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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99. 5. 24. 토요법회 _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은 이호원 교우님 <원불교를 만나서>가 있었습니다.
씩씩한 목소리로 잘 해주셨습니다. 호원 교우님이 원불교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나고 나서 어떻게 변했는가. 이야기를 통해 느끼셨을 겁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소중하며 인격을 존중받아야합니다. 동일한 권리를 가지며 공정하고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외모, 목소리, 지혜, 손금, 성격, 복 등은 다 다릅니다. 이 차이는 인과의 이치에 의해서 본인이 지은 바에 따라 발생합니다.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일란성 쌍둥이도 몇 십년간 다른 환경에서 살게 되면, DNA가 바뀐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며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호원 교우님의 생김새도 호원 교우님이 만들고 있습니다. 강연 중에 체중을 20kg 감량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본인이 다 만든 겁니다. 호원교우 외모도, 성격도 본인이 만들었습니다. 미래에 어떻게 되는가도 본인이 만듭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무엇이 만들까요? 본인의 생각, 마음, 몸이 어떻게 작용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가령 형제가 없다보면 관계성이 약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서로 간에 먹을 걸로 싸워도 보고, 옷도 뺏어 입어보며 경쟁관계를 가집니다. 한편 협력관계를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타인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회성이 형성됩니다.
본인이 본인을 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신의 얼굴도 거울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보는 것은, 부모를 통해, 형제를 통해, 스승을 통해, 친구를 통해서, 동지를 통해 자신을 객관화시킴으로써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은 관계가 중요합니다. 호원교우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해주고 싶은 말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내용 < 관계”
내용은 현실, 사실이기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아무리 좋은 노래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부르면 듣기 싫은 반면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듣기 좋습니다. 대상의 좋고 나쁨은 그 대상의 내용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지적인 사람들은 사실과 내용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관계 속에서 삽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감정, 느낌,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칫 내용만을 추구하면 타인과의 관계가 곤란하게 되고, 관계가 곤란하면 결국 내용도 퇴색되게 되며 문제가 발생합니다. 직장생활을 비롯한 모든 생활에서 이 관계성을 어떻게 잘 갖추느냐가 중요합니다.
내용은 원불교로 치면 삼학과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의 목적은 대타관계를 잘하자는 것입니다. 대타관계를 잘하자는 것이 신앙입니다. 수행이 수행에 멈추면 절름발이 수행이고, 꽃을 피우지 못한 수행입니다. 수행의 꽃은 신앙입니다. 출발이 신앙이고, 끝이 신앙입니다.
종교도 내용(수행)으로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계(신앙)로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관계(신앙)로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많은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줄까요? 좀 전에 한 질문 중에 고려대 출신 공군병사가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자살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주위에서 나를 구박해도 결국은 구박일 뿐임을 알아야합니다. 주위 사람은 결국 내 인생을 좌지우지 못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내가 나를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아셔야 합니다.
주위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도 알고 보면 주위에 의해 일으켜진 내 마음입니다. 따라서 주위환경이 아니라 주위환경을 느끼는 내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가령 보름달이 떴다고 생각해봅시다. 굶주린 이는 ‘보름달’이라는 빵을 생각할 것입니다. 실연당한 사람은 헤어진 연인의 얼굴이 떠오를 것입니다. 달은 그냥 가만히 있는 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빵으로 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이고, 외롭게 보이는 것은 결국 내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목적은 바로 이런 것에 속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생을 내 마음의 노예로서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 남에게 내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삶입니다.
인정받으려 집착할수록 인정 못 받습니다. 직장에서 직원이 월급에 대해 불평하면, 도리어 더 못 받습니다. 가만히 자기업무를 묵묵히 하고 있으면 월급은알아서 올라갑니다. (물론 너무 낮으면, 노조도 결성하며 행동을 해야겠지요) 무엇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돈도 따라오게 하고, 명예도 알아서 굴러오게 하며, 이성도 알아서 따라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자기가 과거에 했던 모든 결과가 현재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과거에 지은 바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 내가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내 욕심, 내 뜻대로 안된다고, 원망하며 삽니다.
호원 교우님이 강연중에 말한 ‘알아차림 공부’에 대해 제가 한 마디 더하겠습니다.
“지 관 (止 觀)”
마음공부는 알아차림 공부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리라면 먼저 지(止), 즉
멈춰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알아차리려면 멈추고 비워야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보입니다. 분별을 분별로 대체해 인식하려는 것은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고 속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경계를 대할 때 본래 경계가 없는 마음으로 경계를 비추는 것과, 경계에 물든 마음으로 경계를 대하는 것은 다릅니다. 멈춘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입니다. 내 상과 집착과 욕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알아차려집니다. 그러지 못하면 이기적 알아차림으로 바뀌어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게 됩니다.
