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대학 앞은 방학이라 한산했다. 그곳은 창원에서 김해 진해로 넘나드는 시내버스 종점이면서 기점이었다. 150번은 성주사역에서 창원공단 배후도로를 따라 양곡을 거쳐 진해로 갔다. 나는 진해행 150번을 타고 가다 공단 배후도로 중간에서 내렸다. 자연마을 옛터 정리마을 주민들이 떠나면서 유적비를 세워둔 곳이다. 예전 내가 장복산에 올랐다가 그곳으로 내려온 적 있었다.
공단 배후지역이라 민가와 상당히 떨어진 외진 곳이다. 장복산 북사면 골짜기에 주목받는 공사가 현재 진행 중이다. 시청에선 친환경적인 장묘문화를 선도할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현대적 시설의 화장로와 납골당을 안치시키는 공사다. 진입로 공사는 마무리되고 터 닦기를 마쳐 놓았다. 추모공원이 완공되면 인구 백만이 넘은 통합 창원시에 걸맞은 위생적인 장묘시설일 테다.
등산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산한 골짜기다. 들머리 콘크리트였던 개울바닥은 걷어내고 자연석으로 치장했다. 내가 찾아갔을 때 정오가 지날 무렵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은 장비를 세워두고 임시식당으로 향했다. 일반인이 들리지 않은 곳으로 내가 찾아간 데는 까닭이 있었다. 추모공원이 조성 중인 현장에서 멀지 않은 산기슭 어디엔가 있는 삭은 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었다.
작년 그곳에서 소담스레 돋은 영지를 제법 땄더랬다. 올해도 분명 묵은 참나무 등걸에 영지는 돋아났을 것이다. 아무도 찾은 이 없기에 고스란히 있을 것이다. 나는 인적 없는 희미한 산길을 더듬어 올랐다. 추모공원 공사현장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작년에 들렸던 삭아가는 참나무를 다시 찾았다. 바람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아름드리 참나무가 중간에 꺾어진 고사목이었다.
내가 일부러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참나무둥치 아래 돋아 자란 영지는 자주색으로 여러 송이였다. 나는 배낭을 벗어 놓고 가져간 비닐봉지에다 영지를 따 담았다. 큰 영지는 주전자 뚜껑만한 것도 있었다. 일부는 장맛비에 삭으면서 벌레가 파먹는 것도 있었다. 한 자리에서 그만한 영지를 따기 쉽지 않은 일이다. 도시락이 든 배낭에 영지가 다 들어가지 않아 봉지 하나는 손에 들었다.
나는 공사현장 가까이 내려와 골짝을 빠져 나오지 않았다. 맑은 물이 흘러오는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계곡에는 장마철인지라 제법 많은 물이 흘렀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등산화를 벗었다. 말 그대로 탁족(濯足)이렷다. 우리 선인들이 누렸던 피서의 한 방법이지 않던가. 가득 딴 영지는 너럭바위에 두고 시원한 계류에 발을 담그니 신선도 부럽지 않았다. 가져간 곡차까지 비웠으니.
때늦은 도시락을 비우고 계곡에 발을 담근 채 한참 머물렀다. 해거름 가까워져 나는 배낭을 다시 꾸렸다. 도시락과 곡차를 비웠으니 부피가 줄어 아까 넘쳤던 영지는 배낭 안에 다 넣을 수 있었다. 나는 배낭을 짊어지고 낮은 산자락을 하나 넘었다. 오전에 들어온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갈 참이었다. 산을 내려가니 평지농원이 나왔다. 토종닭과 흑염소를 키우는 농장이었다.
빠져 나간 곳은 남지 사거리 쪽이었다. 창원공단 조성 때 원주민이 떠나면서 남지마을 옛터비가 세워진 곳이었다. 나는 안민동 청솔마을아파트로 갔다. 종점에는 버스기사가 출발 시동을 걸고 있었다. 혼자 탄 버스는 남산터미널을 거쳐 시내로 들어왔다. 내가 사는 동네 근처를 지날 무렵 내렸다.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배낭 안의 영지를 어디로 보낼 참이었다.
고향에는 내보다 열세 살 더하는 형님이 계신다. 비록 농사를 지으나 한학에 밝고 문중 대소사에 신경을 많이 쓴다. 세상을 꿰뚫는 안목이나 인생의 깊이가 객지에 머무는 아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근래 형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염려된다만 심성 착한 조카들이 곁에 있어 든든하다. 나는 우체국창구 택배박스에 영지를 모두 담아 포장해서 받을 사람으로 형님 성함을 또박또박 썼다. 1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