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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철학
그 내용을 도식적(圖式的)으로 나타내면, 이론적 입장에서는 방법적 회의(方法的懷疑)에 의하여 얻은 코기토(cogito)의 명증적 의식(明證的意識)에서 출발하여 정신의 순수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명석판명지(明判明知)의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규칙과 생득관념설(生得觀念說)에 따라 신(神)과 물질세계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신과 물체는 각각 독립된 실체라는 이원론(二元論)에 도달하였다. 한편, 실천적 입장에서는 반대로 물(物:身)과 심(心)의 합일을 설명하고 그 합일의 결과인 정념(情念)의 통어(統御) 자체 안에 세계의 기계적·법칙적 필연에 대한 인간적 자유의 영역을 인정하였으며, 자유의지의 완성을 이상으로 삼는 도덕설에 이르렀다.
데카르트학파
위와 같은 데카르트의 학설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데카르트학파가 고찰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데카르트가 미해결로 남긴 물심이원(物心二元)에 관한 심신문제 및 섭리[神的必然]와 자유의 이원에 관한 변신(辨神)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해결의 주된 시도로서 N.말브랑시로 대표되는 기회원인론(機會原因論)과 S.스피노자로 대표되는 범신론(汎神論)이 있다. 기회원인론은 세계 사상(事象)의 유일한 작용자를 신(神)이라 하고, 피조물로서의 정신이나 물체는 다만 이 신에 의해 작용된 기회인(機會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범신론은 데카르트의 기계적 물질세계를 신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신은 곧 자연이다’라는 견해이다. 피조물의 작용성을 신의 그것으로 대치하려는 이 두 견해 중에서 기회원인론은 신의 작용 또는 신의 대행자로서 세우게 되는 법칙을 일반적인 경우에 한정하고, 이것을 특수화하는 기회인으로서 피조물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범신론은 세계의 법칙적 필연성 자체를 신성(神性)으로 보는 완전한 결정론(決定論)이다. 그런 의미에서 범신론은 데카르트주의의 궁극적인 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기회원인론에서 법칙의 작용성이 피조물에 맡겨지고, 또 범신론에서 물체의 본성을 연장하려는 전제를 버린다면 G.W.라이프니츠의 단자론적 세계(單子論的世界)로 결론지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데카르트주의의 완전한 종언을 뜻한다. 데카르트가 미해결로 남긴 문제를 계기로 삼아 전개된 위의 세 견해는 근대의 자연학을 인정해야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형태를 거의 거론하였고, 그것이 오늘날에는 현상학·실존주의·마르크스주의 등의 새로운 입장에서 재평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210.99.156.1/home/yj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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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
Elisabeth CLEMENT, Chantal DEMONIQUE, Laurence HASEN-LØVE, Pierre KAHN, Pratique de la philosophie de A a Z, Hatier, 1995(1994), pp. 79-81. (P. 384).
[개요]
뚜렌느 지방의 라 플레쉬(La Flèche)에서 교육을 받은 후, 데카르트는 수학만이 관념의 명석함과 이성의 확실성을 유지한다고 보았다. 그는 보편 수학의 원리에 따라서, 인식을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알아야 할 모든 대상들은 수학적 공리와 같은 방식으로 '계열화되어 있다(s'entresuivre).' 이 보편 수학은 지식[학문]의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지식의 보편성이란 자연의 통일성 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의 다양성이 어떤 것이라 할 지라도, 도일한 방식으로 대상에 적용할 수 있는 정신의 통일성에서 성립한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제 3장에서 학문의 단일성과 그 도구로서 인식의 단일성에 이란 두 가지의 단일성이 선결문제의 오류에 빠져있다고 지적한다.]
방법: 직관과 연역
그러므로 우선 중요한 것은 방법이다. 모든 인식을 이성의 유일한 질서에 복종시키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 가지 과학 논문[기하학, 광학, 기상학]의 서문으로 쓰여진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37)』에서 데카르트는 4가지 규칙을 발설한다. 먼저 명증성(l'évidence)은 이 방법의 원리이다. 명증성은 주의 깊은 정신이 부여한 확실함에 대해 의심을 하지 못하도록 진리로서 인정하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다른 세가지 규칙이 이 방법의 작업에 관여한다. 무엇보다 먼저 아직 모르는 크기를 방정식으로 작업하는 수학적 방식에 영감을 얻은 분석(l'analyse)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까지 작은 부분들로 나누는 작업이다.
그리고 나서, 단순한 것, 즉 가장 쉽게 잘 알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복잡하고 복합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종합(la synthèse)가 있다. 이것은 유크리트의 『기하학 원론(Eléments)』에서 기하학이 연역적 순서로 따라가는 것을 표본으로 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성에 의해 [사물의] 연쇄계열을 다시 열거(la récapitulation)하는 것으로, 정신이 한눈에[단번에] 표상하기 위해서이다. [이 전체를 매거하는 것은 당연히 진리의 전제이다.] 그래서 명증성은 모든 진리의 모델이 되며, 진리는 명증성이다. 이 명증성은 직관에 의해서 파악되고, 방법의 3번째 규칙(종합)에 부합하며, 그래서 진리는 명증성에서 연역된다.
