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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군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공원관광이야기2)
(조감도사진 11번 민중광장,14번 하늘길,17번 위령탑 모습)
(종합조감도상의 11번 민중광중모습과 하늘길 입구와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모습.사진 하단은 민중광장이고 그 중앙에 하늘길 계단초입이며 상단의 하얀색 탑이 동학혁명군위령탑모습임.)
(민중광장과 하늘길 및 위령탑 모습)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공원은 공원내 주차장을 출발해서 산책로를 따라 7번 죽림광장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11번 민중광장이다. 민중광장은 100평이상 되어 보이는 원형의 큰 광장이다. 이 민중광장에서 동쪽으로 올려다보면 하얀색 탑이 보이는데 이 탑이 바로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이다.
그리고 보은 민중광장과 보은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사이에는 지그재그로 목재 계단길이 위령탑까지 걸어서 올라갈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이 지그재그 목재 계단길을 종합조감도사진에서는 “하늘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하늘길 옆에는 각종 안내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 안내표지판 세부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하늘길안내표지판1에는 보은의 동학농민혁명군이 보은군 북실마을인 종곡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어떻게 몰살당했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보은군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공원내 하늘길 계단에 세워진 안내표지판 1,2,3에 기록된 글 내용)
(보은군과 동학농민혁명이란 안내표지판1=하늘길 안내표지판1 내용)
“ 조선 500년 동안 영화를 누려온 양반중심사회는 갑오년을(1894년) 전후하여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
“1893년 봄 충청도 보은군의 장안마을과 전라도 금구현의 원평마을에서 부패척결과 외세침투를 배척하는 동학집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전국각지에서 동학도들이 보은땅으로 몰렸다. 동학대도소가 위치한 지금의 장안면 장내리가 목적지였다. 수많은 동학도들은 왕조정부에게 나라를 바르게 하여 벡성을 살기 편하게 만들고 일본과 서양의 침입을 막아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제기하였다. ”
“ 그 다음해인 1894년에는 전라도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불타올랐다. 일본이 무단으로 파병하여 서울에 들어가 경복궁을 기습 점거하자 동학농민군은 전국에서 봉기하였다. 동학교단을 따르는 동학농민군은 충청도는 물론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에서 무장을 갖추고 보은으로 집결하였다. 옥녀봉 아래 자리잡은 동학대도소와 그 주변에 줄을 지어 세운 대규모 초막들은 위풍당당하였다. ”
“ 일본과 싸우기 위해 모인 동학농민군은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영동으로 집결지를 옮긴 동학농민군은 통령 손병희의 지휘아래 출진하여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의 호남농민군과 합세하였다. 공주시 우금치 전투는 남북접농민군이 함께 참여한 대규모 공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밀려단 동학농민군은 전라도로 후퇴하였다. ”
“ 전라도 순창 장수 진안 무주를 거쳐 영동으로 돌아온 동학농민군은 보은으로 향하였다. 1894년12월16일(음력) 눈이 많이 쌓인 한 겨울밤 장거리 행군으로 지친 동학농민군 대부대는 보은군 북실마을에(종곡리) 들어섰다. 북실마을은(종곡리 마을은) 마을 뒤로 마치 종처럼 생긴 산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작은 야산을 둘러싼 12개의 마을을 합해서 북실마을이라고 부른다. 동학의 고위지도자들은 누청리의 김소촌가에 모여 있었다. ”
“ 당시 경북 김촌에서 뒤따라온 일본군 장교는 동학도 약 10,000명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각기 몸을 녹이고 있었으며 조금도 방비하는 것 같지 않다고 자기들 보고서에 기록했다. ”
“ 일본군과 경북 상주군 소모영의 유격병들이 이런 동학농민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 유격병들은 동학농민군 파수병 4명을 제압한 뒤에 김소촌가도 공격하였다. 다행이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지도부가 떠난 뒤에 일본군과 소모영의 유격병이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토비대략이란 자료는 약 2600명의 동학농민군이 북실마을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때 학살된 동학농민군은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북실마을의 야산과 기슭에는 집단매장지가 흩어져 있다. ”
“ 1893년의 척외양창의운동과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에서 보은은 중심지의 하나였다. 이 같은 자주운동과 변혁운동에서 보은지역이 갖는 의미는 크다. 처음과 마지막 시기의 큰 사건이 이 지역에서 전개된 사실은 역사에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
라고 하늘길 계단 초입에 있는 안내표지판 1 글은 기록하고 있다.
