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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 개관
발칸 반도의 남쪽 끝, 그곳에는 그 누구보다도 오래된 나라가 하나 있다. 이 나라는 마치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않는 듯, 혹은 신의 가호를 받는 듯 굳건히 버티며 수많은 세력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봐 왔다. 이 나라는 수많은 시대, 종교, 민족들이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과거와의 연속성을 잃지 않았다. 1천 년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에 세워져 암흑 시대와 중세 시대를 모두 겪어온 "로마인들의 제국"은 이제 유럽 르네상스의 태동기에 살짝 발을 걸치려 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 제국의 강역은 북으로는 로도페 산맥, 남으로는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과 마주보는 에게 해 해안에 이르며 동으로는 소아시아, 서로는 아드리아 해 해안에 이른다. 다만 애석하게도 이 땅들은 예전과 같이 통합되어 있지 않다. 라틴인들이 4차 십자군 원정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고 "로마니아의 제국"을 세웠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수많은 세력들이 영토를 산산이 쪼개 놓고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예컨대 성채, 탑, 요새로 가득찬 모레아 반도의 산악지대에서는 로마인들, 앙주 가문 세력들, 베네치아인들, 프랑크인들, 카탈루냐인들이 누구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버티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상황이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로마인들이 점점 점령지를 넓혀 가면서, 150년 전에 잃어버린 땅들을 모두 수복하고 통합된 로마 제국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상황이 크게 변했다. 현재 제국은 사회, 종교, 정부의 전 영역에 걸친 심각한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 틈을 타 이웃 나라들도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달려들고 있다.
역사적 배경
1204년 콘스탄티누폴리스 약탈 이래로 로마 제국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1261년 제국군이 수도를 탈환한 뒤 약 1세기 동안 대부분의 유럽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14세기 초 제국 국력의 핵심이었던 소아시아는 버려지고 빼앗겼다. 우리가 다룰 시대에 소아시아에서 제국이 가진 것은 몇 개의 해안 도시 뿐이다. 나머지는 수많은 튀르크인 베이와 에미르들이 차지했고, 로마인들은 도시를 하나하나 빼앗길 때마다 인적자원을 잃는 동시에 수많은 이주민 떼거리를 떠안아야 했다.
유럽에서는 그나마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제국의 국내 질서는 귀족들 사이의 내분, 에노티키(Enotikoi/로마 교황과의 통합을 바라는 분파)와 안쎄노티키(Anthenotikoi/그 반대파)의 대립, 상류 계급과 하류 계급의 갈등, 'Esychasmos'와 같은 종교적인 문제를 둘러싼 수도사들 사이의 분쟁으로 휘청거렸다. 우리가 다룰 시대의 "바실리아 톤 로메온"에는 이처럼 국가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이 산적해 있는 상태이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1341년에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45세의 나이로 서거했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는 너무 어렸다. 선제의 친우이자 제국군 총사령관(Megas Domestikos)이었으며, 선제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한사코 공동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거부했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어린 황제의 섭정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몇 달 후, 칸타쿠지노스를 믿지 못했던 황태후 사보이의 안나, 세계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총리(Mesazon) 겸 해군 총사령관(Megas Doux)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를 장악했다. 칸타쿠지노스는 가족과 몇몇 귀족들과 함께 디디모티콘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는 이에 반발하여 칸타쿠지노스를 공동황제로 추대하고, 새로 편성된 섭정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섭정 정부 측의 군대가 우세하여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하고, 총사령관의 거점인 디디모티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쎄살로니키의 열심당(Zealots)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어린 황제와 섭정 정부를 지지하는 제국 하층민들로부터 공격당한 많은 귀족들이 칸타쿠지노스 편에 가담했다. 이에 더해 칸타쿠지노스는 헤지카스트 운동의 지도자였던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기 때문에 갈등의 불씨는 종교계에도 튀었다.
