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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월문리에서
송 기 원
화당리(花唐里)의 야산을 굽어 돌자 옆에 가던 이 선배가 손짓을 했다.
“저기여.”
나는 이 선배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삼 년 전 가을에 도토리며 상수리 열매를 따러 몇 번인가 와보았던 눈에 익은 골짜기였다.
“저긴 칡골인데…… 공동묘지가 있는 것 같지 않았는데요?”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이 선배가 다시 손짓을 했다.
“저기 솔밭 뒤루 민둥산이 보이잖여? 거기여.”
나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칡골의 깊숙한 골짜기를 향해 다락논들이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왼쪽 어귀의 솔밭 사이로 민둥산이 엿보였다. 흔히 공동묘지 부근이 그렇듯이 아카시아나 가시나무 따위의 악목들만이 제멋대로 숲덤불을 이루어 우거져 있는 틈틈이 몇 개의 무덤이 추운 듯 엎드려 있었다. 나는 삼 년 전 몇 번인가 칡골을 드나들면서도 공동묘지를 보지 못했던 까닭이 수긍이 갔다. 나무다운 나무가 없는 민둥산 쪽을 구태여 올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이 선배가 앞장을 서서 솔밭 속으로 산길을 타자 나는 잠시 멈추어 처와 아이들을 기다렸다. 맞은편 골짜기의 응달에서는 잔설들이 눈에 시렸다. 이제 막 음력설을 지낸 무렵이라 골을 타고 내리는 바람이 얼굴에 차가웠지만, 성급한 농부들이 져다 낸 무논*의 두엄더미며 박빙(薄氷)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은 역연한 봄기운을 뿜어내며 빛나고 있었다. 그 햇빛을 바라보자 문득 내 시야에는 햇빛에 겹쳐 흰 두루마기 자락 같은 것들이 어른거려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내 시선에는 이제 보다 뚜렷하게 솔숲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흰 두루마기 차림의 큰아버지며 작은 아버지 그리고 사촌 형제들의 모습이 비쳐 들고 있었다, 팔촌에서 십촌을 훨씬 넘어 거의 촌수를 헤아리기도 어렵게 벌족한* 생부 집안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어서 정초에는 스무 명 남짓이 떼를 이루어 종일토록 마을 뒤 선산의 잘 가꾼 솔숲을 헤집고 다녔었다. 그럴 때면 큰아버지는 서자 출신인 나의 어색한 입장을 거두느라고 으레껏 나를 앞장세워 다니며, 이분은 증조부니라, 이분은 할아버님이시다, 이분은 할머님이시다 하고 자상하게 일러주었고, 그러다가 내 생부의 묘에 이르면, 에이, 몹쓸 것, 하고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버린 내 생부를 향해 쯧쯧 혀를 차곤 했었다.
나는 무논에서 눈을 돌려 가까이 다가온 처를 돌아보았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있던 처는 내 시선을 느끼자 얼핏 눈을 내리깔았다. 추위 탓만도 아닌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이 처의 표정을 굳게 하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솔밭을 가로지른 산길로 걸음을 옮겼다. 이 선배는 민둥산 어귀의 밭두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선배가 나에게 힐끗 일별을 던지고는 재빨리 외면을 했다. 이 선배는 아침 무렵에 함께 서울을 떠나 이곳으로 오면서부터 이상하게도 줄곧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눈치였고, 그런 이 선배에 대해서 나는 나름대로 공연히 죄스러워져서, 차라리 혼자 올걸, 하고 이 선배와의 동행을 후회하는 마음이었다.
뭘 그리 급하게 구는 거여? 설이나 지나구 날씨가 따뜻해지걸랑 그때 천천히 가여. 나두 함께 갈 팅께. 지금 그렇게 성치 않은 몸으로 가면 마을 사람들한테 숭 잽혀. 아, 공연시 마을 사람들한테 병신이 되어 나왔다구 뒷소문 들을 필요가 어딨어?
꼬박 이 년 반을 갇혀 살다가 나온 후에, 그 후유증으로 병원에 들락거리던 연초의 어느 날 이 선배에게 내가 어머니의 산소에 다녀올 뜻을 비치자 이 선배는 벌컥 화를 내면서까지 만류해왔다. 무언가 애매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선배의 만류대로 차일피일 산 소행을 미루다가 음력설을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만 결단을 내렸다. 이번에는 이 선배도 차마 만류를 하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언짢은 표정으로 동행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아카시아숲이며 가시덤불 그리고 버려진 무덤들을 지나치며 민둥산을 올라갔다. 민둥산의 중턱에 다다르자 이 선배가 한 무덤 앞에 멈추어 섰다.