(1893년3월 보은 장안집회 안내표지판=하늘길 안내표지판2)
(1893년3월 보은 장안집회 안내표지판2 내용=하늘길 안내표지판2)
“ 1893년3월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 교단의 중심세력은 동학도소가 있는 보은과 청산 등지로 내려갔다. ”
“ 최시형은 곧바로 팔도의 모든 교인들은 보은 장안(현재의 외속리면 장내리) 으로 집결하라고 지시했고 1893년3월11일 전라,경상,충청,경기,강원 등에서 수 만명이 집회에 참석했다. ”
“ 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킴) 라는 외세배격의 정치적 기치가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
“ 이에 당황한 조정은 충청감사 조병직을 파직하고 집회군중을 해산시킬 선무사로 어윤중을 내려보내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면서 고종의 칙유문(임금이 몸소 타이르는 글)을 발표하자 집회를 주도한 최시형은 아직 때가 아니다 라고 느껴 자신 해산하게 된다. ”
“ 그러나 보은 집회를 통하여 민권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종교운동을 벗어나 정치적 방향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의의로 들 수 있다. ”
(1894년12월 보은 북실전투 안내문=하늘길안내표지판3))
(1894년12월 보은 북실전투 안내문내용3=하늘길 안내표지판3))
“ 1894년 갑오년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이 무장봉기한 뒤 보은은 또다시 동학혁명의 무대가 된다. 동학교단의 대도소가 장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해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동학은 즉각 대처해서 봉기를 준비하였다. ”
“ 동학의 거두들이 모여있던 보은은 다시 인근 군현 관아에서 관심을 집중시키는 땅이 된다.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린 직후 보은은 전국에서 무장한 동학농민군이 몰려오는 목적지가 되었다. ”
“ 충청도 전역은 물론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속속 보은 장내리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장기 주둔에 적합한 황간과 영동으로 이동하였고 400여 채의 초막이 세워진 장내리는 동학농민군이 기세를 떨치며 세력을 확장하던 중심지였다. ”
“ 보은 황간 영동에 주둔했던 북접농민군은 통령 손병희의 지휘아래 논산으로 진군해서 남접의 전봉준 세력과 합세하하였다. ”
“ 공주시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남하했는데 손병희가 인솔한 북접농민군은 전라도 순창 진안 장수 무주 영동을 거쳐 보은으로 돌아왔다. ”
“ 관군과 일본군 그리고 민보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추격하는 속에 북접농민군 대군은 숙영지 보은읍 종곡리 일대 북실마을 김소천가에 (현재는 보은읍 누청리에 위치) 지휘본부를 두고 불의의 기습을 받는다. 이 기습으로 북접농민군을 비롯 주민 2600여명이 숨진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북실전투의 비참했던 시기는 한국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북실마을은 이러한 모습을 전해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 조각상을 보자. 뒤에 있는 농민군이 오른손에 죽창을 들고 먼곳을 응시하고 있고 그농민군의 왼쪽발은 짚신을 신고 있다. 이 농민군의 왼손은 부상당한 동지의 머리를 받치고 있다. 이렇게 부상당한 동지는 머리를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축 느려진 모습이고 이 동지의 오른쪽 어깨에는 당대의 농민군 무기인 화승총이 힘없이 메어져 있다.)
(보은군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에 기록된 안내문 내용)
민중광장에서 하늘길이란 목제계단을 타고 동학농민군위령탑앞에 도착하면 죽창을 든 동학농민군이 쓰러진 동료를 감싸고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다.
이 죽창을 든 농민군의 표정은 결기에 찬 모습이다. 그런데 이 농민군의 신발은 짚신이다. 12월의 눈 내리는 겨울이라는데 짚신을 신은 농민군들의 발은 얼마나 추웠을 것인가.
