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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丙子胡亂)은, 재해설(再解說)되어야 한다 <No.2>
여진(女眞)! 조선(朝鮮) 서북(西北) 변방(邊方)을 수호(守護)하던 종족(種族)
(2) 日 錄 / 序
〔粤惟丁丑之兵.邦運不幸.乘輿去邠.江都淪沒。萬姓魚肉. : 생각하면, 정축년(1637, 인조 15) 병란(兵亂) 때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해서 임금이 수레를 타고 도성을 떠났으며, 강도(江都 강화(江華))까지 함락되어 모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었다. 于是時也.余奉今上.久在虜陣.宗社安危.間不容髮.及夫南漢議和.靑丘賴安.而今上曁昭顯世子.竟未免沙磧之行. : 이때에 나는 금상(今上)을 모시고 오랫동안 오랑캐의 진영(陣營)에 있었는데, 종묘사직의 안위(安危)는 숨 쉴 사이도 없이 다급했었다. 남한산성에서 화친이 맺어짐에 이르러는 우리나라가 편안할 수 있었으나, 금상과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마침내 청나라 사막(沙漠)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 余獨扈駕還都.北望遼山.只切飮泣之情. : 나는 홀로 임금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서, 북쪽으로 요동(遼東) 산을 바라보니, 오직 눈물 흘리는 정이 간절할 뿐이었다.〕
➊ 빈(邠) : 도성(都城)을 말한다. <빈(邠) : 나라이름 빈(邠)>자이다. 빈(邠)은 빈(豳)과 함께 쓰인다. 빈(邠)은 어디며, 무엇이길레 도성(都城)을 뜻하는 것일까? 주(周)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다. 아버지는 제곡고신(帝嚳高辛)씨다. 후직(后稷)의 증손자(曾孫子) 공유(公劉)가 관직을 잃고, 빈(豳)에서 살았는데, 공유(公劉)의 9 대손 고공단보(古公亶父)때 계속(繼續)된 외적(外敵)의 침략(侵略)을 받자 기(岐)로 옮겨 살았다. 주(周)나라의 초(初) 도읍지(都邑地)란 의미(意味)다.
➋ 문제(問題)는 왜 조선(朝鮮)에서는, 선대(先代)의 여러 나라들의 도읍지(都邑地)인 평양(平壤)이나 경주(慶州) 또는 개성(開城)등지를 말하지 않고, 빈(邠)을 자신(自身)들의 도읍지(都邑地)로 불렀는가 하는 것이다.
➌ 강도(江都) : 강도(江都)는 강화도(江華島)를 말한다고 한다. 대륙(大陸)의 강도(江都)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남경(南京)”을 말하는데, 반도(半島) 강도(江都)는 섬(島)이다.
➠ 강화(江華) : 강(江)이란 장강(長江)을 뜻하는 글자이며, 화(華)란 꽃과 중심을 뜻하며, 번성(繁盛)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장강(長江)주변에 강화(江華)라는 지명(地名)이 생길 수는 있어도, 바다 속에 갇힌 섬(島)에 “강화(江華)”라는 지명(地名)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➍〔竟 未 免 沙 磧 之 行 : 마침내 사막(沙漠)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고 하였다. 사적(沙磧)이란 말은, 사막(沙漠)의 또 다른 말이다. 이 말은 「당시(當時) 청(淸)나라는 “사적(沙磧)”지대에 있었다는 말이며, 특히 그들의 도읍지(都邑地)가 사막(沙漠)가운데에 있었다.」 는 이야기다. 「역설적(逆說的)으로, 당시(當時)의 청(淸)나라가 사막(沙漠) 한 가운데에 없었다는 증거(證據)는 무엇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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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庚辰.替質遼陽.年甫弱冠.去國悲懷.瀋水俱深.於是或奔走于戎馬.或辛苦于楚囚。