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가톨릭 인물인 이승훈 베드로와 많이 헷갈려 이 사람이 민족대표 33인에 천주교 대표로 나갔다고 오인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개신교(장로교)인이다.
1864년 평안북도정주군에서 태어났다. 양민 출신.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16세에 유기상 알바를 시작으로 보부상을 거쳐 10년만에 대상인이 되었다.[3]
근데 하필이면 청일전쟁의 스테이지가 평안도. 그 탓에 재산을 모두 잃게 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일어나지만 이번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처음 이승훈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 자본이 없어 중국과 인삼 사무역으로 치부했던 조선 제일의 거부 오삭주[4]를 찾아가 돈을 빌렸다. 오삭주는 이승훈의 재목을 보고 거리낌없이 돈을 빌려주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사업이 거덜나자, 이승훈은 오삭주에게 다시 찾아가 "다시 자본을 대주시면 이번에는 제대로 일해 갚겠습니다"라며 당당히 요구했고, 이승훈의 진솔함에 탄복한 오삭주는 일전에 빌린 빚을 무효처리하며 물심양면 이승훈을 지원했다.
이승훈은 불굴의 의지로 다시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그 돈으로 능참봉직을 사서 여태 못해봤던 양반 행세를 하였다. 그러다가 안창호의 교육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그의 화려한 언변에 감동을 받아[6]신민회에 들어가 평안북도정주군에 신식 교육기관인 오산학교[7], 강명의숙 등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교육자의 길을 가게 된다. 서적 출판을 담당하던 태극서관도 이 사람의 작품.
그 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를 가고, 105인 사건으로 인해 유배 중에 감옥으로 끌려가 10년형을 언도받고, 5년만에 가출옥하였다. 그 동안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에 개신교 대표로 참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로 인해 또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고, 33인 중 가장 늦게 출옥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 오산학교 교장으로 살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에 힘쓰는 한편, 농촌 진흥에 노력을 기울이다 1930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67세.
성격은 능동적이고 유쾌하여 민족대표 33인의 서열을 정하는 것도 순탄하게 처리하였으며, 학교 기금을 위해 평안도의 광산업자들을 포섭하는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어 어디에 땅을 사두라고 하면 어김없이 땅값이 오르게 되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애시당초 사업가로 성공한 분이니.
독실한 개신교인이지만 3.1 운동 당시 승려이던 만해 한용운 선생을 늘 위에 명단을 쓰고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이 그걸 안 좋게 말하자 그들을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나라가 있어야지 종교가 있지! 그럼 일본이 종교만 인정하면 일본이라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 제발 경솔하게 종교부터 따지지 마라!
그 외에도 자신의 학생들을 매우 아끼고 좋아했었는지 많은 말을 남겼다.
열심히 공부해서 일본인들을 앞지르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다.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내 사랑하는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
이런 일화도 있다. 오산학교의 화장실은 그 당시에 재래식이었고, 그 때문에 겨울이 되면 쌓인 똥이 얼어버리는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이승훈 본인이 직접 얼음똥을 도끼를 들고 와서 손수 깼다는(…) 일화다. 학생들을 아끼는 마음이 드러나는 좋은 일화긴 한데 좀 깬다(…).
여담으로, 이 분이 세운 오산학교의 후신은 현재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오산중학교와 오산고등학교.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학교를 재건한 경우다.의사양반의 모델인 백인제 선생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출처 : 나무위키
희년의 사람 남강 이승훈
남강(南岡) 이승훈(이昇薰, 1864~1930) 선생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성실하게 일하여 자수성가한 사업가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한 교육자였습니다. 남강은 기독교 대표로 삼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한 기독교 독립운동사의 큰 별이었습니다.
남강의 부모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 남강은 열한 살 나이에 공장과 상점을 경영하던 한 부잣집에 잔심부름하는 사환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먹고 지내면서 날마다 주인의 요강을 버리고 방을 쓸고 걸레질하며, 손님의 재떨이와 화로를 가져오는 허드렛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인이나 손님이 버리라고 한 붓과 종이로 남이 보지 않을 때 글씨 쓰는 연습을 했는데, 종이가 까맣게 될 정도로 몇 십 번이고 반복하였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남강에게 종이와 붓을 주면서 격려하였습니다.