그리고 부상을 당해 축 늘어진 동학농민군은 중상을 입은 모습이다. 오른쪽 어깨에는 화승총으로 보이는 총을 힘 없이 겨우 메고 있다. 이 동상 우측 하단에는 위령탑 안내문이 적혀 있고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보은군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안내문 기록내용)
“ 동학농민혁명군이 1894년12월17일 아침 영동군 용산을 출발하여 오후 보은읍에 들어설 때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저녁 종곡리 북실마을에 도착한 동학군은 주먹밥을 먹고 모닥불 옆에서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밤에 누가 공격해 오겠는가 라며 긴장을 풀고 모처럼만에 휴식에 들어갔다. ”
“ 밤이 깊어 졌을 때 상주에 있던 일본군과 청주에 있던 관군이 연합하여 눈속을 뚫고 기습공격을 해 왔다. 치열한 전투는 그 이튼날 오후까지 계속되었고 동학군 2600여명의 피가 눈 덥힌 하얀 북실 뜰을 붉게 물들였다. ”
이 북실 전투에서 산화하여 망나니골에 잠들어 있는 동학농민혁명군의 넋을 기리고자 2007년에 탑을 세우고 2015년 위령탑으로 정비하였다. 2015년 봄부터 천도교 제례에 따른 위령제와 원불교에서 천도제를 지내게 되었다. “
“- 2015년9월 보은군수 정상혁 -”
(보은군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뒤쪽 벽면에 새겨진 오석판 안내게시문 1,2,3,4의 내용)
(무너진 하늘,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라는 안내게시문1 내용)
(무너진 하늘,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 라는 위령탑 뒤편 오석판 안내게시문1 내용)
“ 석달만에 다시 밟은 보은 땅, 덜컥 내려앉은 하늘에서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금치에서 물러나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들은 10월25일 10월26일 이틀간 전라도 원평과 태인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이 연합부대를 해산했다. ”
“ 터지고 찢겨져 나간 살가죽에 솔잎을 짓찧어 붙인 채 태인에서 정읍으로 입암으로 순창 임실 장수 무주 황간 영동을 거쳐 수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영동군 용산면 청산을 지나 보은에 돌아왔다. ”
“ 돌아온 보은에는 관군들이 부숴버린 장안 마을 폐허의 초막들과 살갖을 저미는 매서운 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문을 부수고 보은 관아를 점령한 우리 부대는 일본군과 민보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전갈을 받고 우리부대는 종곡리 북실마을로 이동했다. ”
“ 낮이 저물고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자 모닥불을 지피고 얼어붙은 몸을 서로 기댄 채 온기를 아꼈다. 끝없이 쏟아지는 폭설과 한치앞을 분간할 수 없는 흰 어둠이 온 마을을 뒤덮었다. ”
“ 12월18일 꼭두새벽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에서 적들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전 골짜기 마다 까마귀에게 눈알을 뺏기고 심장 파헤쳐진 채 나딩굴던 벗들이여 형제들이여 아 수많은 농민군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과 뼈가 흩어진 이 산하에 고이 잠들라. ”
“ 그대들을 따라 쏟아지는 눈보라 뚫고 왜놈들의 총구를 헤치고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가려니 기필코 눈부신 봄을 맞으리니 진달래 되어 조선산하 굽이굽이 꽃불 밝히리니. ”
- 갑오년 (1894년) 12월 ,무명 동학농민군 -
(저마다 하늘님 되는 세상을 향하여라는 뒤편 오석판 안내문2의 기록내용 모습사진)
(저마다 하늘님 되는 세상을 향하여 라는 위령탑 뒤편 오석판 안내게시문2 내용)
“ 늙으신 부모님을 남겨두고 집을 떠나온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청산에서 기포령이 내리던 날 집 떠나기 망설이던 나에게 단호히 말씀하시던 아버님의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
“ 나라가 무너지고서야 어찌 부모형제가 있겠느냐 어서 채비하여 집을 나서라. 네 아우 데려 가거라. 가서 저 무도한 왜놈들과 서양 오랑캐들 서울의 권귀들을 물리쳐서 이 나라를 반석위에 다 두고 장차 만백성이 저마다 하늘님이 되어 세상을 열거라. ”
“ 손병희 통령 지휘 아래 논산으로 내려온 우리는 전봉준 장군 부대와 연합하여 공주로 진격했다. 노성을 지날 때는 진눈깨비와 함께 목천의 동학농민군 7명이 처참한 몰골로 연합부대를 찾아왔다. 서울로 가는 길목을 선점하고 있는 가파른 산등성이에 군량미와 무기를 숨겨두었던 목천 세성산 근거지가 관군의 기습을 받아 무너졌다고 한다. ”
“ 이인과 웅치 호포전투를 시작으로 우리들은 우금치 능선을 오르내리며 관군.일본군과 밤낮 없이 혈전을 벌였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쏟아지는 왜놈들의 포탄과 총탄에 머리통이 꿰뚫리고 가슴팍이 찢기고 팔뚝이 떨어나간 동학농민군 주검들이 골짜기 마다 겹겹이 쌓여갔다. 찢겨진 깃발 나부끼는 겨울나무 사이로 게걸스럽게 날아드는 숱한 까마귀 떼를 뒤로 한 채 우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를 거듭했다. ”
“ -갑오년(1894년) 11월 무명 동학농민군- ”
(보은군수에게 고함=안내문 게시 3의 기록내용 사진 모습.)
