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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김훈의 칼의노래를 읽고
이순신의 여자 여진에 대한 글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제 유현덕님과 달항아리님의 글을 보고
오래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댓글을 달았는데
궁금하여 관련자료를 찾아 보았다
그시절 관기와 계집종은 사람이 아니고 관가에 귀속된 물건으로
여겨졌던 시절이라 장군이 진중에서 官妓를 품었다 해도 죄는 아니었을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장군에 대한 생각이 무참히 깨지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도 역시 양반가의 남자였구나 생각했었다
아래글에 칼의 노래 원문과 난중일기중 官妓 관련글
그리고 이순신연구가의 반론을 실어본다
官妓에 관련된 글과 반론을 모두 읽어봐도
아리까리한 느낌은 남는다
사실이라 해도 당시 일종의 권리였고 장군이
우리 역사에 기여한 위대함은
사라지지않는다
그날 밤, 나는 두 번째로 여진을 품었다.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다. 그 여자는 쉽게 수줍음에서 벗어났다.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 냄새가 퍼져나왔다. 그 여자의 입 속은 달았고, 그 여자의 몸 속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에는 다급한 갈증이 섞여 있었다. 새벽에 나는 품 속의 여진에게 물었다. 밝는 날 어디로 가겠느냐 ------.
나의 실수였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 그 여자의 목소리는 진실로 베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부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여자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담벽에 걸린 칼에 달빛이 비치었다.
칼날의 숫돌 자국 속에서 달빛이 어른거렸다.
그 여자의 머리 속에서 먼지와 햇볕의 냄새가 났다. 나는 더욱 끌어안았다. 그 여자는 몸을 .작게 웅크리고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여자의 작은 손이 내 등판의 식은땀을 씻어내렸다.
그 여자의 빗장뼈 밑에서 오른쪽 젖무덤까지, 굵은 상처 자국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등에도 아문 지 오랜 상처 자국이 있었다.
나는 상처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달이 구름을 빠져나오면서 다시 칼날을 비추었다. 달은 칼의 숫돌 무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칼빛이 뽀얗게 살아났다.
칼은 인광처럼 차가워 보였다. 가늘고 긴 목이 내 품속에서 떨리면서, 그 여자는 다시 말했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 여자의 신음은 낮고도 애절했다. 나는 그 여자를 안듯이 그 여자를 베어주고 싶었다.
나는 내 몸을 그 여자의 몸 속으로 밀어넣듯이 그렇게 칼날을 여자의 몸 속으로 밀어넣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 여자를 안는 힘으로 세상의 적을 맞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몸을 떨었다.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무인이 아니었다. 아침 숲에서 새 떼들이 깨어나 지껄였다. 아침에 나는 그 여자의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나는 다시 바다 쪽으로 나아갔다. 내가 먼저 떠났다. 나는 여진의 삶의 궤적을 알지 못했다. 함평에서도 나는 여진의 내력을
현감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김훈,(칼의 노래)39~40쪽
2월 19일 [양력 4월 1일]<경술>
맑다.
순찰하러 떠나 백야곶(여천군 화양면 백야도)의 감독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權俊)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렸다. 기생도 와서 종일 같이 놀았다.
비가 온 뒤라 산의 꽃이 활짝 피어 경치가 멋져 형언키 어렵다.
3월 9일 [양력 4월 6일]<병자>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 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임자>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밤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을사>
바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 (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정미>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무신>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기유>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 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임신>
맑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 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 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해․면․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한대 (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명과 잤다.
--난중일기 --
'칼의 노래' 여진은 실존 인물 … 동침 기록은 없어 / 일러스트=김하경
김훈 소설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여진(女眞)은 실존 인물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소설 속 묘사와는 달리 이순신 장군과 여진이 동침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순신 연구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난중일기’의 용어·인명 400여 곳을 고증해 21일 출간한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도서출판 여해)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노 소장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된 1602년 해남 윤씨 집안의 분재기(分財記·가족이나 친척에게 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에서 ‘비(婢·여자 종) 여진(女眞)’이라는 이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가문의 사비(私婢)였던 여진은 전란 중에 죽었다는 소설 속 설정과는 달리 임진왜란 종전 4년 뒤에도 생존해 있었으며, 모두 11남매를 낳았다고 기록됐다.