우리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이 규칙들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오류를 범할 가능서이 있는 것은 우리의 자유재량[자유의지] 때문이다. 만일 오류를 범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지, 다시 말하면 판단하는 우리 능력이 무한하고, 유한한 오성(l'entendement)의 명석 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 오성의 한계를 분명하게 밝히는 작업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자유의지나 우리의 인식 능력의 무한함이 오류의 가능성이라기보다 진리 생성의 권능(또는 창조의 가능성)으로 개방성을 주장하는 것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서 표출될 것이다.]
의심(회의, le doute)
의심할 수 없는 것을 명백히 밝히는 최상의 수단은 체계적 의심을 거치고 난 뒤에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의심은 정신이 불확실성에 사로 잡혀있는 자발적 의심과 다르다. 데카르트의 의심은 또한 판단 중지를 지혜의 결정적 규칙으로 삼는 회의주의의 의심과도 다르다. 그의 의심은 방법적이고 임시적이다. 그것은 진리에 접근하려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판적 기능이며 어원적으로 보아 경계설정의 기능이다. 그래서 그 수단을 통하여 확실함과 의견[속견]을 구별할 수 있다. 이리하여 데카르트는 매우 야심적인 방식으로 한편으로는 이미 진리라고 주장된 과거의 모든 유산을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 위에 앞으로 올 과학을 결정적으로 보증하려고 하였다.
코기토(le cogoto): 나는 생각한다.
의심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첫 번째의 확실함은 사유의 확실함 즉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이다. 세가지 계기가 이 확실함을 구성한다. 첫째로 확실함은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je suis, j'existe)"이다. 의심은 이 확실함을 공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심이 확실함을 가정하고있기 때문이다. 의심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의심은 사유의 양상(modalité)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의 존재를 확신한다. 셋째로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영혼이다. 데카르트는 영혼을 생명(la vie)의 모호한 원리로서가 아니라 사유하는 실체(res cogitans) 또는 사유하는 사물로서 규정한다. 사유 주체의 자신에 대해 무매개적으로 현전(la présence)하는 의식은 이리하여 모든 가능한 진리의 근거가 된다.
선천성과 이원론(Innéisme et dualisme)
이 코기토로부터 두 가지의 귀결이 나온다. 첫 번째로 인식이 전자의 밖에서 그 기원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석 판명하며 진실한 관념은 선천적(innée)이다. 둘째로 의심의 방법과정에서 나는 순수사유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혼과 신체, 즉 정신과 물질을 따로 분리해야 한다. 영혼과 신체는 두 개의 실체이며, 이들의 본질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즉 사유이며, 비물질적이며, 다른 하나는 기하학적 순수 너비(l'étendue pure)이며, 보편기계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유 주체에 마주하고 있는 세계는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것으로 영혼이 없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들이 자연에 부여하고자 했던 의도도 신비적(occulte) 힘도 없다. 이 기계적 세계는 수학적 탐구에 종속되고,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로서 기술자의 기획에 지배받고 있다.
신
데카르트는 우리 속에 있는 완전한 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이 관념은 오성에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명석 판명한 관념이다. 그리고 오성은 자신의 고유한 힘으로는 이 관념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성 그 자체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는 우리의 정신 속에 있는 완전한 관념의 원인이다. 신은 두 번째의 확실성이며 사유하는 주체의 확실성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러나 또한 세계는 신에게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여전히 과학의 관심과 종교의 관심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했다. 즉 기계적 자연조차 신적 "기술자"를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는 순수 기계론적이기 때문에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세계는 신적 창조("연속적 창조"이론)에 항구적으로 매달려 있다.
도덕과 정념
만일 영혼, 세계, 신에 관해서 반성하는 형이상학이 지식의 나무의 뿌리를 구성한다면 물리학은 나무의 줄기이고, 역학과 의학과 도덕학은 나무의 가지들이다. 그러므로 도덕학은 이미 구성된 지식의 전체로부터 연역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이상학과 물리학의 확실성을 발견한 시대를 가정한 것이며, 이런 확실성으로부터 도덕론은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 품성(행동)의 과학으로 연역될 수 있고 생겨날 수 있다. 그 때까지는 잘 행동하고 품성(행동)의 규칙에 복종해야 한다. [규칙이 완성되기 전에는 일반적인 관습의 방식에 따라서 평소대로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를 데카르트는 주장한다.] 여기서 임시적인 도덕의 관념이 나온다, 이 도덕 관념이란 확실하지 않지만 그럴듯할 뿐만 아니라, 실용적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이 신중함의 규칙은 데카르트에게 자신의 철학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조용함을 얻을 목적으로 나온 것이다.
결정적인 도덕론의 목적은 행복을 위하여 영혼의 정념(passion)과 감화(affection)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정념은 신체적 매카니즘의 자발적(involontiare)운동의 결과이며 영혼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반면에 의지적(volontiare)운동의 경우에 영혼은 신체에 작용하고 권고한다. 그래서 정념에 의해 생겨난 표상들은 자연히 혼동되어 있어 진리의 탐구를 모호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유의지의 결과에 의해서 정념을 막을 수 있거나 "치유(guérir)"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에 따라 이용할 수 있고 이성에 의해 절제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들을 변경시키면서 우리는 우리 신체를 변모시킬 수 있고 우리 정념을 평화롭게 할 것이다.
* 주요저서: 『정신의 지도를 위한 규칙들(Règles pour la direction de l'esprit, 1628)』,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 1628)』, 『형이상학적 성찰(Méditations métaphysique, 1641)』, 『철학원리(Principes de la philosophie, 1644)』, 『영혼의 정념론(Traité des passions de l'âme,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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