칸타쿠지노스는 기존의 동맹군이던 세르비아 왕 스테판 두샨과 불가리아의 짜르가 자신을 배신하고 섭정 정부 측에 붙자 그의 친구인 아이든 공국의 우무르와 오스만 공국의 오르한을 끌어들였다. 동방 세력의 지원을 받은 받아 상황을 반전시킨 칸타쿠지노스는 제국 제 2의 도시 쎄살로니키를 포위하고, 아드리아누폴리스를 포함해 트라키아 각지의 도시를 해방시켰다. 이제 상황은 섭정 정부 측에 불리하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트키아의 몇몇 해안 도시들과 섬들, 그리고 콘스탄티누폴리스 뿐이다. 그러나 칸타쿠지노스와 섭정 정부 중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현재 상황
지중해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제국은 지금까지 수많은 정복자들의 탐나는 목표가 되어 왔다. 제국의 북쪽에는 로마인들의 오랜 적들 중 하나인 불가리아 제국이 있다. 불가리아의 짜르 이반 알렉산더는 상당히 영민한 군주로써, 영토 획득을 위해 칸타쿠지노스와 섭정 정부 어느 쪽과도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북서쪽의 세르비아를 다스리는 교활한 왕 스테판 두샨은 로마 황제가 되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으며, 발칸 지역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거리낌없이 저지를 것이다. 서쪽의 시칠리아를 다스리는 앙주 가문은 그리스 서부 해안에 영지를 가지고 있으며,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수 세기 전에 제국에 벌였던 짓을 재연하고 싶어한다.
남쪽에는 라틴 제국의 잔당들이 펼쳐져 있다. 아케아 공국, 시칠리아의 앙주 가문, 최근 카탈루냐 용병단에게 점령된 아씨네 공국을 포함해 기타 수많은 영주들과 귀족들이 로마 제국의 통합을 방해하고 있다. 에게 해에서는 해양 공화국인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섬들의 귀중한 무역 거점들과 동방 무역로를 독점하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제국이 에게 해 북부에 가진 몇 안 되는 섬 거점들을 빼앗는 데에도 혈안이 되어 있다. 이에 더해 성 요한 기사단도 에게 해의 쟁패에 가세하여, 남쪽의 도데카네스 제도를 점령하고 동방의 이교도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 동방에서는 여러 튀르크 베이들이 지역 권력의 공백을 틈타 독자적인 국가들을 세워 놓고 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오스만, 아이든, 카라만 공국(Principalities; Beyliks)으로서 영토, 군대, 영향력 면에서 다른 공국들을 압도하고 있다. 이들의 확장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면, 정복지가 부족한 그들은 로마인들의 남은 영토를 노리기 시작할 것이다. 소아시아의 해안 도시들, 혹은 그 너머의 섬들이나 유럽 지역까지도.
이 세력들을 성공적으로 상대하려면 반드시 동맹 세력을 구해야 한다. 동유럽의 발라히아 공국과 몰도바 공국은 불가리아의 확장을 경계하고 있으며, 헝가리와 보스니아 역시 세르비아의 성장을 경계하고 있다. 뛰어난 외교관이 있다면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상호 악감정을 이용해 서로 싸우게 만들거나, 튀르크 공국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시칠리아의 만종'의 결과로 벌어진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분리 역시 잘 이용한다면 앙주 세력이 제국 내부의 자기네 영지를 지원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남아 있는 라틴 공국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동맹 세력도 제한될 것이다.
정부와 사회
콘스탄티누폴리스 함락 이후 로마인들의 정부는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수백 년 전 AD 7세기의 암흑시대처럼, 제국의 정부와 관료기구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그 결과 국가는 더욱 군사화되었는데, 정부의 민간 및 사회 담당 부문의 대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위 조직을 포함해 정부 전체를 통괄하는 직책은 총리(메사존 혹은 메사스티키온)였으며 그 아래로 행정, 입법, 사법기구의 장인 메가스 로고쎄티스, 메가스 프로토프로에드로스, 프로타스크레테스가 있었다. 육군성과 해군성(세크레톤 투 스트라티오티쿠 & 세크레톤 투 플리무)은 강력한 상태로 존속되었지만, 반대로 대외 및 재무 부서 상당수는 사라지고 그 책임자들은 의전상 직책으로만 남았다. 그 외에 여전히 기능하는 부서로는 상업 해운을 담당하는 해운성(세크레톤 테스 쌀라세스)이 있었다. 로마 원로원 회의는 이제 황궁에서 열리는데, 원로원 회관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대부분 정부 관리, 심지어 황제의 가까운 친인척들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에서 황제의 의견에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법 영역을 보자면, 1261년에 콘스탄티누폴리스가 수복된 이후 최고 법원(바실리콘 세크레톤)이 새로 세워졌다. 그 외에도 수도와 지역 각지에 지방 법원이나 순회 법원이 있어 사법을 담당했다.