이 여진이 난중일기 속 여진이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난중일기’에 기록된 노비의 이름은 여진을 제외하고 옥이(玉伊), 옥지(玉只), 갓동, 덕금(德今), 한대(漢代), 춘화(春花) 등 모두 6명인데, 이 6명의 이름이 모두 해남 윤씨 분재기에 그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1577년 해남 윤씨 집안에서 이순신의 둘째 형 이요신의 전답을 매입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지역의 유력자였던 이 가문에서 인연이 있던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노비 인력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진은 ‘난중일기’ 1596년(병신년) 9월 12·14·15일에 세 차례 기록됐지만 인명인지 종족 이름인 여진족인지 불분명했다. 김훈은 지난해 본지 통화에서 “‘난중일기'의 해당 부분을 읽고 여진이 사대부 여인은 아닌 것으로 보아, 천한 신분의 여성으로 설정해 도입부에 등장시켰다”고 말했다.
당시 이순신은 전라도 무창(현 전북 고창)에 있었고, 14·15일 일기에서 여진이라는 글자 뒤에 각각 스물 입(卄)과 서른 삽(卅)인 것처럼 보이는 글자를 썼다. 일각에선 이것이 ‘성관계 횟수’였다고 봤다. 또 “여진은 여진족을 말한 것으로, 곡식을 구하러 20~30명이 전라도까지 내려왔다는 기록”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그러나 노 소장이 고문서 전문가인 하영휘 전 성균관대 교수와 함께 살펴본 결과, ‘입’ ‘삽’으로 보이는 글자는 ‘함께 공(共)’자의 변형된 초서체로 판독됐다. 노 소장은 “이 글자는 ‘난중일기’에 72번 나오는데, 모두 일상적인 만남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기일 뿐”이라고 했다. 1596년 6월 24일에는 ‘경상수사(원균)도 와서 함께했다[共]’고 기록했다. 만약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의미라면 가까이 했다는 뜻으로 ‘근(近)’자를 썼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노 소장은 또 ‘난중일기’ 정유년에 등장하는 ‘독송사(讀宋史)’란 글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이순신 장군이 쓴 글이 아니라 명나라 학자 구준(丘濬·1420~1495)의 저작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불쌍한 사람' 이순신
왜란 당시 이순신의 좌수영 근처에 이순신의 모친 초계 변씨, 여수에 부인 상주 방씨가 피난을 와 있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친인척과 집안 노비의 왕래 사례도 자주 나온다. 아들들은 물론 동생 우신, 조카들, 이순신 집안의 많은 노비가 등장한다. 일기 속의 빈도와 그들이 왕래하는 곳을 살펴보면 이순신의 가족들은 대부분 여수 고음천에 피난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95년 5월 8일 "춘세가 불을 내 집 10여 채가 탔지만, 어머니가 계신 집까지는 붙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16일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평안하시나 아내는 불난 뒤 마음이 많이 상해 천식이 더 심해졌다고 했다" 등의 기록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1596년 10월 11일은 이순신이 어머니를 뵙고 한산도로 돌아간 날이다. 그날 일기에는 "삼경말(三更末, 밤 12시 30분쯤)에 뒷방(後房)으로 갔다가 사경두(四更頭, 밤 1시쯤)에 마루방(樓房)으로 돌아왔다. 오시(午時, 낮 12시)에 어머니께 떠난다는 인사를 올렸다"고 썼다. 이 일기에는 명시적으로 상주 방씨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조선시대 남편과 아내의 거주 장소를 반영한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남편과 아내는 사랑채와 안채에서 각각 지내지만, 밤에 남편이 안채로 들어가 아내를 만나고 새벽녘에 다시 사랑채로 돌아오는 관습 때문이다. 이날 일기의 뒷방은 상주 방씨가 기거하던 안채이고, 마루방은 이순신이나 다른 가족 남성들이 거주하던 사랑채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엔 '종년을 간통하는 것은 누운 소 타기보다 쉽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양반 주인의 힘이 막강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 어머니와 아내가 인근에 머물고 있었다. 자식과 조카도 수시로 왕래했다. 군사와 백성들이 늘 리더 이순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이항복의 기록처럼 책임감으로 전쟁터에서 심신이 지극히 피로한 상태였다. 스스로도 젊었을 때부터 여색을 절제하려 했다. 그런 그가 함부로 다른 여인과 동침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난중일기 속 이순신은 그야말로 전쟁의 승리, 그리고 군사와 백성이 먹고사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삶을 글자 몇 개로 조각내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후대가 할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첫댓글 세종대왕이 성병으로 죽었다는 글을 읽었읉 때의
작은 충격이 되살아 나네요.
