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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한가(長恨歌 - 긴 아쉬움의 노래)/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
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 때 백거이가 지은 대표적인 장편 서사시(長篇敍事詩)이다. 당 헌종 원화 원년인 806년에 지어졌다. 당나라 현종과 그의 비 양귀비(楊貴妃)와의 사랑을 읊은 노래이다.
당 현종(712-756)이 죽은 지 50년이 지나 백거이 나이 35세에 친구 왕질부(王質夫)와 진홍(陳鴻)이 그를 찾아와 선유산에 놀러 갔다. 거기서 당 현종 이융기와 양귀비와의 로맨스가 화제에 올랐다. 왕질부의 제의로 백거이는 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시로 진홍은 산문으로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신화적인 내용으로 애절하게 썼다.
장한가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부분은 양귀비가 총애를 받고,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장면, 둘째 부분은 양귀비를 잃고 난 후의 현종의 쓸쓸한 생활, 셋째 부분은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보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작가적인 상상력을 최대한 드러내 애절함을 고조시킨다.
“上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주소서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언약했지요“
◇ 중국 당나라 백거이 장편서사시 '장한가'(감독 및 연출: 장예모) :
◇ 장한가(長恨歌 - 긴 아쉬움의 노래)
漢皇重色思傾國 한황중색사경국
한나라 황제가 미색을 중히 여겨 경국지색을 찾는데,
御宇多年求不得 어우다년구부득
다스리는 오랜 동안 얻지 못하였도다.
楊家有女初長成 양가유녀초장성
양씨 가문에 딸이 있어 갓 장성했는데
養在深閨人未識 양재심규인미식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니 누구도 알지 못했소.
天生麗質難自棄 천생려질난자기
하늘이 내린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 일조선재군왕측
하루 아침에 간택되어 군왕 곁에 있도다.
回眸一笑百媚生 회모일소백미생
눈웃음 한 번에 온갖 교태가 나와
六宮粉黛無顔色 육궁분대무안색
여섯 궁궐 화장한 후궁들이 낯빛을 잃었다오.
春寒賜浴華淸池 춘한사욕화청지
봄 추위에 화청지에서 목욕을 하니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골세응지
매끄러운 온천물에 기름진 때를 씻는다.
侍兒扶起嬌無力 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 부축해 일어나니 귀엽게 힘이 없는 듯
始是新承恩澤時 시시신승은택시
이때부터 새로이 황제의 승은을 입었네
雲鬢花顔金步搖 운빈화안금보요
구름 같은 머리, 꽃 같은 얼굴과 흔들거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 부용장난도춘소
부용휘장[1] 안에서 봄 깊은 밤을 헤아리니
春宵苦短日高起 춘소고단일고기
짧은 밤을 한탄하나 이미 해 높아 일어난다.
從此君王不早朝 종차군왕부조조
이를 좇는 군왕은 조회를 돌보지 않았고
承歡侍宴無閑暇 승환시연무한가
연회를 벌이느라 한가할 틈이 없어,
春從春游夜專夜 춘종춘유야전야
봄이면 봄놀이 따라가고 밤이면 밤시중을 독차지했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가려삼천인
후궁에 빼어난 미녀 삼천이 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총애재일신
삼천의 총애가 한 사람에 머무르니
金屋粧成嬌侍夜 금옥장성교시야
금빛 방에서 단장하고 교태로 시중 들고
玉樓宴罷醉和春 옥루연파취화춘
옥루 잔치 끝나면 춘정에 취한다.
姉妹弟兄皆列士 자매제형개렬토
자매와 형제 모두가 봉토를 갖게 되니,
可憐光彩生門戶가련광채생문호
아리따운 광채가 가문에 나는구나.
遂令天下父母心 수령천하부모심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不重生男重生女 부중생남중생녀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겼네.
驪宮高處入靑雲 려궁고처입청운
여궁[2] 높이 솟아 푸른 구름 모여들고,
仙樂風飄處處聞 선악풍표처처문
신선의 풍악은 바람 타고 곳곳에서 들려온다.
緩歌慢舞凝絲竹 완가만무응사죽
느린 노래 오만한 춤이 비단결과 피리에 맺히니
盡日君王看不足 진일군왕간부족
군왕이 종일 넋 잃고 보아도 부족하다.