남강은 그 부잣집에서 사환으로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틈날 때마다 스스로 열심히 글을 읽었습니다. 남강은 자연스럽게 주인과 손님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장사와 나라 사정 등 세상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경영하는 유기 공장에 자주 심부름을 가던 남강은 햇빛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새까만 옷을 입은 채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고통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의 평등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강은 열다섯 살에 결혼하면서 독립하였고 열여섯 살부터 유기행상을 하였는데, 스물네 살에 그간 유기행상으로 번 돈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빌린 돈을 합하여 유기 공장과 상점을 차렸습니다.
이 때 세운 공장도 애초에는 다른 유기 공장과 다를 바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시절에 본 유기공장 노동자의 참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들여서 공장의 구조를 햇빛이 많이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먼지가 나지 않게 하여 항상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일할 때 입는 작업복과 일을 마친 뒤에 입는 평상복을 따로 입게 하였고, 일정하게 쉬는 시간을 주었으며, 임금을 높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지역의 다른 공장주들이 남강을 비난하였지만 남강은 굴하지 않고 소신대로 경영했습니다. 남강은 사업에 성공하자 그 사재(私財)로 가문의 집성촌을 만들면서, 마을의 공유 농지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빈부의 차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때는 청일전쟁으로 공장과 상점이 파괴되고 큰 위기에 빠졌으나, 남강은 철저한 정직의 실천으로 큰 신용을 얻었고 결국 재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남강은 도산 안 창호 선생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사흘밤낮을 꼬박 고민한 끝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오산 학교를 세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땅을 팔아 오산 학교의 재산을 만들었고 독지가들을 모아서 다달이 경상비를 조달했지만 학교 재정은 언제나 부족했습니다. 남강은 교사들이 굶는다는 말을 듣자 "혼자만 밥 먹을 수는 없다. 남은 집과 세간을 팔아 학교에 주고 우리는 학교 곁에 가 학생들 밥이라도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고 학교의 지붕에 비가 샌다고 하자 자기 집 기와를 벗겨서 지붕을 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남강의 정성어린 헌신으로 오산학교에서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함석헌, 한경직 등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습니다. 이와 같은 남강의 실천은 바로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禧年) 정신과 맞닿았습니다.
남강이 유기 공장에서 노동자를 위해 편 경영방식은 가혹한 노동을 금지하고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라는 희년의 노동법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남강은 공유 농지를 마을에 기부하였고, 자기 땅을 팔아 오산 학교에 기부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평등한 토지권을 받았다는 희년의 토지법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제의 고문과 옥고에도 불구하고 그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바친 것은,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희년 정신을 본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강은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내가 후진이나 동포를 위해서 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시키신 것이다.”(2008. 4. 26. 크리스찬신문 참조)
이승훈
호는 남강. 3 · 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 1907년 오산 학교 설립.
이승훈은 이렇게 다짐하면서 남의 집 심부름꾼이 되었다. 그 집은 놋쇠를 만드는 공장으로 이승훈은 막일을 하면서 밤늦게 공부를 하기도 했다.
종이가 귀하던 때라 이승훈은 주인이 쓰고 버린 종이를 주워 모아 글씨 연습을 했다. 공장 주인도 그런 이승훈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종이와 붓을 사 주기도 했다. 그래도 이승훈은 종이 조각을 주워 글씨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허허, 하얀 것은 모두 주워 오니 네 앞으로는 흰 나비도 날아오지 못하겠구나. 나비도 종이로 보여서 써 버릴 테니까 말이야.”
공장 주인은 이승훈의 성실함을 칭찬하며 이승훈에게 경리일을 맡도록 하였다.
그렇게 10년이 채 되지도 않아 이승훈은 스물네 살에 직접 놋그릇 공장을 차렸고, 성실하게 사업을 일으켜 대사업가가 되었다. 하지만 청일 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잃고 말았다.
