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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너 뛰었다. 함석헌
씨알 여러분 고맙습니다. 기쁩니다. 이 새 언덕에서 서로 만났으니 말입니다.
씩씩한 영으로, 기쁜 마음으로, 살아난 몸으로,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멘! 아옴!
그 무서운 것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그 캄캄한 깊음 말입니다. 그 숨 막히는 안개 말입니다. 그 무한의 단절 말입니다. 그 무거운 짐 말입니다.
꿈이라면 몰라도, 꿈이 아니고 사실이라면, 이 언덕에를 오신 이상, 건너뛰지 않고는 될 수 없고 그 짐을 떼버리지 않고는 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셨나 말입니다.
이 새 언덕에서 첫째로 나가는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곧 인사요, 감사요, 기도요, 찬송입니다.
정말 어떻게 건너뛰셨습니까? 거기는 걸어서는 못건너는 곳, 다리를 놓을 수도, 배를 띄울 수도, 비행기를 날릴 수도 없지요, 거기는 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 이론의 줄을 걸수도 없는 곳, 거기는 일체가 부정되는 낭떠러지입니다. 거기는 참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시간이 없어지는 곳, 그러기에 정말 무서운 시간의 모습에 접하는, 곳 아닌 곳, 순간 아닌 순간.
호모 사피엔스도 거기선 막혀버립니다. 호모 파베르도 별수가 없습니다. 요새는 호모 포텐스(Homo potens)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더구나도 어림이 없습니다.
“이 해가 간다.”할 때 일체가 절대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습니까? 용납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는 시(是)도 비(非)도 없습니다. 선도 악도 없는데 성(成)이니 패(敗)니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 망상이라고 버티어 보려했댓자 말이 채 나가기 전에 선 땅이 꺼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어차피 해 아랫 물건들입니다.
낡은해 새해를 우리가 만든 것 아닙니다. 누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게 자기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나선 것입니다. 그 순간을 참이라 합니다.
참이 무엇입니까? 묻는 것은 빌라투스만이 아닙니다. 만물이 묻고 또 묻는 것이 그것입니다.
참을 참(滿) 이라고도, 참(忍) 이라고도, 참(站) 이라고도, 참(寒) 이라고도 해봤습니다마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참은 무엇보다도 참(斬)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잘리었습니다. 목이 떨어지고 허리가 끊겼습니다.
혈관이 잘려야 피가 뵈고, 목이 끊어져야 숨이 나타납니다. 섣달 그믐이 와야 개인의 살림, 인류와 역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죽음으로만 사는 생명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거기를 어떻게 건너뛰었는가. 그말입니다. 더구나 떨어도 흔들려도 칼로 잘라도 아니 떨어지는 그 짐을 어떻게 벗으셨습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고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건너뛴다 했지만 건너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알 수 없습니다. 모릅니다. 그것은 내가 할 수도,누가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누군지 모를, 누구도 아닌 그이 자신이 그렇게 할뿐입니다. 그가 우리 앞에 닥아 설 때는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건너뜀을 알 놈도, 할 놈도 없습니다. 거기는 현재 동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기적이 나타난 후 우리 입에서 증거하고 감사하는 과거 동사가 나올 뿐입니다, “나는 건너뛰었다”라고.
예수께서 살았을 때는 몇 번씩이고 자기가 죽고 살아난다는 것을 말씀하였으면서,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나는 다시 살아난다.” 하시지 않고,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다 이루었습니다.” “내 영혼을 바칩니다.” 하셨을 뿐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이 잘 죽으심 곧 참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잘 죽으셨기 때문에 참으로 잘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해를 넘기는 것 아니라 해에게 우리가 넘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는 해 채가기 전에 오는 해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거짓말이요, 새해가 벌써 다됐는데 묵은 해의 잘못을 갚는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묵은해의 것을 훔쳐내지 않는 새해 준비도 있을 수 없고, 새해에 구멍을 내지 않는 낡은 해 기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날 수고는 그 날에 족합니다.