경진 년(1640, 인조 18)에 “볼 모”를 바꾸게 되어 요양(遼 陽)으로 가니, 이때 내 나이 겨우 20세라, 나라를 떠난 슬픈 회포가 심양강(瀋陽江) 물과 함께 깊었다. 이에 혹은 전쟁터에 분주하게 다니기도 하고, 혹은 구류를 당해신고(辛苦)를 겪기도 했다. 寂寂蠻館.與愁爲隣.空抱蘇武之節旄.日望上林之歸雁. ; 오랑캐의 사관(舍館)에 쓸쓸히 있으려니 시름과 동무할 수밖에 없었다. 부질없이 소무(蘇 武)의 절모(節 旄 임금이 사신에게 주는 깃대)를 생각하고 날마다 상림(上林)의 기러기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至甲申.大明云亡.北師入燕.武關之質縱解.星槎之行尙繁.夏令炎熱.冬日霜雪.行役艱苦. : 갑신년(1644, 인조 22)에 이르러 명나라가 망하여 청나라 군사가 연경으로 몰려 들어갔다. 무관(武 關)에서의 볼모 상태에서는 비록 풀려났으나, 성사(星 槎 사신들이 타고 다니는 선박)의 행차는 오히려 빈번해졌다. 여름철의 더위와 겨울날 추위에 행역(行役)이 어려워서 자못 몸으로 견디지 못할 바였다.〕
➠ 〔武 關 之 質 縱 解 : 무관(武關)에서의 볼모 상태에서는 비록 풀려났으나〕하였는데, “무관(武關)”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무관(武關)」 이란 관문(關門)의 이름을 말하며,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대(四大)관문(關門)【동(東) : 동관(潼關)인 함곡관(函谷關) / 서(西) : 보계(寶鷄)의 산관(散關) / 남(南) : 섬서(陝西) 남쪽 상현(商縣)의 무관(武關) / 북(北) : 감숙성(甘肅省) 고원(固原)의 숙관(肅關)이 있다.】중에서 남쪽 관문(關門)인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남(東南)쪽에 있는, 무관(武關)을 말하는 것이다.
➎ 그렇다면 뭔가 이해(理解)할 수 없는.........일이 있는데, 이때서야 ‘연경(燕京) 곧 북경(北京)’을 함락(陷落)시키고, 명(明)나라는 무대(舞臺)뒤로 사려져버렸는데, 겨우 ‘북경(北京)인 연경(燕京)’만을 함락(陷落)시킨 때인데, 이곳으로부터 서(西)쪽으로 수천(數千)리 먼 곳에 있는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에 있는 「무관(武關)에서 볼모로 있었다.」 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 위에서 설명(說明)한 “무관(武關)”이 아니라면, 무관(武關)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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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略.半生他鄕.風餐露宿.積痾纏身.而王事鞅掌.年年北征.賦命奇釁.胡至于斯耶. ; 반평생을 타향에서 보내며, 한데서 자고 먹어 묵은 병은 온몸에 감겼는데, 게다가 나랏일에 바빠 해마다 북쪽 길을 가게 되니, 타고난 운명이 기박하기가 어찌 이렇단 말인가? 艱危之時.鞠躬之瘁.參以分義.固不足恤.以此管見.屢當關機.專對僨事.理所然矣. : 어렵고 위태할 때에 심력을 다한 것은, 나의 분의(分義)를 돌아볼 때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와 같이 좁은 소견으로 자주 외교의 중한 임무를 감당해야 했으니, 일을 그르쳤을 것은 이치에 당연하다. 纔一返襢.誣謗隨尾.身世多舛.胡至于斯耶. : 겨우 한 번 돌아와 복(服)을 입자마자 헐뜯는 말이 꼬리를 물고 생기니, 신세(身世)가 어찌 이와 같이 대부분 뒤틀어지는 데에까지 이르렀는가?〕