이승훈은 다시 돈을 빌려 이번에는 평양에 무역 회사를 차렸다. 서울(한성)과 인천을 통해 외국과 거래하는 국제 무역상으로 거듭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일 또한 러일 전쟁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게다가 나라마저 일본으로 넘어가자 이승훈은 큰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를 만나 신민회에 들어갔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이 되고자 한 이승훈은 술과 담배를 끊고 기업의 수익금을 독립군 지원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1907년, 오산 학교를 세워 독립의 일꾼을 기르는 일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1911년, 일제는 안명근 등이 무관 학교의 설립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된 ‘안악 사건’을 꼬투리 잡아 이승훈을 제주도로 보냈다. 또한 신민회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며 민족 지도자를 체포했고 이승훈은 그 사건의 주모자로 감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이승훈은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3 · 1 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혀 3 · 1 운동에 앞장섰다.
193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승훈은 독립 운동과 국민의 교육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체를 학생들이 연구하는 데 쓰도록 오산 학교에 보존하게 해 달라고 했다.
남강 이승훈 선생 추도식을 바라보며…청소년 인성교육을 말하다
【데일리즈】이재찬 외부기고가/ 2017.05.16
지난 8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내에서 남강 이승훈(1864~1930년) 선생 제 87주기 추도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남강문화재단, 오산중ㆍ고등학교, 한국독립유공자협회, 민족대표 33인 기념사업회, 서울지방보훈청 등의 많은 관계자와 五山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석해 선생의 뜻을 기렸다. 남강 선생은 1907년 만민공동회에서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강연에 감명을 받고 한 평생 독립운동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1907년 오산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힘쓰고, 1911년 105인 사건 주모자로 옥고를 치뤘으며, 1919년 민족대표로 3ㆍ1 만세운동에 앞장 섰다. 이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했으며, 1924년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민족 언론을 고취했다.
1930년 선생이 운명을 앞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서 쓰게 하라. 그리고 서로 돕고 낙심하지 말고 쉼없이 전진하라"고 남긴 유언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 남강 이승훈(1864~1930년) 선생 ⓒ필자 제공
이에 정부는 1962년 선생의 업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단재 신채호(1880~1936년)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다. 이는 역사로부터 유비무환의 교훈을 잊으면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태평성대에는 군신관계가 발전적이며, 국익을 위한 충언이 자유로와 나라가 부강하고 국민의 삶이 풍요로우나, 내우외환 시대에는 군신(君臣)간 불신의 벽이 가로막고, 탐관오리가 득세해 경제가 파탄나고 패망에 이르기까지 했다.
불행한 시대의 근본 원인은 국가의 안녕과 장래를 생각하기 보다는 권력과 재물에 어두운 지배계급의 탐욕 탓이다. 한반도의 백제,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조선의 멸망이 모두 그러하다.
더욱이 중국과 일본의 과거 한반도 침략으로 인한 가장 큰 폐해는 우리의 귀중한 역사서를 모조리 불태우거나 약탈해서 고려 이전의 역사를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임나일본부 주장은 한국이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후진성을 감추기 위해 우리 역사를 조작,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폐지한 것은 타당하다. 민주국가에서는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사에 대한 강단사학과 민족사학간 뜨거운 학설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공청회를 통해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 찾아야 할 것이다.
한 국가의 역사란 이를 지킬 힘이 있을 때 유지되는 것이지, 그러지 못하면 강대국의 냉혹한 힘에 의해 파묻히는 불행을 겪는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간신배들이 얼마나 많은 손실을 초래하였는가? 조선 말 을사늑약에 앞장 선 오적신(五賊臣)이 그 사례 중 하나이다.
