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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5일 부활주일 설교
골로새서 3:1-10
부활(일으켜짐), 곧 지금 계속 새로워짐
부활절입니다. ‘부활절’, 이 말을 들을 때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른 새벽, 여자들, 빈 무덤, 흰옷 입은 존재. 참으로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부활 이야기가 그것이 전부라면-그날 아침 무덤 앞에서 끝나고 멈춘다면- 예수 부활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부활은 단지 그 옛날 예수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이기만 할까요? 또는 장래에 있을 미래의 일이기만 할까요? 아니면 지금 이 땅과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진행되고 있는 무언가일까요? 질문이 다소 도발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거든, 여러분은 위의 것들을 계속 추구하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기서 ‘일으켜졌거든’은 마태복음 4장 예수의 시험장면에 나오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과 같은 표현(εἰ, 에이)입니다. 즉 ‘의심’이나 ‘가정’의 표현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한글성경은 이를 적극 반영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으니”라고 번역합니다. 또 한편으론 2주 전 변모산 설교 때 잠깐 언급했던 ‘부활 대표 표현’(ἐγείρω, 에게이로, 일어나다, 일으키다, 깨어나다, 깨우다의 수동태)’이기도 합니다. 즉 지금 골로새서는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부활을요.
부활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 왔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난 후 저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뜨는 것.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오셨듯 우리도 언젠가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미래의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 이해가 틀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부활의 전부도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과연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부활이 오직 육체의 소생에만 국한된다면, 오직 죽음 이후의 이야기라면, 지금 이 순간 이 땅과 이 자리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 골로새서는 그것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실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지금 당신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다.”,
“예수의 그 부활이 지금 여기, 당신들 안에서 그리고 당신들의 삶 속에서 시작되었다.”
달리 말해, 과거에 일어났던 예수의 부활이 현재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본문 외에 다른 한 책도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톨스토이(1828-1910)의 장편소설 『부활』(Воскресение, 보스크레세니예)입니다.
32세의 귀족 청년 네흘류도프 공작은 어느 날 배심원으로 법정에 나갑니다. 그런데 피고인 세 명 중 한 여인이 눈에 들어옵니다. 금품 절도 및 계획적 살인혐의로 기소된 창기 마슬로바입니다. 그 얼굴을 본는 순간 그는 얼어붙습니다. 그녀는 고모 댁 하녀로 10년 전 자신이 떠나버린 정인이었기 때문입니다. 22세에 그는 고모 댁 하녀인 19세의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껴서 구애했고, 그 구애를 거절하던 순수하고 겁 많은 그녀 역시 끝내 넘어가 서로 첫정을 나눈 정인, 그런데 동침 후 남자는 신분 차이 및 현실이 생각나 나름의 미안함과 책임감으로 100루블 지폐를 쥐여주곤 떠나버린 바로 그녀 카튜샤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녀는 아이를 낳기 위해 고모 집을 나갔다는 것을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알게 됐고, 날짜를 따져보니 자기 아이인 듯도 했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자기 아이라고 믿을 수 없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일을 생각한다는 게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워 점차 찾아볼 생각을 그치고 잊게 된 여인을 보곤 자신의 행동과 행적, 실수와 잘못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재판이 끝난 후 용서를 빌기 위해 그녀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카튜샤는 자기를 못 알아보고 그저 ‘나에게 매력을 느껴 찾아온 돈 많은 귀족’인 줄 알고 추파를 던집니다. 네흘류도프가 자신임과 용서를 빌러 왔다고 밝히자, 그녀는 얼굴이 굳었다가 이내 모욕적인 웃음을 지으며 “당신 같은 사람은 모르고, 술이나 마시게 10루블만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자신 안에 오래, 깊이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일으켜진 것입니다. 어떤 진실이 갑자기 환하게 드러나진 것입니다. 네흘류도프에게 드러나진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진짜로 어떤 사람이며 누구인지가 환히 밝혀졌습니다. 찬란한 귀족의 신분과 지위 이면에, 호화스러운 파티와 사교계의 삶 이면에, 그리고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하는 막대한 부동산과 재산 이면에 — 한 여인의 삶을 망가뜨리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자신이 그 재판정에서 환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드러나지고 밝혀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목도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 이야기는, 반드시 죽음 이야기를 동반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네흘류도프가 법정에서 카튜샤를 보고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있어 정작 살아있어야 할 부분은 죽어있고, 죽어있어야 할 부분은 왕성히 살아있음을 목도한 것입니다. 