그러므로 이 새 언덕에서 서로 주고받아 서로서로의 속을 일깨워 주어 봄이 올 때 어김 없이 억지함도 없이 새싹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참 말씀은 오직 하나 “나는 건너뛰었다”가 있을 뿐입니다.
대적은 밖이 아니라 내 속에
씨알 여러분, 정치는 잘난 것들이 살자는 일인지 모르지만, 종교는 분명히 못난 것을 살게 하자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는 결코 완전만이 있는 곳 아닙니다. 그보다도 완전이라 할 것은 극히 드물고 거의 그 전체가 불완전한 것으로 차 있는 것이 우주입니다. 물질적으로, 생리 심리적으로 그럴뿐 아니라, 도덕적 정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어진 마음이란 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새해에 기쁨과 감사로 내놀 말은, 가난하고 둔한 지아비 지어미가 만들어낸 좀 먹은 과일이나 엉성하게 씨 먹지 못한 베 같이, 허술한 말뿐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도리어 씨알에게 안심하고 받을 선물이 될 것을 믿고 부끄럼 없이 내놓습니다.
나는 지난해 마지막에 여러분을 보고 웃음으로 설을 새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마지막 밤이 다가오니 한 초 한 초가 잘리어 나갈수록 암흑은 영겁의 바다처럼 자꾸 넓어만 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짐은 점점 가속도적으로 무거워만 갔습니다. 그리고 그 무게가 내리누를수록 내 살이나 뼈나 되는 양 바짝바짝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내 마음은 어서 떠밀자는데 내 손은 더욱 더 감아쥐었습니다. 나는 이제 인생의 저녁 나룻가에 서서 한해의 저녁과 일생의 저녁을 겹쳐서 맞게 될 처지이므로 그 짐을 어서 시원히 벗고 저 밀물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는데, 내심정은 도리어 그것을 벗어버리면 죽을 것만 같이 겁을 냅니다. 그러니 웃음으로 가는 해를 보내자 할 때는 그것이 서로서로 짐을 풀어주는 일이라 해서 한 말인데 도저히 나는 한산 습득(寒山 拾得) 같이 웃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못 웃는 웃음이 도리어 짐을 더했습니다.
그러는데 라디오에서 이제 보신각의 종으로 제야의 종을 울린다고 했습니다. 그래 나는 백팔번뇌를 다 씻어버린다는 그 종의 맑은 소리를 들어 내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옷깃을 여미고 자리를 고쳐 앉았습니다. 이윽고 종이 뗑하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의 중생의 혼의 갈피 속을 물처럼 햇빛처럼 스며들어가는 실낯보다 더 연한 그 여운을 들으려고 나는 귀와 마음을 기우리며 내 숨의 드나듦을 스스로 잊고 앉았는데, 그런데 이것 보십시요, 아나운서라는 사람이 해설을 한답시고 산골 시냇물에 시궁창 물을 퍼 넣듯 잡음을 넣지 않습니까? 뱀에 발도 분수가 있지, 이것이 어찌 설명을 할 때입니까? 그러나 옆에 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참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는 동안에 그 구적물은 종시 끊지 않고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다 망가쳐 버렸습니다. 어느덧 내 입에서는 “무식한 놈” “건방지게”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는 그 찰나에 갑자기 “하하하”하고 寒山 拾得의 웃는 소리가 벼락 같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미쳐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이, 그 순간 내 가슴에, 벼락 맞은 늙은 느티나무 같이, 구멍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도 어느샌지 모르게 맥없이 하 하 하 하고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 가슴을 누르던 무서운 짐이 언제 어디로 간지 모르게 됐습니다. 나는 모든 생각을 다 잊어버리고 이제 새해로구나 하는 생각이 먼동처럼 터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글 한 줄 쓰는 것 없이, 시 한 귀 읊조리는 것 없이,그야말로 하나님의 발길로 차 던짐을 입어 새해의 언덕 위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정신을 차려 무슨 생각을 하려는 참에 갑자기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었습니다. 귀를 대니 그것은 태평양을 건너서 오는 새해 축복의 소리였습니다. 전화를 다 받고 돌아와 자리에 앉으려는데 또 전화가 오지 않습니까? 들으니 이번은 현해탄을 건너오는 소리였습니다. 엉겁결에 되지도 않는 영어로 말을 하려니 속에 있는 말은 하지도 못하고 전화는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조금 있으니 또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은 서울이면서도 서울은 아닌 구석에 갇힌 가운데서 오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는 학생이요, 하나는 자유와 인권위해 국경을 잊고 싸우는 동지요, 또 하나는 갇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셋은 다 같이 하늘의 사자였습니다.
