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생각하지 말고 영국 신사하면 딱 떠오르는 3가지는?”
며칠 전 동료 여기자에게 물었습니다. 20년차 안팎의 경험 많고, 센스 좋고, 취재 잘 하고, 글 잘 쓰는 기자입니다. 상식과 교양까지 갖춰 이 친구가 하는 말은 늘 신뢰가 갑니다.
대답은 “우산, 수트, 독특한 영어 액센트.”
“킹스맨.” 2015년 1편이 개봉된 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에 나오는 주인공은 영국 신사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30대 후배 여기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딱 한마디 하더군요. “킹스맨.” 2015년 1편이 개봉된 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에 나오는 주인공은 영국 신사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전설적인 베테랑 요원 해리 하트는 말합니다. “젠틀맨에게 가장 필요한 건 멋진 수트야. 기성복이 아닌 맞춤 정장.” 이렇게 멋지게 수트를 입은 영국 신사를 떠올릴 때면 원통형 모자 실크햇과 우산을 함께 연상해도 좋을 법 합니다.
매너, 정중한 예의 또한 영국 신사에게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역시 킹스맨의 해리 하트가 말하는 최고의 명대사가 떠오릅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
이런 신사의 나라 이미지의 핵심 축인 영국 왕실이 요즘 걱정이 많은 듯 합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이자 올 6월 만 100세가 되는 필립공(公)이 지난 1월 16일부터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여기에 왕실과 공식적으로 완전 결별한 해리 왕손과 그 아내 메건 마클이 왕실에 부담주는 행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해리 왕손 부부가 미 CBS 방송 오프라 윈프리 인터뷰에서 영국 왕실의 부정적인 면까지 공개하면서 영국 왕실이 벌통을 쑤셔놓은 것 처럼 들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 주변에서 즉각 이런 반응이 터졌습니다. “신사의 나라라더니 진흙탕이네. 왜 이런거야?”
그 실체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영국이 전 세계에 신사의 나라로 ‘각인돼’ 있습니다. 영국에서 만난 한 교포 얘기에 따르면 예전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전 이런 기내방송이 나왔다고 합니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이 교포의 다음말이 묘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교포들)는 그 방송 들을 때마다 피식 웃어요.” 옆에 있던, 20년 넘게 영국에서 작품 생활을 하고 있는 한 여성 작가도 “영국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지요”라고 거들었습니다. 신사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낭만적 모습과는 전혀 다른 뭔가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신사’라는 말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고, 많은 이견과 논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누구를 신사라고 할 건지 개념 정의부터 다를테고, 영국인 모두는 아닐텐데 그중 어떤 사람이냐는 등 생각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젠틀맨을 이해하는데 영국 역사와 런던 생활이 도움이 됐습니다.
우선, 젠틀맨은 중세와 근대를 거쳐 영국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자리잡은 ‘젠트리’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젠트리는 작위 귀족, 즉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아래에 있는 상류층입니다. 젠트리는 다시 세 계층(기사와 에스콰이어, 그리고 제일 하위의 젠틀맨)으로 나뉘는데, 이중 젠틀맨이 절대 다수였다고 합니다. 젠틀맨은 넓은 의미로 작위 귀족까지 포함하는 뜻으로도 사용됐다고 합니다.
옛날에 젠트리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뜻했습니다. 지대 수입만으로 여유있게 살 정도로 땅이 충분히 많은 지주 또는 소영주였던 셈이죠. 한마디로 부유층입니다. 이들은 지역에 막강 영향력을 행사했고, 의회에도 대거 진출해 국정의 향방을 좌우했습니다. 이들은 부와 권력을 과시만 한게 아니라, 전쟁 참여나 세금 납부 등 책임과 의무도 성실하게 수행했다고 합니다.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해요. 젠트리는 영국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었고, 영국 사회의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가 이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들은 기부도 많이 하고, 사회에 대한 봉사도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러니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엔 ‘신사 되기’가 범국민적 취미처럼 돼 버렸다는 평가가 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젠트리=젠틀맨은 영국 사회에서 결국 소수에 불과할 수 밖에 없지요. 이런 점들을 알게되면서 영국 젠틀맨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국 남자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으로 (적어도 외부인한테는) 대단히 말이 적고, 감정이나 능력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제 아들 친구 조지는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의 외아들입니다. 키는 190cm가 넘고,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갖고 있습니다. 케이팝, 특히 한국 걸그룹을 ‘미치도록’ 좋아해서 재작년 고교 1학년 때 엄마와 함께 무작정 한국에 오기도 했습니다.