제국은 여러 테마와 케팔라티키아로 분할되어 있으며, "케팔레"라고 불리는 총독이 민정과 군정을 통괄한다. 그러나 그들이 통제하는 범위는 주요 도시에 한정되며 주위의 마을과 영지, 군대는 전혀 다른 체제 아래 있다. 과거의 테마 군제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로마 제국은 새로운 징집 체제를 도입했다. 이제 제국군은 크게 프로니에(Pronoiai)와 알라기아(Allagia)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에 있든 지방에 있든 모든 제국군 병사들은 중앙에 소속되어 있으며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의 지휘를 받는다. 단 황제 직속 근위대는 메가스 프리미케리오스의 지휘를 받으며, 수도 근처나 황궁 내부에 주둔한다. 한편 제국 해군은 지속적으로 쇠퇴했기 때문에, 남은 함선들은 모두 메가스 둑스(Megas Doux)의 지휘 하에 수도 근처에 머무른다.
이 모든 계급들, 직책들, 고급 칭호들은 몇몇 귀족 가문들이 수 세기 동안 독점해 왔다. 여러 추가 요소들이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제국 경영의 권리를 가진 것은 바로 이 귀족들이다. 이 귀족들의 사회 하류 계급에 대한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으며, 오랫동안 자기들 이익에 따라 조세를 착취해 왔다. 그 결과 "대중(hoi polloi)"들은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놓치지 않고 착취자들에 항거했고, 우리가 다룰 시대에서는 하류 계급들이 칸타쿠지노스를 지지하는 귀족들에 대항해 섭정 정부를 지지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주목할 만한 예시가 바로 "쎄살로니키의 열심당(Zealots of Thessalonica)"으로, 그들은 총독과 그 부하들을 완전히 몰아낸 뒤 발칸 지역에 천 년 만에 "민주주의" 체제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교회와 종교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로마 제국 교회는 여전히 전 세계를 아우르는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비록 아시아와 유럽에서 많은 영토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로마 황제가 세속 권위의 수장이듯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세계총대주교는 여전히 전 세계 정교회 신도들의 종교적 수장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정교회 교구들이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203년에는 불가리아의 대주교구가 독립한 뒤 1219년에는 세르비아 교회, 1381년에는 몰도바 교회가 뒤를 이었으며 이들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권위를 명목상으로만 인정했다. 그러나 제국에서 종교 문제는 교회와 국가 모두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였고, 따라서 국가와 교회 모두 질서와 안녕을 지키기 위해 종교 문제에 개입했다. 특히 14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는 "헤지카스트 논쟁"이라는 신학 논쟁에 휘말렸고, 이 논쟁은 기상천외한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vs 플라톤 철학, 유명론 vs 실재론, 수도원 vs 세속 사제단, 라틴 교회 vs 비잔티움 교회, 하류층 vs 귀족들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지지자들 vs 제국 섭정 정부의 구도가 된 것이다.
헤지카즘(그리스어 Ησυχασμός, 정적, 안정, 고요함을 의미하는 Ησυχία에서 유래)은 정교회의 수도사들이 하던 은둔적인 기도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마태복음 6장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한 데서 유래했으며, 감각을 버리고 내면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신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얻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헤지카즘 수행자는 그 정신이 그 마음과 이어진 상태에서(실제로 얼굴을 심장 쪽에 대기도 한다) 마음과 정신으로 함께 예수의 기도를 바친다.("Κύριε Ἰησοῦ Χριστέ, Υἱὲ τοῦ Θεοῦ, ἐλέησόν με τὸν ἁμαρτωλόν;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를 통해 수행자의 의식은 더 이상 내면에서 명멸하는 표상들에 구애받지 않은 채 예수의 기도만을 반복하는 상태에 이른다. 이 경지에 이르는 것이 헤지카즘 수행자의 일생의 목표이며, 이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그는 명상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이 경험은 주로 빛으로 나타나는데 이 빛이란 곧 동방 신학에서 말하는 '창조되지 않은 빛'이며, 다볼 산의 예수 현성용 때 그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빛과 같은 것이다.