漁陽瞽鼓動地來 어양비고동지래
어양에서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 오는데,
驚破霓裳羽衣曲 경차예상우의곡
예상우의곡의 소리도 끊기었다.
九重城闕煙塵生 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에 연기 먼지 솟아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 천승만기서남행
천 대 수레와 만 명 기병이 서남으로 떠났다.
翠華搖搖行復止 취화요요행부지[3]
화려한 깃발 흔들리며 가다가 서곤 하는데,
西出都門百餘里 서출도문백여리
도성 문에서 서쪽으로 나와 백여 리
六軍不發無奈何 육군부발무내하
육군이 아니 움직이니 어쩔 수 없이[4]
宛轉蛾眉馬前死 완전아미마전사
눈썹 긴 미인도 군마 앞에서 죽어야만 했지.
花鈿委地無人收 화전위지무인수
땅에 떨어진 꽃비녀 거두는 사람 없고
翠翹金雀玉搔頭 취교금작옥소두
취교, 금작, 옥소두도 그러하네
君王掩面救不得 군왕엄면구부득
군왕이 얼굴 가리고 구하려 해도 어쩔 수 없고
回看血淚相和流 회간혈루상화류
차마 돌린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른다.
黃埃散漫風蕭索 황애산만풍소삭
누런 흙먼지 일고 바람 쓸쓸히 부는데
雲棧縈紆登劍閣 운잔영우등검각
구름 걸린 굽은 사다리, 검각[5]을 오른다.
峨嵋山下少人行 아미산하소인행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
旌旗無光日色薄 정기무광일색박
어기(御旗)는 빛을 잃고 햇빛도 희미하다.
蜀江水碧蜀山靑 촉강수벽촉산청
촉강 맑게 흐르고 촉산은 푸르건만,
聖主朝朝暮暮情 성주조조모모정
황제의 마음은 날로 저물어간다.
行宮見月傷心色 행궁견월상심색
행궁에서 달을 보니 마음 절로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 야우문령장단성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 애간장이 끊어진다.
天旋地轉回龍馭 천선지전회룡어
하늘 바뀌고 땅이 돌아 황제 돌아오는 길에
到此躊躇不能去 도차주저부능거
여기 이르러 머뭇거리매 떠날 수가 없었다.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하니토중
마외역 언덕 아래 진흙더미 속에는
不見玉顔空死處 부견옥안공사처
고운 얼굴 보이지 않고 죽은 자리만 남았다.
君臣相顧盡沾衣 군신상고진첨의
임금 신하 서로 보니 눈물이 옷을 적시고,
東望都門信馬歸 동망도문신마귀
동쪽 도성문 향해 말에 길을 맡겨 가니
歸來池苑皆依舊 귀래지원개의구
돌아와 본 황궁의 정원은 예전과 같아
太液芙蓉未央柳 태액부용미앙류
태액지의 연꽃도 미양궁의 버들도 다름이 없다.
芙蓉如面柳如眉 부용여면류여미
연꽃은 얼굴이요 버들은 눈썹.
對此如何不淚垂 대차여하부루수
이런 정경을 보고 어찌 아니 눈물 흘리겠는가!
春風桃李花開日 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꽃 만발하고
秋雨梧桐葉落時 추우오동섭락시
가을비에 젖어 오동잎이 떨어진다.
西宮南內多秋草 서궁남내다추초
서궁과 남원에 가을 풀 우거지고
落葉滿階紅不掃 낙섭만계홍부소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쓸지 않네
梨園子弟白發新 이원자제백발신
이원의 자제들은 백발이 성성하고
椒房阿監靑娥老 초방아감청아노
초방의 젊은 시녀들도 늙어 버렸다.
夕殿螢飛思悄然 석전형비사초연
저녁 궁궐에 반딧불 나니 더욱 처량하여
孤燈挑盡未成眠 고등도진미성면
외로운 등불 심지 다 타도 잠이 오지 않는다.
遲遲鍾鼓初長夜 지지종고초장야
더디고 더딘 종과 북소리에 처음으로 긴 밤을 보내는데
耿耿星河欲曙天 경경성하욕서천
은하수 반짝이며 새벽 하늘을 넘어간다.
鴛鴦瓦冷霜華重 원앙와랭상화중
원앙기와 차가워 서리가 겹겹이 쌓이는데,
翡翠衾寒誰與共 비취금한수여공
비취금침 싸늘하니 누구와 함께 덮겠는가?