(보은군수에게 고함 이란 위령탑 뒤편 오석판 안내게시문3 내용)
“ 무른 사람 노릇하기에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 첫 번째가 곧은 절개로 충성을 다 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신하 노릇하기요. 두 번째가 죽는 날까지 온 마음 온 정성으로 부모를 섬기는 자식 노릇하기요. 세 번째가 정조를 지키며 사는 지어미 노릇하기다. ”
“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이치이며 유사하고 무사함 또한 운명이다. 무사하고 안락할 때 태어났다가 충효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은 쉽고도 어렵고 어렵고도 쉽다. ”
“ 오늘날 왜적과 양적이 나라 한 가운데 들어와 혼란이 극심하다. 지금 서울은 온통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었다. 임진년과 (1592년) 병인년의 (1866년) 치욕이 되씹힌다. 그때를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삼천리 강산이 흉악무도한 짐승들의 발자국으로 가득하다. 우리 수만명은 죽기를 맹세하고 힘을 합쳐 저 왜적과 양적을 물리쳐 나라를 지켜내고자 한다. 바라건대 보은군수도 충의로운 선비들을 모아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협력하여 함께 보국하기를 간곡하게 바란다. ”
“ - 계사년 (1893년) 3월10일 동학창의유새등 백배상서 -
- 보은취회 때 동학농민군이 보은관아 삼문밖에 내걸었
던 보은관아 통고- “
(천지인은 하나, 사람이 곧 하늘이다.=안내문 게시 4의 기록내용 사진 모습)
(천지인은 하나,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위령탑 뒤편 오석판 안내게시문4 내용)
“ 이곳 보은은 해월 최시형이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해 몸을 숨긴 채 동학을 전파했던 중요한 근거지로 1893년 전국에서 온 수만명의 동학교도들이 척왜양창의 기치를 들고 반외세 반봉건 정치집회인 보은취회를 열었던 곳이며 북접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최대 항전인 북실전투 때 수많은 농민군이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통한의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
“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사회경제변화와 민중의식의 성장으로 신분제를 비롯한 사회체제가 심하게 흔들렸다. 특히 19세기는 산업혁명이후 자본주의 시장개척에 혈안이 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국권이 위기에 처하고 세도정치의 무능과 부패로 국가제도가 문란해지고 탐관오리들의 억압과 착취가 극에 달해 백성들의 삶이 벼랑끝으로 내몰렸다. 이에 참다 참다 못해 일어난 농민들의 항거가 전국 각지에서 끊임 없이 이어졌다. ”
“ 나라 안팎의 위기가 날로 높아가던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수운 최제우는 후천개벽 사상과 함께 신령한 하늘을 모신 존재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을 창도하였다.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은 신분제도를 전면부정하고 근대적 인권을 주창하여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나 조정은 이를 철저히 금지하고 탄압했다. 급기야 최제우는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고 최시형에 의해 동학은 이곳 보은에서 꽃 피었다. ”
탐관오리 조병갑의 홍보게시문에 기록된 악행 이야기1) (황토현기념관 홍보게시문 내용임)
본관은 양주(楊州).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이다. 여러 주군(州郡)의 수령을 거쳐 1892년(고종 29) 4월 고부군수가 되었다. 부임한 이래 갖가지 명목으로 탐학비행(貪虐非行)을 저질렀다.
(1)농민에게 면세(免稅)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해주고는 추수기에 강제로 세를 징수했다,
(2)부민을 붙잡아들여 불효(不孝)·불목(不睦)·음행(淫行)·잡기(雜技) 등의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 2만여 냥을 빼앗았다,
(3)대동미를 쌀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돈으로 질이 나쁜 쌀을 사서 중앙에 상납하고 차액을 착복했다.
