는 권세가의 자식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6] 전두(纏頭)란 악공이나 기녀가 연주를 마치면, 청중들이 들은 값으로 주는 비단을 가리켰다. 나중에는 꼭 비단이 아니라 다른 재물을 줄 경우에도 전두라 하였다.
[17] 금이나 비취로 장식한, 꽃 모양 머리 장신구이다.
[18] 옛날 중국의 기녀들은 선후배끼리 의자매를 맺되, 서로를 '자매'가 아니라 '형제'라 칭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제(弟)가 남동생이 아니라 후배기녀인 것. 또한 나이든 퇴기들이 기녀들을 관리하되, 형식상 양녀로 받아들여 기녀들이 양모라 불렀다 한다. 그래서 본디 이모, 또는 계모를 가리키는 이(姨)가 여기서는 기생어미이다.
[19] 보통은 이 부분을 '남동생은 군에 가고 양어미/이모는 죽고' 등으로 번역한다. 여기서도 김경동 교수의 해석을 따랐다.
[20] 직역하면 '수레와 말(馬)이 없다.'고 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화자의 미색이 쇠하여) 수레와 말을 타고 찾아오는 (부유한, 권세 있는) 손님이 없다는 뜻이다.
[21] 오늘날 장시성 징더전시 푸량현(浮梁县)을 가리킨다. 예나 지금이나 차로 유명하다.
[22] 시어의 첫머리 거래(去來)를 '왕복한다.' '오간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강어귀에 다른 배들이 오간다, 또는 여자가 강어귀를 오간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경동 교수는 거(去)가 바로 윗줄의 (남편이 차 사러) 떠났다(去)는 표현을 받은 것이고 래(來)를 '~~한 이후'란 뜻으로 해석하여 '남편이 차 사러 떠난 후로'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도 김 교수의 해석을 따랐다.
[23] 우리나라나 중국의 학자들은 보통 '꿈에서 울었더니'라고 해석한다. 꿈에서 울었다면 꿈속에서부터 뭔가 슬펐단 이야기고, 꿈에서 깬 뒤에 울었다면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영락이 대비되어 서러워서 울었단 뜻이므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시의 느낌이 바뀐다.
[24] 얼굴에 화장한 상태에서 울었더니 눈물과 화장이 섞여 붉은 물이 되어 흘렀단 뜻이다. '홍란간'을 '붉은 난간'으로 오역하는 사례도 있으나, 여기서 '란간'은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비유한 것이고, '홍'자를 붙임은 눈물이 붉은색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5] "스스로 말하길..."(自言本是...) 하는 부분부터 여기까지가 비파를 연주하는 여자가 하는 말이다.
[26] 여기서부터 백거이가 여자에게 하는 말이다.
[27] 심양(潯陽)은 구강군(九江君)의 별칭이다.
[28] 여기서 사죽(絲竹)은 직역하면 '실과 대나무'지만, 중국 악기들의 흔한 재료란 점에서 '악기의 총칭'으로도 쓰인다.
[29] 여기서 고죽(苦竹)이란 대나무의 한 종류이다. 죽순의 맛이 써서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쓸 고(苦)를 써서 '고죽'이라 부른다.
[30] 안 그래도 좌천된 신세인데 집 주변에 자라는 풀마저 시든 갈대에 써서 죽순도 먹을 수 없는 대나무라니, 백거이의 외롭고 처량한 신세가 더욱 두드러진다.
[31] 보통은 이 구절을 '현을 조이고/고르고 급히 연주한다.'고 번역한다. 운지를 달리해서 현을 팽팽하게 했다는 것은 김경동 교수의 해석이다.
[32] 강주(江州)는 구강군(九江君)의 별칭이다. 백거이가 구강군(강주)의 사마가 되었으므로, 여기서는 백거이 자신을 가리킨다.
[33]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는 것은 상대가 벼슬아치에 사대부들이므로 예를 갖추기 위함이다.
[34] 화자인 백거이가 좌천하여 낙향한 상황이라면 백거이와 어울려다니던 청중들 중에도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 꽤 있었을 것이다.