현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본원인은 기성세대의 도덕불감증에 기인한다. 이것은 바로 어릴적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성인이 되고서 그릇된 사회풍조에 쉽게 젖어들어 각종 문제가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는 아마추어, 사회는 프로세계로 볼 수 있다. 아마추어세계는 실력을 키우면 기회가 올 수 있으나, 프로세계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인정을 받는다. 따라서 아마추어환경에서 상당한 적응훈련을 준비해야만 장차 프로환경에서 견뎌내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미래세대에게 '헬조선', 'N포세대'라는 짐을 지우고 있는 세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교육이며, 그 첫걸음은 바른 역사교육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그릇된 것은 비판하고 귀감이 되는 것은 널리 알려 바른 역사를 세우고 건전한 인성교육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 일제 치하에서도 자신의 삶 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신 분의 얼을 기리는 청소년 현장체험 학습은 역사교육 뿐 아니라 인성교육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필자 이재찬 : 데일리즈 칼럼니스트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서문)
남강이 무엇인고
열(熱)이요 성(誠)이로다
강(剛)이요 직(直)이러니
의(義)시며 신(信)이시라
나갈젠 단(斷)이면서도
그저 겸(謙)이시더라.
광명천지, 춘하추동 속에서 살면서도 해 달이 어째서 돌아가며 비바람이 무엇하자고 부는지를 알아 볼 생각을 아니한다면, 어찌 지각(知覺)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을까?
무한 우주 속에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바퀴를 돌면서도, 이 꽃을 보면 어째서 웃음이 나면서, 저 새소리를 들으면 어째서 울음이 나는지를 물으려 하지도 않는다면, 어찌 감정이 있는 생명이라 할 수 있을까?
하고자 함 있음(有欲)과, 하고자 함 없음이(無欲)이 한 뿌리에서 나오면서 이름이 서로 다를 뿐이라는 말을 노자(老子)가 벌써 이천년 전에 말해 주었다. 하늘 나라, 세상 나라가 따로 있는 것 아니라 제가 모든 것의 주인인 줄로 아는 사람이라면 세상 나라며 죄요, 나는 죽어버리고 참만이 살아 있으면 하늘 나라며 참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때 어둠이 앞을 가리우는 일이 있을지라도, 두려워도 말고 미워도 말면서 나가노라면 고난 속에서도 묘한 새 역사의 아들을 보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참과 사랑의 불꽃을 품고 종용히 탈 것이지, 결코 덤비거나 미쳐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소위 대통령 선거 이후 세상이 어찌면 이렇게 달라졌을까? 3, 4층 위에서 뛰어내리면서, 혹은 제 손으로 전신에 휘발유를 뿌리고 태연히 분신자살을 하던 입에서 허탈감(虚脱感), 좌절의식(挫折意識)이란 탄식이 나오게 됐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따지고 난다면, 악(惡)과 싸우잔 말인데, 악은 결코 물건이나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욕지거리나 주먹이나 칼이나 폭탄으로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악마가 예수를 먹어 치우려 했을 때 천하 만국의 권세와 영화를 보여 주면서 “네가 내게 절만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다 네게 줄 수 있다”고 한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대신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면서 “네가 정말 유대인의 왕이냐”했을 때 예수는 분명히 “자기는 진리의 왕이라”고 했고, 숨이 마침내 끊어지려 할 때 “다 이루었습니다”했다. 또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물었을 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에게 있느니라” 했다.
지난해 유월 여름 “국민 대행진”을 했을 때 그 기세가 얼마나 당당했던가! 하늘 땅을 다 삼킬 듯했던 그 의기와 용맹이 다 달아나 버리고 좌절, 허탈하는 소리가 그 입에서 나온단 말이냐?
정말 좌절이냐? 정말 허탈이냐? 네가 예수는 그만 두고, 맹자(孟子)도 모르는구나!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나는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노라”고 했고, “그 기운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어 누리에 그득 찬다고 했으며, 그것은 “의(義)와 짝하고 도(道)로 더불어 하여 그것 아니고는 맥을 못춘다”고 했다.
이제 이러한 때에 오산학교가 교육가, 학자 중에서 빼어난 이들을 동원하여 남강 이승훈 선생의 생애와 사상, 무엇보다도 그의 민족운동을 자세히 연구하게 하여, 그 논평집을 내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어서, 이야말로 정말 죽을 병에 청심환이다. 생명 내걸고 싸우던 푸른 피들이 허탈감에 빠졌노라 하니 정말 민족의 죽을 병 아닌가? 그런데도 어디 가 물으려고 아니하니, 정말 꺾어지고 부스러진 것 아닌가?
