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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제1독서 : 사도 2,14.22-33
복 음 : 마태 28,8-15
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버드대 우등생 공부 비법이 있다고 합니다.
우등생들은 평소에 설렁설렁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은 기가 막히게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 사감이었던 교수가 이들을 눈여겨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잘 드러나지 않는 공부 비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정보다 열흘 먼저 해치우기.’
읽어야 하는 책이 있으면 열흘 먼저 읽습니다. 제출해야 하는 에세이도 열흘 전에 다 씁니다.
발표할 자료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단순히 하버드대 우등생만 그러했을까요?
소위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결정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 모두가 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가 뒤로 미룰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벼락치기를 해야 자기의 뛰어난 능력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리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나중에 힘이 생기면,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나중에 구원해 줄게.”라고 하시면 어떨까요?
자기의 일은 늘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하고,
그 외의 것은 언젠가 이루어져도 된다는 이기심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공평하심을 믿는다면, ‘나중’이라는 말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은 실제로 제자들에게 곧바로 찾아갑니다.
뒤로 미루지 않고 곧바로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기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기쁜 일이 있으면 그냥 비밀로 간직하지 않습니다.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그만큼 여자들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컸기에
기쁨을 가지고 곧바로 찾아갑니다.
이 사랑을 아셨기에 여자들에게 가장 먼저 부활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경비병들도 무덤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했던 수석 사제들을 찾아갑니다.
경비병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움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사랑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의 뜻인 사랑을 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행동합니다.
“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을 극심한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이라는 당혹스런 사실 앞에서,
믿음의 흔들림과 의혹과 허탈감으로 절망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붙잡혀 죽게 될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고,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그 깊은 어두움속에서도 결코 갈망이 식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두려움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깊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움이 되어 이른 새벽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게 했고,
거기서 그들은 천사를 만나 놀랍고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마태 28,7)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면서 ‘평안하냐?’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천사를 통해 사명을 주었건만, 굳이 열절하신 사랑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주 오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향하여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인간을 향하여 계신 분”(본 훼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나 여기 있노라.”(이사 58,9;66,1) 하시며,
이미 찾아와 우리 앞에 계십니다.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셔서, 우리가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을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붙잡혀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당신 앞에, 항상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당신 면전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어, 막달레나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당신 부활을 선포하는 첫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달아나 버린 제자들을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떠났어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들을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내 형제에게로 가라”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첫 사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예수님을 뵈올 것입니다.
척박한 땅 갈릴래야,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 땅,
바로 여기,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형제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할 때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서 피어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형제들 안에서 당신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
그분을 뵙는 일, 이보다 기쁘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가는 곳에 항상 먼저 와 계신, 먼저 오시어 나를 기다리시는 분,
결코 저를 떠나지를 못하시는,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찾으면 ‘나 여기 있노라.’ 하시고,
제가 숨으면 ‘너 어디 있느냐?’고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먼저 제 안에 들어와 ‘어서 가자.’고 이끌어 주시는.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
부활은 믿음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돈은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총선을 앞두고 후보자들의 실상을 보게 되는 데 물질에 지배당한 어리석은 모습도 봅니다.
여당도 야당도 표를 사려고 헛공약을 남발하며 현혹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서 결코, 속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빈 무덤에 관해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 사건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며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간 여인들은
“평안하냐?”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이 그분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주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 매 순간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약속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노래방이 생기면서 전 국민이 가수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하면서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듯이,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면서 몇 번을 간 곳도 내비게이션 없이는 찾아가지 못하듯이,
노래방에 가사가 나오면서 예전에는 외우던 노래들을 외우지 못합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지만,
예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기억하던 기능들은 점차 약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새것을 알기 전에 예전의 것들에서 배우자는 것입니다.
‘Old is but Good'이라는 말도 이와 비슷합니다.
요즘의 음악도 좋지만, 예전에 들었던 노래가 가슴에 더 깊이 와 닿는 때가 있습니다.
그 노래에 나의 기억과 나의 삶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18번으로 부르는 노래 중에 최성수의 ’해후‘가 있습니다.
애잔한 멜로디와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을 아파하면서도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는 가사가 좋았습니다.
또 하나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성가로 만든 ‘아무것도 너를’이 있습니다.
성가가 곧 기도가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성가입니다.
가사 중에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 만으로 만족하도다.’가 있습니다.
이 두 노래는 제가 그 가사를 온전히 기억하는 노래입니다.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내면서 문득 성가를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성가 329번 ‘미사시작’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이 넘쳐 뛸 때 뉘 나와 함께 나누리.
