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와 연인 사이가 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그 기간 누나를 대하는 데 있어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가끔 뽀뽀 한 번씩 한다는 게 예전과 달라진 것이다. 쿠쿠, 뽀뽀 한 번 한다는 거. 그걸 단지라고 말하다니 내가 주제 파악을 잠시 못했나 보다. 감히 가슴 떨리는 일이라 꿈에 조차 잘 나타나지 않는 그런 일을 두고 단지라고 말하다니... 생 후 처음 와 보는 이런 낯선 곳의 여관 방에서 하룻밤을 묵을려니 별 생각들이 다 떠오른다.
병장 되기 꼴랑 한 달 남겨 두고 탈장인가 뭔가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승헌이를 보러 이 곳에 왔지만 그 새끼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난 지금 낯선 여관 방에 혼자 누워 냄새 나는 베개를 꼭 껴안고 누나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잘난 여자가 내가 뽀뽀 하자고 하면 한다. 처음엔 장난 같기도 했는데, 요즘은 결혼 얘기도 나오는 것이 나를 진짜 애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누나와 애인하기로 했지만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고는 아직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헤어짐이 오면 웃어 줄 것이라 다짐하고 누나는 언젠가 딴 남자의 여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연애와 결혼은 항상 같을 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최근들어 누나에 대한 그런 내 생각이 많이 틀려지고 있다. 누나와 키스하면서 눈을 말똥히 떠고 누나의 표정을 살폈던 적이 있다. 그 잘난 여자는 내게 뽀뽀를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수줍고 행복한 여인의 모습이 바로 누나에게 있었다. 한 남자에게 입술을 맡긴 채, 잠시 세상의 일은 한 쪽으로 치워두고 그 남자만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은 모습, 누나도 그랬다. 조르는 동생에게 마저못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누나는 나를 느끼고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를 딴 사람에게 줄 수 없을 것 같다. 장하다 박철수,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정말 수고 많았다.
베개를 꼬옥 더 껴 안았다. 헤헤...
그래서 그럴까? 예전에는 누나가 어떤 모르는 남자와 팔짱을 껴고 걸어 가던, 같이 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조금 서운했던 적은 있지만 질투심 나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너들이 암만 그래봤자 누나는 나하고 더 친하다. 이렇게만 생각했었다. 근데 더 친하게 된 연인사이가 되었는데 요즘 누나하고 친한 척 하는 놈들이 보이면 불안하고 질투심나고 기분 나쁘다. 분명 요즘이 예전보다 더 친해졌고, 더 가까웁게 지내지만 예전보다 태연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새끼... 한 번 날 잡고 싶은 새끼가 있다. 그 자식 참 밥 맛 없는 놈인데 누나 곁에 오래 붙어 있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다. 그리고 또 한사람 여전히 불안한 사람이 있다. 예전 누나의 연인이었던 사람, 승주 형. 승주 형이 돌아 와서 누나 곁에 나타나면? 나는 예전처럼 그냥 삐친 모양으로 나 혼자 내 기분을 삭일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조금 떨어져 주면 더 편할 것이라 생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누나에게 따지고 들지도 모른다.
껴 안았던 베개를 풀었다. 베개를 머리 쪽으로 옮기고 이불을 덮었다. 한 여름이 가까이 왔는데도 난 이불을 덮고 별 생각을 다 하다가 잠이 들었다.
"꼬끼 오~"
율전 그 촌 동네에서도 듣기 힘들었던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겁나게 촌 동네인거 같다. 새벽 동이 밝아 온다. 내가 누나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일찍 일어 날 필요 없다. 다시 잤다.
"삐리리~"
잠결에 전화 벨 소리를 들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방 빼야죠?"
"아, 지금 몇시인데요?"
"12시 다 되었어요."
내 온 몸이 땀에 젖어 있다. 나, 덮었던 이불을 돌돌 말아 껴안고 있었다. 후후, 이불 말고 자는 건 은정이 누나가 하던 짓인데...
외모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군발이 면회 가는데 외모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아무리 겉모습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가지만 군발이 보다는 확실히 잘 나 보일거다.
면회하는 매점에 앉아 승헌이를 기다렸다. 외모에 좀 신경을 써고 오는건데 그랬다. 제법 예쁜 아가씨 둘이가 내 가까운 곳에 앉아 나를 흘깃 쳐다 본다. 그려, 나 금방까지 자다 온 사람이여.