“여기여.”
이 선배가 여전히 나를 외면한 채 말했다.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전혀 손질이 가지 않은 주위의 무덤들과는 달리 어머니의 산소는 그래도 비교적 다듬어진 편이었고 화강암으로 만든 작은 묘비도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잠자코 묘비를 들여다보았다. 유인해주최씨지묘 (孺人海州崔氏之墓).
“그래두 이 일대에선 여기가 제일 좋은 자리여.”
옆에서 이 선배가 마치 내던지듯한 어투로 말했다.
어머니의 부음을 전해 들은 것은 내가 갇혀 있기 시작한 뒤로 일 년 반이 가까워오는 무렵이었다. 엷은 비닐막으로 유리블 대신한 창문을 넘어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햇살이 이제 막 투명하게 여겨지는 초가을이었다. 면회 온 처가 울먹이며 어머니의 부음을 전해주었다.
……병이 악화되어서 그만……
아니, 다 나으셨다고 했잖았소?
나는 면회실의 칸막이 너머로 악을 쓰듯 물었다.
사람들이 알리지 말라고 해서…… 안에 있는 사람한테 좋지 않다고…… 그럼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줄곧 일어나시지 못했단 말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처를 건너다보다가 그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래도 장례식은 외롭지 않았어요. 많은 분들이 오셔서……
처의 말을 마저 듣기도 전에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면회실을 빠져나왔다. 자꾸 비틀려지는 입술에 힘을 주면서 나는 감방까지 걸어갔다. 초가을의 햇살이 독방의 마룻바닥에서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서서 과일과 어포 따위를 진설하고* 있는 이 선배와 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독방으로 들어석던 순간의 숨이 끊어질 듯하던 고통이 되살아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억 하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마릇바닥의 햇살더미 위에 나뒹굴었다. 눈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슬픔이라든가 분노 따위의 감정도 없었다. 나는 다만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으로 사지를 뒤틀었을 뿐이었다. 훗날 나는 그 고통을 바로 어머니의 한(恨)이 나에게 그런 형태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딱 잘라서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에는 그때 나에게 왔던 생리적인 고통은 너무 생생한 것이었다.
“뭘 해, 절허지 않구?”
진설을 마친 이 선배가 망연히 서 있는 나를 추궁했다. 나는 이 선배에게서 술잔을 받아 술을 친 다음에 허물어지듯이 엎드려 절을 드렸다. 그러고 나자 비로소 내 입술을 비틀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시든 잔디에 이마를 비벼대며 울었다. 옆에서 이 선배가 혀를 찼다.
“내 이럴 줄 알구 될 수 있으면 늦게 오려구 한 거여.”
독방에서도 울음이 터진 것은 어머니가 묻혀 있을 서해안의 어느 이름 모를 야산을 향해 북쪽 벽 아래에다 물 한 그릇 떠놓고 절을 드린 다음이었다. 나는 그렇게 한 그릇의 물 앞에 꿇어앉아 소리를 죽여 울면서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혼령 이 계신다면…… 한 번이라도 만나야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이기심이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혼령이라도 한 번만은 모습을 나타내야 될 것 같았다. 당신의 말마따나 너무나 드센 팔자를 타고나서 뼈가 다른 남매를 또 다른 의붓아비 그늘에서 길렀더니 이제 비로소 자식과 함께 산 지 채 이 년이 못 되어 이번에는 자식 때문에 죽었다……, 더군다나 자식은 당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죄명 아래 갇히고, 거기다가 당신은 생모이면서도 법적인 친자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면회마저 금지되어 자식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당신의 병이라는 것도 화병으로 쓰러진 것이 원인이 되어 반신불수로 죽는 날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한 그릇의 물을 떠놓고 그 앞에 꿇어앉아서 나는 어머니에게 찾아든 단말마의 순간에 어머니가 반신불수의 몸을 뒤틀며 나를 향해 부르짖었을 외마디소리를 듣고 그 모습을 보았다.