2017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국 문화 페스티벌' 당시 한국 케이팝 그룹 공연에 몰려든 영국 팬들
2017년 7월 런던에서 열린 ‘한국 문화 페스티벌’ 때 일화입니다. 행사에 EXID와 HIGHLIGHT 등 케이팝 그룹 공연이 있어 조지를 초대해 함께 갔지요. “위 아래~ 위 아래~” EXID 노래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조지는 좌석에 얌전히 앉아 손을 무릎 쪽에 올려놓고 참 얌전히도 손뼉을 치고 있더군요. 제 아내가 가서 조지를 일으켜 세우고 같이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는데, 그것도 잠시. 금방 자리에 앉아 다시 ‘무릎 위 손뼉치기’ 내공을 시연하더군요. 주변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춤추며 즐기는데도 그렇게 차분히 앉아있는 이 영국 소년을 보면서 “정말 특이하다” 생각했습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가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이란 책에서 설명한 영국인의 남자다움도 같은 맥락입니다. “영국 중간 계층 남성들은 어릴 때부터 신사의 이상을 흠모하도록 교육받는다… 점잖고 예의 바를 것, 자존심을 지킬 것, 과묵할 것,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을 것 등의 행동 규율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런 ‘합리적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영국의 젠틀맨은 진짜 모습일까, 아닐까.
우리 눈에 보이는 영국 신사의 모습과 언행은 대단히 매력적인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속, 영국인 신사의 머리와 마음 속까지 ’'젠틀'하다고 생각했다간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유명한 제국주의자 정치인이었던 세실 로즈는 “우리(영국인)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인종이다. 우리가 세계에서 거주하는 지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인류에게 이롭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들 마음속엔 언제나 대영제국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 때 이런 영국 사회에서 이런 인종적 우월감과 엘리트 의식이 가감없이 표출되는 것을 봤습니다.
영국은 줄을 잘 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 배경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영국의 언론인 길(A. A. Gill)은 ‘분노의 섬’(The Angry Island, 2005)에서 “영국인은 줄을 서야하기 때문에 줄을 선다. 그러지 않으면 서로를 죽일 테니까”라고 했지요.
영국인의 특성을 글 하나에 담기에 너무 부족하다는 걸 잘 알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영국인을 젠틀맨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일부는 맞을 수 있지만 일부는 반드시 틀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아주 훌륭한 젠틀맨도 많지만, 그 중엔 속다르고 겉다른 표리부동형 신사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영국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실용주의자’ 또는 ‘경험론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그들은 돈 문제에 대단히 강하고 또 예민합니다. 자본주의가 탄생한 나라, 과거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금융이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장점인 나라이기 때문일까요.
만약 영국에 가서 젠틀맨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 크게 실망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우선, 길에서 만나는 영국인 중 다수는 평범한 서민들이기 때문이고, 젠틀맨을 만난다 해도 그가 워낙 과묵해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만났다면 운이 좋으신 겁니다.
◇조선일보는 매일 아침 재테크, 부동산, IT, 스타트업, 의학, 법, 책, 사진, 영어 학습, 종교, 영화, 꽃, 동물, 중국, 영국, 군사 문제 등 21가지 주제에 대한 뉴스레터를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구독을 원하시면 <여기>를 클릭하시거나, 조선닷컴으로 접속해주세요.
출처 : 조선일보, 2021.03.09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2]영국에 가면 젠틀맨을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