〔今年又因北塞開釁.縉紳罹禍.陳奏之命.復屬此身.簡日奉表.載馳長程.處事茫然.與天同闊。而況臨行.慘遭季子之殤.未號嬴博.抑情登途. : 금년에 또 북쪽 변방에 일이 벌어져서 사대부(士大夫)들이 화를 입게 되자, 이를 진주(陳奏)하라는 명령이 다시 또 나에게 내려졌다. 날짜를 가려서 표문(表文)을 받들고 먼 길을 달려가노라니, 일을 처리하기가 넓은 하늘처럼 아득하였다. 더구나 떠날 때에 비참하게도 막내아들의 죽음을 당했는데도, 그 무덤에 가서 울지도 못하고 심정을 억제하면서 길에 올랐다. 暮投虛館.獨倚羈榻.殘燈明滅.愁緖萬千.自酌自傷.屈指細思.自庚徂丙.北渡鴨水.十有一矣. : 저물녘에 빈사관(舍館)에 들어 홀로 객탑(客榻)에 의지해 있노라니 쇠잔한 등잔만 깜박거리면서 천만 가지 시름을 자아낸다. 스스로 헤아리고 스스로 상심하면서 손을 꼽아 곰곰이 생각하니, 경진 년(1640, 인조 18)부터 병신년(1656, 효종 7)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것이 열한 번이나 된다. 廿年征役.縱緣北使催迫.間有自朝廷命送.瀝血陳懇.敷奏情悃. : 20년 동안의 정역(征役)이, 비록 북쪽 사신(使臣)의 재촉이 심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중간에 간혹 조정에서 명령해 보낼 적도 있어, 간곡하게 사정을 아뢰기도 했다. 兪音猶秘.溫綸反降.倘罹誣謗.旋雪其冤.中心感激。圖報無路.庶幾盡瘁.以酬萬一.官路三千.亦嘗聊以是自慰也. : 그러나 임금의 말씀은, 오히려 따뜻한 윤음(綸 音)을 내리셨고, 혹시 남의 헐뜯음을 당하더라도 이내 그 억울함을 풀어 주셨다. 마음속으로 감격하나 보답할 길이 없었다. 끝까지 몸을 바쳐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여, 관로(官路) 3000 리도 역시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면서 갔었다. 曾前往返。適多事故.耳聞目擊.一未紀述.年代旣久.則此間情景.其誰能知. : 전번에 갔다 올 때에는 마침 사고(事故)가 많아서, 듣고 본 것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연대가 이미 오래되면, 그때의 정경(情景)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以故行邁暇隙.撥忙起懶.紀陰晴之外.又將使事本末.逐條並列. : 그런 때문에 이번에는 바삐 가는 중에도 틈을 타서 대략 날씨와 그 밖의 일을 기록하고, 또 사신의 일의 본말(本末)을 조목마다 모두 기록하였다. 山川程途.風俗景物.率以備焉.觀者其憐之矣乎. : 산천(山川)ㆍ이정(里程)ㆍ풍속ㆍ경치까지도 대개 갖추어 쓰는 것이니, 이것을 보는 사람은 어여삐 여겨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인용(引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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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丙子胡亂)! 병자(丙子)년 오랑캐(胡)들의 난동(亂動) 사건(事件)이다. 조선사(朝鮮史)에서 임진(壬辰)년 왜(倭)의 난동(亂動)과 함께, 도무지 이해(理解)할 수 없는, 상식적(常識的)이 못한, 전쟁사(戰爭史)라 할 수 있다. 실제(實際)로 그런 전쟁(戰爭)【내란(內亂)이라고 본다.】이 있었는지 조차 불분명(不分明)할 정도(程度)로, 내란(內亂) 주모자(主謀者)들의 입장(立場)에서, 일방적(一方的)으로 서술(敍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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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군(淸軍)은 : 서력(西曆) 1,636년 12월 02일 심양(瀋陽)을 출발(出發) ∼ 압록강(鴨綠江) 도하(渡河) ∼ 의주(義州) 임경업(林慶業)이 있는 백마(白馬)산성(山城)을 피한다. ∼ 정주(定州)를 거쳐 ∼ 청천강(淸川江)을 도하(渡河) ∼ 안주(安州) ∼ 평양(平壤) ∼ 대동강(大同江)을 도하(渡河)하여 ∼ 황주 ∼ 평산(平山) ∼ 개성(開城) ∼ 임진강(臨津江)을 도하(渡河) ∼ 한성(漢城)으로 진입(進入)한다.
㉮ 12월 02일 심양(瀋陽)을 떠난 청군(淸軍)【청군(淸軍)+몽고병(蒙古兵)+한군(漢軍)】10만 병력(兵力)은, 12월 09일 압록강(鴨綠江)을 도하(渡河)했다고 한다. 이때 임경업(林慶業) 장군(將軍)은 여진(女眞)들이 쳐들어 올 것을 예견(豫見)하고, 굳게 지키고 있었는데, 10만 청군(淸軍)은, 백마(白馬)산성(山城)을 피해서, 다른 길로 진격(進擊)했다고 한다.