오산아, 네가 우리를 건졌구나! 남강이 아니고 우리가 어디 가서 묻겠느냐? 그 고마움을 무엇으로 표시할까?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 “짚신에는 제날이 제일이라고, 반짝 하는 것이 반드시 고운 것” 아니다. 참은 드러나 번쩍거리는 비단주머니에 있는 것은 아니요, 도리어 수수한 순박 속에 있다. 본래 오산의 표는 수목두루마기에 있지 않았느냐? 남강은 졸업생들을 보고 사랑의 채찍질을 잘 하셨다. “요놈, 안고수비(眼高手卑)해서, 모양만 낼 줄 알고, 일 하기는 싫고”하곤 하셨다. 재주가 문제 아니라 참이 문제다. 옛날 어떤 가난뱅이 친구가 오랜만에 찾아오니 반갑기는 한데,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뺨을 한 대 갈겼다는 말이 있다. 나도 한 번 오산의 뺨을 갈기련다.
“남강 소리를 벌써 했을 것이지, 왜 이때까지 멍멍하고 있었느냐! 선생님 돌아가신 지 육십년이 돼 오는데, 이 무슨 게으름장이냐!”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자빠져 누워 침을 뱉는 소리지만, 남강을 내놓고 또 다른 약이 없다.
남강의 일생을 보면 옛날 한산(寒山)의 한수시(寒樹詩) 생각이 난다.
한수선림생(寒樹先林生) 찬나무 숲에 앞서 났으니
계년유일배(計年逾一倍) 나이 헨다면 갑절이 넘을 것
근조릉곡변(根遭陵谷變) 뿌리 언덕골짝 따라 변하고
엽피풍상개(葉被風霜改) 잎새 바람 서리맞아 달라져
함소외조령(咸笑外凋零) 사람마다 겉으로 시들고 떨어짐 웃을뿐
불련내문채(不憐内文彩) 속으로 짙어가는 무늬볼줄 몰라
피부탈락진(皮膚脱落盡) 껍질 살은 다떨어져 없고
유유진실재(唯有眞實在) 오직 참속알만 남았더라
제자들이 그 높은 덕을 길이 살리고저 동상을 세웠을 때 그는 일어서서 종용히 “나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시키셨을 뿐입니다”했을 뿐이었다.
1988년 5월 9일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남강문화재단) 1988.5.9
독립운동가 지도자 남강 이승훈
글쓴이 : 이승희
도산은 “옛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힘을 길러야 하며, 새로운 힘을 기르기 위해 새로운 교육을 해야 한다.”고 절규했다. 그 평양 연설회 자리에 43살 된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다음 날 상투를 자르고 도산을 찾아가 만났다. 이 만남이 그 남자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삶을 180도로 바꾸었다.
1907년 7월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시국연설회가 있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국을 구하고자 국내에 들어온 도산은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신민회를 조직하고, 각지로 다니며 연설회를 열고 있었다. 도산은 “옛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힘을 길러야 하며, 새로운 힘을 기르기 위해 새로운 교 육을 해야 한다”고 절규했다. 그 평양 연설회 자리에 43살 된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다음날 상투를 자르고 도산을 찾아가 만났다. 이 만남이 그 남자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삶을 180도로 바꾸었다. 그때까지 그의 목표는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 나기 위해 악착같이 돈 벌고 벼슬을 사서 가문의 영달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만남 이후 자신이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강은 안창호가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되었다. 평북 정주의 용동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당을 고쳐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신식 초등교육 기관을 열고, 그해 12월에는 중등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또한 그동안 해온 사업 경험을 살려 신민회의 산업부문인 식산흥업의 책임자를 맡아 평양 마산동에 자기(磁器)회사를 설립하였고, 서적 출판과 공급을 위한 태극서관이라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한 남강은 33인 민족대표 중 기독교계를 대표한 인물로서 3·1운동의 산파역을 했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한때 동아일보 사장을 한 언론사 경영자였고, 1930년 5월 9일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칠 때는 자신의 시신마저도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표본으로 기증할 것을 유언할 만큼 아낌없이 조국과 학생들을 사랑한 교육자요 애국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의 성장과정은 따뜻한 부모의 양육과 정규교육 같은 것과 거리가 멀었다. 1864년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자라던 남강은 아홉 살 때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여의어 천애의 고아가 되었다. 그는 큰 유기공장을 하는 임일권이라는 사람의 사랑방 심부름꾼으로 보내졌다. 그런 역경이 노동, 성실과 정직,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라는 학교에서 배우기 어려운 인생의 원리들을 굳은살처럼 그의 몸에 배게 했는지 모른다.