성삼문의 이름을 三問이라 한것은 그가 날 때에 지붕 위에서 “아기가 낳느냐?” 하는 소리가 세 번 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왜 물었을까? 그 후의 일로 보아서 그것은 다음날 가서 이 나라의 의의 실개천이 말라버리려고 할 때에 그는 피를 흘려 거기 수혈을 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새해 새벽에 이 나에게 하늘 소리가 세 번씩 떨어지는 것을 무엇을 위해서일까? 큰 너털웃음으로 강산을 흔들어 역사의 묵은 짐을 단번에 떨어버렸으면 하고 바라기는 하면서 조그만 뱀의 발 하나를 불쌍히 여기지 못하고 화를 내는 이 나의 좁고 열은 마음 위에 말입니다.
생각을 하고 앉았으니 둔하고 더러워진 내 마음에도 진동이 도무지 없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을 건너 물결 위로 날려 보낸 소리가 이것이었습니다.
“이제 상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전에 하던 그런 방법을 좀 더 크고 좀 더 강화된 규모로 하는 것만으로는 이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대적은 이제 밖에 있는 것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어떤 폭력도 이겨낼 수 있는 참 힘의 근원인 참이 내 안에 없습니다. 이제 나는 참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천하에 대적 없는 씨알
공자는 인자무적어천하(仁者無敵於天下)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설 말씀입니다. 仁者는 왜 천하에 대적이 없습니까? 강하므로 모든 대적을 정복해서 대적이 없다는 것 아닙니다. 仁者는 누구를 대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대적이 없습니다. 仁者는 때로 싸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지배하기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요 미워해서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므로 형제를 악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기 위해 사랑으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큰 말씀이 진리인 줄은 알면서도 실천되는 일은 퍽 드뭅니다. 그 까닭이 뭐냐 하면 仁者라 할 때 그것은 특별히 난 성인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仁이 그렇게 특별하고 어려운 것이라면 공자가 그것을 가르쳤을 리가 없습니다. 仁을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악에 종살이를 하여 그것이 버릇이 됐으므로 오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仁입니다. 仁이란 다른 것 아니고 사람의 천성 본질 곧 사람대로의 본 면목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仁者란 사람대로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대로 있는 사람이 누구냐? 씨알입니다. 지위를 가진 것도 없고 돈을 가진 것도 없이 눌리고 뺏기고 천대 받으면서도 하늘만 바라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늘만 바라고 산다는 것은 아무것도 믿는 것 없고 다만 사람인 제 천성만 믿고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仁者란 곧 씨알입니다. 성인이란 다른 것 아니고 씨알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금이라면 금덩이를 곧 생각하지만 자연에는 금덩이란 것은 없습니다. 흙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仁도 씨알 속에 금싸라기처럼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작은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힘은 곧 지극히 작은 씨알들의 믿음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씨알의 금같은 천성이 뭐냐? 사랑입니다. 씨알은 하나님의 모습대로의 자기 본성을 믿고 살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그 사랑의 천성을 잃고 인간에 대해 적대하는 자리에 설 때 그는 속에 무력을 느낍니다. 무력(無力)를 느끼기 때문에 무력(武力)을 취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무장한 사람일수록 힘없는 사람입니다. 힘이란 곳 다른 사람을 능히 얻어 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천성을 잃지 않는 사람끼리는 곧 친구가 되고 협동자가 됩니다. 그것을 능히 할 수 있는 자신이 없는 사람이 법을 만들고 권력구조를 만들어 남을 억지로 나의 협동자를 만들려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씨알끼리는 그런 법 없습니다. 언제 어느 나라에 가도 곧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적어천하(無敵於天下)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졌습니다. 나는 내가 옳고 저쪽이 그른 것을 압니다. 그 확신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못 이겼습니까? 