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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4일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제1독서 : 사도 3,11-26
복 음 : 루카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름답고 멋진 장소에 가시면 무엇부터 하십니까?
아마 감탄사가 먼저 나올 것이고,
그리고 이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기 위해서 사진도 찍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장소라도
자기 몸 상태에 따라 하지 않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10년 전, 남미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행기 탄 시간만 하루가 될 정도로 먼 곳에 있는 곳이고,
이제 다시 이곳에 오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많은 체험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일정을 마치고 관광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페루 쿠스코에 도착했을 때, 울고 싶었습니다.
안데스산맥 사이의 해발 3,399m에 위치한 15세기에 세워진 고도시입니다.
볼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사진 한 장 찍기도 힘들었습니다.
두통과 어지러움, 계속해서 붕 뜬 느낌과 소화 불량이
계속 제 몸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산병 때문입니다.
고산 증세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과연 아름답고 멋진 경치가 눈에 들어왔을까요?
사람들이 감탄사를 외치는 곳에서 저는 한숨만 내쉬면서 빨리 낮은 곳에 가고만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산 증세는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하룻밤을 묵고 나서는 다시 생생해졌고, 그제야 아름답고 멋진 장소가 눈에 보였습니다.
이제는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의 이해에 따라 달라지는 주변 환경에 대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 환경에 적응하고 바라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보인 것처럼,
주님께도 완전히 적응해야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방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자기들 역시 죽지 않겠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예수님께서 직접 3번이나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몰랐던 사건이 아닙니다. 3번이나 예고하셨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잊어버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이해가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는 많은 군중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 역시 세상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한 군중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소리,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 모욕적인 군중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셨던 모든 말씀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 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거행하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 줍니다.
이토록 보여 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이는 부활 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꽃피우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 마음을 열어 주소서.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 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고, 저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아멘.
아는 것이 힘이 되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사람이 있고, 드러난 사실 안에서 진실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안에서 그 의도, 본뜻을 헤아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존경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실은 물론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실뿐 아니라 진실을 모르면서 갖은 추측과 추정을 통하여
사실인 것처럼,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말이 많습니다.
그야말로 떠도는 말, 입에 발린 말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 안에서 진실을 보는 지혜로운 처신과 절제된 침묵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부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책임을 감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미사를 도와주는 어린 복사가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어떤 색깔을 좋아하세요? 빨강이예요? 파랑이예요?
얼떨결에 하얀색! 하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여당도, 야당도 아니고 천주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몸을 알아보려면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 없었고,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실 때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한결같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
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일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증인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이런 증인은 법정에서 볼 수 있고, 증인의 증언은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이런 증인의 증언을 공적인 장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5공 청문회’였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부당함을 증언하였습니다.
송곳 같은 질문으로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밝혀낸
‘청문회 스타’ 국회의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짓 증언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수산나’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혔던 노인들은 수산나가 부정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수산나는 억울하게 죽을 위험에 직면했지만,
다니엘은 두 노인의 거짓 증언을 밝혀냈습니다.
수산나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악의 그물에서 벗어났습니다.
거짓 증언을 했던 노인들은 벌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에서 여덟 번째 계명은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념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증인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투쟁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세대를 ‘386 운동권’이라고 했습니다.
3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한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대부분 586세대가 되었습니다.
5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에 출생한 사람을 지칭합니다.
이들의 저항과 이들의 투쟁은 많은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가 있습니다.
그 밖에도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의 민주화는 그런 증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증인은 스테파노입니다.
부제였던 스테파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300년 박해의 시간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런 순교자들을 특별히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의 복음 전파 없이 자생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던 한국 교회도
복음 때문에, 신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로서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우리들 또한 순교자들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이제 세상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회개했던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회개한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두 번째는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부당한 폭력 때문에 생길 수도 있지만
교회의 위기는 회개한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 주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 부활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일의 증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 인간들과 끝까지 접촉하시고 소통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초세기 교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여부는 참으로 큰 관건이고,
그에 대한 합당한 교리적 설명은 너무나도 큰 과제였습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했던 특별하고 기이한 예수님 부활 사건이었기에
일반 대중은 물론 예수님을 추종했던 사도들조차도 믿음을 지니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부활 예수님의 태도는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합니다.
배신과 불신, 완고한 제자들의 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 앞에 발현하실 때마다 먼저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뿐만 아닙니다. 치욕과 수모, 혹독한 고통의 흔적인 당신의 오상,
저 같았으면 절대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을
손과 발의 깊은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만져보라고 손과 발을 내어주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은 우선 급한 대로 자신들이 먹고 남은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 어디에나 등장하시는 분입니다.