※ 한군(漢軍)이란 무슨 뜻인가? 이러한 것들이 바로 역사(歷史)를 조작(造作)했다는 증거(證據)다. 당시(當時)에 한인(漢人)들로 이루어진 군대(軍隊)에 어디에 있었을까? 한족(漢族)이란 말은, 근세기(近世期)에 사용(使用)된 말이다.
➠ 압록강(鴨綠江)은 하늘이 내려준(天惠) 해자(垓字)와 같다고 하였다. 강(江) 양측(兩側)이 절벽(絶壁) 천(千)길에 이르기 때문에, 이민족(異民族)들의 침입(侵入)이 아주 어렵다는 이야기다. 좋다. 청군(淸軍) 10만이 압록강(鴨綠江)을 도하(渡河)하려 준비(準備)하는 것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또한 수많은 말(馬)과 군수물자(軍需物資)와 함께 도하(渡河)하는 그 순간(瞬間), 조선(朝鮮)의 변경(邊境)수비대(守備隊)들에게는 절호(絶好)의 기회(機會)가 된다.
이들 대규모(大規模) 군대(軍隊)가 큰 하천(河川)을 도하(渡河)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좋다! 이들 대규모(大規模) 군대(軍隊)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면, 이곳에 있던 변경(邊境)수비대(守備隊)의 봉화(烽火)는 일사천리(一瀉千里)로, 한양(漢陽)을 향해 올려 졌을 것이며, 하루도 채 안 되어 한양(漢陽)에 있던 황궁(皇宮)안에서는 긴급(緊急)대책회의(對策會議)가 열렸어야 상식적(常識的)이다.
이러한 상식적(常識的)인 여러 조건(條件)들을 모조리 생략(省略)하고, 무조건(無條件) 청군(淸軍)이 침입(侵入), 남하(南河)했다는 말은, 역사조작(歷史造作)이요, 왜곡(歪曲)이다. 대륙(大陸) 땅이든, 반도(半島) 땅이든, 산봉우리마다에는 봉수(烽燧)대가 설치(設置)되어 있었으며, 이 봉수대(烽燧臺)는 일천(一千)여리를 가는데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의주(義州)지방에서 올린 봉화(烽火)는, 한 나절이면 한양(漢陽) 땅의 ‘봉화대(烽火臺)=봉수대(烽燧臺)’에 도착(倒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설사(設使), 의주(義州)에서 미쳐 올리지 못했다하더라도, 정주(定州)나 안주(安州)등에, 청군(淸軍)이 나타났다면, 여기저기에 설치(設置)되어 있던 많은 봉화(烽火)가, 최고(最高)의 긴급(緊急)사항(事項)으로, ‘우서(羽書)=우격(羽檄)’이 되어, 한양(漢陽)조정(朝廷)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 12월 13일에서야 조선조정(朝鮮朝廷)에서는 청군(淸軍)이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전(傳)한다. 이 말에 따르면 청군(淸軍)이 12월 02일 심양(瀋陽)을 떠나, 압록강(鴨綠江)을 도하(渡河)한 것이 12월 09일이라고 하는데, 한성(漢城)에서는, 12월 13일에서야 알았다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 12월 14일 개성(開城)진입(進入)하고, 통과(通過)했다.
㉱ 12월 14일 밤 조선(朝鮮)왕(王) 인조(仁祖)는, 강화도(江華島)로 도주(逃走)하려 하였으나, 청군(淸軍)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百官)들과 함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避身)하였다.
㉲ 서력(西曆) 1636년 12월 16일 : 청군(淸軍) 선봉대(先鋒隊)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包圍)하였고,
㉳ 서력(西曆) 1637년 01월 01일 : 청주(淸主) 태종(太宗)이 도착(到着)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 아래의 탄천(炭川)에, 20만의 청군(淸軍)이 집결(集結)하니,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완전히 고립(孤立)되었다고 한다.
