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나 피곤하던지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동쪽과 남쪽으로 창이 난 방을 얻게 되어 해를 따라 금방 일어났다.
시계도 필요 없고 해만 뜨면 무조건 따라서 일어나는 사람이다 보니,
좀 더 뭉게고 누워 있으려고 해도 머리가 아파서 못 누워 있는다.
잠꾸러기 유진이 일어나자면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된다.
TV를 켜자니 속 내다보이고, 책을 좀 보자니 글이 안 보이고,
에구, 무슨 잠을 그리도 많이 잘까? 눈이 부시는데도 잠이 올까?
아침부터 싸우지 않으려고 혼자서 궁시렁궁시렁, 애가 터진다.
(통영의 명물 꿀빵. 6개 한 상자에 6,000원)
내일 산에 가서 먹을 거라며 사 온 통영의 명물 꿀빵,
원래 한 상자에 6개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2개가 없어졌다.
아마도 내가 잠든 사이 유진이란 사람이 2개를 먹은 모양이다.
통영의 명물이라고 하는데 흔적이라도 남겨야 될 것 같아서,
이불 위에다 얹어 놓고 일단 사진부터 한 장 찍어 놓고,
자는 사람 내려다보면서 옴삭옴삭 나도 2개를 먹었다.
남은 건 2개, 일어나서 보더니 빵이 왜 2개 밖에 없느냐고 한다.
"우리는 동급, 혼자만 입이가?" "내가 2개먹었다 왜?" 하고 나섰더니,
무슨 여자가 어떻게 남자한테 한 마디도 안지고 같이 덤비느냐며,
졌단다. 갋지 못할 사람이란다. 아더메치유란다.
아더메치유: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하다.
(복지리. 11,000원+10,000원=22,000원)
목도 까끌까끌하고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아 밥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일단 산속에 들어가면 밥 구경은 못할 것 같아서 억지로 끌어넣었다.
그런데 먹어보니 복어국 너무 시원하더라.
(관음사 관음전)
복지리 백반으로 아침을 먹고 택시를 타고 미륵산 입구까지 왔다.
어제보다는 좀 나은데 그래도 안개가 끼어 있어 하늘이 좀 흐리다.
날씨가 흐려 몸은 무겁지만 몸살이 없으니 그래도 살만하다.
초반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산으로, 산으로 올라간다.
(우와 키 크다. 8층 석탑)
산 이름이 미륵산인데 어찌 길목에 있는 절을 그냥 지나치겠느냐며,
절에 관심도 없는 사람을 끌고 들어가 "저 왔습니다." 하고 인사올리고,
별 신기하지도 않은 탑이며 범종, 단청 등을 살펴보고 나왔다.
(길도 많아라)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힘 안들이고 금방 올라가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는 케이블카를 한번 타 보려고 왔는데,
아직은 두 다리가 성하니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에게 양보하기로 하고,
습도에 거친 숨을 헐떡이며 둘이서 말없이 터벅터벅 앞만 보고 올라간다.
(꽃비가 내렸다)
한산도 망산 만큼 바닥이 폭신폭신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좋은 길이다.
문제는 습도, 습도 때문에 길도 미끄럽고 호흡도 곤란하여 좀 힘들다.
대신에 숲은 깨끗이 씻기어 색깔이 매우 선명하고 맑아서 참 좋다.
(석문)
(미륵산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다 본 경치)
(한국 사람은 돌탑 쌓는 데는 선수)
(바위 꼭대기에 날름, 꼭 분재같다)
(열매 까먹으면서 나무 이름까지 까먹었다)
산의 높이에 관계없이 오르막만 오르면 무조건 숨이 끊어질듯 쌕쌕,
한발 떼고 쉬고 한발 떼고 쉬고, 어느 천년에 다 올라갈지 모르겠다.
앞에 가는 무정한 사람은 빨리 따라오지 않는다고 "뭐 하냐"며 재촉하고,
몸은 무거워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고, 에구 같이 다니기 힘들어라.
그렇다고 발갛게 익은 저 열매를 보고 그냥은 못 가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열매를 한 줌 따서 먹었다.
앗! 퉤퉤, 왜 이렇게 떫어? 생기기는 맛있게 생겨가지고 말이야.
열매를 핑계로 앞에 가는 무정한 사람 불러 세워 거리를 좀 좁혔다.
(꼭대기에 산불감시초소)
(미륵산 461m)
미끄러운 길 올라오느라 많이 헐떡거렸는데 올라오니 또 금방이다.