위대한 업적이 이러한 일로 흠집이야 나겠습니까
흔히 말하는 밤의 분출이 있어야
낮의 활동에 힘이 난다는(?) 항변을 믿으면
것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몽연님 반갑습니다
세종대왕 실록을 보면
어린시녀가 대왕에게 물을 바치려다
긴장해서 물을 엎질렀는데 무엄하다고 사사했다고 합니다
당시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 가냘프고 어린 여성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경우도 많았을겁니다
장군도 군기를 어긴사람은 가차없이 목을 베어 죽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시절에는 어쩔수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위대한 이순신장군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지만
그도 그럴것이 수많은
남자중 한사람이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역사는 흐른다~~~~
아침에 묵직한 글 입니다
좋은하루~
아침얘기로는 조금 무거운 주제이지요
당시에는 고을마다 관기가 배정되있어 원님들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고 합니다
장군님도 당시 제도하에 그랬을걸라 이해되며
그래도 전쟁터에서는 공과사를 분명히 하셨다 합니다
칼라풀님도 무더운 화요일 시원하게 보내시기를 !!
삶의방의
글방다운 주제들로 카베메서의
이런내용들은 눈이 행복합니다
김훈작가의 칼의노래 이순신장군
이야기글등 또다른 측면에서 느끼고 갑니다
지인 운영자님 감사합니다
칼의노래는 한자로 아주 간결하게 기록된 난중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서 썼을걸 봅니다
장군님도 전쟁터에서의 긴장감과 외로움을
그렇게 달래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조금만 검색해도 쉽게 자료가 나와있네요
이순신은 호색과 거리를 둔 분으로 처2, 첩1명 외에 여색을 즐기지않는 분으로 적혀있네요. 거기에 소설가 김훈은 답을 피하셨다고 나오고요
조선이 일본을 침략한게 아니라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고 약탈하기위해 호시탐탐 술수를 부린 시기
통신장비도 기상청도 무전기도 없는시절
초능력에 가까운 집중력 없이 적들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1분 1초 예외없이 감지하고 전술을 펼쳐내는 일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
하지만 소설로서의 칼의노래도 흥미롭긴 합니다
그산님 잘 읽었습니다
드가님 감사합니다
장군은 군기를 엄정하게 집행한 분이라
본인의 사생활도 엄격하게 하셨다는 기록도 많습니다
난중일기가 한문으로 간결하게 쓰였기에
해석과정에서 오류도 있을수 있다고 봅니다
긴 글 읽고 갑니다.
박작가님도 고향이 천안이라 인근 아산에서 성장하신
이순신장군에 대하여 많이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우와~~ 그산님의 이 포스팅에서 학구적이고 성실하신 그산님의 면모가 그대로 보여서 감탄합니다! ^^
이래서 제가 그산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역사적으로 그 궤적이 뚜렷한 인물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는 필연적으로 고증의 문제와 더 나아간 경우엔 역사 왜곡의 시비가 따라오지요.
그런데 창작물이란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니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한 단어로 합친 팩션(faction)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왔구요.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에서는 전편에 걸쳐 전쟁터의 광기와 짙은 허무가 배어나옵니다.
충무공께서 임진왜란 때에 베어버린 왜적의 숫자 못지 않게 군율을 잡기 위해 베어버린 조선 군졸의 숫자도 엄청났다고 하는데, 이렇듯 피아를 막론한 살육이 일상화된 현장에서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숫적 열세에 몰린 아군을 이끌고 나가는 인간 이순신이 느끼는 공포와 허무는 상상을 초월하게 심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그 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느끼는 그 공포와 긴장과 허무를, 김훈 작가는 언급하신 여진을 비롯한 여성들과의 잠자리를 통해 표현했다고, 저는 그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어요.
