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를 돌볼 때 남녀의 역할 구분을 크게 고집하지 않는 미국에 살다 보니, 가끔은 제가 장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집사람도 나름 필요한 장을 봐 오기도 해서 어떤 때는 이미 냉장고에 있는 것을 모르고 또 살 때가 있습니다. 냉장고 서랍에 보관하는 양파나 감자나 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옛날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이미 가지고 있더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래 본문이 말하는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들에게 이를 수 있도록,
즉 약속하신 그 영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갈 3:14).
위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는 뭔가 좀 아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자 위 본문이 간단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래 내용은 나름 기도하면서 더 추구하여 얻은 결과입니다.
첫째, 위 “아브라함의 복”이 아브라함 본인이 받았던 복인지, 그와 별개의 복인지가 궁금했습니다. 조금 더 추구하면서 창세기 22장이, “하늘들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씨(후손)의 복을 ‘아브라함 본인’이 얻는 것(7절)과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씨 안에서 받을 복”(8절)을 구분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위 본문은 후자 즉 ‘땅의 모든 족속’ 혹은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씨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을 복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이해했습니다.
둘째, 개역 성경 등은 위 ‘아브라함의 복’과 ‘약속하신 그 영’ 사이에 “또”라는 말을 넣어 번역해서 마치 이 둘이 별개인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이 문장은 ‘so that’ 구문입니다. 참고로 엘리코트는 이 둘의 관계를, “아브라함에게 선포된 복이 그의 씨를 통해 성취될 것”(the blessing pronounced upon Abraham to be fulfilled in his seed)을 가리킨다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소개한 <회복역 성경> 본문처럼, 이 둘을 동격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셋째, 위 본문에 나오는 ‘영’을 거의 모든 한글 성경은 ‘성령’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 대부분은 ‘the Spirit’으로서, ‘성’(聖)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확대역>도 “the [Holy] Spirit”이라고 적어 원문에는 ‘Holy’가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역 성경을 주로 읽는 분들은 성령을 삼위 중 (1 격과 2 격이 제외된) 제3 격만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위 본문의 영은 그러한 영과는 다른 영입니다.
참고로 요한복음 7장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받을 그 영”이 그 당시에는 “아직 계시지 않았다”라고 말씀합니다(the Spirit was not yet)(39절). 그 후 이 그 영은 “마지막 아담”께서 부활로 “영광을 받으신 후”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을 때 비로소 존재하시게 되셨습니다(고전 15:45하). 그런데 마지막 아담은 “신격의 모든 충만”(골 2:9) 즉 삼위 전체가 아들 안에서 육체가 되신 분이듯이, ‘생명 주시는 영’ 역시 삼위 전체와 (죽고 부활하신) 그분의 인성을 포함한 복합되신 영이십니다. 이 영은 출애굽기 30장에서 복합된 관유(a ointment compounded)로 예표되었습니다(25절). 아브라함의 복의 성취로서 믿음으로 우리 안에 받아들인 그 영은 이 예표의 성취입니다. 이 복은 지금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있습니다.
솔직히 예전에는 이 말씀을 구원의 관점에서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추구 과정에서 같은 말씀을 우리가 받은 복의 관점으로 다시 볼 때 새로운 맛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이라 제가 물질적인 복을 받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볼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복의 실재로서 제 영 안에 거하시게 된 이후로 저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땅에서 사는 목적과 삶의 방향이 명확해져서 더 이상의 방황이 없게 된 것은 제겐 큰 축복입니다(계 4:11). 또한 예상치 않는 고난이나 환경이 닥쳐왔을 때 당황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내주하시는 그 영께 나아가 그분을 앙망하고, 주신 평안과 부활 능력 안에서 감당하고 또 헤쳐나가게 된 것도 큰 복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주님을 더 누리고 얻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의 “냉장고” 깊숙이 있는 “양파와 감자와 파”와도 같은 ‘그 영’에 대한 계시가 점점 더 밝아져서 더 자주 더 다양하게 복이신 그분을 “요리하여”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쓸 때 문득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무시하고 다른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을 책망하시는 다음 두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오랫동안 제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 바알세붑에게 문의하러 가는 것이냐?”(왕하 1:3). “자기 애인들을 따라가 나를 잊어버렸던 바알들의 날들만큼 내가 그녀를 벌하리라”(호 2:13). 오, 우리 모두에게 이미 받은 복에 대한 재발견이 있게 되기를!
오 주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의 실재로 오심을 찬양합니다.
남은 날들 동안 이 복의 귀함을 바로 알고 누려,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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