이기적으로 알아차린 사람들, 대충 알아차린 사람들은 자신이 알아냈다고 좋아 하나, 옆 사람들은 피해를 봅니다. 이기적 알아차림은 자기 욕심을 놓지 못한 알아차림이라 그렇습니다.
강연중에 언급한 수행품 33장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수행품 33장 : 『문 정규(文正奎) 여쭙기를, “경계를 당할 때에 무엇으로 취사하는 대중을 삼으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 생각으로 취사하는 대중을 삼나니, 첫째는 자기의 본래 서원(誓願)을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스승이 가르치는 본의를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당시의 형편을 살펴서 한 편에 치우침이 없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라, 이 세 가지로 대중을 삼은즉 공부가 항상 매(昧)하지 아니하고 모든 처사가 자연 골라지나니라.”』
동산 문정규 선진님은 연로하신 상태에서 대종사님 문하에 오십니다. 대종사님보다 나이가 많으셨지만 열심히 성리를 공부하셨습니다. 문정규 선진님은 대종사님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면, 대답을 많이 하셨던 분입니다. 죽기 3일 전까지 견성인가를 받고자 하셨지만 결국 인가를 못 받고 열반하십니다. 돌아가신 뒤에, 대종사님은 문정규 선진님이 내생에 크게 될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살아 있을 때 칭찬받으려고 집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칭찬과 비난을 초월해야합니다. 원불교 공부는 바로 그러한 공부입니다. 원불교 공부는 칭찬받으려는 공부가 아니라, 칭찬 속에서도 공부하고 비난 속에서도 공부하는 칭찬과 비난을 초월한 공부입니다. 이것이 성리에 바탕한 공부입니다. 비난받아도 공부요, 칭찬받아도 공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난받으면 칭찬이 없다며 상대를 원망하고, 칭찬받으면 자아도취하여 다시 강급의 길로 떨어집니다. 원불교 공부는 절대 그런 공부가 아닙니다.
법문에서 문정규 선진님은 “경계를 당할 때 무엇으로 취사를 삼으오리까” 질문하십니다.
경계를 당했다는 것은 뭐죠? 내 마음을 뺏겨버린 상황이 왔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끌렸거나, 화가 나거나, 옴짝달싹 못하거나, 너무 괴롭거나, 너무 힘들거나 또는 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 때입니다.
하지만 경계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마음을 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계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세요?
사람들은 문 잠그고 자거나, 이불속에서 울거나, 친구에게 전화통화로 몇 시간 동안 경계를 준 사람을 비난하거나, 전화를 끊어버리고 안 받아버리곤 합니다. 아니면, 갑자기 강원도 등 다른 곳으로 향하는 등 여러 가지 행동을 취합니다.
남자들은 술을 찾고 여자들은 빵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법원에 고소하고 흥신소를 찾기도 합니다. 사람 따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공격적으로 대응하며, 어떤 사람은 그 상황을 회피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모두 해결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말을 찬성해줄 사람만을 찾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계를 당하면, 이 상황을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설명해줄 사람을 안 찾습니다. 나를 칭찬해주거나 위로해주거나 지지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얘기해줄 사람은 피합니다. 진짜 찾아야할 스승, 멘토, 지혜로운 사람을 안 찾습니다.
여러분 부모님들이 정말 여러분을 목숨 바쳐 생각해주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의 스승님이 여러분을 진짜 위해줄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경계를 당할 경우 부모와 스승을 멀리하고 자기를 동의해줄 사람만을 찾습니다. 그래서 경계를 대하면 꼬이기만 합니다.
대종사께서 첫째로 제시해준 것이, 자기의 세운 바 본래서원을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호원 교우님은 세무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입니다. 고시를 하려고 하는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서원반조, 목적반조입니다. 설사 학원강사가 마음에 안들어도, 집안에 일이 발생하더라도, 내 몸이 피곤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친구가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적과 원력이 있으니까요.
저의 경우에는 잠이 많습니다. 제 어머니는 저 같은 잠보가 어떻게 새벽에 좌선을 하냐 걱정하셨습니다. 저는 “같이하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바로 일어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숙면을 취해도 힘들어요.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기 싫다는 육신의 요구, 습관, 중생심이 저를 붙잡습니다. 그때 그것을 이기는 방법이 바로 서원입니다. 내일 시험을 치루는 사람이 오늘 친구랑 술 먹겠어요? 시험이라는 목적을 잊지 않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서원은 대조할 때 무서운 힘이 납니다. 서원은 자력적 측면이 있습니다.