“그만 울구 일어나. 몸두 성치 않으면서…… 다 지난 일 아녀?”
이 선배가 내 한쪽 팔을 붙들어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눈물이 흘러나오는 두 눈을 손잔등으로 씻으며 새삼스럽게 어머니의 산소를 둘러보았다.
내가 어머니의 죽음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되는가를 생각한 것은 단식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무렵이었다. 어떤 종교를 지닌 것도, 그렇다고 사후의 세계나 영혼의 존재를 굳게 믿는 것도 아닌 나로서는 어머니가 단말마의 순간까지 품고 있었을, 그러다가 외마디소리로 나에게 남기고 갔을 예의 한에 대해서 전혀 속수무책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러한 자신의 무력감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래, 돌아가셨군 하고, 쉽게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더욱이나 없었다.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나서부터 아무런 생각 없이 날마다 어머니에게 떠 올렸던 물 한 그릇만으로 하루를 견뎌내던 나는 마침내 사흘째 되던 날 비로소 자신의 단식에 대해서 의미를 붙였다.
좋수다. 당신의 죽음이 한스러운 만큼 나도 거기에 못지않겠수.
나는 그때 누구보다도 바로 어머니에 대해서 이를 악물었을 것이었다. 나는 굶어 죽을 결심이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남기고 간 한에 대해서 나는 그런 식으로나마 이겨내고 싶었다. 어머니의 한에 대한 자신의 무력감이 이제는 한 그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번져갔는지도 몰랐다.
열흘째 되는 오후 무렵이었다. 나는 창문 바로 옆에 누워 쏟아져 들어오는 초가을의 햇살을 아득한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된 지 모르게 웅웅 귀를 울리는 이명과 함께 담장 밖 버드나무숲에서 늦매미가 울어대고 있었다. 나는 절반쯤은 잠이 든 상태에서 꿈결에서인 듯 나의 이명과 늦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런 소리들에 겹 쳐서 문득 어떤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어화, 이놈의 세상을 어이 넘어갈꺼나……
어머니였다. 여섯 살 무렵이던 나는 어머니의 무룩 위에 눕혀져 있었다. 늦봄의 긴 오후 나절을 툇마루에 앉아서 어머니는 칭얼대는 나를 달래며 시름겨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극심한 흉년 끝에 닥친 보릿고개를 견디다 ·못한 어머니와 누님과 나 이렇게 세 식구는 논가의 웅덩이에 있는 물풀을 건져다 밀기울에 버무려 죽을 쑤어 먹고, 그중에 어렸던 내가 물풀에 독이 올라 온몸이 뚱뚱 부은 채 거의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런 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어머니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육자배기의 느린 가락으로 시름을 달래고 있었다. 어머니의 노랫소리는 나의 이명처럼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며 계속해서 들려왔고, 나는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베개를 흠뻑 적셨다. 나의 눈물 속에서는 여전히 초가을의 햇살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어머니의 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 나에게서는 이미 어머니의 한에 매한 무력감이나 절망감 그리고 반감 따위는 사라져 있었다.
열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여전히 자리에 누운 채였다. 또다시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너무도 뚜렷한 모습과 목소리로 나에게 왔다.
오메, 내 새끼야아.
그런 어머니 앞에 나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공휴일이 되어 집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마침 장날을 맞아 길거리에 난전을 펴고 앉아 멸치며 김 따위를 팔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자 이제 막 멸치 봉지를 묶고 있던 손에서 지푸라기를 떨군 채 어머니는 엉거주춤 일어나며 외쳤다.
오메, 오메, 내 새끼야아.
어머니의 소나무 껍질처럼 거칠게 마디진 손이 나의 희고 부드러운 손을 덥석 잡았다. 멸치를 사려던 아낙네가 나를 힐끔거리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오메, 이렇게 좋게 생긴 아들이 다 있었소잉?
하문이라우. 내 아들이요. 광주서 핵교를 안 댕기요?
어머니는 연신 내 손을 어루만지며 함지박만큼 입을 벌린 채 얼굴 전체로 웃고 있었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 쪽 창문으로 가서 담당 교도관에게 나의 단식이 끝난 것을 알렸다. 아직까지도 내 손에서는 어머니의 소나무 껍질처럼 거칠게 마디진 손바닥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마디진 손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비로소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한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단말마의 순간에 어머니가 반신불수의 몸을 뒤틀며 나에게 남겼을 외마디소리도 함께 깨달았을 것이었다. 만일 사후의 세계라는 것이 있어서 내가 죽은 다음에 어머니를 만난다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할 터이었다.