소설 속에서 여진이 충무공의 품 속에서,
날이 밝으면 자신을 베어달라고 중얼대는 장면이 참 충격적이었는데, 그 대목에서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허무가 잘 드러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아무튼 칼의 노래 속의 이러한 장치로 인해 김훈 작가는 고증 오류는 물론 여성 비하로 적지 않은 비난을 받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절제되고 스타일리쉬한 문체와 높은 소설적 완성도로 인해서 칼의 노래는 큰 성공을 거둔 것 같아요.
김훈 작가의 또 다른 걸작인 남한산성에서도 저는 작가의 짙은 허무를 읽었습니다.
남한산성 도입부에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길을 안내한 뱃사공을, 혹여 적군에게도 그 길을 알려줄까봐 베어버리거든요.
도입부에서부터 서늘..
하지만 그 사공의 어린 딸을 나중에 잘 거두어주는 것에서 읽는 저를 안도하게도 해주었지요.^^
그산님의 좋은 글 읽고 아침에 댓글이 길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평안한 하루 되시어요. ^^
달항아리님 감사합니다
위에 인용한 난중일기를 보더라도 충무공은 진쟁이 없을때
많은 여인들과 관계한듯한 글을 남겼습니다
해석상에 다른의견이 많지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당시 전쟁터의 수장인 장군에게
부여된 권리였고 그로인해 전쟁수행이나 업무에 지장이 됐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난중일기엔 원균이 기생과 술을 먹으며 뱃놀이했다고 질타하는 기록도 있는데 장군은
공사를 엄하게 구분하신것 같습니다
@달항아리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기생의 이름중에 여진이 여러번 나오는데
한자로 간결하게 기록했기에 같이 잔것은 아니라는 해석도 나옵니다
진실은 그분만이 아실것이고 사실이든 아니든
나라의 운명이 촌각에 달린 전투를 앞두고
장군이 그렇게라도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할수 있었다면
작가의 상상력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달항아리님의 과찬의 말씀과 격려의 댓글 감사드리며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잘보내시기 바랍니다 !
햐~ 글 쓴 사람에게 힘이 나게 하는 멋진 댓글입니다.
제가 뒷줄에 있는 사람이나 구석에 있는 사람에게 더 눈길을 주는 사람이어서일까요. 정성 가득한 이런 댓글 보면 그냥 못 지나가지요.^^
얼마전 돌아가신 김민기 선생은 당신의 천재적 재능을 앞에서 발휘하기보다 뒤에서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한 분었기에 저는 존경했습니다.
그산님의 본문도 좋은데 달항님의 댓글로 인해 더 빛이 나니 참 좋습니다.ㅎ
@유현덕 맞습니다
달항아리님은 저뿐아니라 다른 모든분들의 글에 정성가득한 댓글을 다시는 분입니다
김민기님도 보이지 않는곳에서 조용히 음악과 연극 한길을 파고간 훌륭한 분이시죠
@유현덕 에구 현덕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어제 밤에 알라딘에 주문한 허송세월이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읽으며 더위를 잊어볼게요. ^^
아이구 요 며칠 새에 삶의 방이 독서로 풍성해졌습니다
반가우이 ~ 하면 손을 맞잡고 싶습니다
8월 초 아름 문학상이 시작됩니다 현덕님과
댓글 다신 여러분들 모두 동참해주시길 이자리를 빌어 홍보겸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
운선작가님 감사합니다
삶방에 좋은 글을 많이 올려주시는 유현덕님과 달항아리님 두분의 글을 보고
이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글에 댓글 올려주신 분들 모두 원문보다 훨씬 빛나는 댓글을 달아주셨고
많은 분들이 아름문학상에 응모하셔서 아름다운 5060을 풍성하게 해주시길
기대합니다
인기의 척도라는 조회수와 댓글 갯수에 신경 쓰지 않고 묵묵하게 게시물을 올리는 그산님이 저는 참 좋습니다.
다소 긴 글을 읽느라 황금같은 제 점심 시간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덕분에 공부가 되었으니 오늘은 디저트가 따로 없네요.
저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더 신뢰합니다. 말 그대로 하루 일과를 보내고 당신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솔직하게 기록한 일기잖아요.