悠悠生死別經年 유유생사별경년
생사를 달리한 지 아득하니 몇 년인가
魂魄不曾來入夢 혼백부증래입몽
꿈속에서 혼백마저 만나볼 수 없다.
臨邛道士鴻都客 임공도사홍도객
임공[6]에서 온 도사가 서울에 머무는데
能以精誠致魂魄 능이정성치혼백
정성을 들이면 혼백을 불러올 수 있다 하니
爲感君王輾轉思 위감군왕전전사
그리워 잠 못 드는 군왕을 위해
遂敎方士殷勤覓 수교방사은근멱
방사로 하여금 남몰래 찾게 해보았지.
排空馭氣奔如電 배공어기분여전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내달아
升天入地求之遍 승천입지구지편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아
上窮碧落下黃泉 상궁벽락하황천
위로는 하늘 끝, 아래로는 황천까지.
兩處茫茫皆不見 양처망망개부견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찾을 길이 없는데
忽聞海上有仙山 홀문해상유선산
홀연 바다 위에 선산 있다는 소문 들어
山在虛無縹緲間 산재허무표묘간
그 산은 아득한 허공 먼 곳에 있고,
樓閣玲瓏五雲起 누각령롱오운기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 구름이 일어
其中綽約多仙子 기중작약다선자
그 곳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사는데,
中有一人字太眞 중일 유일자태진
그중 '태진'[7]이라 하는 선녀 하나 있으니
雪膚花貌參差是 설부화모삼차시
눈 같은 피부와 고운 얼굴이 닮았다고 했지.
金闕西廂叩玉扃 금궐서상고옥경
황금 대궐 서쪽 방의 옥문을 두드리고
轉敎小玉報雙成 전교소옥보쌍성
소옥에게 일러 쌍성에게 말 전하니[8]
聞道漢家天子使 문도한가천자사
한나라 천자의 사자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里夢魂驚 구화장리몽혼경
꿈에 깨어 놀라는 화려한 장막 안의 혼백.
攬衣推枕起徘徊 남의추침기배회
옷을 들고 베개 밀고 일어나 서성이더니
珠箔銀屛迤邐開 주박은병이리개
주렴과 은병풍이 스르르 열렸다.
雲髻半偏新睡覺 운빈반편신수교[9]
구름 같은 머리 한쪽으로 드리우고 막 잠에 깬 듯,
花冠不整下堂來 화관부정하당래
머리장식 안 고친 채 집에서 내려오니.
風吹仙袂飄飄擧 풍취선몌표표거
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이 나부낀다.
猶似霓裳羽衣舞 유사예상우의무
예상우의무를 추는 그 모습인 듯한데,
玉容寂寞淚欄干 옥용적막루란간
옥 같은 얼굴 수심 젖어 눈물이 난간에 흐르니
梨花一枝春帶雨 이화일지춘대우
활짝 핀 배꽃 한 가지 봄비에 젖은 듯하다.
含情凝睇謝君王 함정응제사군왕
정 어린 눈길 돌려 군왕에게 사뢰니
一別音容兩渺茫 일별음용량묘망
한번 이별 후 소리와 모습 다 아련하여
昭陽殿里恩愛絶 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받던 은총도 끊어지고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중일월장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이 오래건만
回頭下望人寰處 회두하망인환처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 부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먼지뿐.
唯將舊物表深情 유장구물표심정
오직 옛 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려 하니
鈿合金釵寄將去 전합금채기장거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보내겠다 말했지.
釵留一股合一扇 채류일고합일선
비녀는 반 쪽씩, 자개함은 하나씩.
釵擘黃金合分鈿 채벽황금합분전
비녀와 자개함을 반으로 나눴으니
但敎心似金鈿堅 단교심사금전견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인간회상견
천상과 인간세상 사이에서 다시 보게 되리라.