살아있어야 할 사람에 대한 신의, 사랑, 책임에 대해서는 정작 죽어있는 자기 자신을요, 반대로 책임회피, 정당화, 합리화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요. 그래서 자기 자신이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추구해야 할 진정 살아있는(생명)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안에서 일으켜진 것입니다. 네흘류도프에겐 그것이 직면과 책임 그리고 용서 구함의 길이었던 것이지요. 본문의 언어가 아닌 보다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죽음의 인식. 내 안의 무언가가 죽어있다는 것. 양심이 죽었고, 타인을 진정으로 대하는 능력이 죽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 죽어있었다는 것을 보고 느낀 것입니다. 그렇게 환히 밝혀진 어둡고 수치스러운 자신의 진짜 모습 때문에 참담했지만, 이번에는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길을 선택하자고 하는 마음과 용기가 일으켜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살아 있지만 죽어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굳어버린 관계.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영역.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무감각해진 부분들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골로새서는 말합니다. 부활 곧 일으켜짐이란 그런 것들이 살아나는 것들이라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기 때문이며,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니 정말 살아있는 사람답게, 일으켜진 존재답게 생명을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생명과 죽음을 혼돈하지 말며, 뒤바꾸지 말라고요. 그것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살아있어야 할 부분에 살아있고 죽어있어야 할 부분에 죽은 존재라는 것을 일으켜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이십시오, 땅 위에 있는 지체들을.”
우리 안에 죽어있는 것들을 살아있다고 착각하며 붙들고 있진 않는지 되돌아보라는 요청입니다. 탐심, 정욕, 거짓, 자기합리화 — 이것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진짜 매력과 능력 그리고 생명이 있는 것처럼 현혹되어 살아가진 않는지 자기 자신을 살펴보라는 초청입니다.
임신한 20세 남짓의 카튜샤가 쫓겨나다시피 네흘류도프 고모네 집에서 나온 이후 일들은 이렇습니다. 경찰서장 집에 하녀로 들어갔지만, 쉰 살 넘은 서장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까닭에 세 달만에 쫓겨납니다. 해산할 달이 가까워져서 어쩔 수 없이 술을 파는 한 과부 산파 집에서 네흘류도프의 아들을 낳지만, 산욕열이 옮아 부득이 양육원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아이는 가자마자 숨을 거둡니다. 이후 일자리를 구하는 곳마다 그 집 남자들이 치근대는 까닭에 쫓겨납니다. 심지어 같은 건물에 살면서 결혼까지 약속한 사내는 어느 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 곁을 떠났습니다. 그 직후부터 술을 찾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남자들로 인해 시련과 아픔을 겪으며 갈 곳 없는 그녀에게 뚜쟁이 할멈은 차라리 유곽에 몸을 담으면 돈도, 술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어 그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렇게 된 카튜사의 모습에 미안함과 죄스러움 그리고 반성과 책임감을 느낀 네흘류도프는 이 이후 억울한 그녀의 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겁니다. 카튜샤가 결국 유죄를 선고받아 시베리아로 징역살이(강제 노역형)를 향할 때, 그 역시 그녀를 따라갑니다. 귀족적 특권을 내려놓고, 자기정당화를 내려놓고, 안락한 삶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름다운 결단이기 전에, 몹시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실은 그 과정과 여정에서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고, 몇 번이나 돌아서고 싶었습니다. 내적갈등을 지속적으로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계속 나아가게 만든 것이 있습니다. 그의 강한 의지도, 도덕적 결심도, 속죄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각오도 아닙니다. 그 마음을 강하게 먹었더라도 매번 순간순간의 시련에 흔들렸습니다. ‘정말 이 길이 맞는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이 정도면 되지 않은가?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은가?’등의 생각이 순간순간 그를 강하게 휘어잡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나아가게 만든 원동력은 그의 외부에 있었습니다. 