슬픔이 가득할 때 뉘게 하소연 하리
영광의 주 우리게 기쁨을 주시오니
서러운 눈물 씻고 주님께 나가리
당신이 아니시면 그 누가 빛을 주리
인생은 어둠 속에 길 잃고 방황하리
희망의 주 내 삶의 길 인도 하시오니
나 언제나 주 안에 평화를 누리리.
부당하온 이 영혼 주 앞에 어찌 가리
주께서 살피시면 결백함 있을런가.
사랑의 주 우리의 뉘우침 굽어 보사
불쌍히 여기시어 받아 주옵소서.”
멜로디가 장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숙연하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내어 주시면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느끼게 해 줍니다.
먼 길 떠났다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그네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젊은 날 객기를 부리면서 방황하던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미사 시작은 바로 그런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잔치를 벌여 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쉽고, 야속하고, 화가 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믿었던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안하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걱정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슬픔을 다 떨쳐 버리고,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오늘부터 메주고리, 파티마, 루르드 성지순례를 갑니다.
주님의 사랑에 깊이 머물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예수님 부활
-사실인가? 또는 가짜뉴스인가?-
“예수님은 살아나셨다!(Christ is risen!)”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3월31일은 3월 성 요셉 성월의 끝날이자 주님 부활 대축일이었고
오늘 4월1일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이어
4월 한 달은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과 함께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부활시기가 펼쳐집니다.
옛 어른의 4월 말씀과 오늘 말씀도 참 좋습니다.
“거피취차(去彼取此); 이상에 취하지 말고 일상에 몰두하자”
다산이 노자를 인용한 4월 주제 말씀입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부활을 체험한 우리들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냉철한 삶의 자세입니다.
“사자는 갈기가 없더라도 사자다. 선비는 궁한 처지에도 비굴하지 않다.”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부귀함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비천함도 이 뜻을 바꾸지 못하며,
위험도 이 뜻을 굽히지 못하니, 이래야 대장부라고 할 수 있다.”
맹자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 부활을 체험한 자라면 모름지기 다산 어른의 선비의 자세가,
맹자 어른의 대장부의 자세가 마땅하겠습니다.
어제, 성주간 동안 수도원에 머물다간 제 옛 고향,
대전교구 원로 신부의 유머스런 말씀도 힘이 되었습니다.
“수도원 도서실에서 <요셉수도원 설립 25주년(1987-2012)>
화보집에서 당시 원장이던 ‘신부님의 회고사;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를 읽었습니다.
초창기 수도원을 일궈 놓으신 대단한 분이더군요.
그분이 누굴까 유심히 살펴보니 신부님이었습니다.
절로 말하면 수도공동체의 원로가 되는 신부님은 방장이고, 원장신부님은 주지가 되는 셈입니다.
신부님은 불암산의 ‘산중(山僧)’이라면 저는 세속의 ‘들중(野僧)’입니다.”
정말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해 불암산 성 요셉수도원의 산승(山僧)답게,
수도공동체의 겸덕(謙德)과 학덕(學德)을 겸비한
출중한 영적지도자 방장답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어제는 참 많이 부활 축하 카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주님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신부님,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요지의 축하 글이었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글이었습니다.
교황님의 부활성야 강론 시
“예수님과 함께, 무덤은 더 이상 삶의 기쁨을 압도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주제로 말씀하셨고,
부활절 메시지에서는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한다!(Christ is risen! All begins aneu!)”
희망찬 주제를 택하셨습니다. 부활의 희망, 부활의 기쁨이 우리를 살게 하는 참된 내적힘입니다.
정순택 서울대교구장의 부활메시지도 적절했고 일부 인용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자주 ‘반대자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험담하는 이들을 축복합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은 국가의 발전과 국민들의 행복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곧 치르게 될 총선에서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권리를 잘 행사해서
국민의 참 봉사자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어려움을 넘어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입니다.
나라의 좋은 일꾼을 택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후보의 배경인 당과 삶을 역사를 봐야 할 것이고,
무수한 쓰레기 가짜뉴스들에 휘둘리거나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 부활하셨고 일부 제자들은 너무나 생생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이에 당황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매수하니 종교지도자들이 가짜뉴스의 진원지가 됩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자기들이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그들이 시킨대로 했고,
이 가짜뉴스 유언비어가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합니다.
정말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예수님 부활이 유언비어 가짜뉴스처럼 들렸을 것이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정말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참 분별하게 난감합니다.