➠ 남한산성(南漢山城)은 한강(漢江)을 도하(渡河)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이십(二十)만 대군(大軍)이 한강(漢江)을 건너려면........군마(軍馬). 군량(軍糧). 기계(器械)등 수많은 군수물자(軍需物資)와 함께 건넌다는 것은, 21세기 현대전(現代戰)에서도 어려운 작전(作戰)일 수밖에 없다. 수비군(守備軍)이 호시탐탐(虎視耽耽) 약점(弱點)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사학(旣存史學)【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는, 이때 한강(漢江)이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에 쉽게 도하(渡河)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조선(朝鮮)의 정예(精銳)병사(兵士)들은, 적군(敵軍)이 꽁꽁 언 한강(漢江)을 건너는 것을 보면서, 모두 산(山)속으로 도망(逃亡)을 갔다는 얘긴가? 아니면 대부분 휴가(休暇)를 보냈다고 말 할 것인가?
※ 1950년 6월 25일, 북한(北韓)군(軍)이 38선을 넘어 공격(攻擊), 남하(南下)했을 때도, 주말(週末)이라서, 많은 병사(兵士)들이 외출(外出) 및 휴가(休暇)를 갔다고 설명한다. 꼭 이 모양이다. 일만(一萬)년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어쩌면 저렇게 똑같은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냐?
〔12월 02일 심양(瀋陽)을 출발(出發)한 청군(淸軍)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고, 청천강(淸川江)을 건너고, 대동강(大同江)을 건너고, 임진강(臨津江)을 건너고, 한강(漢江)을 건너, 12월 16일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했다〕는, 이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임진(壬辰)년 왜란(倭亂)과 함께,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 자(者)들”이 주장(主張)하는, 조선사(朝鮮史)의 핵심(核心)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도무지 이해(理解)할 수 없는, 상식적(常識的)이지 못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이때 남한산성(南漢山城)안에는 13,000 여명의 군사(軍士)와 50일 정도 지탱(支撐)할 수 있는 식량(食糧)이 있었다고 전한다. 명군(明軍)의 원병(援兵)이나 의병(義兵) 곧 근왕병(勤王兵)은 기대(期待)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왜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임란(壬亂)때는 수많은 근왕병(勤王兵)과 의병(義兵)들이 있었는데, 왜 이때는 기대(期待)할 수 없다고 한 것일까?
㉵ 이때【병자(丙子)년】 혹독(酷毒)한 추위가 찾아와, 노숙(露宿)하는 장수(將帥)와 군졸(軍卒)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병들고, 아사(餓死), 동사(凍死)자(者)가 늘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자(者)들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격하(格下)시키기 위해 환장(換腸)한 놈들이다. 이 자(者)들은 정말이지 더럽고, 추악(醜惡)하고, 치사(恥事)한 놈들이다.〕
➠ 더구나 조선(朝鮮)의 지형지리(地形地理)에 밝지 못한 공격(攻擊)자 입장(立場)에서, 혹독(酷毒)한 추위가 20만 청군(淸軍)은 피해가고, 조선(朝鮮)군대(軍隊)에게만 닥쳐온 것은 아닐 터이며, 조선(朝鮮)군대(軍隊)는 수비(守備)요, 청군(淸軍)은 공격(攻擊)하는 측이기 때문에, 추위가 왔다면 조선(朝鮮)군대(軍隊)보다는, 청군(淸軍)에게 더 불리(不利)하게 작용(作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왜 조선(朝鮮)군대(軍隊)만 추위에 떨어야 하고, 굶주려야 할까?
※ 이성계(李成桂)가 요동(遼東)정벌군(征伐軍), 10만 병사(兵士)를, 회군(回軍)시킬 때도, “여름철이라 활줄이 늘어나고, 전염병(傳染病)이 걸릴 위험이 있다”하여【이성계(李成桂)의 4대 불가론(不可論) : 첫째로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른다는 이소역대, 두 번째는 여름에 출병한다면 농사를 짓지 못한다. 세 번째로 온 나라가 출병하면 왜구가 그 틈을 노려 침략한다. 네 번째로 여름 장마철이라 활줄이 늘어나고 병사들은 전염병에 걸린다는 4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는 10만 대군(大軍)을 회군시킨 후, 황성(皇城)을 포위(包圍)했다.】반란(叛亂)의 명분(名分)으로 삼은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냐? 그렇다면 많은 나라 또는 부족(部族), 종족(種族)들 간의 여름철에 전쟁(戰爭)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겨울전쟁은 추워서 동사(凍死)하고, 여름전쟁은 활줄이 늘어나고, 아교(阿膠)가 녹아 활을 사용(使用)할 수 없다면, 왜 하필이면 조선사(朝鮮史) 이야기에서만 전매특허(專賣特許)로 나오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 서력(西曆) 1637년 01월 30일, 인조(仁祖)는 세자(世子) 및 일행(一行) 500명과 함께 나와서,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되었다는 수항단(受降檀)에서 청 태종(淸太宗)에게 굴욕적(屈辱的)인 항복(降伏) 예(禮)를 하고, 환도(還都)했다고 전한다.