그까짓 물고기 한 토막 드셔도 되고 안 드셔도 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된 것임을 제자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보잘것없는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야무지게 잡수신 것입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 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 동반하시기 위해 또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 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 하였다.
부활은 상상조차 못 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실제의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셨다.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 말씀하셨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 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바로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하여야 하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가 증인으로서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평화가 너희와 함께!” (24,36)
언젠가 영원한 딴따라가 되고 싶은 박진영은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에게,
“가수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고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이다.”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설교자 역시 동일한 마음과 태도로 사람들에게 설교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체험한 사람의 말이 비록 어설플지 몰라도 체험한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고
진정성이 솟아 나오기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 듣게 되고 감명을 받습니다.
어쩌면 부활을 선포했던 사도들의 말씀도,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바를 들려주었기에 듣는 청중들이 감명받고,
사람들이 하느님께 회개하였다고 봅니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체험보다 더 좋은 설교는 없습니다.
자기 인식을 깨트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24,35)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있을 때입니다.
사실 동료들의 말을 전해 듣고도 다른 제자들은 쉽게 생각을 바꾸기가 어려웠고,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24,36) 하며,
부활한 당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신 것은,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24,37) 는
표현에 암시하고 있듯이,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부족한 믿음을 탓하기보다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24,38) 하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부활하신 당신을 체험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과정은 보지 않고도 믿을
우리를 위한 체험학습이자 영적 교육의 기회로 삼으셨는지 모릅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이전의 예수님의 몸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정녕 같은 몸인가?’라는 의문이 일어나겠지요.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과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코15,42.44)라고
명백히 우리의 의문을 불식시켜 줍니다.
부활하신 몸은 분명 어제와 같지만, 어제와 전혀 다른 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으며” (24,40) 이를 보다 더 명백하게 하시려고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24,41) 하고 물으신 다음,
제자들이 건네준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24, 42.43)
이렇게 하신 다음,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관한 성경 말씀을 들려주심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던” (24,45)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몸의 현현顯現과
성경의 확증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방점은
바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24,47.48) 하고
선포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결국 사도들이 선포할 내용이란 다름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이며, 이는 예수님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사람을 살리시는 분으로,
하느님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보살피며 충만하길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베드로는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이후 베드로 사도는
놀라운 변화와 함께 전인격적으로 성숙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체험은 베드로 사도의 존재와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선포 내용의 진정성의 보증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이 예수님을 3번이나 배신했다가 다시 용서받고,
자기중심적인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하느님의 어부로 다시 호출받고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예수님의 사명을 받들어 선포하는 베드로 사도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3,15)
그렇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존재와 활동은 바로 참된 증거이며 증언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 사도는 참된 부활의 선포자입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화답송 후렴/시8,2)
부활의 기쁨을 위해 반드시 준비할 것 :
진리(하늘의 뜻)는 은총(부활의 기쁨)을 담는 그릇
전삼용 요셉 신부
영화 ‘나이야드’(2023)는 다이애나 나이야드(Nyad)의 2015년 회고록 『길을 찾아라』를 원작으로 합니다.
이 영화는 2013년 상어 우리의 보호 없이 쿠바에서 플로리다까지 수영한 최초의 사람이 된
미국인 장거리 수영 선수 다이애나 냐드(Diana Nyad)의 전기 드라마입니다.
나이야드는 책에서 본 한 문장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말해봐. 단 한 번밖에 없는 이 삶을 걸어서 네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약속을 취소하고 침대에 드러눕는 게 일상이 된 다이애나는 어느새 60세에 이르렀습니다.
그녀가 이루고 싶은 것은 이제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어렸을 때의 꿈을 보게 되자 생각이 바뀝니다.
30년 전에 쿠바와 플로리다 해협까지 110마일을 수영으로 완주하겠다는
평생의 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이애나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코치의 지원을 받아
30년 전에 실패한 쿠바에서 플로리다 해협까지
110마일 바다 수영을 완주하겠다는 평생의 꿈을 다시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기에서 그녀의 이름 ‘나이야드’가 중요합니다.
그녀의 이름, 나이야드는 ‘그리스의 물의 요정’을 뜻합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지어준 그 이름을 굳게 믿고 도전에 도전을 이어가다
5번째에 성공하여 미국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나이야드가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동료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못할 도전을 꿈꿨고 그것을 위해 많은 전문가가 함께했습니다.
코치와 배와 바다 전문가가 필요했고 상어 퇴치 전문가와 독 해파리 전문가,
그리고 의료팀 등도 필요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꿈을 돕는 자에게 하늘도 돕는 자들을 보내주십니다.