작은 심부름도 성실하고 부지런히 한 끝에 인정을 받아 4년 뒤에는 이 상점의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다. 14살 남강은 1878년 이도제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했다. 결혼하고서도 남의 집 사환 노릇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남강은 유기그릇을 받아 지고 장터를 도는 보부상이 되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돌며 돈을 모으게 되자 납청정에 유기상점을 차렸다. 사업은 번창했다. 얼마 후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였고, 철산의 갑부 오희순에게서 자본을 빌려 1887년 24살 나이에 납청정에 유기공장을 세웠다. 제조와 판매, 지방 도산매를 겸하여 번창하던 중 청일전쟁이 터졌다. 평안도가 전쟁터가 되었다. 3년 동안 피난을 하고 돌아 왔을 때 남은 것은 잿더미로 변한 공장과 빚더미뿐이었다. 남강은 빚을 준 철산 오씨를 찾아갔다. 이제까지 빚의 원금과 이자를 상세하게 뽑은 문서를 보이며, “전쟁으로 거지가 되었으니 다시 한 번 자본을 빌려 주면 묵은 빚까지 다 갚겠다”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오씨는 문서에다 먹줄을 죽 그어버리고 “본전만 갚으라”며 새로 2만 냥을 빌려 주었다. 남강이 후에 이자까지 깨끗이 갚은 것은 물론이다. 그후 수년 간 사업이 번창하여 평양과 인천에 본거를 두고 마침내 전국 제일의 무역상이 되었다.
1902년 1만냥의 엽전을 싣고 부산으로 가던 남강의 운송선이 일본 영사관 소속의 배와 충돌하여 침몰했다. 일본 영사를 상대로 2만 냥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루한 소송은 1년이나 걸려 겨우 원가만 받게 되었다. 그 동안 소송 때문에 사업을 못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남강은 사업을 접었다. 그리고 왜, 어떻게 하여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흔들리는 국권의 문제가 있었고, 일본의 침략이라는 큰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평양 연설회에 참석한 것은 바로 그런 때였다. 자기만 잘 사는 것이 다가 아니며, 나라가 편안하고 부강해야 개인도 잘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육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확신한 남강 이승훈은 온힘과 정성을 오산학교 경영에 쏟았다. 남강 이승훈이 보여준 몇 가지 지도자의 특징적 면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솔선수범
남강은 오산학교 설립자요 교장으로서 학교 일을 위해 외부 일을 보지 않을 때는 학교에서 선생들과 학생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으며, 같이 일하고 배웠다. 그는 뜰을 쓸고 변소를 손수 치우고, 헐은 데를 고쳤다. 그는 학생들의 이름을 잘 기억했고, 학생들과 만나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언제나 교사와 학생을 다정한 가족으로 대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학교를 돌아보던 남강은 변소에 대변 무더기가 얼어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남강은 도끼를 가지고 와서 언 변 무더기를 깨 내었다. 그러한 남강의 정신이 학생들에게 퍼져나가 오산학교는 “헌신의 불도가니”가 되었다.