내가 옳지만 그 옳음은 작용을 못하게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옳음은 거짓 옳음 혹은 마비된 옳음입니다. 맹자는 한잔 물을 가지고 한수레 장작불을 끄려다가 못 끄는 사람이 누구보다도 저 仁 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제 그렇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가장 하나님께 욕을 돌린 사람입니다. 내가 이제 대적이 내 안에 있다 하는 것은 그것을 자백 아니 할 수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싸우되 저쪽을 대적으로 아는 것 아니라 내 형제로 알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심정으로 정말 했다면 내가 이렇게 참패를 당했을 리가 없습니다. 반드시 권력으로 제도를 이겼으리라는 말 아닙니다. 그 이김은 참 이김이 아닙니다. 저들이 나를 지운 것 아닙니다. 나는 악에게 졌습니다. 악의 본질인 갈라놓고 미워함을 내가 온전히 아니하지 못했으니 내가 악의 포로가 된 셈입니다. 대적은 내 속에 있습니다. 내 심장 속 뇌 세포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몰아낸다면 나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지난해에 나는 졌습니다. 그렇지만 얻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대적의 있는 곳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분명히 안 자는 반드시 이기는 날이 올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 의미에서 이번에 해를 보내고 맞음이 아주 슬프고 부끄러운 가운데 됐지만 나는 절대로 낙심은 아니 합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씨은 대적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仁者無敵의 仁은 곧 씨 입니다. 씨를 본래 仁이라 합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받은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복숭아씨가 도인(桃仁)이듯이 사람의 씨는 人仁 입니다. 그러나 仁이 곧 人이기 때문에 그저 仁이라하기만 합니다.
씨이 결코 잘났단 말 아닙니다. 그 타고난 分으로 하면 작습니다. 그러나 씨은 자아밖에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작으면서도 仁의 分으로 하면 같이 타가지고 있으면서도 불순한 잡물을 많이 가짐으로 실지로는 거의 죽은 상태에 있는, 소위 잘났다는 그것들보다 그 가지는 仁의 퍼센테이지가 큽니다. 그래서 씨은 仁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무적이란 말입니다. 작아도 순한 것이 정말 강한 것입니다. 씨알은 작지만 작기 때문에 겸손하여 스스로 순할수 있으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돈보다 기술보다, 수단 방법보다, 먼저 스스로 우리 속에서 불순한 것을 몰아내서 우리 눈에 대적 원수가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는 일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보통 말하는 힘, 곧 폭력은 아닌 참 힘, 정신의 힘, 영의 힘이 솟을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나 간디, 킹이 보여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권력을 쥐는 것이 이김 아닙니다. 모든 권력은 반드시 망했습니다. 그보다 죽으면서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義의 씨를 씨알의 가슴 속에 깨워주는 것이 정말 이김입니다. 양심이 없는 무리는 호랑이나 승냥이겠지만 양심이 깨여 있는 씨알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한 걸음이면 족합니다.
씨알 여러분 우리는 왜 실패했습니까? 원인은 여러 가지 입니다.
첫째 이 나라에는 사상이 없습니다. 공산당은 공산주의 사상이 있겠지만 이 국민은 무슨 사상의 국민입니까? 전쟁도 인간이고서야 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것은 사상으로 먼저 이겨 놓고 그리고 나서 외교를 하거나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사상이 없으면 외교를 해도 거짓말 밖에 할 것이 없고, 전쟁을 한다 해도 짐승무리를 몰아 사람에 대항하는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군인에게는 구식이나마 생존경쟁 철학이라도 있을런지 모릅니다. 군인도 아닌 씨알은 무엇을 가질 것입니까? 사실이야 씨알처럼 제 철학 제 사상을 가지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이름이 바로 그 철학입니다. 씨알 철학 가졌으면 세계 통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 속에 있어도 버려두고 닦지 않으면 될 수 없습니다. 옥도 닦아야 옥이요 사상도 닦 아가야 사상입니다. 칼을 갈아야 날이 서듯이 마음도 갈아야 날이 섭니다. 날 선 마음은 청룡도보다도 미사일보다도 무섭습니다. 사실 미사일은 날 선 마음의 시설의 한 가락 밖에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처럼 마음 갈지 않은 백성이 어디 있습니까? 갈아야 갈립니다. 마음을 갈아야 제도가 갈리게 됩니다. 무딘 칼이 못쓰는 칼이요 무지한 마음이 망하는 마음입니다. 사상을 가지고야 씨알을 동원합니다.
