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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어산
*산행일자:2011. 4. 25일(월)
*소재지 :경남밀양
*산높이 :만어산669m, 구천산640m
*산행코스:관음사-영천암-구천산-감불고개-만어산-만어사-우곡교
*산행시간:7시32분-14시28분(6시간56분)
*동행 :나홀로
벌써부터 별러온 만어산을 이번에 다녀왔습니다. 전날 대구 참사랑산악회 초청으로 울산의 신불산을 올랐다가 저 혼자 남아 밀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아침 일찍 삼랑진으로 옮겼습니다. 관음사에서 시작해 구천산과 만어산을 차례로 오른 후 만어산 중턱에 자리한 만어사(萬魚寺)를 탐방했습니다.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자리한 자그마한 절 만어사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이 절의 규모나 오랜 역사 덕분이 아닙니다. 고려명종 때 지은 이 절이 신라 때 창건된 다른 명찰처럼 천년고찰이 아님은 분명하고, 좁은 절터에 세워진 미륵전과 대웅전의 규모 또한 아주 작아 큰 암자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고찰도 못되고 대찰도 아닌 이 절이 명찰로 자리 잡은 것은 이 절 앞을 흐르는(?) 종석(鐘石) 너덜 덕분입니다. 이 너덜이 없었다면 김수로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질리 만무했고, 그랬다면 만어사라는 절 이름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려의 명승 일연스님은 그의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통해 이 절과 관련된 설화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습니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이니, 부근에 가라국이 있었다. 옛날에 알이 해변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당시 나라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연못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는 나찰녀 다섯 명이 독룡과 오가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번개가 치고 비가 와서 4년이 지나도록 오곡이 영글지 않았다. 왕은 주술을 막고자 했으나 하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에게 청하여 설법을 한 연후에야 나찰녀가 오계(五戒)를 받아 이후로는 폐해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바위로 변하여 골짜기에 가득 찼는데 각기 쇠북과 경쇠소리가 났다.”
이 바위들을 고기들이 변해서 됐다 하여 만어석(萬魚石)이라 부르며, 또 두드리면 종처럼 맑은 소리가 난다고 해 종석(鐘石)으로도 부릅니다. 이곳에 고려스님 동량 보림이 만어사를 세운 것이 1180년이었으니, 물고기들이 종석으로 변한 지 천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이 절을 8백년 넘게 지켜온 것은 대웅전 앞뜰의 삼층석탑과 지금도 두드리면 3개 중에 하나 꼴로 종소리를 낸다는 너덜입니다.
만어사 아래 첩첩이 깔려 있는 너덜을 보고 마치 바위덩어리들이 흘러내려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이산 저산에서 크고 작은 너덜들을 꽤 여러 번 보았지만 매번 큰 바위가 박혀 있다고 생각했지 물 흐르듯이 바위들이 흘러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우리말 너덜을 지형학 용어로 바위덩어리들의 흐름을 뜻하는 암괴류(巖塊流, Block Stream)으로 칭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습니다. 여기 암괴류는 약6,500만 년 전인 신생대 초기에 지하에서 관입한 흑운모 화강섬록암이라 합니다. 이 화강암은 오랜 세월 땅 속에서 풍화를 받은 후 지표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화강암이 지표로 올라올 때 이 암석을 내리누르던 거대한 압력이 사라져 암석이 팽창하면서 절리가 발생하는데, 특별히 만어산 일대에서는 밀양-언양 단층선의 영향으로 화강암에 절리가 탁월하게 발달하여 대규모의 암괴류가 만들어졌다고 이우평님은 그의 저서 “한국지형산책”에 적고 있습니다. 바위에서 소리가 나는 것은 바위덩어리인 암괴들이 꽉 물려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바위들 사이에 가볍게 얹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 하니 부처님의 영험과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