1911년 일제가 신민회의 만주 무관학교 설립 운동과 관련지어 남강을 제주도에 유배했다. 유배지에서 남강은 일찍 일어나 동리를 깨끗하게 쓸고 어린아이들의 코를 닦아 주고, 옷고름을 매어 주었다. 이런 솔선수범이 주민들의 관심을 끌자 남강은 집을 깨끗하게 치우는 것, 부지런히 일할 것을 가르쳤고, 동네 청년들을 모아 우물을 깨끗하게 치우기도 했다.
남강이 온 지 한 달이 지나자 동네는 깨끗해졌고, 싸움이 없어졌다. 그후 다시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때도 남강은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똥통 청소를 도맡아서 하였다. 그는 손으로 똥을 만지면서 기도하기를 “주여,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이 문에서 나가는 날 이 백성을 위하여 이 똥통 소재하기를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인간 사랑
유기점의 노동자들은 무식하고 가난하였으며, 천대받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일을 해서 몇 푼 벌면 곧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여 탕진해 버렸다. 게으르고 버릇없으며, 싸움질에, 아무런 희망 없는 노동자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남강은 이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장의 시설을 위생적으로 고쳤다. 작업복을 주고, 노동시간을 정했다.휴식시간도 주었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이러한 노동조건 개선으로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되었을 뿐 아니라 작업능률 또한 크게 향상되었다.
오산학교의 한 학생은 지독한 말썽으로 한 두 차례 근신과 정학을 받았음에도 조금도 반성의 빛이 없어 퇴학 처분을 하기로 교사들이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말없이 듣고 있던 남강은, “사나운 망아지라야 길들이면 명마가 되는 거요. 길들일 가치가 있는 사나운 망아지를 내쫓는 거 더 생각해 봅시다.” 이 한 마디로 그 학생은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다.
그는 3·1운동으로 3년형을 언도받고 민족대표 중 가장 늦게 출옥했다. 남강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출옥하고 자신만 남아 있을 때에도 자신의 석방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기를 하루라도 더 있으면서 형제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남강은 감옥 안에서 신약전서만 백 번 이상 탐독했다. 남강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러므로 독립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1919년 2월 초 해 그름에 한 나그네가 남강의 사랑방 문을 두드렸다. 독립선언을 위하여 연락차 상해에서 온 선우혁이란 청년이었다. 남강은 무릎을 치며, “이제야 죽을자리가 생겼구나” 하며 기뻐하며 곧 조카 자경을 불러, “예, 급한 일이 생겨 팔아야겠다. 독립운동에 돈이 있어야 하니 나부터 내야겠다” 하며 여덟 마지기 땅을 팔게 했다.
3·1운동의 계획이 추진되고 있던 1919년 2월 14일 평양에서 몇몇 목사들을 만나 거사에 참여하기를 청했으나 그들이 종교인임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그는 책상을 내려치면서,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느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얼마 후 2월 27일 남강이 서울의 정동교회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서는 기독교 측의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 서명을 위해 문안을 돌려보던 중 서명 순서를 놓고 천도교 대표보다 먼저 서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며 논란이 분분했다. 남강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앉으며 말했다.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것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논쟁은 종결되었다.
남강은 자신을 위해 사는 작은 나(小我)의 삶에서 솔선수범, 인간사랑, 비이기적인 헌신으로 큰 나(大我)의 삶을 산 참 지도가가 되었다. 어느 해인가 한강 둑이 터져 고양 지역에 홍수가 났던 때가 있었다. 온 천지가 물바다였던 그 때 지역 수재민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다름 아닌 물이었다. 정작 물천지에서 마실 물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홍수 속에서 마실 물 찾는 것처럼 “참 사람,” “참 지도자”에 대한 절실한 갈망의 몸살을 앓아 온 지 오래되었다. 오늘날 남강이 깨어난다면 다시 빗자루를 들고 우리의 잠든 양심과 양식을 일깨우고, 안일과 무관심, 이기심과 분쟁, 갈등으로 갈라진 마음과, 부도덕으로 썩어가는 마음들을 쓸어내려 하지 않았을까?
첫댓글 감사합니다
샬롬 반갑습니다. 시대가 혼미할 때 남강 이승훈선생님의 교육입국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