臨別殷勤重寄詞 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사중유서량심지
두 마음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10]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석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11]
하늘에서 만난다면 비익조가 되기를 원했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련리지[12]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바랐지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하늘 땅이 장구해도 끝이 있건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다함이 없네
◇ 중국 당나라 백거이 장편서사시 장한가
한나라 황제는 색을 중시하여 경국지색을 생각하고
황제에 오른 후 많은 해 동안 구했으나 얻지못하였다
양씨 가문의 한 아씨가 갓 장성하였는데
깊은 규방에서 자라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타고난 미모는 그대로 묻힐 리 없어
어느 날 갑자기 선택되어 군왕을 모시게 되었다
눈동자를 돌려 한번 웃으면 백가지 아첨이 생겨나니
육궁의 단장한 미인들이 무색해졌다
봄추위에 천자는 그녀에게 화청 연못에 들기를 허락하여
온천의 부드러운 물은 윤기 있는 그녀의 몸을 씻었다
시녀들이 부축하는 그녀의 몸은 힘없이 늘어졌고
이것이 천자의 승은을 받게 된 처음이었다
구름같은 머리칼, 꽃같은 얼굴, 걸으며 흔들거리는 금비녀
부용꽃 수놓은 휘장 안은 따뜻하고 봄날은 깊어만 갔다
봄밤은 짧아 천자는 해가 높이 뜬 뒤에 일어났고
이 때부터 천자는 조회에 나가지않았다
그녀는 천자 기분에 맞춰 시중 들기에 여념이 없어
봄이면 봄놀이 밤이면 밤새껏 그녀 혼자 천자를 독차지했다
후궁에는 궁녀 3천명이 있었지만
그 3천명이 받을 총애가 그녀에게만 있었다.
금옥에서 화장한 뒤 황제의 밤을 모셨고
옥루에서 잔치가 끝난 뒤 취한 마음은 봄날의 화창함에 녹았다
그녀의 자매 형제는 봉토를 받았고
그들의 집 문에는 눈부신 광채가 났다
마침내 천하의 부모들 마음은
아들 낳기보다 딸 낳기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궁은 높이 솟아 푸른 구름에 닿았고
신선의 음악은 바람처럼 여기 저기서 들린다
느릿한 노래에 맞게 고요한 춤이 추어지고
하루가 다가도록 군왕은 부족함을 몰랐다
어양에서 전쟁의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 들려오고
연주되던 예상우의곡은 놀라 중단되었다
구중궁궐에 연기와 먼지가 피어 오르고
일천수레와 일만기병은 서남쪽으로 출발했다
황제의 기는 흔들거리며 가다가 멎고 천천히 움직여
장안 서쪽 백여리에 이르렀다
여섯 군대가 출발하지 않으니 천자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갸름한 눈썹의 양귀비는 말 앞에서 살해되었다
그녀의 꽃 비녀는 땅에 버려졌으나 줍는 사람도 없었다
물총새 깃털, 공작모양 황금 머리장식, 옥비녀 모두
천자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녀를 구하지 못하니
돌아본 얼굴에는 피 눈물이 뒤섞여 흐른다
황색먼지 뿌옇고 바람은 쓸쓸히 부는데
구름까지 닿을 듯 높고 구불구불한 길로 검각산을 오른다
아미산 기슭에는 지나는 사람도 적고
천자의 깃발도 빛이 없고 햇빛도 약하다
촉나라 강물은 파랗고 촉나라 산빛은 푸른데
천자는 아침저녁 그리운 정으로 가득하다
궁전에서 달을 보면 달빛으로 슬픔을 느끼고
밤비 속에 창자를 끊는 듯한 방울소리를 듣는다
천하 정세는 바뀌어 천자는 장안으로 돌아오다가
그곳에 이르자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했다
마외 고개 아래 진흙 속에
옥같은 얼굴은 볼 수 없고 죽은 곳만 남아 있었다
천자도 신하도 서로 눈물로 옷을 적셨고
동쪽 성문 향해 말이 가는대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연못도 동산도 옛날 그대로
태액 연못 연꽃도 미앙궁 버드나무도 그대로였다
연꽃은 그녀 얼굴같고 버들은 그녀 눈썹같으니
그것들을 대하니 어이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
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날이나