어머니보다 쉽게 살지는 않았수.
고백하건대, 적어도 그 순간만은 어머니와 나는 한몸이었으며, 어머니는 내 몸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다.
“음복햐⁕.”
이 선배가 나에게 술잔을 건넸다. 나는 찬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이 선배에게 잔을 돌려주었다. 이 선배 역시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 나를 바라보았다.
“장례 때는 마을 사람들이 엄청 고생을 했어. 아무리 시굴이라지만 그런 인심은 흔찮어. 마을루 내려가면 고맙다구 인사라도 해얄껴. 특히 마을 조합장네허구 머시냐, 거기 동갑내기 정씨한테는 빼놓지 말구 가봐얄 껴.”
“그러지요.”
나는 기꺼이 수긍을 했다. 대충 음복이 끝나자 이 선배가 재촉했다.
“자, 그만 마을루 내려가보지.”
이 선배의 재촉에 따라 어머니의 산소에서 몸을 돌리려던 나는 갑자기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정작 나는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는 어머니에게 드리지 못하고 자리를 뜨는 것 같은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만일 이렇게 절을 드리고 음복을 하는 의식 (儀式)으로써 나의 내부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고정시켜버린다면, 차라리 나는 어머니의 산소에 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었다. 나는 차마 등을 돌리지 못하고 이 선배에게 말했다.
“먼저 가시우. 곧 갈 테니깐.”
이 선배는 언뜻 이마를 찡그리더니 이내 돌아섰다. 이 선배의 뒤를 따라서 처와 아이들이 내려간 다음에 나는 어머니의 산소에 혼자 남겨졌다. 나는 새삼스럽게 어머니의 산소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덤불을 이루어 어머니의 산소를 에워싸고 있는 아카시아며 가시나무 따위 악목들이 찌르듯 내 눈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가슴속에 남아 있던 그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어머니, 아직은 잠들어서는 안 되우. 머지않아 어머니의 한도 풀릴 날이 올 거요. 그때까진…… 잠들면 안 되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어머니의 한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미를 깨닫고 난 다음부터 나의 내부에서는 어머니와 나 사이에 일종의 화해가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절망을 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이 쉽게 어머니를 만나곤 했다. 어머니는 어디에서나 곧잘 나에게 모습을 나타냈다.
세계사를 보고 있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제정 말기의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는 유형수들의 모습이 삽화로 나와 있는 페이지였다. 그 삽화에는 유형수와 그 가족들이 헤어지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는데, 처음에 무심코 그것을 들여다보던 나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전혀 삽화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 나는 철철 눈물을 흘리며 유형수들과 헤어져 통나무 벽을 치고 있는 유형수의 가족들 속에서 바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삽화 아래 나와 있는 시를 나는 이제 외지 못한다.
……우리가 죽지 않으려 해도 저들은 우리를 죽일 것이며, 우리가 죽으려 해도 저들은 우리를 죽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죽을 때에야 우리가 흘린 피로 비로소 내일의 붉은 해는 떠오리라……
대충 기억나는 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시의 구절 속에서도 틀림없이 내 어머니가 흘린 피를 발견했을 것이었다.
새벽이면 나는 까닭 없이 가슴을 설레며 창문을 열곤 했다. 창문을 열면 쇠창살 너머로 이제 막 먼동이 터오는 동녘 하늘가로 불붙는 듯한 능선들이 보였다. 그러면 나의 귀에는 이명이 섞여서, 그 능선을 넘어 달려오는 무수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발짝 소리 속에서도 어머니의 발짝 소리를 구별해낼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어머니.
긴 밤이 끝나고 새벽이 오려 하고 있습니다. 쇠창살 너머로 새벽별이 스러지고 이제 막 동이 트는 능선마다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내일을 살기 위하여 오늘을 죽는 새벽의 사람들을 보세요. 이슬에 젖은 발차국 소리가 지금 산야를 울립니다.
어머니.