(4)세곡을 운송하는 전운소(轉運所)에서 추가로 쌀을 강징(强徵)하고 부족미(不足米) 명색으로도 더 거두었다.,
(5)묵은 땅을 개간하여 면세가 되어야 할 땅에서 도조와 시초(柴草)를 거두었다.,
(6)태인현감을 지낸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1,000여 냥을 거두었다.
(7)고부읍 북쪽에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에 축조되어 고부군과 태인현의 농민들이 수리(水利)의 혜택을 받고 있던 만석보(萬石洑)가 파손되지도 않았는데도 농민들을 동원하여 구보(舊洑) 밑에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그해 가을에 신보 이용에 따르는 수세(水稅)를 1마지기에 상등논은 쌀 2말, 하등논은 쌀 1말씩 농민들로부터 거두어 700여 석을 사취했다.
(8)이러한 탐학이 계속되자 농민들은 1893년 11월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동학접주인 전봉준(全琫準)을 찾아가 진정서를 부탁했다. 11월 15일 전봉준이 농민 40여 명과 함께 조병갑에게 진정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하고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했다.
(9)그러나 그해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근명령을 받음으로써 이 봉기는 취소되었다.
(10)그러나 조병갑을 이어 고부군수로 발령받은 자들이 계속 다른 곳으로 재발령되거나, 병으로 오지 못하게 되자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되었다.
(11)1894년 1월 11일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그는(조병갑은) 전부사(前府使) 정모(鄭某)의 집에 숨어 있다가 옷을 바꿔입고 정읍을 거쳐 전주로 도망쳐 관찰사 김문현(金文鉉)에게 농민항쟁을 보고했다.
(12)김문현은 조병갑의 탐학으로 민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그의 죄상을 취조해야 된다고 정부에 건의하자 정부는 조병갑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압송하여 치죄(治罪)하고 섬으로 귀양보냈다.
(13)이 고부민란이 계기가 되어 갑오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4)조병갑이 고부군수 전에 함양군수를 거쳤는데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1073-1번지의 상림공원에는 조병갑 선정공덕비가 있다.
(전봉준장군이 서술한 탐관오리 조병갑 악행 이야기 2 )
고종과 민비 척족세력의 빽으로 조병갑은 고부군수가 되었다. 동학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서술에 따르면 조병갑이 군수로 있으면서 저지른 비리는 아래와 같았다.
첫째-남의 산 나무를 벌목하고 주민을 강제동원해 원래 있던 민보 아래에 또 보를 쌓아 물세를 징수하고
둘째-논마다 세금을 추가로 걷고
셋째-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추가로 세금을 걷고
넷째-부자들에게는 불효 음행 따위의 죄목으로 걷어낸 돈이 2만량이 넘었다.
다섯째-자기 아비 공덕비 비각 세운다고 천량을 뜯었다. 정읍시 피향정에는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선정비가 있다. 조병갑은 이 선정비 비각 건축비를 주민들에게 뜯어내며 자기 배를 채웠다.
여섯째-나라 세금낸다고 고급쌀을 거두더니 정작 중앙에는 저질쌀로 세금을 납부하고 이득을 횡령한 죄를 모두 조병갑 수령이 홀로했다 고 전봉준은 답했다.
여러 죄상 가운데 만석보가 가장 컷다. 고부에 흐르는 동진강물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쌓아놓은 둑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조병갑이 민력을 강제동원하고 남의 산 소나무를 강제로 징발해 또 둑을 쌓고 물세를 신설해 챙겼다는 것이다. 악행은 부임하자 처음부터 했고 그 모든 악행이득을 혼자서 다 챙겼다는 것이다.
드디어 1894년 1월10일 고부농민이 죽창을 들었다. 조병갑은 도주했다. 동학군은 고부 관아감옥을 파괴하고 창고를 도끼로 열어 벼 1400석을 풀었다. 그리고 1월17일 농민들은 만석보를 파괴했다.
조병갑의 악행은 일개 지방 탐관오리에게는 개인비리에 불과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조선근대사 흐름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대사건인 청일전쟁을 야기시켰다.
(동학농민전쟁을 촉발시킨 고부 군수 조병갑의 일생)
충남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한 산속에는 조병갑의 무덤이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후 조병갑은 고향 산너머 예산군 대흥면에 숨어있다가 이곳 공주시 신풍면에서 생을 마쳤다. 조병갑 무덤 옆 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묘가 있다. 두 사람 묘가 있는 이 능선 전체는 지금도 그 후손의 소유다.