㉷ 이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빈궁(嬪宮)과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질(人質)로 잡혀갔고, 척화(斥和)파 거두(巨頭) 홍익한(洪翼漢)과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등을 압송(押送)하며, 02월 15일부터 철군(撤軍)하기 시작하였다.
㉸ 이후(以後) 문제(問題)로 청군(淸軍)에 의해 납치(拉致)됐다는 수십만(數十萬)명의 조선인(朝鮮人) 문제(問題)가 대두됐으며, 이 중(中)에서 부녀자(婦女子)들의 송환(送還)문제와 환국(還國)한 여인(女人)【환향녀(還鄕女)】 들의 비참(悲慘)함과,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왔다는 가족(家族)들의 비판(批判), 회피(回避)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女人)들도 상당수(相當數) 있었으며, 이혼(離婚)당하는 사례(事例)도 있었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4대 문장가(文章家)로 이름을 떨친, 장유(張維 : 1587-1638)란 분도 청군(淸軍)에게 끌려 간 며느리(子婦)의 이혼(離婚)을 허락(許諾)해 달라는 상소문(上疏文)을 예조 (禮曹)에 올렸다고 전(傳)한다.
➠ 절대적(絶對的)으로 재평가(再評價) 되어야 할 것이, 왜란(倭亂)과 청란(淸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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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청(淸)나라가,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에서 발흥(發興)했다는 말은 사기(詐欺)다. 요녕성(遼寧省)은 대막지대(大漠地帶)도 아니며, 사적지대(砂磧地帶)도 아니다.
○ 오달제(吳達濟) / 忠烈公遺稿附錄.附錄.記事五絶句.曹漢英 : 〔欲把阿膠止濁河.忠魂終作沒胡沙.微公一死吾何面.三士光應萬古多〕중에서 『忠 魂 終 作 沒 胡 沙 : 충의를 위해 죽은 혼, 오랑캐 모래위에서 죽었다. 』고 하였다.
※ 오달제(吳達濟) :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끝까지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이듬해 인조(仁祖)가 삼전도(三 田 渡)에서 굴욕적(屈辱的)인 항복(降伏)을 한 뒤, 청(淸)에서 척화(斥和)론자의 처단을 요구하자 스스로 척화(斥和)론자로 나서서,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심양(瀋 陽)으로 끌려갔다.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西門) 밖에서 윤집·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형(處刑)을 당하였다.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고 한다. <척화삼학사(斥 和 三學士)>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淸)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反對)한 강경파(强硬派)의 세 학자(學者)를 말하는 것으로 평양(平壤) 서윤(庶尹) 홍익한(洪翼漢), 교리(校理)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등의 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 淸陰先生集卷之十一.雪窖集.二百八十九首.龍灣留贈守而.癸未春再作瀋行時作 : 〔二年沙漠二年灣.歷盡千辛與萬艱.今日又成江上別.世間人事幾時閑〕중에서, 『二 年 沙 漠 二 年 灣 : 2년은 사막(沙漠)에서, 2년은 용만(龍灣)에서』라고 하였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청(淸)나라로 끌려가기 전에, 몸이 불편하여 2년 동안 용만(龍 灣)에서 대기(待機)상태로 거주(居住)했고, 또 심양(瀋陽)으로 끌려가, 2 년 동안 사막(沙漠) 땅에서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 위 두 분의 글을 보면 : 「심양(瀋陽)이란 곳의 지세(地勢)」는, 「사막(沙漠)이란 특이지형(特異地形)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單純)하게 청(淸)나라의 심양(瀋陽)이 요녕성(遼寧省)에 없었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청(淸)나라가 실제(實際) 존재(存在)여부(與否)로 비화(飛火)된다.