이 수도사적 기도법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바로 정교회의 유식자였던 발람으로, 칼라브리아 출신 수도사였던 그는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 구세주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1337년 아토스 산을 방문한 그는 헤지카즘 수행자를 만나 그 기도법에 대해 들었고, 아토스 산의 수도사이자 헤지카즘 운동의 선구자였던 성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쓴 글도 읽었다. 서구 신학 체계에서 훈련받았던 발람은 이 기도법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헤지카즘은 이단이며 불경스러운 것이고, 신의 지식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더 지적이고 명제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헤지카스트 측에서는 새로 쎄살로니키의 대주교가 된 성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직접 나섰다. 그리스 철학에도 해박했던 그는 1340년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열린 세 차례의 종교 회의에서 헤지카즘을 변호했고, 헤지카즘을 옹호하는 저작들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1341년 수도에서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가 친히 주재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발람에게 죄를 묻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고, 발람은 칼라브리아로 돌아간 뒤 나중에 가톨릭 교회의 주교가 되었다. 그 뒤에는 발람의 친구였던 그리고리오스 아킨디노스가 논쟁에 가세했다. 그는 내전에도 관여하고 있었는데, 칸타쿠지노스는 헤지카즘에 우호적이었던 반면 섭정 정부는 적대적이었다. 이와 관련된 종교 회의는 세 차례 더 열렸는데, 그 중 두 번째에서 발람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1351년 새 황제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주재 하의 회의에서 헤지카즘 교리가 정교회의 정통 교리로 채택되었다.
유닛 개관
팔레올로고스 시대의 로마군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외국 군대들과 크게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다. 징병 시스템은 지역 방위군인 카스트레니(Kastrenoi, 그리스어 kastron=성에서 유래), 소규모 자영농과 프로니아 보유자를 모두 포함한 직업군인인 알라기테(Allagitai, 제국 각지에 주둔한 제국군 연대=Allagia에 등록된 병사들), 수도에 주둔한 황실 직속, 혹은 특수부대인 바실리키[안쓰로피](Basilikoi[Anthropoi]=황실 소속[사람])로 나뉘었다. 그 외 다른 분류군으로는 신트로피에(Syntrophiai) 혹은 이테리에(Hetaireiai)로 불린 용병들, 혹은 동맹국이 로마군에 파견한 보조 병력들이 있었다.
로마군의 이처럼 복잡해진 구성은 그 자체로는 나쁜 특징이 아니었다. 프로니아 소유자에서 용병, 소농 군인, 민병대, 황실 근위대에 이르는 다양한 병종들은 저마다 장점이 있었고, 이들이 한데 통합됨으로써 서로 다른 병종들의 고유한 약점을 메꿔 주는 효과가 있었다. 프로니아 소유 병사들은 소농 병사들과 달리 거의 중기병이었다. 이들은 현금을 받는 용병들과 달리 국가 재정에 직접적인 부담이 적었으며, 국가가 직접 경영하기 어려운 곳을 프로니아로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프로니아로 할당받은 지역들은 대개 외딴 곳이 많았기 때문에 급히 소집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으며, 자기 지역에서 나오는 수익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오래 걸리거나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원정에도 참여하기 어려웠다. 반대로 용병들은 보수가 제대로 나오는 한 끝까지 원정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가장 유지비가 비싼 부류였기 때문에 국고가 모자라 동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소농 병사들은 가격대 성능비가 가장 뛰어났으며, 대개 해당 지역의 토박이가 되어 살았으므로 프로니아 소유자나 용병들에 비해 변경 지역을 방비하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잘해봐야 경기병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낙후되고 배타적인 이방인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규율이 엄정하다거나 신뢰할 만한 병사들은 아니었다. 한편 황실 직속 부대는 야전군의 핵심을 담당할 수 있는 병력들이었지만, 숫자가 너무 적어서 다른 병종들의 지원 없이 중요한 결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파수꾼, 농민, 징집병, 경비병 따위로 구성된 지방 민병대는 군대의 머릿수를 늘리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막상 전투에서 뭔가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카스트레니 Kastrenoi
