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살이
신상숙
농촌 사람은 누구나 이웃과 어울려 살아야 농사꾼답다. 더구나 농사일은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품앗이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농기계가 발달하면서 품앗이의 정겨운 풍습도 서서히 사라지고, 대신 끼리끼리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이다. 게다가 농기계 사용료와 천정부지로 치솟은 품꾼의 품삯이 농산물 수확량의 단가를 앞지른 관계로 나이가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전부가 호락질이다. 하여, 농사철에는 자식들이 주말마다 부모님이 농사지으시는 시골집으로 득달같이 달려온다. 우리도 남들과 다를 게 없어서 농기계 주인에게 기계사용료와 사람의 품삯을 지불하며 논농사를 짓고 있다. 그나마 밭농사는 수작업이 가능해서 남편과 둘이서 밭에서 살다시피 한다. 때문에 무더운 여름에도 농사일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자갈밭 4백여 평을 집터로 잡아놓고 빨간 벽돌집을 지었으니, 토박이들과 농경지 이웃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묵묵히 감당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부당한 처사를 입 다물고 있으려니 창자가 뒤틀릴 때가 한두 번 아니다. 더구나 모내기 후 물꼬 관리는 내 몫이어서 논두렁을 오갈 때마다 좁은 소갈머리가 구시렁거린다. 아버님께서 농사지으실 땐 우마차가 드나들던 논두렁, 우리가 농사지으면서 행정기관에 도로사용료까지 납부하는데, 당연시 여겨야 할 발길조차 편치가 않으니, 왜 아니겠는가.
논두렁관리는 위 논배미 주인의 몫이어서 이른 봄 가래질이나 여름철 풀 깎기 할 때도 아래 논 임자가 본체만체해도 탓하지 않는 게 이 동네 풍습이다. 한데, 염치가 사라진 아래 논배미 임자는 논 평수를 늘려 볼 심사로 야금야금 삽으로 논두렁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기껏해야 벼 두어 줄 더 심으려고 안간힘을 쓰다니,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터무니없는 사람들도 세월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으니, 일부는 돌아가시고 일부는 농사일에 손 놓은 상태이다. 그들이 저질러 놓은 엉터리 경계가 아직도 존재하는 건 그의 후손들이 대물림을 받아서이다.
우리가 집 지을 때, 이웃 농지와 경계를 측량한 기사가 박아 놓은 말뚝까지 멋대로 뽑아버리고 시치미 떼는 바람에 측량을 다시 해야만 했다. 측량을 다시 하는 날 본인이 직접 경계 말뚝에 망치질까지 하고도 심술보가 가라앉을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하니, 이웃과의 살가운 정이 솟아날 리 만무하다. 이웃끼리 왜? 저리 하는 건가 궁금해서 심술보 영감과 텃밭 이웃에게 물어보았다. 논배미 이웃은 눈꼴이 시어서, 텃밭 이웃은 우리 집 그늘이 자기네 밭으로 내려와서라니, 이건 우문에 억지 명답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양반에 속한다. 우리 논두렁에 설치한 관정(管井)을 제멋대로 사용하고 고장이 나도 고쳐놓을 생각을 하지를 않는 막무가내도 있으니 말이다. 아래 위 구분 없이 욕지거리 퍼붓는 엉터리와 참을 인(忍)을 뒤로 한 채 강녕포 삼거리에서 대판 싸워 내가 이겼다. 얼굴 붉히는 일 피하려고 입조심 말조심을 하는 와중에 음의 높이가 최고로 올라간 것이다. 내 입에서 뛰쳐나간 말이 어찌나 발 빠르게 이 동네 저 동네로 돌아다니는지 다시 내게로 돌아오기까지 두어 시간 정도이면 족한데, 십 여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 내 귀가 잠잠하다.
동네 사람들 농사일에는 모두가 박사들이다. 서툰 농사일 박사들에게 물어가면서 콩 심고 팥 심고 고추모종도 심어야 하는 걸, 그냥 내 멋대로 밭농사를 지었으니 토박이들에게 얄미운 사람으로 보였을 게다. 더구나, 서툰 솜씨로 심어놓은 작물마다 풍성하게 열매를 맺어놓아서일까? 어쩌다 모르는 게 있어서 이웃에게 물어보아도 “나는 모른다. 그냥 알아서 대충이다.”로 일관이다. 고약한 농촌인심을 탓하기보다 그들과 어울림이 부족한 나를 뒤돌아 볼일이다. 지금은 농사정보를 손에 들고 다니는 전화기에 물어물어 해결하는 일이 다반사다. 해서, 농업박사들에게 아쉬운 소리 할 일도 없다.
우리 남편 ‘부모님 살아계실 적에는 용강리 인심이 참 좋았다’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집 나간 사람들의 착한 심성이 도래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 이제부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차례이다. 우선 마음의 문부터 활짝 열고 무거운 철대문도 닫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여름과일 가을과일 잔뜩 심어놓은 텃밭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목청 높여 고하리라. “우리 집으로 들어오시오, 오셔서 단내 나는 과일 주머니 가득 담아가세요."라고, 말이다. 이 밤 헛된 바람이 아니길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