언제 그런 힘든 일이 있었느냐는 듯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깔깔깔,
정상은 여태껏 있었던 괴롭고 힘들었던 일들을 말끔히 잊게 해준다.
오로지 즐겁고 행복하고 기분 좋은 일들만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어제 한산도의 망산은 정상에서 멀리 보이는 섬들이 아름다웠는데,
오늘 통영 미륵산은 바로 내가 선 이 자리, 정상이 아름다운 산이다.
어제는 한산도 망산에서 오늘은 통영 미륵산에서 마음껏 웃어본다.
(가스가 끼어 희미하지만 그래도 좋다)
(구르다 멈춘 바위에 붙어 사는 저 잡초들)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을 위하여 케이블카에서 정상까지 목재데크)
(용화사인가? 저기도 명당이다)
(좋다. 좋다는 말 외 할말이 없다)
(박경리 묘소 전망대)
그러고 보니 통영에는 유명한 예술가들이 참 많다.
소설가, 시인, 작곡가, 음악가, 화가 등,
여기서 보면 박경리묘소가 보인다고 하는데 내 눈에도 보이겠나,
난 아예 보려고 생각도 하지 않고 향긋한 초록냄새에 코만 킁킁대었다.
(시인 정지용이 통영에 와서 시인 유치환의 안내를 받고 어쩌고 저쩌고...)
미륵산은 정상이 아름다운 산이다.
긴 말은 전하지 못하니 그냥 한번 와 보시라.
와보면 왜 그 아름다움을 전하지 못하는지 알게 되리라.
와서 보고 즐기고 자연과 어울리어 직접 한번 느껴보시라.
(오늘은 내가 머리를 좀 썼다. 무거운 것은 무조건 유진의 배낭으로 슬쩍)
무거워 낑낑대면서도 내 앞에서는 아주 늠름한 척 하나도 무겁지 않단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힘들지 않다 하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이상 없단다.
아무리 아파도 속으로만 아프지 절대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 유진,
뒤에서 쳐다보니 지칠 대로 지쳤건만 "당신이 문제지 나는 괜찮다"고 한다.
(이름을 몰라서 그냥 하얀꽃)
(어제 내린 비로 길이 좀 미끄럽다)
정상에서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마음껏 마시고 이제 하산한다.
경사가 그리 심하지는 않는데 비온 뒤라 길이 미끄러워 조심조심,
있는 병도 골치가 아픈데 다리까지 삐게 되면 큰일이다.
먼눈팔지 말고 앞만 보고 살금살금, 안전이 우선이다.
(이제 가파른 길은 다 내려왔다)
(용화사 보광전)
하산 길, 또 절에 들어와 "저 왔습니다." 인사올리고,
별 흥미도 없고 신기하지도 않은 기와지붕과 불상을 보고 간다.
산에 다니는 사람이 산에 있는 절을 무시하면 안 된다면서.
(늘씬도 하다)
미륵산 산행을 완전히 마친 시간은 오후 1시 50분,
배도 고프고 기운도 떨어지고, 빨리 무엇이든 먹어야 된다.
이때를 놓치고 나면 회복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빨리 밥부터 먹기 위하여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통영 해저터널이 유명하니 가는 길에 거기 들렀다 가자고 한다.
깜깜한 굴속은 왜 또 들어가 난 싫다. 그냥 바로 가자고 했더니,
지금은 별로지만 그 당시에는 유명한 곳이었으니 꼭 보고 가잔다.
내키지 않았지만 또 무엇이라도 있는 줄 알고 가보기로 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통영 해저터널 입구까지 왔다.
내리자마자 성질을 내고 고함을 지르며 잡아먹으려고 한다
이유는, 원하는 곳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왔다는 것이다.
즉, 미륵도에서 통영으로 오는 입구로 와야 되는데,
통영에서 미륵도로 가는 입구로 왔다는 것이다.
유진의 말대로 택시를 타고 왔으면 바로 올 수 있었는데,
내 고집대로 버스를 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륵도에서 해저터널을 걸어 나오면 바로 통영,
통영에서 점심을 먹고 유치환우체통으로 가면 되는데,
고집 센 여자 때문에 모든 일을 망쳤다는 것이다.
그럼 택시를 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말했어야지,
나는 무조건 해저터널입구만 가면 되는 줄 알았잖아?
뭐 이유? 잠자코 따라오면 될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해저터널 입구 버스정류소에서 또 막 싸웠다.