가을비에 오동잎 떨어질 때
서궁이나 남원에는 가을 풀이 무성하고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단풍을 쓸어낼 사람이 없었다
이원제자들도 백발이 성성하게 되었고
초방의 궁녀들 푸르던 눈썹이 늙었다
저녁 궁전에 반디가 날아드니 쓸쓸한 생각에 잠기고
외로운 등잔심지가 끝까지 다해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시각을 알리는 종과 북소리가 들려오니 밤이 긴 것을 알고
날이 새는 하늘에 은하가 반짝인다
원앙 모양의 기와는 차갑고 서리는 무겁고
비취 날개 수놓은 이불은 싸늘하여 함께 잘 사람이 없다
삶과 죽음의 세계는 멀어 오랜 세월이 흘렀고
혼백은 꿈에서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임공도사를 손님으로 초대하여
정신을 집중하여 죽은 자의 혼을 불러 내나
그는 천자가 잠못이루고 사모함에 감동하여
드디어 가르침에 따라 방사를 시켜 부지런히 혼이 있는 곳을 찾게 했다
방사는 구름을 열고 번개처럼 달려가
하늘에 오르고 땅속에 들어가 샅샅이 찾았다
위로 하늘 끝 아래로 황천까지 찾았으나
어디나 끝없이 펼쳐질 뿐 혼을 찾을 수 없었다
문득 들리는 말이 해상에 신선 사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은 아무것도 없는 먼 곳에 있다고 했다
누각은 옥처럼 빛나고 오색 구름 솟으며
그 안에는 나긋한 모습의 선녀가 여럿 살고 있었다
그 중에 자를 태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눈같은 살결과 꽃같은 얼굴이 양귀비와 비슷하다 했다
선산 황금 궁전 서쪽 건물 옥문을 두드리니
소옥이란 시녀로부터 쌍성이란 시녀에게 전해졌다
한나라에서 먼길 찾아온 천자의 사자라는 말 듣고
온갖 꽃 모양 호화로운 휘장 안에서 태진은 꿈에서 깨어났다
옷을 손에 들고 베개를 밀치며 일어나 배회하는데
진주 발과 은 갈고리가 뒤이어 열린다
구름처럼 치켜올린 머리는 갓 일어나 반쯤 흩어졌고
꽃으로 만든 관을 정돈하여 쓰지 못한 채 당에서 내려왔다
바람이 신선의 옷깃을 펄럭이게 하고
마치 예상우의 춤을 다시 보게 해주는 듯했다
옥 같은 얼굴에 쓸쓸하게 눈물 떨어지니
마치 배꽃 가지가 봄비를 맞는 듯 했다
정을 간직한 채 사자를 보며 군왕께 감사를 전했고
이별 후 천자의 목소리와 모습이 모두 흐릿해졌다 한다
소양전에서 천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것도 끊어졌고
선산 봉래궁에서 긴 세월을 보내고 있다
머리를 돌려 아래 인간세상을 굽어보아도
장안은 보이지 않고 먼지와 안개가 자욱할 뿐
다만 천자가 주신 기념품으로 내 깊은 정을 표시하고
나전 상자와 금비녀를 주며 가져가라 하니
금비녀도 나전 상자도 반씩 나누어 간직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금비녀도 반으로 나누고 나전 상자도 둘로 나누었다
우리 마음이 본래 하나였던 이 비녀와 나전처럼 맺어졌다면
언젠가 천상이든 인간 세상이든 만날 날이 있겠지요
헤어질 무렵 간곡히 다시 전할 말 부탁했는데
그 중에는 두 사람만 아는 맹세의 말이 있었다
칠월칠석에 장생전에서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리라
하늘과 땅도 끝이 있고 시간조차 다함이 있으나
이 한만은 영원히 이어져 끝이 없으리.
∘ 해설
백거이가 806년(35세)에 지방의 관리로 임명되어 서안 지역에 부임했다. 어느 날 함께 술자리에서 대작하던 지인이 '서안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담긴 지방이니, 이런 역사적인 이야기는 명시인들의 손길이 닿은 시가 있어야만 후대에 널리 알려진다.'고 제안하자, 백거이가 이를 받아들여 장한가를 썼다.
당현종은 712년에 즉위하여 성실하게 국정에 임하였으나 740년 양귀비를 만난 뒤 나랏일을 멀리하다가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났고 이듬해 756년에는 황제도 피난을 떠나야 했다. 신하들이 화근인 양귀비를 죽여야한다고 간하자 결국 당현종도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죽으라고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역사적 일화에 백거이가 상상을 가미해 쓴 서사시이다. 후반에는 죽은 양귀비가 슬퍼하는 모양새까지 그려 당현종과 양귀비의 드라마 같은 사랑을 잘 표현한, 백거이의 대표적인 명시이다.