✵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의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대력(大曆) 7년(772년), 뤄양(洛陽) 부근의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県, 지금의 허난성 신정시)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 6세 때 이미 시를 짓고, 9세 때에 호율(號律)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은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원(貞元) 16년(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백거이의 지우였던 원진은 백거이의 문집 《백씨장경집》 서문에서, "계림의 상인이 (백거이의 글을) 저자에서 절실히 구하였고, 동국의 재상은 번번이 많은 돈을 내고 시 한 편을 바꾸었다"고 하여, 당시 백거이의 글이 신라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810년에 당 헌종이 신라의 헌덕왕(憲德王)에게 보내는 국서를 황제를 대신해 지었으며, 821년에서 822년 사이에 신라에서 온 하정사 김충량(金忠良)이 귀국할 때 목종(穆宗)이 내린 제서도 그가 지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남기고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湖)에 건설한 백제(바이띠, 白堤)라는 제방은 소동파가 만든 소제(쑤띠, 蘇堤)와 더불어 항주의 명소로 유명하며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항저우에서 재직하는 동안 항상 나무 위에 올라 참선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조과'란 별명을 가진 '도림 선사'와의 일화가 재미있으며 다양한 버전이 있다. 약술하자면 백거이가 도림선사에게 불법을 묻자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은 다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백거이가 '세 살 어린 애도 아는 이야기'라며 일축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아이도 알지만, 여든인 노인도 평생을 통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개성(開成) 원년(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3년(838년)에는 태자소부(太子少傅)이 되었으며,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백씨장경집)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백거이는 다작(多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문집은 71권, 작품은 총 3,800여 수로 당대(唐代) 시인 가운데 최고 분량을 자랑할 뿐 아니라 시의 내용도 다양하다. 젊은 나이에「신악부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는 이른바 「풍유시(諷喩詩, 風諭詩)」를 많이 지었으나,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나서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주제로 한 「한적시(閑適詩)」의 제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밖에도 평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원진(元稹), 유우석(劉禹錫)과 지은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의 감상시도 유명하다. 백거이가 45세 때 지은 「비파행」은 그를 당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게 하였으며, 또,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시 「장한가」도 유명하다.
풍유시를 주로 했던 시기, 한적시를 주로 지었던 시기 전체를 통틀어, '짧은 문장으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平易暢達)' 것을 중시하는 시풍(詩風)은 변함이 없었다. 북송(北宋)의 석혜홍(釋惠洪)이 지은 《냉재시화(冷齎詩話)》 등에 보면, 백거이는 시를 지을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읽어주면서, 노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평이한 표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그의 시는 사대부(士大夫) 계층뿐 아니라 기녀(妓女), 목동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애창되는 시가 되었다.
이 밖에 <백시 장경집(白氏長慶集)> 50권에 그의 시 2,200수가 정리되었으며, 그의 시문집인 <백씨 문집>은 그의 모든 시를 정리한 시집이다. 장편서사시로는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이 있다.
∘ 참고문헌 및 출처;
∙ 「琵琶行」 難句 의미 해석고, 김경동, 중국학보 78권(2016), 115-148쪽
∙ 김경동 교수의 논문 외에도 아래 자료를 번역, 또는 주석에 참고하였다.
∙ 「長恨歌」와 「琵琶行」의 諷刺와 隱喩 攷, 김상홍, 한자한문교육 30권(2013), 473-508쪽
∙ 白居易의 <琵琶行>에 관한 세 가지 의문, 정진걸, 중국문학 81권(2014), 1-29쪽
∙ 「중국시가선」 지영재 편역, 을유문화사
∙ Daum 나무위키
첫댓글 덕분에 상식이 늘었습니다.
정주미 우리춤연구회회장님
정담 담긴 기자님의
좋은글 덕분에
마음 호강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봉산 정현욱 님
비파행
감성이 넘치는 서사시로군요
시인들은 기쁠때 보다 슲프거나 애절한 사연이 있을때 詩想이 많이 떠오른것 같아요
수필이나 소설도 픽션이나 넌픽션이 있듯 시도 그런것 같아요
비파행이 실제 보고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썼건 상상을 동원한 창작이든 상관없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전해내려 와 누구나 애송하는 시가 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