○ 谿谷先生集卷之三十.七言律.一百六十首.聞瀋陽不守二首 : 〔요하의 소식을 어찌 차마 들 으 리 요. : 遼 河 消 息 不 堪 聞 / 오랑캐들 구름처럼 남침했다네. : 羯 虜 南 來 氣 若 雲 〕라고 하였다. 그런데 청(淸)의 여진족(女眞族)을, 갈노(羯虜)라고 하면서, 분명(分明)하게 말하기를 「남침(南侵)」이라고 하였다. 이해(理解)할 수 없는 지형지리(地形地理)이다.
➠ 갈(羯) : 불깐 흑양(黑羊) 갈(羯)자로, 서방(西方) 땅에서 자라는 양(羊)이다. 서방(西方) 땅에서 살던 양(羊)을 몰고 다니며, 유목(遊牧)생활(生活)을 했던 여진족(女眞族)들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었다는 말은, 조선(朝鮮)을 반도(半島)로 몰아넣기 위해, 창작(創作)된 역사소설(歷史小說)일 뿐이다.
2015년 03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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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의 연행록(연도기행...)을 보니 당시의 상황이 눈에 보이는듯 애잔한 마음뿐이네요.....
나는 홀로 임금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서 북쪽으로 요동산을 바라보니....
여기서도 북쪽이라 했으니 반도사관에의한 왜곡방향이라 생각할수도 있겠으나 제 판단은 사실일 것입니다. 즉 서안에서 바라보았을 때 대략적 방향은 북쪽이라는 것이죠...
갈로(羯虜)의 남침(南(侵) ; 병자호란 (조선 내부 반란인데 여진족의 침입으로 덮어 씌웠다고 생각할수도 있으나 일단 여진족의 침입으로 보고...)은 분명 북에서 남으로 전개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나랏일에 바빠 해마다 북쪽길을 가게되니 ...(年年北征)> ,< 북쪽으로 압록을 건넌 것이 열한번이나.....> <北使;북쪽사신>등등 ; 여기에도 北征으로 나옵니다.
무관(武關)에서의 볼모상태에서는 비록 풀려났으나 성사(星槎)의 행차는 오히려 빈번해젔다... 사신들이 타고다니는 선박이 빈번하다 하니 연도중 적어도 일부 구간은 수로가 있습니다. 이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위 연도기행의 저자인 인평대군이 무관(武關 ; 현 섬서성 상현..?)에 볼모로 잡혀있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반도사관이라면 지금의 심양 정도가 적절한데 그곳에 무관이 있을리 없고 1640~1656까지 압록강을 열한번 건넜다 하니 섬서성 상현까지 갔었을 시간적 여유도 없습니다. 현 서안이 북경(연경)이라면 또 모를일이나 역시 어려운 설정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관중주위에 있다는 사대관문의 명칭은 왜곡이동된 명칭으로 보아야 하고 본래는 연경 주위에 사대관문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특이한 것은 동관(潼關)입니다. 연행노정중에 동관역(東關)이 있는데 대부분의 연행록에는 東關으로 나오나 농암집, 목은시고, 삼탄집 등 개인문집에는 潼關으로 나옵니다. 물론 지금의 황하변의 동관을 읊은 것도 아니고 함경도 종성(반도사관)의 동관을 표현한것도 아닌 연행노정중의 영원성과 산해관 사이의 동관을 읊은 것입니다. 황하변의 동관과 지금의 함경도 종성의 동관은 왜곡 이동된 것이고 지금의 영원성(싱청시)와 산해관(친황땅오)사이의 동관도 본래의 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동관〔潼關〕
한밤중에 동관역에 도달을 하매 / 夜到潼關驛
성문 쉽게 열어주려 하지 않누나 / 城門不肯開
말 세우고 오랫동안 서성이면서 / 徘徊立馬久
고개 들어 삼태성을 바라보누나 / 擧首望三台<삼탄집 제8권>
환국한 여인, 즉 환향녀(還鄕女)이야기가 나오는데, 연행록에 보이는 환향하(還鄕河)와 별개의 일일까요..? 반도사관에 의하면 별개의 일입니다.