무엇이 유언비어요 가짜뉴스인지 오늘 복음을 보면 분명합니다.
종교지도자들과 경비병들이 유언비어 가짜뉴스의 진원지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유언비어 가짜뉴스가 만연된 세상에서
이에 속지 않도록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좋은 선택을 하시기바랍니다.
특히 배경의 당과 인물의 과거 행적을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살아온 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회개가 아니곤 사람은 결코 고쳐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너무나 자명한 진리입니다.
부활의 희망, 부활의 기쁨이 우리를 험난한 광야 여정 중에도 무너지지 않고
독야청청 살게 하는, 샘솟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도대체 부활한 파스카의 예수님이 아니곤 어디에다 참 희망과 기쁨을 둘 수 있을런지요!
바로 그 생생한 부활의 증인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그대로 베드로의 주님 부활체험을 반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어 예로 드는 다윗 시편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을 여러분의 내 고백으로 삼으셔서 바쳐도 은혜롭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이 시편16,8-11절입니다.
저는 오늘 부활절 다음날 4월1일 오늘 파공은 주님 부활의 희망과 기쁨을 관상하며,
또 교황님의 부활 강론과 메시지를, 아래 시편을 묵상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려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고백이자 주님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의 행복한 고백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시편(16,8-11)을 그리스도화하여 렉시오디비나 하는 경지가 참 놀랍습니다.
과연 렉시오디비나의 모범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아멘.
병사들에게 많은 돈을 집어주며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8절)
그들은 상상도 못 한 놀라운 일들을 보았다.
그 여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였다.
바로 얼마 전에 그분이 안장되시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이 비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빈 무덤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천사들이 그들을 무덤으로 데려간 것이다.
여자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9절) 하신다.
그들은 몹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았고 확신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0절)
주님께서는 이 여인들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경비병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하러 왔을 때, 사제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며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13절)고
거짓말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무덤은 권력자의 명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리고 무덤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었을까?
그들이 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몰래 그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유다에게 돈을 주어 배신하게 했던 사제들은
경비병들에게도 돈을 주고 입을 막아 신앙을 무덤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날 밤 무덤에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골방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었다.
수석 사제들은 무덤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빌라도에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치고서는 부활하셨다고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게 되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마태 27,64)이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진리를 은폐하려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려보려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비병들만 매수해서 가릴 수 있었다면,
그 진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현실적으로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은폐하기보다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부활절 50일의 대장정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는 지난 3일 동안 예수님의 파스카
(Triduum Paschalis: 최후만찬, 십자가 죽음, 무덤에 묻힘과 부활)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직접 펼치시는 인류 구원사의 절정이자 최종적인 사건이 부활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앞서간 글들에서 거듭 강조하였지만,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이 단번에 주어지는 신앙이 아니다.
이는 부활 대축제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따라가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우선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성야부터 시작하여 만 하루의 축제일로 지냈다.
이것이 서로 모여 빵을 나누며 기도하는 일을(사도 1,14; 2,12 참조) 빼고는 유일한 축제였다.
3세기 초엽 초대교회는 유다인들이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를 8일 동안 거행한 것을 본받아
하루의 부활 대축일을 부활 팔일 축제로 확장하여 기념하였고,
4세기 초엽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연이어 國敎로 선포되면서 축제일은 50일로 최종 확정된다.
50일의 숫자는 이미 유다인들의 과월절(해방절) 축제 이후
50일째 지내던 오순절 축제를 연상시키기에 우리에겐 전혀 낯설지 않다.
유다인들에게 과월절(해방절)은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물리적 해방을 의미하며,
오순절은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야훼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을 기념함으로써 영적인 해방을 의미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유다인들의 오순절 날 한곳에 모여 있던 12사도(마티아가 가리옷 유다의 자리를 채움)에게
성령이 내림으로써 본격적인 교회의 탄생이 시작된 것(사도 2장)을 감안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사건, 그리고 성령강림사건을 하나로 묶은 축제일로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사상으로 자리 잡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오늘부터 예수님의 기막힌 부활사건을 승천(40일째)을 포함하여
성령강림사건까지 50일간의 부활대축제 시기를 지내게 된다.
교회가 예수 부활사건을 축제일로 50일을 지내든,
일년 내내 모든 일요일을 예수 부활 기념일로 지내든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 부활을 信仰하느냐?’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부활 신앙을 돕기 위하여 교회는
파스카의 성삼일뿐만 아니라, 부활팔일 축제도 준비하였다.