그다음 조직이 없습니다. 그러면 반대가 많이 들어올 것입니다. 관에서 하는 것은 말고라도 기독도 불교도 천도교도 있지 않으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가림 없이 말한다면 이 국민은 아직, 왕조 시대의 껍질을 완전 탈피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정치는 따지고 들면 결국 양반 정치인데 그 까닭을 말한다면 그 국민이 아직 “百姓놈”의 탈피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종의 탈을 완전히 벗은 민중을 감히 다스릴 어떤 양반놈이 감히 있을 수 있나?
조직이 무엇입니까? 소위 말하는 그 일사불란이 아닙니다. 또 일사불란이라 합시다, 어떻게 하면 일사불란이 될 수 있습니까? 각 사람이 제 의무를 충분히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조직의 목적입니다. 지금 서로 난투를 하는 천도교,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에서인들 어찌 스스로 자기와 자기 의무를 아는 사람이 많습니까?
그다음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없습니다. 가령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돈과 무기와 기계를 싹 제해 놓고 순수한 인간관계에 돌아간다면 제 사람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또 그 가지는 제 사람이란 것이 얼마나한 정도의 것이겠습니까? 이 사회 꼴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씨알은 지도자 있어야 씨알 노릇을 합니다. 인류에게 비폭력 운동의 큰 가르침을 주었고,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과학이라고 했던 간디는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데모크라시라면 그보다 더 데모크라시의 사람이 없겠지만 그는 그저 민중 하자는 대로 내버려서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토론을 할 때는 얼마든지 자유로 하고 비판 반대하려면 얼마든지 자유로 하 지만 일단 자기 의견에 옳다고 동의하고 들어온 이상은 자기에게 절대 복종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독재라면 참 독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의 독재가 아니고 사랑의 독재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독재는 서로 모순되는 말 입니다. 독재일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럴만한 인물이 우리에게 어디 있습니까? 슬프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없습니다. 그 자격이 없으면서 그 자리에서는 사람은 어리석던지 그렇지 않으면 간악한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면서 그렇게 모시는 부하는 간사한 아첨자던지 그렇지 않으면 흉악한 도둑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난 일년의 쓴 잔을 마시면서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새 새해의 희망과 용기에 가득차 있다가도 얼마 못가서 곧 또 낙심하고 물러가고 헤지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인줄을 알아 스스로를 부단히 가다듬는 것이 우리의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세우는 것이 “한걸음이면 족합니다” 하는 정신입니다. 이것은 본래 뉴맨 스미스의 지은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하는 찬송가의 한 귀절입니다. 간디가 이 찬송을 특히 좋아서 많이 불렀기 때문에 이것을 간디의 찬송이라고 하기까지 합니다마는, 그 위대한 간디로 저도 한 걸음이면 족하다고 했거든 우리같이 연약한 것은 더욱 그래야 할 것입니다. 새해가 결코 365일에 있지 않습니다. 하루에 있습니다, 하루가 결코 밤낮 24시간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것이라 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라는 한 순간에 있습니다. 그것만이 내게 주어진 것 입니다. 거기 권력하고 그 한순간을 능히 이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데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완전히 이긴 것만이 참 이김입니다. 살 순간을 완전히 이기기만 한다면 어떻게 큰 대적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 모든 위대했던 투사들의 한결같이 증거해 주는 말입니다.
저 먼 길을 단번에 다 정복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이 한 걸음을 승리로 내디딜 수 있게 해줍소서 하는 기도로 이 한해를 꿰뚫기를 약속합시다.
씨알의 소리 1976. 1,2 50호
저작집; 9- 43
전집; 8- 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