‘서원(誓願)’은 ‘외서내원(外誓內願)’의 준말입니다. ‘외서’는 밖으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부모님, 교무님, 법신불에 한 약속입니다.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서원이 아니라 그냥 원입니다. 즉 ‘서원’은 밖으로 오픈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목표가 있습니다!” 라고 타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혼자만의 생각은 ‘서(誓)’ 자를 못 붙입니다. ‘서’는 서약하는 것입니다. 법신불전에, 스승에게, 부모님께, 직장의 동료들에게 약조하는 것입니다. 선서는 “약속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경계가 닥쳐 약속을 지키기 싫어도, 약속에 대한 신용을 생각하며 지키는 힘을 갖자”는 의미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약속을 쉽게 뒤엎는지 모르겠습니다. 변덕이 심해 하루에도 여러차례 결정을 바꿉니다. 이러니 누구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온다고 하면 오고, 간다고 하면 가야지요. 약조를 안 지킨 겁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서원은 대원(大願)이라 합니다. 글자그대로 큰 원입니다. 또한 대원은 대욕(大慾)입니다. 큰 욕심입니다. 돈 잘 벌어서 시집장가 잘 가고, 멋진 집에서 멋있게 살아보자는 소망은 서원이 아닙니다. 그냥 욕심입니다. 서원은 내가 사은의 은혜를 받고 사니 사은에게 보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원이지요.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하는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고 있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아셔야합니다. 호원 교우의 교무님인 정 봉원 교무님께서는 호원교우를 오랜 기간 상담해주셨는데, 이를 시중의 병원비로 계산하면 호원교우는 수백 만 원에서 수천 만 원에 상당할 것입니다. 돈으로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그 고마움을 알라는 것입니다. 출가하신 분이니까 당연히 타인에게 무상으로 배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인생만 소중한 게 아니라 남의 인생도 소중한 것입니다. 돌고 도는 인과의 이치가 있습니다. 교무님은 저를 상담해주시려고 출가하신 것 은 아니지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 고마움을 어떻게 보은할 것이냐. 그것이 서원입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고마운 마음을 갖겠다는 것이 서원입니다.
제 서원은 문자화되어있습니다. 문자로 개념화 되어야 확실한 것입니다.
제 서원은 “영생의 행복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대종사님의 교법이 다 들어있습니다. 교법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가 되고 수용이 되며, 나름대로 깨침이 있어서 이러한 서원을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저는 출가를 결정했습니다.
첫째는 영생개념입니다. 불생불멸이지요.
둘째, 행복은 인과를 말합니다. 누구나 행복을 위해 살지만 죽을 때 허망한 행복, 눈물이 될 행복은 고통입니다. 이생에도 잘 살지만, 영생이 있다고 하니 영생에도 잘 살아야지요. 영생을 잘 살려면 이생에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이 나옵니다. 선하다 졸릴 때, 아침에 일어날 때, 일을 엎어버리고 싶을 때, 서원을 대조하면 한순간에 눈 녹듯 녹아버립니다. 서원을 대조해야합니다. 회사에 왜 다니는지 교당에 왜 다니는지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대종사님께서도 경계를 많이 당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마음공부를 하겠다고 회상을 찾아오고는, 명예를 구하고, 외학과 외질을 찾는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종사님 교법으로 원만한 사람이 되어 이 사회에 보답하고, 영생의 행복자가 되자고 해놓고는 명예를 구하고, 외학과 외질을 구하면 안되겠지요. 여러분 각자각자가 소중해요. 여러분 인생도 소중하고, 여러분 부모님 인생도 소중하고요, 제 인생도 소중해요. 옆 동지 인생도 소중하고, 교무인 제 인생도 소중합니다. 서원에는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얘기도 들어있습니다. 나만 소중하다하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면 어떡합니까. 다른 사람 힘들게 하는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환영받고 박수 받는 것이 서원입니다.