물론 당대의 벼슬아치이자 시인인 백거이가 전 황제를 대놓고 소재로 삼을 순 없으니, 공식적으로는 한무제와 이부인(李夫人)의 고사를 바탕으로 썼다. 그래서 첫머리부터 대뜸 한나라 황제(漢皇)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양씨 가문의 딸'이라고 하질 않나, (양귀비가 자결한) 마외(馬嵬)를 언급하질 않나, 양귀비의 도사 시절 도호인 태진(太眞) 운운에 장안을 이야기하니, 장한가의 실제 모델이 누군지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준.
백거이가 지극한 어조로 장한가에서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했음에도 불구하고, 풍자하는 뜻을 집어넣었다고 보기도 한다. 황제를 가리켜 '군왕'(君王)이라고 격이 낮은 말로 표현하고, 첫구절에 다짜고짜 "황제가 미색을 중히 여겨 경국(지색의 미녀)을 찾는데" 하는 구절이, 그로써 나라가 기울어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군왕(현종)이 양귀비와 밤을 보내느라 조회도 보지 않고 해가 높이 뜬 뒤에나 일어난다고 하는 등, 아름다운 구절로 사랑을 표현하면서도 부정적인 면을 집어넣었다. 마냥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아름답게만 묘사하는 시가 아니라는 것.
조선시대의 문신 장유(張維, 1587-1638)는 백거이가 장한가에서 침실에서 오간 은밀한 대화[13]까지 서술했으니 참으로 외설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 연꽃을 수놓은 휘장.
[2] 당나라 화청궁(華清宮)이 여산(驪山)에 있었기 때문에 여궁(驪宮)이라고도 불렀다.
[3] 復은 보통 '복'이라 읽지만, 여기서는 '다시'란 뜻이라 '부'라 읽었다.
[4] 여기서 '육군'은 당나라 황제의 친위대를 가리키는데 금군(禁軍)이라고도 한다. 안록산의 난을 피해 당현종이 군사와 궁인들을 이끌고 피난할 적에, 육군의 병사들은 '지금 이런 환난이 닥침은 오직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들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벌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면서 행군을 멈추었다. 황제가 명령해도 소용이 없었으므로 병사들을 달래고자 당현종은 결국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에게는 자살을 강요했다. 이때 양귀비는 마외역 근처에 있는 불당에 들어가 목을 매었다고 한다.
[5] 중국의 지명.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를 넘는 험준한 고갯길이다. 군사적 요충지라 관문이 있다.
[6] 장안 근처의 지명. 현재의 쓰촨성 충라이시(邛崃市)이다.
[7] 당현종이 양귀비를 여도사로 변장시켰을 때 태진(太眞)이란 이름을 쓰도록 했다.
[8] 소옥(小玉)과 쌍성(雙成) 모두 서왕모를 모시는 선녀들이다.
[9] 覺자는 '깨달을 각'이지만, '잠에서 깬다.'는 뜻으로는 '교'라고 한다.
[10] 비녀와 자개함만으로는 도사가 정말로 양귀비의 혼령과 만났다고 보증할 수 없으니, 현종과 양귀비만이 아는 대화를 알려주어 참임을 보증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11] 비익조(比翼鳥): 중국 전설 속의 새로 암컷과 수컷이 각각 눈과 날개를 하나씩만 갖고 있어서 짝을 지어야만 날 수 있어서 금슬이 좋은 부부의 정을 상징한다. 중국 당(唐)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 <장한가(長恨歌)>의 마지막 부분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비유한 상상의 새로 널리 알려졌다.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양귀비(楊貴妃)를 그리는 당 현종(玄宗)의 사랑을 비익조에 비유했는데, 이는 808년 37세 되던 해에 결혼했던 부인 양씨(楊氏)에 대한 백거이의 사랑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장한가(長恨歌)> 마지막 연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사람 없는 깊은 밤 서로 나눈 말,/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높은 하늘 넓은 땅도 다할 때가 있건만/ 이 한은 면면이 이어져 끊일 날이 없네”
당나라의 6대 왕이었던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자,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 양귀비는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이 부분은 양귀비를 잊지 못한 현종이 예전에 양귀비에게 속삭였던 말을 백거이가 시 속에 넣어 상심한 현종을 위로했던 구절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시에 나오는 연리지(連理枝)는 가까이 서 있는 두 나무의 가지나 줄기가 연결되어 하나처럼 보이는 나무를 뜻하며, 비익조와 같이 뗄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은 부부나 친구를 의미한다.
[12] 연리지는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맞닿다가 엉켜 하나로 합쳐진 것을 뜻한다.