도움은 은총입니다. 그 은총을 위해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방향입니다. 꿈이고 하늘의 뜻입니다.
하늘의 뜻을 들어주는 자라야 하늘이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운전도 못 하는 아이에게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은총을 주시는 분의
뜻을 따를 결심을 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사명을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제가 ‘돈 쭐’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던 때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월세도 못 내고 있던 차에,
돈이 5천 원밖에 없는 형제에게 무료로 치킨은 내어줬던 치킨집 사장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형이 프랜차이즈 본사에 보낸 편지가 알려지면서 이른바 돈쭐의 주인공이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선행이 알려진 뒤 따뜻한 마음을 악용해 협박하거나 손찌검하는 사람들로 마음고생했습니다.
사장은 그 와중에도 조용한 선행을 계속 이어왔다고 합니다.
돈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사장이 가지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하면서 오히려 내어주는 기쁨에 중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돈을 주는 이유는 단지 그 형제에게 선행을 베푼 것만 보고서는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돈을 주어도 앞으로 계속 그런 선행을 할 뜻을 보고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이에게 나타나시고 은총을 주십니다.
내가 살아갈 방향, 곧 이웃 사랑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은총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자녀 앞에 그릇을 먼저 준비시키지 않고 음식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활 예수와 지상 예수의 동일성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전례에서는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부활사화(24장)의 내용 중 세 번째 단락이 봉독 된다.
24장 마지막에 기록된 예수승천 부분(50-53절)을 뺀다면,
부활에 관한 기록은 이 단락으로 끝난다.
따라서 루카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 부활에 관한 기록은
‘빈 무덤 확인“(1-12), ’엠마오 제자들의 부활 체험‘(13-35),
그리고 오늘 복음이 구체적으로 전하는 ’제자들 앞에서의 부활 예수 발현‘(36-49)이 된다.
오늘 복음이 루카가 전하는 마지막 부활 기록이라면,
이 복음을 통해서 루카가 心中에 두고 있는 意圖가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의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믿음이다.
루카는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의 부활 當日에
즉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채 넘어가기 전에,
예수 부활 사건과 부활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믿음을 목적으로
부활 사화를 기록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더 이상 죽은 이들 가운데 있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부활 예수에 대한 믿음은 죽음직전 지상에서의 예수와
죽음 직후 부활한 예수의 同一性에 대한 믿음이다.
하루만에 이 엄청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무리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생각할 거리가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① 새벽녘에 여인들이(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마리아) 들이닥쳐
열한 제자들과 그 동료들에게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고, 시체가 없어졌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여인들은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갈릴래아에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보라.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6-7절)라는 천사의 메시지도 전해 주었다.
물론 사도들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② 베드로는 달랐다. 단숨에 무덤으로 뛰어간 베드로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돌아와서 다른 동료들에게
“주님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시몬) 나타나셨다.”(34절)라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③ 엠마오의 제자들이 歸京하여 자신들의 부활체험을 들려준다.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은 적어도 이런 세 가지 일로 인해 머리가 복잡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그리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면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36절)
예수께서 우선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신다.
그동안 잘 있었느냐는 安否이기도 하겠지만,
이 평화는 복잡한 머릿속의 安寧을 기원하는 말씀이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의심(38절)을 버리고 믿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아울러 단편적인 성서의 지식들을 가지고 복잡해하지 말고
성서의 모든 기록들을 예수님 자신을 향하여 해석함으로써 실마리를 풀라는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자신의 특유한 문체와 문체의 세심함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록에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문체로 표현하였듯이
여기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심한 문체로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아직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 모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거의 반나절을 함께 걸어가시기도 하셨고,
오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의 상처를 만져볼 수 있도록 내어 보여 주신다.
뼈와 살이 있으니 유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까지 잡수셨다.
오늘 복음에 대한 省察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신학적 지식을 얻는다.
그것은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① 예수님의 부활은 靈적으로만 부활이 아니라 영과 육신의 부활이다.
②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시다.
즉, 지상 예수와 부활 예수는 동일한 분이시다.
③ 성서의 모든 기록(이미 기록된 구약성서, 앞으로 기록될 신약성서)을
해석하는 기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④ 예루살렘에서의 구체적인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향한 보편적 구원 사건이 될 것이다.
⑤ 여기에 證人인 사도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물론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현 캐트린 수녀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루카 24,44)
여전히
무섭고 두렵다.
내내 의문스럽고 깨닫지 못한다.
조금 놀랍기는 하다.
그토록 들었고 보았고 함께 했었는데...
다시 시작하자.
주님께서 나를 증인으로 세우셨으니
충분하다.
넘친다.
이제 시작이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