법정에서 카튜샤를 보고서 자신의 진짜 모습과 자신이 돌이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된 것처럼, 주위 사람들을 통해 다시금 내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어느 자리에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싶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간략히 언급하자면, 시베리아로 강제로 내몰리고 끌려가는 농민 및 시민들과 그들에게 판결을 내리고 집행하는 지배층 또는 지도층들의 모순적인 현실과 그 모습이 그를 그 길로 계속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떵떵거리고 위세 부리지만 실상은 자기와 그 잇속밖에 모르는 추악하고 수치스러운 그들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비록 억울하게 억눌려 갖은 모멸과 고생을 하지만 실상은 그런 상황에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인간미(인류애)가 있는 양심이 살아있는 그들의 길을 갈 것인지 진짜 현실을 알아보고 느끼게 한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참된 지식에 이르도록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새 사람이란 계속 새로워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새롭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됨을 입는 사람,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것이 계속 그를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문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내가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에게 와닿을 때, 내 안에서 오래 죽어있던 것들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깨운 것이 아닙니다. 깨어난 것입니다.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주위 사람들과 환경, 곧 우리 모든 삶의 자리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거나, 어떤 말을 듣게 되거나, 어떤 순간에 —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계기로 내 안에서 꿈틀대고 생동하는 경험이 다들 있으실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새 사람의 새로워짐, 수동태의 갱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부활(일으켜짐, 새로워짐)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완성됐다, 이루어졌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1절에선 ‘여러분은 일으킴 받았다’(단회 수동) 말하기도 합니다만, 4절과 10절에서는 각각 ‘드러나질 것이다(미래 수동)’, ‘(지금 계속) 새로워지고 있습니다(현재 수동)’로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이란 단지 과거의 일도 아니고, 현재 완성된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단지 미래에 있을 일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과거로부터 시작되어 미래에 이뤄지게 될 일이지만, 지금 이 땅 이순간에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일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가장 놀랍고 뜻깊고 아름다운 일이 일어납니다. 카튜샤의 새로워짐입니다. 네흘류도프가 공치사로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험난한 여정을 뒤따르며 계속해서 전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 역시 새로워집니다.
오랫동안 그녀는 상처와 아픔에 함몰되어 자기를 포기했습니다. 자신은 창기라고,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고, 다시는 달라질 수 없다고 체념하고 운명을 탓하곤 막살았습니다. 그런데 네흘류도프가 그녀를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하면서, 포기하지 않으면서, 오래전에 죽어버린 줄 알았던 무언가가 그녀 안에서도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절망과 체념 속에 자포자기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고픈 꿈이 다시 움직이고 생동하기 시작합니다. 그 소망이 그녀를 새로워지게 만듭니다. 또한 남자들과 사람들을 향한 적개심과 불신으로 가득했던 냉소가 어느덧 그들을 향한 용서와 긍휼 그리고 따뜻한 연민으로 바뀌어 갑니다. 예전의 삶보다 더 춥고 혹독한 시베리아의 삶 가운데서도요. 그 가운데서도 표정과 얼굴빛이 달라지고, 말투와 사람을 대하는 게 달라집니다. 본문이 말하는 부활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과 내용들(5-10절)이 네흘류도프 뿐만 아니라 카튜샤에게도 역시 일어나게 됩니다.
한 사람의 부활이 다른 사람의 부활을 낳은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또 다른 진정한 의미이지 않을까요? 부활은 나 혼자의 사건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살아날 때, 그것은 반드시 내 곁의 누군가에게로 흘러가고 영향을 끼칩니다. 이것 역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와 네흘류도프가 참여하게 된 것처럼요. 그 죽음과 부활에 또 다른 우리인 카튜샤가 참여하게 된 것처럼요. 네흘류도프와 카튜샤의 새로워짐을, 각자 서로를 매개로 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참여시키신 것처럼요.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으니, 위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의 것’ 이것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지금 이 자리를, 지금 이 삶을 보고 찾고 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추구하시는 것들을 추구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와 함께 새로워지는 변화를 입는 존재답게 추구하며 살라는 것이며, 그렇게 사는지 되돌아보라는 요청입니다. 예수께서 추구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죽어있는 존재들을 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낙인찍히고 포기된 그리고 스스로도 그 낙인과 포기에 굴복한 자들이 일으켜지도록 함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머무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세리와 창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먹고 마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예수와 함께하는 부활을 지금 이순간에도 그리고 이 자리에서도 이땅과 우리에게 행하고 계시며, 일으키시고 깨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계속해서 온전히 받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