<환향하는 ~~중략~~ 모든 물들이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물만이 서쪽로 흐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고향에 돌아가는 물[還鄕河]’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송 휘종(宋徽宗)이 원(元)에 납북되어 갈 때 이 환향하 다리를 지나다가 말을 멈추고 사방을 슬픈 표정으로 돌아보며, ‘여기를 지나면 큰 사막이 가까워 오는데 나는 어떻게 이 물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먹지도 않고 갔다 해서 ....<계산기정>
여기서는 모든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물은 서쪽으로 흐른다하고 물따라 내려가면 고향이라는 것인데 여기서의 동서 방향은 믿을수가 없습니다. 기존의 사관대로라면 동쪽에 큰 사막이 가까워 온다는데, 현 요동, 요서가 사막은 아니죠...그렇다고해서 현 천산 서쪽이 송 휘종(宋徽宗)의 나라라면 얼핏 맞는 듯 보이나 천산 동쪽이 금나라가 되니 모순됩니다.
제 판단은 방향의 왜곡이란 것입니다. 즉 본래는 환향하가 남북으로 흐르는데 지금의 역사구도와 지형지리에 맞춰 동서로 바꿔놓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청음 김상헌의 글에 ....' 二年沙漠 二年灣' 은 그의 詩 ‘가노라 삼각산아...’ 와 관련하여 중요한 말이라 생각 됩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져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위의 시를 지은 곳이 어디일까.....?’ 를 생각해 봤습니다. 반도사관에 의하면 삼각산은 서울 북한산이니 당연히 지금의 서울에서 시를 짓고 의주인 용만까지 가서 그곳에서 2년을 보내다 압록을 건넜다 하겠죠...그런데 의주에서 2년을 보낸동안은 고국산천을 떠난 것은 아니니 위의 詩가 조금은 뻘쭘합니다.
그러나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에서 보듯이 떠나기 바로 직전에 한수 남기고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삼각산과 한강수가 한양에 있을것이란 생각은 고정관념일수 있지 않을까요... 제 생각은 삼각산과 한강수는 의주에 있으며 김상헌은 용만(의주)에서 약 2년 머무르다 드디어 북으로 떠나가려니 착찹한 심정에 위와같은 시를 남긴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 좋은 의견과 일부 주장에 동감합니다. 소소한 지명이나 하천, 산등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큰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것에, 소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일단 뒤로 미뤄 놓았습니다. 대략적인 조선의 그림을 그려 놓고, 그 안에서 소소한 지명들의 위치등을 고려 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원과 관심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병자호란은 어떤 정치적인 사건을 근거로 조작된 이야기라고 봅니다. 이것또한 모두다 한반도 조선사를 만들기위한 것이죠. 원래 조선이 청인데 이것을 분리해내기위해서 만들어진 사료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으로 의복을 예로들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서북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각색해서 병자호란 이라는 작품을 만든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의 몇가지 회화나 그림을 근거로 유추해보면 대략 역사적인 사실이 드러납니다.
대부여님!
좋은 의견같습니다. 조선역사의 진실을 알려 한다면, 발상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1) "청"은 조선의 일개 제후의 나라였다 (2) "청"은 가공의 나라로 조선 서북계열의 정권 (3) 그러나 반도사관=식민사관으로 "청"은 황제국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사학의 주장에는 많은 모순이 있으며, 이러한 모순에 대한 상식적인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재야에서 묵묵히 조선사를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이 있으므로 해서, 조선왕조의 정체가 드러 날 것이다라고 믿습니다. 성원과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압록강에서 한양이 지금 거리로 4-500 km 인데 무장한 겨울복장의 보병이 5일만에 주파를 할 수는 절대 없죠.
잠실에서 임진각까지 65km 를 1월 맹추위에 극성맞은 300여 마라톤 동호인들과 빈 몸으로 달려는데도 10시간(아침 8시 -오후6시: 점심도 달리며 빵과 바나나 정도만, 관광버스로 돌아 오는 길에 모두 넉다운)이 걸렸는데,4-5일을 밥해 먹으며, 무기, 식량까지 지고 하루 100km 를 달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죠.그것도 10만대군이...???
파발마 혼자라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