이름 없는 산야의 이름 없는 무덤들 사이에서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시들은 잡초들 무성한 무덤 너머로 새벽별이 스러지고 이제 막 동이 트는 능선마다 달려오는 눈부신 새벽의 사람들을 위하여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그토록 긴 밤을 떠돌던 많은 넋들과 함께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어이, 뭘 해, 빨리 내려오지 않구?”
이 선배가 솔밭 어귀에서 소리쳤다. 나는 비로소 어머니의 산소에서 등을 돌렸다. 이 선배는 내가 민둥산을 내려와 솔밭 어귀를 접어들자,
“이제 시원하남?”
빙긋이 웃었다.
“시원할 게 뭐 있겠수?”
그러면서도 나도 이 선배에게 웃음을 보였다. 솔밭을 지나 논두렁으로 접어들자 이제 막 오후로 접어든 햇볕에 언 땅이 녹아 질척거렸다.
“벌써 점심때가 넘었네. 내가 너무 주책을 부리는 바람에·…‥ 미안허우.”
내 말에,
“미안허긴…… 거기가 그런다고 살아서 불효했던 게 갚아지남?”
“그건 그렇수.”
녹지 않은 땅을 골라 짚으며 우리는 신작로로 나왔다. 화당리로 접어드는 신작로 어귀에는 음력설을 지내고 다시 도회지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인 듯, 예닐곱 명쯤이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우리를 힐끔거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처녀들은 아직도 명절 끝의 들뜬 기분으로 한껏 즐거운 표정이었고 중절모를 쓴 중년의 사내들이 정초가 다 지나서 무슨 성묘냐는 듯 낯선 우리에게 데면데면 시선을 보냈다. 화당리를 지나 월문리로 향하면서 이 선배는 이제 무언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주로 어머니의 장례식 때의 이야기였다. 이 선배의 이야기에 머리를 주억거리며 흘려듣던 나는 문득 가슴이 설레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실소를 했다. 이제 산모롱이만 돌아들면 바로 월문리였다.
갇혀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단 한 번 어머니를 면회시켜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자식의 신변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잔뜩 초조해하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심은 나무들은 잘 자라요?
하문, 하문, 한나도 안 죽고 다 살았어야. 사과낭구도 살고 배낭구도 살고 그라고 니가 심은 꽃낭구들도 죄다 안 죽고 살았어야.
어머니는 나무들이 모두 살아난 것이 마치 나의 앞날에 무슨 길조라도 되는 양 갑자기 활짝 밝아진 표정으로 신명을 냈다.
월문리로 이사해 간 첫해 봄에 나는 거의 마을 뒷산을 헤매며 살다시피 했었다. 그렇게 뒷산을 헤매며 나는 산벚꽃이며 진달래를 캐다가 안마당 한켠에 작은 화단을 이루고, 뒤울안에는 사과나무며 배나무, 대˙추나무 묘목 등속을 구해다 심었다. 갇혀 살게 되면서부터 나는 이따금씩 월문리를 꿈에 보곤 했다. 그럴 때면 으레껏 꿈속의 나는 뒷산을 헤매거나 아니면 지천으로 봄꽃들이 널려 있는 들판에서 나물을 캐거나 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이튿날이면 나는 어쩔 수없이 가슴을 설레며 담장 너머로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때 월문리는 나에게 자유라거나 혹은 바깥세계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 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갇혀 사는 나에게는 기이하게도 갇히기 전의 많은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는 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음도 그리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쇠창살 너머로 해가 지고 이제 막 땅거미가 스멀거리며 대지를 덮는 시간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저 땅거미처럼 나의 내부에 스며들어 오는 한 가닥 우수를 떼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우수라는 것도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었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갇히기 전에 내가 지니고 있었던 다분히 허무적이고 퇴폐적인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제 갇혀 사는 나를 그렇듯 차갑게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나는 얼마쯤은 그들에게서 떨어져 혼자가 된 홀가분함을 남몰래 즐기기까지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듯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그리움 따위는 느끼지 못하면서, 대신에 월문리라거나 혹은 월문리에서 지냈던 첫해의 봄 무렵만 돌이켜지면 기이하게도 그때부터 나는 가슴을 설레면서까지 그곳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땅거미가 짙어오는 일모*의 무렵을 몇 방울의 눈물로 물들이곤 했다.
