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 破墓) > 실화 실제 친일파 이완용 파묘
실제 <파묘>된 친일파 이완용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에선, 험한 것이 나온 묘의 주인 박지용의 조부는 을사오적이다. 박지용은 할아버지가 친일파라는 걸 알고 있었고, 할아버지의 정체와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기 위해서 파묘는 하겠지만, 할아버지의 관을 열지 말고, 염도하지 않고, 관채 태워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실제로, 친일파인 사람의 묘가 파묘 된 기록이 있다. 바로 대표적인 친일파 학부대신 이완용의 묘가 증손주에 의해 파묘 되었다.
이완용의 친일 행적
이완용은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을사 5적, 정미 7적, 경술 국적에 모두 들어가는 매국 3관왕 타이틀을 가진 악귀적인 친일파였다. 이완용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했고, 헤이그의 밀사를 파견한 고종을 향해 칼을 빼들고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라고 고함을 지르며, 양위를 강요하고, 내각 회의에서 황제 퇴위를 결정했다. 또한 순종 즉위 이후, 대한제국 국정의 대부분을 넘기는 정미 7조약을 맺게 하여 한국 군대해산을 주도했고, 순종을 압박하여 한일 합병에 앞장섰다. 강제병합 이후, 이완용은 매국의 대가로 일본 귀족 작위와 특별 은사금을 받았으며, 여의도의 7.7배 넘는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매국, 반민족 행위로 큰 돈을 벌은 천박한 자였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조국을 일제에 팔아넘긴 이완용은 일본의 특별 대우에 열성적인 친일 활동으로 보답했다. 3.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을 세 차례에 걸쳐,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발표했다. 이완용이 쓴 경고문에는
「'시위라는게 꼭 힘도 없는 것들이 하는거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해서 힘을 키워라. 조선인의 경거망동을 엄중히 단속해야 하며, 운동에 참여한 자들은 민족을 멸망시키고, 동양 평화를 파괴하는 적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완용은 3.1일 운동을 비난한 이 경고문을 작성한 공로로, 1920년 후작으로 승격된다.
그리고 1924년, 이완용의 차남인 이항구 역시, 아버지 못지 않은 친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보통 작위는 세습하는 때문에 부자가 모두 자기를 수여받은 경우는, 이완용 부자 외에는 없기 때문에, 친일파 분야에서, 이완용 부자는 신기록 보유자들이 볼 수 있다. 또한, 이항구의 아들 이병주는, 해방 이후 일본에 가서, 일본인이 되었다.
이완용의 매국 행위가 극에 달하자, 이완용은 독립운동가들의 암살 1급 대상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자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식에서 추도문을 읽으며, 이토가 자신의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또한, 이토의 뜻을 지지하고, 존경한다고 말하며,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토가 암살된지 두 달 후,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명동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이완용이 나타나자 옆구리와 어깨 등 총 세 차례 비수를 날렸다. 하지만 나쁜놈은 목숨도 질기고 돈도 있고 빽도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대한의원으로 후송되어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김구가 무고한 생명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재명 의사에게서 총을 빼앗기에 이재명 의사는 칼을 사용했고 이완용이 살아남자 김구가 총을 뺏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이후 이완용은 죽지 않고 살았으나 이때 입은 폐의 상처 탓에 줄곧 폐렴과 천식을 알았다. 일본이 제공한 의료진 덕분에 살아난 이완용은 사건을 계기로 더욱 열정적인 매국 활동을 했고 결국 1910년 8월 22일 한일강제병합 조약을 맺게 하여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이완용의 사망
이완용은 69세가 떵떵거리며 살다가 1926년 2월 11일 사망했다. 이완용은 죽기 전 남긴 유언장에 힘없는 다리를 부축해 달라고 남에게 부탁한 것이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은 일이라고 매도 당해야 하냐' 며 억울해 했다고 한다. 이후 이완용의 장례는 1300여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완용은 매국 친일의 대가로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국화 대수장은 일본 왕실이 현재까지도 수여하고 있는 현장으로 역대 수훈자 목록의 한국인은 총 4명이며, 이 중 왕족 세명을 제외하고 왕족이 아닌 조선인이 받은 것은 이완용이 유일하다.
이완용의 묫자리, 파묘
이완용은 도굴, 파손 등을 염려해 자신의 묫자리를 서울과 먼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산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워낙 악랄하고 유명한 매국노 있고 매국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 사건이 일어났다.
해방 이전에도 훼묘 사건이 종종 있어서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고, 해방 이후로도 식칼이 묘에 꽂혀 있거나 봉분이 파헤쳐지는 등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끊이지 않자, 매장된 지 53년 만인 1979년 증손자인 이석형이 '오래 둘수록 치욕만 남는다며' 파묘 후 유골를 꺼내 간이 화장하고 인근의 장암천에 뿌렸다. 당시 파묘 작업에 동원된 인부들의 말에 따르면, 묘의 관리가 너무 엉망이어서 이완용의 무덤인 줄은 미쳐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 이위 대훈위 후작 우봉 이공지구'라고 씌어 있었다.
또한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 부부의 묘도 2006년 8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묘는 봉분이 사라져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고 상석만 남아 있었으며 상석도 파손, 묘 주인을 알리는 글씨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 지역 원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직후 마을 주민들이 묘의 불을 지르고 무덤을 파헤쳤다고 한다.
한편 살아있는 이완용의 호손 중 증손자 이윤형은 1992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에 돌려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하여 수천평의 땅을 되찾았다. 사실 이완용의 땅을 국가에 귀속시킨것은 0.05% 극히 미미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돌려 준 건이다. 이완용과 그의 일가가 친일 행적을 통해 이룬 재산의 전부는 지금도 여전히 대물림되어 반민족 행위자 후손들의 재산 증식에 쓰이고 있다.
민족과 겨레의 깊은 생채기 반민족행위자의 비겁하고 잔인한 행적을 보며 만해 한용운 선생의 말씀
《해방 이후 백년이 지나야 비로소 해방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