동학란이 진압되면서 조병갑은 전남 완도군 고금도로 유배형을 받았지만 이듬해 음력 7월 사면되고 이후 법부 민사국장,한성재판소 재판관,황실 비서원 주임관으로 승승장구했다.
만석보를 만들고 아버지 조규순 공덕비 비각을 만들며 돈을 착복한 행위는 개인적인 비리였지만 역사적으로는 동학을 촉발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게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탐관오리 하나가 망국의 지옥문을 연 것이다. 정읍에 남아있는 만석보 흔적과 조규순 공덕비 그리고 공주 산기슭 상석도 비석도 없는 조병갑 무덤이 129년전 흑역사를 보여준다.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은 탐관오리였다. 더럽고 탐욕스러운 관리였다. 얼마나 탐욕수럽고 더러웠나. 탐관오리들로 인해 조선팔도에 민란이 들끓었던 그때, 고종도 “조병갑이 형편 없이 수령노릇을 했다”고 힐란하고 그가 저지른 일을 조사한 현지 조사관이 “이전에 듣지못한 일”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탐욕스럽고 더러웠다.
그런데 조병갑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의 흐름을 역류시킨 사람이다. 조선 근대사에 끼친 영향을 따진다면 이 조병갑을 능가할 개인이 없다. 그저 개인 탐욕에 눈이 멀어 만석보를 만들고 아버지 공덕비 비각을 세웠다. 물세를 뜯고 비각 건축비를 착취했다.
착취당한 백성이 죽창을 들었다. 그 죽창을 꺾기 위해 정부에서 외국군을 불러들였다. 그 외국군끼리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다. 전쟁결과 조선이 일본 손아귀에 들어가는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간 역사를 조병갑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일보 2023.1.18. 박종인 선임기자의 글을 붙이기함.)
(그래도 조병갑의 평화로운 말로)
그 조병갑이 바로 충남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 산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옆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 무덤도 있다. 동진강에는 만석보 흔적이 남아있다. 옛 고부땅에는 조규순 선정비가 여태 서 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바꾼 장본인 조병갑이 저기 공주시 평소리 사랑골 능선에 잠들어 있다.
실록에 따르면 조병갑은 1894년5월4일 두 차례 곤장을 맞고 전남 완도 고금도로 유배됐다. 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듬해 3월12일 갑오개혁 정부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이 고종에게 조병갑 재수사를 요청하고 고금도에 관리를 보내 조병갑을 서울로 압송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음력 5월4일 고종은 개혁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을 모조리 거부하고 “작년 6월이후 칙령과 재가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고 선언했다. (근거:조선국 내정개혁에 관한 건 301:1895년.6.26일).
그리고 음력 7월3일 동학과 관련돼 유배형을 받은 인물 279명이 일괄 석방됐다. 그 가운데 민영휘,민영주,민형식,민병석,민응식 같은 친족 여흥민씨들이 있었고 동학의 먼 원인을 제공한 조병식과 동학을 폭발시킨 집안 동생 조병갑이 들어 있었다. (근거:1895.7.3.고종실록)
조병갑은 1898년 양력 1월2일 대한제국 법무부 민사국장으로 권력에 복귀했다. 6개월 뒤 7월2일 동학 2대교주 최시형 선고공판이 있었다. 최시형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재판부 배석판사 2명 가운데 한 명이 조병갑이었다. 1904년6월20일 조병갑은 황실 비서원 주임관인 비서원승에 임명되었다.
1907년 현재 조병갑은 관직에서 은퇴한 뒤 충청도 청양에서 살았다. 청양 북쪽 예산 대흥면은 양주 조씨 집성촌이다. 조병갑 큰아버지인 전 영의정 조두순 집이 남아있다. 대흥면에서는 바로 이 집에 조병갑이 살았다고 전한다.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은 1885년에 죽었는데 부인 이씨와 함께 산너머 공주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1970년 그 후손이 조규순의 무덤가에 비석을 세웠다.
공식기록에서 종적이 끊긴 조병갑은 바로 그 아버지 옆능선에 묻혀있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석물 하나 없지만 땅은 양지바르다. 두 무덤이 있는 산기슭과 마을 앞쪽 임야는 모두 조씨 조규순 후손 명의로 등기돼 있다.
