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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암 5:1-6)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분열의 역사요, 투쟁과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는 전쟁 중인 나라들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기도 합니다.
자연재해이거나, 인재이거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도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재난과 위기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려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볼 수 있는 큰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아무런 문제없이,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고 있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 죽기 위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찌되었든 간에, 어떤 형편에 처해있든지 간에, 살기 위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당장 해결되지 않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을지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우리 마음 먹은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낙심과 좌절, 절망” 이러한 것들은 다 버리고, 소망을 품고, 내일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생 시절, 힘들게 외웠던 이은상 시인의 “고지가 바로 저긴데”라는 시가 있습니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 역사의 능선을 타고 /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예서 말 수는 없다. / 넘어지고 깨어 지고라도 /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아주 힘들게 외웠던 시입니다만, 지금은 다 까먹었습니다. 그런데, 높은 산을 힘들게 올라가게 될 때, 그런 경우에, 시의 단 한 구절을 항상 기억하게 됩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예서 말 수는 없다.”
성경 말씀은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왔다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것조차 본 적이 없다”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예비해놓으신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조금만 더 가면,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데, 조금만 더 기도하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데, 여기서 멈추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일로 인하여, 잠시 멈춰 서 있다고 할지라도, 다시 한번 힘을 내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푯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언젠가는 주님 안에 서게 되는 날, 바로 그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천국에 가서,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지금,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받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나님께서,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갑니다. 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지, 2024년도, 며칠 전 시작하는 것 같았는데, 벌써 2월, 그 2월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을 구하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찾고 구하면, 살 수 있는 것일까요?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아모스 5장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라고 시작합니다. “애가”는 “슬픈 노래”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슬픈 노래의 한 구절을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애가”라는 이름을 가진 책이 있습니다. 어떤 책입니까?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슬프다 이 성이여”,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왜 밤마다 슬피 울었을까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왜 사로잡혀 갔을까요?
시편 6:6절을 보면, 다윗도,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왜,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도 슬퍼하며, 괴로워했을까요?
오늘 말씀 2절을 보면,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엎드려졌을까요? 왜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까요?
남유다 백성들도, 다윗도, 그리고,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했던 북이스라엘도,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일들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찾았습니다. 탐욕에 이끌려,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밤새도록 괴로움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멈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고생 끝”이라고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애가 3:33절을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생하고, 근심하며,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슬픔 가운데,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악을 범하였을지라도, 탐욕에 빠지고, 정욕에 넘어지고, 우상 숭배에 빠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그대로,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이리저리 몰아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살 길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이 우상의 도시들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죽음의 길,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온갖 것들을 다 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우리의 가진 것들을 다 빼앗아 갈 뿐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높은 절벽 낭떠러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절벽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면, 멈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던 발걸음을 돌이켜야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신명기 32:10절을 보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도 없는 황무지 한 가운데, 던져놓고, 모른 척, 가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 짐승의 먹이가 되라고, 던져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그렇게 가 버리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풀무불 속에 함께 계셨고, 사자굴 속에도 함께 계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황무지에서도,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만나주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 되었기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다윗이,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죄악과 슬픔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11:7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 42:1-2절을 보면, 고라 자손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고 말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우리 영혼이 주님을 찾는 일에 갈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그 무엇을 얻고자,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찾는 일에, 더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55:2-3절을 보면, 답이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험한 산속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곳에 들어가, 가부좌 틀고 도를 닦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기 몸을 쳐, 고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그 말씀대로, 그대로 살면 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여러분! 아모스 선지자의 별명은 “정의의 선지자”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불법과 타락한 세상을 향하여, 정의를 외쳤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에, 활동했습니다. 바로 그때가, 북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번영하던 때였습니다. 한 마디로, 먹고 살기 가장 좋은 때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걱정없이 살 수 있는 그런 번영의 시대에, 왜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 되었을까요? 왜 공의가 말라버렸을까요?
아모스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0)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인하여, 고통과 불행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으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살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과 불행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것일까요?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라고 말했습니다.
사울 왕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으로, 더 이상 쓰암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야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아삽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4-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까이 계실 때에 하나님을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세는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 행복의 시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살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을 찾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주님을 찾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