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신간회 활동에 열성이었던 분은
박태홍.
신간회 결성초기는 6.10운동 여파로 제대로 참여 못했지만, 신간회 진주회장으로 해소 때까지 진주 신간회를 지켰던 박태홍이다. 박태홍은 진주천도교활동도 함께 했고 해방 무렵 환원. 아래 링크에는 1944년 환원하신 것으로 나오지만, 진주천도교 기록에는 해방 이후에도 성미납부한 기록이 있다.
박태홍
http://omn.kr/f84
위 사진은 1928년 진주신간회 사진이라 한다.
당시 박태홍은 2차조공건으로 옥중에 있었기에 이 사진에는 없을 것이다. 감옥에서 나와 신간회 진주지회장으로 해소때까지 진주신간회와 함께 했다.
아래는 김희주교수 논문의 일부다.
《진주대교구의 개편과
지역 사회운동에 역동적으로 참여》
/김희주-한국국제대학교 교수
1906년 영남 유일의 대교구로 출범한 진주 천도교는 1914년 7개 교구를 관할하는
경남 교단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도청 소재지인 진주에서 교맥을 이어가던 천도교는
3.1운동을 거친 후 교세의 신장을 이루는 한편
민족운동과 지역 사회운동에 역동적으로 참여했다
3.1운동 이후 교구 임원의 개편과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전희순으로 대표되는 동학 출신의 1세대들이 퇴진하고, 신용구를 필두로 하는
신파 2세대 인사들이 부상한 것이다.
1914년 입교하여 3.1운동 이전까지 무명이었던 신용구는 1920년 전제원을 시작으로 보직을 연임하며 진주교단의 실세로 약진했다.
신유포덕이 이루어진 1921년에는 교인이 증가하고
임원이 보강되는 등 급격한 교세의 신장을 보인다
1922년 연원제의 폐지와 분권화를 골자로 하는
혁신운동이 격화되자 신용구는 이를 배경으로 진주교단을 개편하였다.
그의 사회로 동년 3월 5일 교구 성화실에서 열린 종의회 선거는 진주천도교의 주류 교체가 이루어지는 현장이었다.
폐지된 교구장을 대신할 핵심보직인 종법사, 종무사, 종리사에
신용구, 박태홍, 하준천이 각각 당선되었다.
직전 교구장인 전희순, 김상정은 일선에서 물러난다
신용구는 같은 해 6월, 교주 박인호의 사퇴 후
천도교 전체 사무를 관장했던 42인 대표위원에 선출되어 중앙 교단에도 두각을 나타낸다.
그 뒤 천도교청년당 영남대표와 상무 종법사를 거쳤고 1937년 도령에 보임되어신파의 지도급 인물로 성장했다.
신용구와 함께 진주교단의 핵심이었던
박태홍, 김영선, 이영조도 모두 신파에 해당되는 인사들이다
<천도교진주교구, 지역운동을 선도하다>
확대된 교세와 영향력을 바탕으로 진주 천도교는
지역의 문화운동을 선도했다.
1919년 7월 부인야학교의 설립을 시작으로
강연, 문화, 예술, 스포츠 활동 등의
신문화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3.1운동 직후
진주대교구가 설치, 운영한 부인야학교다.
1919년 7월 전희순, 신용구, 백낙중 등
교구인사들이 발기하여 설립되었다.
교인’노소부녀’들을 대상으로 교리강구와 ‘실천적 신지덕’을 교수했다 한다. 수업은 매일 오후 한 교실에 모여 강의와 문답으로 진행되었다.
교리와 윤리교육, 그리고 일반보통의 지식이라 명시된 정규 학교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수과목인 조선어, 즉 한글은 당연히 채택되었지만
당시 야학이 중시했던 일본어는 배제되었다.
진주대교구의 부인야학교는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천도교의 문화운동이 발동되기 전인 1919년 7월 개설되었다는 점이다. 중앙총부도
이 야학이 가지는 선도적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축하와 함께 13도 교구 도처에서
진주와 같은 ‘실적’이 ‘봉기’하고 이어질 것을 기원했다
두 번째, 3.1운동 이전은 발견하기 어려웠던
진주교구의 실력양성운동이 천도교의 주 계몽대상인 여성층을 상대로 전격 실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진주지역은 대한제국기부터 남녀공동야학이 운영되는 등 근대여성교육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1910년대에도 유지.기생들에 의해 여자야학과 강습소가 꾸준히 설치되었다.