영웅에 앞서 그도 인간이고 생사를 다투는 전쟁터에서 통솔하느라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고뇌가 얼마나 깊었을까요. 저는 이순신의 이런 밤을 이해하고 여전히 그가 영웅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ㅎ
유현덕님 감사합니다
저는 글을 재미있게 쓰지 못하고 여행기나 살면서 느낀 이야기를
그냥 담담하게 올리고 있는데 좋게 보셨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윗글은 예전에 읽은 칼의노래와 난중일기의 기억을
되살려 관련자료를 검색해서 올린글에 불과합니다
부족한 제글을 보시느라 귀중한 휴식시간까지 소진하셨다니 미안한 마음과 고마움 마음이 듭니다.
이순신장군님은 우리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로 생애자체가 감동의 연속입니다
요즘 유현덕님의 좋은글이 연속 올라와 삶방이 풍성해졌고
앞으로도 계속 올려주시길 기대합니다 !
이순신
덕분에 독서하게 되네요
잼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둥근해님 감사합니다
난중일기는 장군께서 전란중에 쓰신 일기로
역경을 이겨내시는 강한 정신력과 애환을 느낄수 있습니다
거기에 김훈작가님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칼의 노래란
좋은 글을 우리가 볼수 있게 된것 같습니다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다소 신선한 충격도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님을 존경합니다.
리디아님 감사합니다
우리국민중 가장 많은 분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이순신장군이라 합니다
전란중에 겪으신 일을 꼼꼼하게 남기셔서
오늘 우리가 그분의 위대한 업적과
인간적 풍모를 함께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소설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와 인물의 내면 세계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작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논픽션위에 버무려진 픽션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난중일기에 잤다고 나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잔 것이 맞을 겁니다. 이게 고결한 성품의 장군의 인품을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비온뒤 선비님 대댓글입니다.
죄송해용
유튜브에 자료가 있어 올려봅니다
https://youtu.be/n0zfdtbIzro?si=-SMIdhlMYbkhEDU9
PLAY
선배님 반갑습니다
제가 20대초반에 읽은 난중일기의 내용은 위의 인용된 내용처럼 간략했고
김훈작가처럼 많은 분들이 그번역본을 참고로 글을 쓰거나 인용한걸로 생각됩니다
그아래 반론처럼 한문을 오역한거일수 도 있고 사실일수도 있습니다
설사 그렇다할지라도 지금의 잣대로 당시를 재단할수 없다고 봅니다
어찌됐든간에 그분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강산을 지키신 위대한 분이라 봅니다
@드가 드가님 감사합니다
올리신 동영상 잘봤습니다
내용을 보면 위에 노승석여해연구소장과 박종평 이순신연구가와
거의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는 한문으로 쓰여졌기에
국역본이 오역할수도 있고 많은 분들이 국역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반론을 제기하신분들이 맞을수도 있으며 진실은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규명되리라 봅니다
@드가 조선시대 관비나 관기가 성적 착취의 대상이었다고 잘못 생각한 데서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니 관비나 관기는 관청에 소속된 신분이 낮은 기능인내지 예능인이지
수청을 들거나 성적착쉬의 대상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장군이 관비와 어찌했다고 결론짓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은 귀가로 댓글이 늦었습니다.
칼의 노래 ..
영웅에게 여인은 빠질 수 없죠.
"여진"과
동침을 했던 안 했던..
충무공이 후대에 남긴 업적은 빛이 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중 변질,외곡되어 잘 못 전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죠.
예를 들어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함께 낙화암에서 뛰어 내렸다던지..
환관과 내시가 같은 의미라던지..하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난중일기에는 여진의 이름이 여러번 나오는데
해석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실은 장군만 알고 계시겠지요
어쨌든 장군께서 초인적인 전쟁수행으로
이나라를 전쟁에서 구출한것은 역사적사실이라 봅니다
이순신장군 !!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아야 할
위대한 분 만약 이순진장군의
투철한 역사관 민족관 나라를
전쟁에서 구해야한다는 신념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말
을 쓰고 있을찌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장군님은 우리민족이 제일 존경하는 분입니다
수많은 모함과 역경을 이겨내시고
뛰어난 작전으로 일본함대를 격파하여
이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위대한 분입니다
@그산 칼의 노래를 감명깊게
앍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