나아가 40일간의 부활 준비시기(사순절)와 50일간의 부활축제일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일년내내 모든 일요일(52~53번)을 부활기념축일로 거행하지 않는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오늘부터 부활팔일축제동안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복음공동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부활 신앙에 도달하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며,
이와 行步를 같이하여 우리의 부활신앙을 고무시켜야 할 것이다.
부활 신앙을 고무시키는 방편으로 복음서가 보도하는
예수 부활에 관한 기사를 주의 깊게 따라갈 필요가 있다.
마르코는 16,1-22에, 마태오는 28,1-20에, 루카는 24,1-53에, 요한은 20,1-25에
각각 부활(승천)기사와 복음의 에필로그(마무리)를 적고 있다.
부활기사의 분량은 마르코 복음(70년경)과 마태오복음(70-80년경)보다
루카복음(80년경)과 요한복음(90-100년경)이 더 길다.
이는 복음서의 집필연대가 늦은 것일수록 비교적 많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복음서 모두가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 내용은
‘안식일 다음 날, 즉 일요일 이른 새벽에
일찍부터 예수를 따라 다니뎐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고,
이 순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사실상 부활신앙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를 토대로 각 복음서는 자기 나름의 부활 신앙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오늘 미사의 마태오복음은 빈무덤 그곳에서 부활 예수와 여인들의 첫 상봉을 보도하면서,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그리고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경비병 매수설’(12절)과 ‘예수 시신 도난설’(134절)을 들려준다.
이는 마태오복음의 讀者가 유다인들과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부분이다.
마태오는 이 대목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예수의 무덤을 경비해야 한다는 독자적인 ‘무덤 경비설’을 미리 덧붙여 놓았다.(마태 27,62-66)
아무튼 부활시기 50일 동안 듣게 되는 모든 복음은
비록 그것이 부활사건을 보도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활신앙을 향하여 읽혀져야 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팔일축제 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무덤을 떠나는 여자들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이때 강조된 주제는 ‘두려움’과 ‘기쁨’인데, 이 주제는 이후에도 되풀이됩니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급히 가던 여자들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평안하냐?”라는 인사를 받게 됩니다.
이 인사를 그리스 말에서 직역하면 “기뻐하여라!”이며
명사 기쁨(‘카라’)의 동사형(‘카이로’)이 쓰였습니다.
이 동사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드린 인사말에도 쓰인 바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이어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이 단어도 오늘 복음의 시작(8절)에서 쓰인
명사 두려움(‘포보스’)의 동사 형태가 쓰인 경우입니다.
곧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무덤을 떠난 여자들은,
이제 예수님께 “기뻐하여라.”(9절, 우리말 번역으로는 “평안하냐?”)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는 부활의 시간을 걷게 된 우리에게
두려움과 기쁨은 수없이 다가오는 감정이고,
그렇게 꾸준히 길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예수님을 만나게 됨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복음의 후반부에는
예수님을 만나 “기뻐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인사 말씀을 들은
여자들과 달리, 두려워하고 근심에 빠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등장합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적 술수, 곧 담합하고 매수하는 것으로 부활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뻐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증인들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독서에서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인 대중 앞에서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그분을, 여러분은 ……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두려움 없는 기쁨은 감출 수도 묶어 둘 수도 없는 힘이며 빛입니다.
이 예레미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와 빈 무덤 사화가 나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여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달려간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아직도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천사가 알려 준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가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평안하냐?’하고 말씀하신다.”
여인들은 무덤에서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자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으로 가득 찬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선포하셨고,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실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려면
당신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를 실현시킨
그곳으로 돌아가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하신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예수님의 사명이 이제 제자들의 사명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빈 무덤에서가 아니라
갈릴레아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여정을 되 밟아갈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의 말씀을 새로운 빛으로 보게 한다.
빈 무덤 사화에서 우리는 유대인들
즉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빈 무덤을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들은 빈 무덤의 현상을 다르게 설명했다.
그들은 빈 무덤은 인정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인하고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시체를 훔쳐 가서”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고 주장한다.
빈 무덤 사화는 마태오 고유의 사료로써 예루살렘 교회에서 엮어 전해진 것으로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보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 강조하는 부분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까 빈 무덤이었다는 것이지
빈 무덤이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부활이란 살아있는 것, 살아있는 삶을 뜻한다.
우리는 살아계신 분을 무덤에서 찾지 않는다.
예수님께선 부활하여 살아계신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멀리 떠날 필요가 없다.
우리들의 삶이 있는 곳, 우리들의 일상의 삶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도록 하자.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