주인을 알려주는 석물은 없지만 마을 주민에 따르면 해마다 봄이면 답사 단체가 무덤을 찾는다고 한다. 평화롭게 근대사 물줄기를 바꾼 탐관오리 하나가 이렇게 잠자고 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이 분노하고 궐기한 사유)
(동학교도의 1893년 최제우 복권 궐기대회)
1800년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간택하고 죽었다. 김조순 사위이자 23대 국왕 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순헌철종의 세도정치) 왕실외척이 국정을 농단한 소년왕 시대를 세도정치 시대라고 부른다. 국정은 농단당하고 그 와중에 400년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물위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얌전하던 조선 백성이 죽창을 들기 시작한 민란시대이기도 했다. 1893년 3월 충북보은에 동학교도 수만명이 집합했다. 1864년 처형당한 초대 교주 최제우의 복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충청감사 조병식은 동학교도의 이런 요구를 무시하고 탄압으로 맞섰다. 정부는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급파해 동학군을 해산시키고 민원을 접수했다. 그해 11월 어윤중이 정부에 올린 보고서는 아래와 같았다.
(양호도어사 어윤중의 충청감사 조병식의 악행감사 보고서내용)
“(1)조병식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이후 몹시 가혹하고 끝없이 가렴주구하여 진실로 근래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공주 백성 오덕근을 비롯해 땅 가진 사람들은 모두 간음했다고 누명을 씌워 쫒아내고 한 겨울에 집과 땅을 차지했다.”
“(2)아산 백성 김상준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고 이렇게 조병식에게 돈을 뜯긴 사람들 명단과 액수가 워낙 많아서 보고서에는 피해자 부록이 따로 붙어 있었다.” 고 한다.
이 조병식은 이듬해 7월15일 충남 금천에 구금된 뒤 19일 의정부 요청에 의해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7월 30일 고종은 조병식의 석방을 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4개월 뒤 전라도 고부에서 또다시 농민들이 죽창을 들었다. 이번에는 조병식의 4촌 동생인 고부군수 조병갑이 문제였다.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은 탐관오리 조병식 충정감사와 탐관오리 조병갑 고부군수 사촌형제의 악행에서 촉발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과 고종 정권의 빽.)
1892년 4월28일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마치 양떼목장에 들어온 늑대처럼 악행을 즐겼다. 악행은 1893년 11월30일 익산군수로 발령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조병갑은 익산으로 떠나지 않았다.
그해 12월24일 신임 고부군수 이은용이 황해도 안악군수로 발령나더니 1894년 1월 2일까지 신좌묵 이규백 허금일 박희성 강인철 순으로 계속 신임 고부군수가 바뀌었다. 한달 남짓한 기간에 서류상으로 고부군수가 일곱명이 바뀐 것이다.
결국 이조에서는 “조병갑이 세금징수에 문제가 많았지만 새로 군수를 뽑으면 일을 더 못하리라 본다.” 며 익산으로 갈 조병갑을 고부에 눌러 앉혔다.
왜 일곱명의 고부군수 후임들이 고부군수로 부임하지 않고 있었는지와 왜 조병갑이 명령에 불복하고 고부군수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의 이 난해한 인사 대행진에 힌트가 있다.
1894년 2월 조병갑의 악행이 폭로된 뒤 전라 관찰사 김문현이 조병갑을 체포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의정부 정승들이 이렇게 말했다. “ 처음에는 칭찬한다고 연임시키더니 지금은 잡아오겠다고 한 것은 관찰사의 빽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중앙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고부군수 부임 직전인 1892년 4월 영동현감이던 조병갑은 중앙정부 기기국 위원으로 전임됐다. 그 무렵 왕비 민씨가 조카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왕비 민씨가 조카 민영소에게 보낸 인사청탁편지내용)
“ 조병갑이 그러하나 관직외에는 나가지 않아 다른 데로 하겠다 고 한다. 일단 다른 직책에 임명한 뒤 상황을 보겠다는 뜻이다. (왕비 민씨의 편지내용) ”
결국 조병갑은 기기국 위원 재임 19일만인 4월28일 고부군수로 발령이 났다. 이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 뒤에는 고종과 민씨 척족세력의 강력한 빽이 작용했다는 증거이다.
