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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2:1-8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25.3.16 주일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입니다.
‘순천’ 하면 국가정원이나 갈대숲을 생각하겠지만 그 부근에 각종 수석을 8천 개 이상 모아 전시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순천수석세계박물관’입니다. 3만평 땅에 개인 한 사람이 50년 동안 독특하고 진귀한 돌들을 모아다가 전시관을 만들었는데 세계 최초, 세계 최고, 세계 최대의 규모라고 합니다. 이분이 이전에 ‘진돗개 전도왕’으로 이름을 날리던 박병선 장로님입니다. 한 번 물면 안 놓아주는 진돗개처럼 전도할 때도 교회 나올 때까지 붙잡은 영혼을 놓치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별칭입니다. 진도군에서는 이분을 진돗개 홍보대사로 임명도 했습니다. 장로님이 영혼만 모은 것이 아니라 이상한 돌도 모았습니다. 우리도 뭐라도 모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돌이 많이 등장합니다. 4,5절에는 “산 돌”이 나옵니다. 6절과 7절에는 ‘모퉁잇돌’, 또 ‘모퉁이의 머릿돌’이 나옵니다. 그리고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나옵니다. 8절에는 ‘부딪치는 돌’, 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도 나옵니다. 이 돌은 모두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돌에 비유한 것입니다.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까? 예수님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는 답, 우리의 저주와 질병과 고통의 문제로부터 해결하는 답, 영생에 이르는 답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도울 힘이 없는 우상,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의 영원한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1.오늘 베드로는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보배로운 산 돌”입니다. 이 말은 살아있는 귀한 돌이라는 말입니다. 이 돌을 보는 관점은 너무도 다릅니다.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이 택하신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돌을 알아보지 못하고 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당시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 당시 종교 지도자들, 유대군중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뜨려서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사 보배로운 산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후에 어떤 건축자는 그 돌을 가져다가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았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축물의 한 면과 다른 면을 연결하는, 모퉁이와 모퉁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고, 저와 여러분을 연결하는 분입니다. 이를 알고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보배로운 돌로 여깁니다. 그렇게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약속합니다. 6절을 보시면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나오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건축자들은 ‘이 돌은 쓸모가 없어!’라고 하면서 내다 버렸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불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비난하다 마침내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결국 예수님이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려고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거부하고 죽은 자들에게 더 이상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 심판의 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오는 자에게는 구원의 돌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거치는 돌, 심판의 돌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3:18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3:36에서도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음의 형벌을 받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해결하셨는데 이를 믿지 않으면 이제는 믿지 않는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요16:9). 하나님은 아들희 희생을 통해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했지만 안 믿으니 그에게 효력이 없는 것이고 아들을 믿고 나오라고 한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2.베드로 사도는 이 돌에 대하여 ‘산 돌’ 즉 ‘살아있는’ ‘산’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하고 우리의 소망에 대해서도 “산 소망”이라고 합니다. 본문 앞장인 벧전1:3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살아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부활의 소망입니다. 영생의 소망입니다. 할렐루야! 이 소망은 지금 우리에게도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강조합니다. 벧전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히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분의 모든 약속의 말씀도 살아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단지 호흡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이 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살아있는 돌, 산 돌이라고 한 것은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돌을 뜻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5:26에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나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요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요11:25).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이 땅에서 육신이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우리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요5:24). 우리는 살아있는, 즉 생명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요7:37,38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서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너희는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요6:63).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생수의 강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은 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생명이신,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3.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절을 보시면 먼저 모든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나가라고 합니다. 즉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라는 것입니다. 멀리 할 것은 멀리 하고 가까이 할 것은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미워할 것은 미워하고 사모할 것은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악독은 남을 해치려는 악한 마음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즉 나쁜 계획, 악한 목적을 품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기만하는 것도 버리라고 합니다. 기만은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속임수로 꼬드기는 것을 말합니다. 정직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눈가림으로 남을 속이는 것이라면 분명히 잘못된 것이니 우리가 취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외식도 버리고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겉으로만 보이려고 하는 것,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외식입니다. 사람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다른 말하는 것,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 외식입니다. 예수님은 외식에 대해 책망하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말씀하셨습니다. 마23:5~7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기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겉과 속이 얼마나 다른지 회칠한 무덤 같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게 단장했지만 그 속은 썩은 송장이 있는 것이 무덤입니다. 이들의 말과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시기함으로 나아가는 것도 잘못입니다. 시기, 질투는 타인이 행복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남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무슨 봉사를 해도 남이 하는 게 질투가 나서 한다면,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 한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가 아니라 서로서로 복을 빌어주고 진실한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있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을 증거할 뿐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복을 빌어주고 더불어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그도 윤택하여 지리라는 것이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잠11:25). 비방하는 말도 금하라고 합니다. 항상 비교하기 좋아하고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먼저 찾아내고 흠담하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이러한 죄의 본성을 버리고 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갓난아기들의 젖이라고 표현한 것은 말씀이 곧 젖, 생명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은 생명줄을 붙잡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젖이 자기를 살리는 유일한 생명양식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되 마치 갓난아기들이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여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어 젖을 빨듯이 그렇게 사모함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듣기를 사모하고 기도하기를 사모하고 은혜 받기를 사모하고 예배드리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만족을 주시고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고 멀리 할 것은 멀리하고 사모할 것을 사모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4. 우리가 이렇게 하므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입니다(2절).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도달하다, 완성하다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시작한 구원을 완성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천국행 열차를 탄 자이지만 아직 도착한 자는 아닙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결코 내려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구원의 시작이요 완성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님이 아버지 보좌에 앉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로 오르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심으로 구원을 완성한 것입니다(히12:2).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으니 완성자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가서 반드시 구원을 완성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을 끝까지 이루는 완성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간다고 했습니다(5절). 이제 우리도 산 돌이신 예수님과 함께 세워져 간다는 것입니다. 원줄기에 접붙인 가지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에 접붙여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님께 연결되어 신령한 집을 함께 지어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자녀답게, 왕 같은 제사장답게, 거룩하게 자기를 구별하여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겉을 단장하는 자가 아니라 속을 단장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요, 성화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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