하늘이 울리도록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고 삿대질을 해댔다.
슈퍼에서 물건을 사고 있던 어르신들이 놀라 나와서 쳐다본다.
또 전쟁이 나서 보따리 싸들고 피난이라도 가야 되는 줄 알았단다.
(용문달양)
해저터널 입구.
옛날에는 이 해저터널에 자동차도 다니고, 관광객들도 엄청 많이 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차량통행금지, 찾아오는 관광객도 없고 마을사람들만 간간히 지나다닌다.
(해저터널)
여기서 부터 터널이 시작,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1931년 착공하여 16개월 만에 완공한 동양최초의 바다 밑 터널로 길이 483m.
바다 양쪽을 막고 그 밑을 파서 콘크리트 터널로 만들었다.
(통영과 미륵도를 잇는 해저터널)
땅이든 바다든 굴은 굴, 매쾌한 냄새가 나고 숨이 턱턱 막힐 줄 알았는데,
냄새도 나지 않고 숨도 막히지 않고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다.
울진 석류굴과 제주도 만장굴, 마산과 진해를 잇는 마진터널만 생각하고
냄새나고 숨 막히면 어쩌나 하고 몹시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여유만 있다면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통영과 미륵도를 잇는 해저터널)
거꾸로 왔던 바로 왔던 왔으면 끝까지 걸어보고 가야되는 거 아닌가?
허기를 벨트로 졸라매고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 계속 걸어가고 있으니,
유진이 뒤에서 지켜보고 "어디까지 가 빨리 돌아오지 못해" 하며 고함을 지른다.
참말로 별꼴이야, 남이야 반만 가든지 끝까지 다 가든지 왜 그것까지 간섭해?
(통영과 미륵도를 잇는 해저터널)
괴로운 통영 해저터널, 혼자서 다 걷고 다시 돌아 나오니,
유진, 고함지르고 나니 속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솟는 모양이다.
혼자 고개 푹 숙이고 구부리고 앉아 아이스크림 쫄쫄 빨고 있다.
(시멘트 길을 걸었더니 발바닥에 불이 나서 신발도 벗고)
현재 시간 오후 3시 7분,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다.
해저터널을 보고 중앙동까지 걸어오니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다.
식당 찾고 말고 할 시간이 없다. 지금 빨리 먹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참외 한 봉지 사서 들고 중앙동우체국 화단에서 먹었다.
(하루도 안 빠지고 편지를 부쳤다는 유치환 우체통)
(청마 유치환과 향수)
(싸운다고 점심은 참외와 먹다 남은 계란과 꿀빵으로 대체)
택시를 타야만 되는 미륵산-통영해저터널에서는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도되는 중앙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택시를 타고,
그 일로 서로 내 잘났다. 네 잘났다 하늘이 울리도록 싸우고,
집으로 올 때는 꼴도 보기 싫다며 각자 따로 따로 앉아서 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금방 부산이다.
먹은 것이 시원찮으니 다시 배가 고파서 허덕허덕,
가끔씩 들리는 횟집에 가서 포항물회로 배를 채우고,
오면서 포도 한 송이 사와서 먹으며 오늘의 이야기에 빠졌다.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 잘 갔다 왔다고, 정말 너무 좋았다고.
|
첫댓글 그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는 산이 미륵산이였던가?
그 산 참 좋지? 난 경미랑 같이 가 보고는.. 넘 좋아서.. 한진아빠 데꼬 갔는데..
산도 못 올라가고 케이블카도 못타고.. 그런 사람을 데꼬 임신 7~8개월 때쯤 갔던 것 같다..
케이블카를 왕복으로 끊었는데... 올라갈땐... 하얗게 질려서.. 시체처럼 앉았다가.. 내려올 땐..
자긴 걸어내려가겠다고 해서... 같이 걸어내려왔던 기억...
참 신기하다.. 경미랑 갔을 땐.. 이쁜 산이였단 기억만이 가득했었는데..
그 사람이랑 다녀오곤..케이블카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밖에 기억안나니...ㅋㅋㅋㅋ
난 경미덕에 통영의 웬만한 곳은 둘러본 셈인데...
저 해저터널 기억난다.
대학교때.. 첨 통영갔을 때.. 경미가 통영의 명물이라 데꼬 갔었는데..
난... 바닷속을 걸어가는 건지 알고.. 흥분되서 갔다가...
시멘트 동굴인걸 알곤.. 엄청 실망했었다는..
그래도.. 바다라.. 참 시원하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