[13] 연리지가 되고 비익조가 되겠다는 마지막 구절을 가리킨다.
✵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의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대력(大曆) 7년(772년), 뤄양(洛陽) 부근의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県, 지금의 허난성 신정시)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 6세 때 이미 시를 짓고, 9세 때에 호율(號律)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은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원(貞元) 16년(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백거이의 지우였던 원진은 백거이의 문집 《백씨장경집》 서문에서, "계림의 상인이 (백거이의 글을) 저자에서 절실히 구하였고, 동국의 재상은 번번이 많은 돈을 내고 시 한 편을 바꾸었다"고 하여, 당시 백거이의 글이 신라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810년에 당 헌종이 신라의 헌덕왕(憲德王)에게 보내는 국서를 황제를 대신해 지었으며, 821년에서 822년 사이에 신라에서 온 하정사 김충량(金忠良)이 귀국할 때 목종(穆宗)이 내린 제서도 그가 지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남기고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湖)에 건설한 백제(바이띠, 白堤)라는 제방은 소동파가 만든 소제(쑤띠, 蘇堤)와 더불어 항주의 명소로 유명하며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항저우에서 재직하는 동안 항상 나무 위에 올라 참선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조과'란 별명을 가진 '도림 선사'와의 일화가 재미있으며 다양한 버전이 있다. 약술하자면 백거이가 도림선사에게 불법을 묻자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은 다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백거이가 '세 살 어린 애도 아는 이야기'라며 일축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아이도 알지만, 여든인 노인도 평생을 통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개성(開成) 원년(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3년(838년)에는 태자소부(太子少傅)이 되었으며,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백씨장경집)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백거이는 다작(多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문집은 71권, 작품은 총 3,800여 수로 당대(唐代) 시인 가운데 최고 분량을 자랑할 뿐 아니라 시의 내용도 다양하다. 젊은 나이에「신악부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는 이른바 「풍유시(諷喩詩, 風諭詩)」를 많이 지었으나,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나서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주제로 한 「한적시(閑適詩)」의 제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밖에도 평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원진(元稹), 유우석(劉禹錫)과 지은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의 감상시도 유명하다. 백거이가 45세 때 지은 「비파행」은 그를 당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게 하였으며, 또,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시 「장한가」도 유명하다.
풍유시를 주로 했던 시기, 한적시를 주로 지었던 시기 전체를 통틀어, '짧은 문장으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平易暢達)' 것을 중시하는 시풍(詩風)은 변함이 없었다. 북송(北宋)의 석혜홍(釋惠洪)이 지은 《냉재시화(冷齎詩話)》 등에 보면, 백거이는 시를 지을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읽어주면서, 노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평이한 표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그의 시는 사대부(士大夫) 계층뿐 아니라 기녀(妓女), 목동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애창되는 시가 되었다.
이 밖에 <백시 장경집(白氏長慶集)> 50권에 그의 시 2,200수가 정리되었으며, 그의 시문집인 <백씨 문집>은 그의 모든 시를 정리한 시집이다. 장편서사시로는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이 있다.
∘ 참고문헌 및 출처;
∙ 「琵琶行」 難句 의미 해석고, 김경동, 중국학보 78권(2016), 115-148쪽
∙ 김경동 교수의 논문 외에도 아래 자료를 번역, 또는 주석에 참고하였다.
∙ 「長恨歌」와 「琵琶行」의 諷刺와 隱喩 攷, 김상홍, 한자한문교육 30권(2013), 473-508쪽
∙白居易의 <琵琶行>에 관한 세 가지 의문, 정진걸, 중국문학 81권(2014), 1-29쪽
∙ Daum 나무위키
∙ YouTube 영상 : 청암의 여행
첫댓글 고봉산 정현욱 님
장편의 장한가를 읽어보니 구구절절 애절함이 묻어 나 한구절도 소흘히 넘길수없는 감성에 사로잡히는것 같네요
디테일한 스토리라 장편 드라마를 연출하기에도 손색이 없어 그 유명한 장예모 감독이 그 특유의 장기로 큰 스케일에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 화답했네요
헌종 사후에 쓴 시지만 미색에 빠저 정사를 소흘히 한 점도 빠트리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띄이고 그리고 설명에 보면 백거이는 시로, 친구 진홍은 산문으로 썼다는데 진홍의 산문은 전해내려오지 않았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