(되돌리지 못한 역사의 흐름)
동진강은 다시 흘러갔다. 하지만 한번 역류를 시작한 역사는 되돌리지 못했다. 2월15일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는 철저하게 농민탄압으로 일관했다.
농민반란은 더욱 확대돼 전국으로 확대됐다. 황토현에서 동학군에게 패한 관군사령관 홍계훈은 조정에 원병요청을 건의했다. 고종은 최측근이자 농민군의 타도 대상인 민영휘와 함께 국내 주둔중이던 청군 사령관 원세개에게 군사를 요청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정부 요청에 병사를 파병했다.
일본은 조선파병을 공동으로 한다는 1885년 천진조약조항을 내밀고 일본군을 파병했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동학전쟁은 조선관군과 일본군의 연합전에 의해서 동학군은 궤멸됐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청일전쟁 종전조약인 시모노세기 조약 1조에 일본은 “조선이 자주 독립국 인정”이라는 조항을 삽입해서 청나라의 간섭을 베재했다. 이것은 대륙진출을 노리는 일본이 마침내 조선을 집어삼킬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역추적하면 조병갑이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지방관리 ,중앙권력의 비호를 받는 탐관오리의 개인비리가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들은 어떻게 처벌되었는가.)
전봉준은 교수형을 당했고 형제들도 연좌제로 사형을 당했다. 후처는 노비가 되었다.
김개남은 전주에서 처형되어 양반들이 내장을 꺼내 씹어 먹었다. 김개남의 머리는 서울로 보내져 서소문에 효시된 뒤 전국을 순회 전시했다.
(보은군 북실마을의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공원을 구경한 뒤 탐관오리 조병갑이 묻혀있는 공주시.신풍면.평소리.사랑골 마을로 이동)
이렇게 보은군 북실마을의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공원을 둘러본 뒤 5.24일 오전10시05분경에 우리는 탐관오리 조병갑이 잠들어 있다는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이란 마을로 이동했다.
사랑골 마을에 도착해서 조병갑 무덤을 찾아보려는데 그 무덤의 소재를 설명해줄 사람을 만날 방법이 없다. 평소리 사랑골 마을은 텅 빈 마을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맨 우측 능선속으로 올라가서 헤메었지만 무덤은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 힘이 들어 나머지 좌측 능선들은 올라가 보지 못하고 그냥 내려와서 귀경길에 올랐다. 그때가 시간은 5월24일 13시15분경이었다.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마을 전경 모습1)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마을 전경 모습2/우측능선을 답사했으나 조병갑 무덤은 발견하지 못하고 하산했음. 좌측능선까지 힘이 들어 올라가지 못했음.)
(맺는말 )
이렇게 보은군 북실마을의(=보은읍 종곡리)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공원 일대와 탐관오리 조병갑이 잠들어 있다는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 마을 뒷산까지 둘러봤다. 비록 조병갑 탐관오리의 무덤을 발견하는데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5월24일 13시15분경에 사랑골 마을을 떠나 귀경길에 올랐다. 점심은 중부고속도로 증평ic 부근에 있는 중국집에서(주소는 진천군 초평면 중부로 1729 상하이왕짜장) 간짜장으로 점심을 때웠다.
서울 아파트에 도착하니 시간은 17시06분이었다. 금일 왕복 주행거리는 517km이고 평균연비는 27.1km이다.
정말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학살된 인원이 9500여명이고 보은군 북실마을에서 학살된 인원이 2600여명이다. 이때 학살된 동학농민혁명군은 아마도 1854년 내지 1864년경에 태어난 젊은이들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억울하게 죽은 분들이 얼마인지는 통계가 있을 리 없다. 정말 이렇게 슬픈 역사의 기록을 읽으니 한없이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진심으로 이때 희생된 동학농민혁명군들의 명복을 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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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간 비용 지출액 : 91,029원)
1.왕복 주행거리 : 517km
2.평균연비:27.1km/리터당.(계기판에 표시된 내용이지만
정확성은 검증하지 못함/하이브리드 차임)
3.휘발유값=517km/27.1km*1519원=28,979원
4.고속도로 통행료=31,050원(유효기간만료로 재발급기간중
이라 할인혜택을 받지 못함)
5.조식김밥값2인분 : 2인*2000원=4,000원
6.기타 간식비(4종) : 11,000원
7.증평중국집간짜장점심값:16,000원(2인*8천원)
8.여행비용지출액 : 91,029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