두 번 째 스승이 가르치는 본의를 생각하라 했습니다. 스승이 가르치는 본의는 제자들을 고생시키겠다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영원히 구제 못하는 중생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본의가 아닙니다. 스승님은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모두 부처임을 깨닫게 해주고, 이 세상이 낙원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제자들을 때로는 혼내고 구속하기도 하고 자유를 주기도하며 어르고 달래 자행자지의 삶이 아니라, 욕심에 속아서 나중에 더 큰 고통을 받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의 길로 안내하길 원하는 분들입니다. 때로는 금지하는 조건으로 때로는 권장하는 조건으로 안내하시는 것이 스승의 본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원력이 있는 사람은 스승의 본의를 따라요. 내 원력과 스승의 본의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내 원력에 욕심에 있거나, 스승의 본의를 파악하지 못하면 내 원력은 스승의 본의와 괴리됩니다.
신심이 무서운 힘이 있어요. 신심으로 하는 기도, 정성, 신앙의 힘이 무섭습니다. 따라서 내 원력을 이루기 위해 신심을 따릅니다. 그 스승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내가 진짜 나에게 가장 은혜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심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본의는 제불제성의 심인이라 하셨습니다.
모든 부처님들이 성품은 어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 경계에, 좁아진 마음에 헤매는 것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교법을 통해 온전한 마음으로 취사하는 것, 교법을 통해 착심에 욕심에 탐심에 진심에 치심에 걸려있으면 본래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경계 이전에는 본래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스승의 본의입니다.
대종사님이 양도신 선진님께 썼던 편지에 “나는 어떻든지 너희들이 성불하기만을 기도한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대종사님의 본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 그거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종사님은 때로는 제자를 혼내기도 하고, 때로는 안아주기도 하셨습니다. 바로 제자들을 성불시키기 위해서요.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성불입니다. 성불은 부처님이나 교무님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불은 참 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거짓 나에 속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참 내가 주체적으로 내 인생을 내가 꾸려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자재로 내 인생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성불입니다.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까지도 해결해줄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 성불입니다.
세 번째로는 본의가 아무리 좋아도, 당시의 상황에 따라 취사가 달라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자께서는 중도라 말씀하셨지요. 예를 들어, 차분히 온전히 취사해라했더니, 총부에 화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함을 챙겨야지’ 하면서 마음을 안정시키며 “지금 불이 났습니다.” 아주 차분하게 말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불 난 줄을 모르겠지요? 이는 상황에 맞는 취사가 아닙니다.
우리 동기 교무가 좌선을 얼마나 좋아해서인지, 좌선시간에 뭔 소리가 들렸는데도 불구하고 좌선 시간에는 좌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무시했습니다. 좌선 끝나고 소리가 난 곳을 찾아보니 옥상 수도관이 터져서, 물난리가 났습니다.
좌선 때 소리가 들리면, 그때의 진정한 온전함은 소리 난 데를 찾아가서, 수도파이프를 잠그는 것입니다. 선 시간에 선만 하는 것이 온전함이 아닙니다. 선에 집착하고 온전함에 집착하면 그것은 진정한 온전한 취사가 아닙니다.
서원을 챙기고, 신심을 챙기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상황 따라 여건에 맞게, 서두를 것을 서두르고, 차분할 것 차분하고, 일어날 때 일어나고 앉을 자리에 앉고, 웃을 자리에 웃고 울 자리에 우는 것이, 바로 취사의 대중을 맞게 잡은 것입니다. 그래야 처사가 골라갑니다.
은혜가 되어야지요. 취사가 제대로 꽃을 피우면 자리이타를 통해 은혜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낙원세상이 되는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교당에 와서도 내가 무엇하러 왔는지 내 서원이 무엇인지 목적을 대조하면, 단장이 서운하게 대하거나 어떤 경계가 찾아와도 다 이겨냅니다. 그리고 스승이 하라는 신심과 교법으로 적용해 나가면 어지간한 경계들은 경계 속에서 공부가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문답감정을 받아가며 그 공부를 응용성 있게 상황 따라, 집착하지 않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 사람에게 무서운 힘이 있는 겁니다. 서원은 죽어서도 가져갑니다. 죽으면 처자식은 놓고 갑니다만 서원은 갖고 가요. 확실한 믿음의 힘이 있다면 믿음도 갖고 갑니다.
원만하게 취사하는 것은 무량한 인연에게 큰 복덕이 되지요. 어디에서나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계를 당하면, 욕심에, 화난 마음에, 습관에, 업력에 의해 경계 이전의 마음은 어디로 사라져버려 경계에 빠진 마음에 스승의 가르침은 부담스럽다고 피해버립니다. 교무님한테 하면 안 되는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법에도 구속되거나 집착하지 않으면서 응용할 수 있는 지혜, 연구력, 그것이 있는 사람은 쑥쑥 성장할 것입니다.
첫댓글 법륜굥님 짱짱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