승헌이가 나왔다. 몇 일동안 세수 안한 모습, 그 짧은 머리가 한 쪽은 눕고, 한 쪽은 섰을 정도니 물 근처를 아예 안 간 것 같다. 초라한 국군 병원 복을 입고 플라스틱 딸딸이에 다리를 절며 반가운 모습 반, 아픈 모습 반으로 나에게 오는 데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제 저기 앉아 있는 여자들이 날 쳐다 보아도 된다. 왜? 나 확실히 승헌이 보다는 몰골이 괜찮아 보일 것이기에.
"어찌 된거냐?"
"응? 탈장. 탈장은 말년에는 잘 안 걸리는데..."
"탈장이 뭐냐?"
"한 마디로 장이 탈났다는 거지. 장이 밑으로 떨어져서 수술해서 끄집어 올려야 되는 병."
"왜 걸렸냐?"
"낸들 아냐."
"병원에 얼마 동안 있은거냐?"
"2주 다 되어 간다. 모레 수술 날짜 잡혔다."
"다리를 절던데?"
"다리가 아픈게 아니고 아랫배가 결려서 그런거다.너 다음주에 한 번 더 와라.
심심해 죽겠다."
"이 더운 날 훈련 안 받고 병원에 있으면 더 좋지 않냐?"
"그건 그렇지만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우리 집에 전화 했었냐?"
"응."
"그 사자 머리더러 자주 오라고 하지?"
"헤헤, 의정이 걔랑은 당분간 모른 척하고 지내기로 했다."
"걔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냐?"
"아니다. 그 애인 사이라는게 말이다. 자꾸 속박하려고 해서, 내가 좀 괴롭더라구. 걔가 뭐하고 지내는지 자꾸 신경이 쓰이는데, 신경 써 줄 처지가 못되었잖아. 그래서 그냥 모른 척 내가 의정일 피했어."
"그럼 니가 군화 거꾸로 신은거냐?"
"하하, 그런 셈이지만 사회로 나가면 다시 시작해야지. 친구는 오래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지만 연인사이는 다르거든."
"군발이다운 생각을 하는군."
"야, 나는 메인 몸인데 애인이 딴 남자 만나고 돌아다니는 상상을 해 봐. 기분 어떻겠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먹을 거나 좀 사와."
"지금 내 복장이 이런데 내가 돈이 있을 것 같냐?"
"야, 비싼 차비 들여가며, 어제 면회가 안 되어 비싼 여관방 신세까지 지며 너 만나러 왔으면 대접을 해야 할 거 아냐."
"진짜 싸가지 말년 병장 군기보다 더 없네. 아픈 놈 면회 왔으면 니가 날 대접해야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 대접도 못할 거면서 무슨 배짱으로 날 불렀냐?"
"너 내 친구 맞어?"
"다른 놈들이나 부모님 오셔서 뭐 먹을 거 사다 놓고 갔을 거 아냐. 그거라도 좀 가져 와."
"여기가 무슨 민간 병원인 줄 아나. 잔말 말고 빨리 먹을 거 사 와."
"나 진짜 돈 없어. 어제 여관비 내고 나니까 돌아 갈 차비 밖에 안 남더라."
"참 내. 그럴려면 뭐하러 왔냐?"
"그래, 나 갈게."
"야. 나 심심해. 그럼 커피라도 한 잔 뽑아 와."
승헌이 녀석하고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두 시간을 앉아 놀았다.
"너, 모레 수술하고 나도 일주일 더 여기 있어야 하거든? 다음 주 수요일 쯤에
여기 한 번 더 와라."
"그때 오면 잘 대접해 주냐?"
"면회 오는 사람이 대접하는 거 아니냐?"
"고정관념을 버려라 임마."
"그건 그렇고 너 요즘도 나이 많은 여자들하고 노냐?"
"응."
"너 그러다 빨리 늙는다? 너 이런 심보 가진 것도 아마 나이 많은 여자들 영향일거야."
"승헌아."
"왜?"
"너 은정이 누나 알지?"
"자가용 타고 다니던 누나 말이지?"
"응. 그 누나 어떻던?"
"예쁘긴 한데 남자를 잡고 살려는 경향이 있어 보이더라. 우리 큰누나와 비슷해."
"하하, 예쁘긴 하지?"
"졸업했지 않냐?"
"대학원 다녀. 푸하하."
"왜 웃어?"
"너 여자랑 뽀뽀해 봤어?"
"야이씨,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의정이하고 근 육개월 사귀다 군에 들어 온 나다."
"해 봤구나."
"못해봤다. 흑흑. 다른 놈들은 군대 들어오면서, 와서도 잘만 하더만..."