자연현상을 합리적 이유를 들어 설명하는 일은 과학의 몫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만어사 앞 종석너덜의 종소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만, 신화가 지배하던 1세기경이라면 김수로왕이라도 그 설명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기(古記)를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나찰녀와 독룡이 합작해 부린 행패가 그리 심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 행패가 이따금 번개 치고 비오는 정도라면 요즘도 흔한 일이니 4년이 지나도록 오곡이 영글지 않은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연 스님은 이 설화를 통해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일러주셨지만, 이 설화의 본 뜻이 부처님의 신통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암괴류를 보고 놀란 우리 선조들이 그들 나름대로 암괴류의 생성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안심했다는 데 있다고 저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산에서 엄청 큰 바위가 굴러(?) 내려온 것을 이변으로 생각지 않고 동해의 용과 물고기가 변해 생성된 상서로운 일로 해석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기에 김수로왕과 부처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 해석한 것이라면 그 나름대로 충분한 논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설명이 오늘날 지형학의 설명과 다르다하여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이 설화가 오늘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합당한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침7시32분 관음사 앞을 출발해 구천산으로 향했습니다. 지도를 꺼내보고 이번 산행의 들머리가 관음사에서 좀 떨어진 영천암 입구임을 안 것은 삼랑진에서 타고 온 택시를 보낸 후였습니다. 별 수 없이 차도 따라 십 수 분간 걸어가다 오른쪽 위 영천암으로 가는 시멘트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른 아침 나뭇잎을 헤집고 들어온 아침햇살을 맞느라 진달래꽃과 아기똥풀이 한껏 제 색을 냈습니다. 축대를 높이 쌓아 지은 영천암을 입구에서 사진만 찍은 후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길이 희미해 먼저 오른 분들이 표지기를 달아놓지 않았다면 길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천암을 출발해 구천산 방향으로 곧바로 오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10여분 진행해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인가 찜찜해 하다가 8시10분 경 오른 쪽 아래 공장(?)에서 올라오는 제대로 된 산길을 만나고 나서야 안심했습니다. 왼쪽 길로 올라 다다른 능선에서 왼쪽 위 구천산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9시11분 해발640m의 구천산에 올랐습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능선 길을 오르며 모처럼 여유롭게 붓꽃 등 봄꽃들을 사진 찍었습니다. 연기에 그을린 듯 시꺼먼 줄기의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는 길을 지나 묘지에 오르자 암릉 길이 보였습니다. 딱 한 곳에서 배낭을 벗어 먼저 올린 후 홀드를 확보해 어렵사리 바위에 오른 다음부터 정상 바로 앞까지 신경 쓸 만한 바위 길은 없었습니다. 전날 신불산에서 까다로운 코스인 에베로리지를 오른 것이 바위에 대한 공포증을 많이 덜어주어 다른 때라면 겁 먹었을 정상 바로 앞의 바위 길을 가뿐히 통과해 망바위에 이르렀습니다. 북서쪽으로 만어산이, 북동쪽 멀리 가지산과 운문산 등 영남알프스의 연봉들이, 남쪽 가까이 안태호와 낙동강이 조망되는 망바위는 사방이 탁 트인 최고의 전망지여서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습니다. 망바위에서 조금 더 가 올라선 암봉이 소나무에 걸어놓은 표지기를 보고 구천산 정상임을 알았습니다. 바위에 뿌리를 박고 정상을 지키는 연분홍 꽃 진달래가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반갑게 저를 맞았습니다. 구천산 정상에서 바위길로 내려가다 길이 아닌 듯싶어 다시 돌아와 왼쪽아래 길로 내려갔습니다.
10시26분 감천고개로 내려섰습니다. 하산 길 중간 중간에 나있는 희미한 왼쪽 길을 무시하고 오른쪽으로 우회해 내려갔습니다. 옛날 산불이 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시꺼먼 소나무 숲을 지나 억새 숲속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이곳이 헬기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억새 숲속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내려가 얼마 후 다다른 묘지 삼거리에서 영축지맥 표지기를 보았습니다. 영축지맥이란 낙동정맥의 영축산에서 분기해 시살등, 금오산과 만어산을 지난 후 매봉산을 끝으로 삼랑진 앞 낙동강으로 침잠하는 산줄기로 여기서부터 만어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영축지맥 길과 겹칩니다. 이번 산행으로 가야의 신화가 깃든 만어산을 오르는 것에 더해 영축지맥 구간종주라는 생각지 못한 보너스도 받는다 생각하자 절로 어깨가 으쓱여졌습니다. 묘지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안부를 지났습니다.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짐을 내려놓고 10분 남짓 쉬는 동안 땀이 식어 등 뒤가 써늘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10분을 채 못 내려가 13번 도로가 지나는 감불고개애 다다랐습니다. 길 건너 나지막한 봉우리에 올라 만어사로 가는 오른 쪽 아래 시멘트 길과 나란한 방향으로 마루금을 이어갔습니다. 이내 만난 공사장을 지나 고도를 계속 높여 갔습니다.
