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760) – 코로나로 일깬 세상
춘분(春分)이 되면 겨우내 길었던 밤의 길이가 낮과 같아지고, 이날을 기점으로 낮이 점차 길어져 계절은 완연한 봄으로 접어든다. 3월 21일을 전후해 태양은 황도를 따라 움직이다가 적도면과 만나는 춘분점에 이르게 되는데, 올해는 지난 20일 12시 50분에 춘분이 들었다. 농경사회에서 춘분은 농번기의 시작을 알리는 기준점, 날마다 걷는 들판은 봄갈이(春耕)가 한창이고 활짝 핀 봄꽃 사이로 나비가 춤을 춘다. 계절은 봄이로되 코로나로 움츠리고 경제가 얼어붙어 봄 같지 않은 봄(春來不似春)이로세.
한쪽은 꽃물결, 다른쪽은 봄갈이가 한창인 집앞 들판
코로나로 일깬 세계의 허상,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의료체계가 취약하고 철옹성 같이 단단하다고 여긴 경제구조가 거품처럼 가라앉는다. 대세를 거스르며 올림픽 개최에 안간힘을 쓰는 일본이 안타깝고 중국을 넘어선 확진자와 사망자를 내며 쩔쩔매는 유럽이 안쓰럽다. 모든 분야에서 세계에 군림하던 미국이 코로나 대응에 허둥대며 뉴욕증시가 휘청거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온 지구촌이 코로나 위기에 숨죽이며 전 세계가 사실상 이동제한상태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미증유의 위기에 비교적 차분히 대응하는 우리의 역량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촉즉발의 외환위기를 범국민적인 금모으기로 슬기롭게 극복하고 세계적인 사재기열풍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등 높은 의식수준의 한국사회가 자랑스럽다. 목전의 이해에 눈이 어두운 정치꾼들은 빼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코로나19 안내문자는 지금이 위기임을 일깬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발휘하여 더 반듯한 공동체를 일구자.
언론을 통하여 살핀 코로나 세태 한두 가지.
1. 씁쓸한 사재기열풍
영국의 BBC는 최근 한국에서 코로나19가 유행하고 있음에도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 등 시민들이 의연한 자세로 코로나19에 대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BBC는 같은 동양권인 홍콩이나 싱가포르에서는 사재기 열풍이 불고 있지만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한국인의 시민의식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과 달리 전 세계에 사재기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1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자 주말인 14~15일 미국인들은 대거 생필품 사재기에 나섰다. 네덜란드 등 유럽도 예외는 아니다. 전 세계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사재기 광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20일 한국에서는 코로나19가 유행하고 있지만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지 않고 있다며 한국인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극찬했다. 미국의 ABC방송도 지난 16일 '한국은 시민이 위대한 나라'라고 보도했다. 그동안 외신들은 한국의 빠르고 광범위한 진단기술에 관심을 보여 왔다. 특히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소에 극찬을 보냈었다. 그런 칭찬릴레이가 이제는 사재기 없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어제(3월 23일) 한 방송은 영국 국민공공보건서비스(NHS) 소속 간호사 돈 빌브러 씨가 눈물로 호소하는 영상을 소개하였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48시간 교대근무를 하다가 지금 퇴근했습니다. 교대 근무 후 마트에 들렀지만 사재기 때문에 텅 빈 매대를 봐야 했습니다. 난 단지 앞으로 48시간을 버틸 음식을 원할 뿐입니다. 과일도 야채도 없는데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이 아플 때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나 같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만 좀 하세요, 제발.’
2. 봄꽃이 빨리 지기를 바라는 고장
지리산을 끼고 있는 전남 구례군은 대부분 산지로 이뤄진 산간 농촌 지역이다. 군민 2만6000여 명 중 55%가 농업에 종사하는 구례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남의 일처럼 여겨졌다. 최근 구례군이 산수유축제를 취소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한 것을 놓고도 “별걱정을 다 한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대한 공포는 시골 오지(奧地)도 비껴가지 않았다. 경북 경주의 35번째 코로나19 확진자 A씨(60·여)가 최근 구례 산수유마을 일대를 다녀간 사실이 확인됐다. 지난 18일 오전과 오후 산수유마을과 화엄사 인근 식당, 사성암을 찾았다고 한다. A씨는 사흘이 지난 21일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구례군까지 코로나19 불똥이 튀었다.
구례군은 A씨의 확진 소식이 알려지자 즉각 방문 지역에 대한 방역에 나섰지만, 불안감은 여전하다. 축제를 취소했는데도 매년 축제가 열리던 산수유마을을 중심으로 연일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어서다. 구례군에 따르면 지난 10일 산수유꽃이 핀 후 주말과 휴일이면 하루 평균 3만여 명이 이곳을 찾고 있다.
평일까지 몰려드는 상춘객 규모와는 달리 지역 상권에는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도 고민거리다. 관광객들이 코로나19를 의식해 지역 내 식당이나 카페, 관광지 방문을 꺼리고 있어서다. 이런 상황은 구례와 인접한 지자체들도 비슷하다. 전남 광양시는 매화축제를 일찌감치 취소했는데도 주말·휴일이면 4만 명 이상이 다압면 매화마을을 찾고 있다. 광양시는 올해 매화가 핀 후 매화마을 일대를 방문한 인파가 31만 명에 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매화마을 주민들이 “관광객들 때문에 외출도 못 하고 꽃이 지기만을 기다리는 신세”라고 하소연할 정도다. 구례군은 당장 산수유 꽃이 지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입장이다. 산수유와 함께 구례를 대표하는 봄꽃인 벚꽃이 3~4일 뒤면 개화하기 때문이다. 구례군은 일대에 방역초소나 방역시설 등을 설치할 예정이지만 관광객 유입에 따른 불안감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입장이다. 김순호 구례군수는 “군민들을 생각할 때 ‘제발 구례 방문을 자제해주십시오’라는 현수막이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산간 농촌마을까지 번진 주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전 국민적인 사회적 거리두기가 절실한 시점이다.(중앙일보 3. 24 봄꽃이 지기만 기다리는 남도 주민들)
벚꽃축제는 취소되었어도 진해를 찾는 시민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