"불쌍한 놈. 너 진짜 공대만 안 들어 왔으면 진짜 잘난 남자 됐을거야. 내가 봐도 넌 잘 생겼어. 어쩌다 삶이 그렇게 꼬였냐?"
"공대가 어때서 임마."
"넌 눈이 아주 낮잖아. 그 잘난 외모로 그 사자머리하고 사귄걸 보면."
"니가 몰라서 그렇지 의정이 걔 참 예쁜 여자야. 근데 갑자기 뽀뽀 얘기는 왜 했냐?"
"그 사자머리보다 백 배는 예쁜 은정이 누나가 내 애인이다. 그 누나하고 나 시도때도 없이 키스하고 그런다."
확실하게 기를 죽이기 위해서 약간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본다.
"푸헬헬! 거짓말 치지마. 그 잘난 여자가 대가리 총맞았냐 너하고 키스하게. 술 먹고 장난삼아 뽀뽀 해 준걸로 너 뻥치는거지?"
왜 안 믿지? 그럼 좀 더 강한 거짓말로...
"내 애인 맞다니까. 나 누나 가슴도 만져 봤어."
"뭐! 가슴을 만져?"
야이, 저 옆에 아가씨들이 다 듣잖아.
"아니, 찔러 봤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누나가 내 애인이라니까."
"야, 나이 많은 여자는 나이 어린 놈에게 종종 애인처럼 잘 대해줄 때가 있어.
거기에 속아 넘어 가면 넌 하인되는 거야. 내가 힘으론 우리 누나들 셋이 다 덤벼도 이기지만 막내 누나에게도 쩔쩔 매는 것은 다 그런 그녀들의 수법에 넘어 갔기 때문이야."
"이 새끼 군발이 되더니 의심만 늘었나."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너 혼자만 아무도 몰래 그렇게 생각 해. 쯔쯧. 나
중에 아픔이 커겠구만."
"나 수요일 날 다시 온다. 그때 보자."
"야, 좀 더 놀다 가, 삐쳤냐? 다섯시까지 있다 가."
"너 혼자 놀아 새꺄."
내가 은정이 누나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친구가 믿어 주지 않았다. 별로 기분 나쁜 것도 없다. 하지만 누나가 나와 애인사이 된 것이 대가리 총맞을 정도인가?
내가 내 가까운 친구에게도 그 누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랗게 느껴졌나?
지하철 역으로 들어 가 화장실을 찾았다. 내 모습이 별 볼일 없어 보였다. 히죽 웃었다. 은정이 누나에게 이런 내 모습이 잘 어울릴까?
집에 와서 바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친구 면회 갔었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
"너네 아버님이 그러시더라."
"우리집에 전화 했었나 보네요?"
"응."
"누나 내 애인 해 주기로 했죠?"
"해 주기로? 그거 너 싫어하던 말이었잖아."
"하여튼. 내 애인 맞죠?"
"왜 자꾸 그런 걸 묻니?"
"그 새끼가."
"좋은 말 좀 쓰라. 면회갔던 친구 말하는거니?"
"응."
"걔가 왜?"
"누나가 내 애인이라고 막 자랑했는데 그 새끼가 막 놀렸어. 거짓말하지 말라고."
"후훗, 너 장난스럽게 말했지?"
"씨, 누나 수요일날 바빠요?"
"바쁘진 않지만 연구실에 있어야 돼."
"그때 결석해요."
"왜?"
"나랑 그 새끼 면회 갑시다."
"응?"
"가서 내 애인 맞다고 좀 말해줘요."
"너 이럴 때보면 참 어린 애 같다."
"내가 누나보다 두살 적다고 그러는거지?"
"또 삐칠려고 그런다."
"갈거야 말거야."
"꼭 가야 되니?"
"응. 내가 오늘 참 많이 수모를 당했단 말이에요."
"너 아직 불안한거지? 그런 생각 언제 떨쳐 버릴래?""
"에?"
"그래, 가서 확인시켜 줄게. 화요일날 서울 올라 오지 뭐. 하루 정도 빠진다고
날 제적시키겠어 어쩌겠어."
"정말 갈래요?"
"가자며?"
"하하, 그럼 내가 화요일날 누나 데리러 갈게요."
"흠. 철수야."
"왜?"
"두 살차이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마. 그리고 내가 너보다 대단한 사람이라고도 생각지 마."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보여요?"
"응, 많이."
"그게 보여요?"
"응."
보이나? 어떻게 해서 보이지? 두 살 많다고 나보다 제법 많이 아네. 그건 그렇
고 푸하하, 승헌아 수요일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