사료들에 따르면 도시 성곽과 성채 수비, 그리고 주변 지역을 경비하는 일은 민간인들의 의무였는데, 이 의무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짜코니케 필락시스(짜코니아 경비대), 필라케스 폴리테(시민 경비대), 비글레(라틴어 Vigiles에서 유래= 감시자) 등의 용어가 언급된다. 이 중 짜코네스 혹은 차코네스라는 이름은 10세기 콘스탄티노스 8세 포르피로예니토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 가난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병사들이 모여 구성된 요새 수비대들로 나온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용어는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펠로폰네소스 지역(특히 라코니아=차코니아)에서 데려와 해병대 겸 황실 수비대로 운용했던 경무장 군대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1. 아콘티스테 Ακοντισταί
다른 이름 : 파리키, 프실리(Paroikoi, Psiloi)
아콘티스테는 지방 권력자의 명령 때문에 싸우러 나온 가난뱅이들로, 군사 훈련이나 규율과는 한참 거리가 먼 농민에 불과하다. 아마도 지방에서 징집된 군대의 대다수 병력은 이런 자들일 것이다. 이들의 주 무기는 사냥용 투창이지만 만약을 위해 도끼나 단도, 작은 나무 방패 같은 것도 가지고 있다. 투창은 기병대에게 비교적 효과적이지만 이들의 근접전 능력은 매우 취약하다.
2. 프실리 Ψιλοί
프실리는 전시에 향토 방위를 위해 징병되거나 끌려온 농민 궁병대이다. 대개 작은 활과 단도, 짧은 칼 따위로 무장했는데, 이들이 쓰는 활은 전쟁에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냥용으로 만든 것이라 장력이 약하다. 이 농민들은 사냥을 위해 활을 다루기는 하지만, 군대에서 쓰는 합성궁은 거의 쏴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따라서 뛰어난 궁병대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다.
3. 비글레 페지 Βίγλαι Πεζοί
다른 이름 : 필라케스, 짜코네스, 필라케스 폴리테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로마인 마을들에서 마을 경비대 복무는 주민 거의 모두가 돌아가면서 참여하는 일이다. 또 주변에 성(Kastron)이 있다면, 그 성의 보호 범위 안에 드는 지역 주민들은 성의 방위 임무에 참여해야 한다. 도시에서는 '아포비글리시스'를 부과받은 시민들이 성문에서 보초를 서거나 야경꾼 역할을 하며, 성채에서 야간 감시, 불 관리, 관리들의 명령 집행 등을 담당한다. 이런 의무들은 교대제로 이루어지며, 담당자들은 관청에서 지급한 창과 가벼운 방패로 무장합니다. 갑옷은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이 두꺼운 누비옷을 사 입는 정도입니다.
4. 비글레 이피스 Βίγλαι Ιππείς
다른 이름 : 필라케스, 짜코네스, 필라케스 폴리테
성 밖의 감시초소나 감시탑 등을 담당하고 주변 지역에 나타날지 모르는 도적떼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말 탄 민병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1342년 조그라푸의 수도원 앞으로 된 가짜 금인이나 1228년 나브팍토스의 주교 요안니스 아포카브코스 등등 여러 사료에서 말 탄 경비병(viglai)이 언급되며, 요새화된 거점 어느 곳에든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 말을 탔다는 것을 제외하면 무장은 일반 경비병들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타고 다니던 말이 크고 힘센 군마나 종마일 리는 없고, 아마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짐말이었을 것입니다.
5. 차코네스 Τσάκωνες
다른 이름 : 필라케스, 카스트로필라케스
사회적으로 좀더 중요하고 인구도 많은 성에는 임시직 징집병들 대신 독자적인 전문 경비 부대가 주둔합니다. 이 차코네스(Tsakones, 수도의 해병대/황궁 경비대와 구분하기 위해 Tzakones 대신 Tsakones라고 씀; 번역시에는 임의로 짜코네스/차코네스로 씀) 부대는 시민들이 낸 "비글리아티콘"이라는 세금에서 봉급을 받으며, 금속제 갑옷을 살 정도로 여유가 있습니다. 칼로 무장한 이들은 지역 민병대의 핵심 중추가 되며, 지역 관리의 호위대로 일하기도 합니다.
뒷부분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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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하세요.
이런 변역 대단하시고 감사드립니다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