그러나 천도교가 설립, 운용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부인야학교의 개설은 3.1운동 이후 이 지역 천도교의 변화를 예시하는 사실이라 하겠다.
중앙의 이론가와 지부 간부들이 참여한 합동 강연회는 신문명, 신사조의 전도장이었다.
주민들은 이를 통해 교리와 함께 개조사상과 같은 문화운동의 논리를 수용할 수 있었다.
천도교가 발행한 잡지 ‘개벽’과 ‘어린이’도
분매소를 통해 진주에 유통되었다. 이 역시 천도교 사상과 문화운동론의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상응해 유지교인들의 교육계몽사업도 등장한다.
지수면의 지주 허진구와 구용서는 사재로 야학과 전교실을 건립하여 교인과 사회적 약자를 계도했다.
소년단체의 독립운동이 처음 일어났던 진주에서
천도교는 사명감을 가지고 소년운동을 실천했다.
천도교소년회의 결성과 어린이날을 통해
1923년 진주 최초의 ‘어린이’가 탄생했다.
이들을 민족의 대들보로 키우고자 교인 지도자들은 열과 성을 다했다. 지.덕.체를 겸비한 미래의 동량을 만들기 위한 소년운동이 1920년대 후반까지 활발히 전개되었다.
‘소년에 의한’ 독립운동과 ‘소년을 위한’ 어린이 운동이 모두 이뤄진 진주는
한국소년운동의 요람이자 ‘성지’였다.
사회주의 세력이 장악한 진주의 청년 노동 농민 운동에서 천도교인들은 각고와 분투를 거듭했다.
김의진, 박태홍, 박태준, 고경인 등은 감시와 구금이 일상인 조건에서도 조직과 운동에 헌신했다.
일제의 고사 전략에 맞서 진주 신간회를 지켜나간
박태홍의 고투는 처절할 정도이다.
1920년대 진주지역의 엘리뜨와 주민들이 추구했던 이상향은 두 가지였다. 한쪽은 선진화된 근대문명사회로의 진입을 기원했다.
다른 한편은 억압과 착취가 없는
사회중의 유토피아의 달성을 갈망했다.
진주 천도교와 교인들은 양자의 세상을 만드는 운동에 선도적으로 참여했고희생당했다.
하지만 이념과 노선에 상관없이 그들의 심령에는
포덕천하와 지상천국의 가르침이 근본했고,
그것이 신념과 동력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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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신간회관련 링크 등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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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9999_1_0027117
강대창(姜大昌)
생졸년 미상.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자. 출신지는 경상남도 진주(晉州)이다.
1923년 진주에서 금주단연회(禁酒斷煙會) 조사원을 하였으며, 1924년에는 사상단체 동우사(同友社)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5년 2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 창립 3주년기념회 준비위원으로 뽑혔다. 같은 해 9월에 설립한 동아일보 진주지국을 1935년 4월까지 맡아 경영을 하였다. 1927년 12월에는 신간회의 진주지회 간사직을 맡아 조직선전부를 담당하였으며, 1928년 2월 진주농민연맹 창립 때 조직부의 담당집행위원직을 맡았다. 1929년 3월에는 진주기자단의 간사로 활약하였으며, 1930년 4월에는 경남기자동맹위원으로서 서무재정을 담당하였고, 9월에는 진주농민조합의 집행위원직을 맡았다. 1931년 7월에는 발기인으로서 진주소비조합에 참여하였으며, 1944년에는 구여순(具汝淳) 외 19명과 함께 고려구국동맹회를 조직하였다.
해방 후에는 진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5년 11월에는 전국인민위원회에 진주시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1946년에 일어난 ‘10월 인민항쟁’ 때는 진주 지역의 항쟁을 선도하였다.『인민의 벗』이라는 좌익잡지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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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86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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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넷
6.10과 신간회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list.do?levelId=nh_049_0030_0020
조우제
http://www.kny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1
진주와 조공(김희주글)
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492718
빈태문
http://w3devlabs.net/korea/archives/tag/%EB%B9%88%ED%83%9C%EB%AC%B8
박진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2&pageTitle=Merit&mngNo=8535
https://yeosoon.tistory.com/entry/23%EC%84%B8-%EB%B0%95%EC%A7%84%ED%99%98%EA%B3%B5
강상호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326510
경남과기대
http://www.newsch.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3
구씨 허씨 두집안
http://omn.kr/1n22p
경남50장면(임종금)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72502
고성독립운동사
http://www.hansa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652
강영호포상신청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33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