11시22분 점골고개를 지났습니다. 공사장에서 이어지는 오름길이 가팔랐습니다. 150m가량 고도를 높여 다다른 능선삼거리에서 표지기가 가리키는 방향이 왼쪽 위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밑으로 우회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길로 바로 들어서기가 찜찜했습니다. 일단 왼쪽 위 봉우리에 올라 둘러보았지만 만어산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능선삼거리로 되돌아가 우회 길로 들어섰습니다. 찜찜한 마음으로 그냥 진행했다가는 제 길이 확인될 때까지 내내 불안해 좀 힘들더라도 봉우리까지 올라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산허리를 가로 지르는 우회 길로 진행하다 만난 삼거리에서 임도 따라 직진했습니다. 감천고개에서 만어사로 가는 시멘트길을 다시 만난 곳이 점골고개로 여기서부터 만어사 가는 길은 마루금 왼쪽 아래로 나 있었습니다. 해발고도가 500m를 조금 넘는 점골고개에서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왼쪽으로 내려선 안부에서 잠시 숨을 돌린 것은 여기서부터 만어산 정상까지는 오름길이 계속되기 때문이었습니다.
12시6분 해발640m의 만어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점골고개에서 올라선 541m봉(?)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다다른 안부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얼마간 가파른 오름길이었습니다. 해발고도가 600m를 넘어가자 능선 길은 평탄해져 걸을 만 했습니다. 서울북쪽의 산들은 아직 진달래꽃도 다 피우지 못했는데 여기 영축지맥의 몇 몇 철쭉나무는 꽃망울을 막 터뜨렸습니다. 낙남정맥 종주 길에 짬을 내 한 번은 만어산을 꼭 찾아 오르겠다고 별러온 것은 낙남정맥의 신어산과 마찬가지로 이 산에도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다, 이 아래 만어사 절 앞으로 다른 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대한 암괴류가 흐르고 있어서였습니다. 헬기장에서 멀지 않은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 두 개가 한쪽 모서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공터가 넓어 전망이 구천산 정상에 못지않았습니다. 영남알프스의 연봉들이 더 가깝게 보였고 삼랑진 앞을 흐르는 낙동강도 훨씬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정상에서 응달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든 후 만어사로 내려갔습니다.
13시6분 만어사(萬漁寺)에 다다랐습니다. 정상을 출발해 이동통신기지국을 지나자 헬기장으로 보이는 넓은 공터와 기지국으로 올라오는 차도가 나타났습니다. 차도 따라 10m도 채 못가서 왼쪽 아래로 난 산길로 내려갔습니다. 가파른 하산 길이 십 수 분 계속되다가 이내 경사가 완만해져 만어사에 다다르기까지 얼마간 산행이 편했습니다. 정상출발 반시간이 채 안지나 만어산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2층 팔짝 지붕(?)의 미륵전과 단층의 아담한 대웅전과 삼층석탑을 둘러본 후 아래로 내려가 돌너덜길을 걸었습니다. 이 절의 주인은 아무래도 대웅전에 정좌하신 부처님이 아니고 저 앞 돌너덜에 드리운 어산불영(魚山佛影) 같았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은 돌너덜의 흐름(?)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종석너덜과 헤어졌습니다.
14시28분 우곡리 삼거리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종석너덜을 건너 미륵전 앞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큰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만어사로 올라가는 차도를 만나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오른 쪽 아래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한참을 내려가 만난 여러 기의 묘지 앞에서 옷을 갈아입느라 잠시 쉬었습니다. 조금 내려가 만난 임도(?)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야 할 것을 오른 쪽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꽤 많이 돌았습니다. 수 분 후 아스팔트 길을 만났고 이 길을 따라 우곡리로 땡볕을 쬐어가며 걸어 내려갔습니다. 아침 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쌀쌀했는데 한 낮이 되자 아스팔트에서 내뿜는 열기로 한 여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꽤 더웠습니다. 아침에 타고 온 택시를 불러 삼량진 역으로 가서 밀양 행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몇 해 전 부산의 금정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정상을 올랐다가 범어사로 내려가며 왼쪽 골짜기를 꽉 메운 너덜들을 보았습니다. 그 아래 범어사(梵魚寺)와는 한참 떨어져 있는 금정산의 암괴류도 만어사(萬魚寺) 앞 그것들보다 그리 작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산 꼭대기에 황금색 물이 가득 차있는 우물이 있었는데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놀다 갔다는데서 금정산(金井山)의 산 이름과 범어사(梵魚寺)의 절 이름이 유래했다 합니다. 지난 4월에는 낙남정맥 종주 길에 신어산(神魚山)을 지났습니다. 신어산(神魚山)의 신어(神魚)는 수로왕릉 정면에 새겨진 두 마라 물고기를 뜻한다 합니다. 신어산에 자리한 은하사 대웅전의 수미단에 새겨진 쌍어문양이 수로왕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도래했음을 일러주는 징표일지도 모른다 합니다. 이 일대에 물고기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산이나 절이 많은 것은 수로왕이 지배한 가야 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물고기를 몰고 다니는 수로왕(首露王)을 수로왕(水路王)으로 불러도 괜찮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 이만 산행기를 맺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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