산모롱이를 돌자 드디어 월문리가 보였다. 마을의 풍경을 대충 한눈에 둘러보며 나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 탓일까, 아니면 긴 겨우살이에서 아직도 풀려나지 못한 마을 자체의 웅숭그린 듯한 분위기 때문일까, 마을 전체가 어쩐지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토록 내가 그리워했던 마을의 풍물들에는 실제와는 달리 너무 아름답게만 색칠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좀 더 뚜렷하게 마을회관과 그 옆에 있는 빨간색 슬레이트 지붕의 어머니의 집이 보이자 큰아이가 손짓을 했다.
“저건 할머니 집이다.”
나는 큰아이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지?”
“아이 참, 아빠하고 나하고 동생하고 이렇게 셋이서 할머니랑 살았잖아?”
“그렇구나.”
“그때 나는 아빠 따라서 나무도 하러 갔다.”
처와 잠시 별거하던 무렵을 큰아이는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다. 큰 아이가 다섯 살 나던 그 무렵은 일정한 직장이 없어 하루하루의 식생활마저도 해결하기 어려운 데다가, 처는 처대로 그리고 나는 나대로 서로에게 대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피곤해하던 상태였고, 그러다가 결국은 별거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때 나는 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자체에 대해서 어느 것 하나 없이 죄다 피곤해했을 것이었다. 불안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소위 먹물을 먹은 자로서 그런 상황에 대해 드러내놓고 행동할 용기가 없는 입장에서는 상황의식에 눈뜬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의 가슴에 바늘을 찔러대는 것에 다름없어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스로를 욕질이나 하고 밤늦도록 술이나 마시고, 걷잡을 수 없이 황량한 연애사건 따위를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더군다나 어쩌다 책상 앞에 앉아 원고지를 대하면 한 줄의 글도 씌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갑자기 밀어닥친 아이들과 나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비실비실 웃으며 말했다.
이혼한 건 아니우.
어머니는 자식의 위태위태한 결혼 생활을 이따금씩 홈쳐보며 다짐하듯 자식에게 말하곤 했다.
뭔 짓을 하던 다 좋제만, 이혼만은 안 돼야. 날 봐서라두 그 짓만은 허지 말어라.
집 앞에 이르자 이 선배가 얼굴의 근육을 씰룩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집이란 본래 사람이 안 살면 버려지기 마련이여. 아, 내가 살던 행정리 집은 어떤디? 이보다 더 숭하게 되었어.”
이 선배의 말에 나는 애써 웃으려 했다. 그러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내 얼굴은 흉측하게 비틀렸을 것이었다. 집은, 자식은 옥에 갇히고 어머니는 죽어간 집안답게 이름 그대로 흉가가 되어 있었다. 내가 짚더미며 건초더미 따위를 헤집고 대문께로 다가가자 이 선배가 나를 붙잡았다.
“보문 뭘 혀? 공연시 마음만 상하지. 이다음에 날이 풀리걸랑 그때 와서 손봐.”
“그래두…….”
“그래두는 무슨 그래두여? 봐봤자 좋을 거 하나두 없어.”
나는 이 선배에게 끌려 대문께에서 물러났다. 우리 집 앞에 서서 서로 눈 둘 곳을 몰라하며 서성이고 있을 때 마을회관 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어이, 언제 온 거여?”
월문리에서 유일한 동갑내기인 정동호였다. 정은 달려오자마자 내 손을 잡았다.
“고생 많었지?”
“고생은…….”
“산소에 다녀온 거여?”
“응, 지금 막 다녀왔어.”
정은 내게서 몸을 돌려 이번에는 이 선배를 향했다.
“이 선생님두 오셨구먼유? 오랜만이어유. 장례식 이후로는 한 번도 안 들리시더니 이 사람이 오니께 오시는구먼유?”
“예, 그렇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시오 리 상간쯤 떨어진 가까운 곳에 살던 관계로 이 선배와 나는 서로 내왕이 잦은 편이었고 그러다 보니 이 선배는 이곳 마을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들어 술자리를 한 적이 있어서 정과는 전부터 구면인 셈이었다. 정이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추운데 여기서 이러구들 있지 말구 내 집으루 가여. 찬은 없지만 점심이나 해여. 자, 이 선생님, 가유. 저기 애기엄니두 함께 가유.”
정이 끌다시피 우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정의 집으로 가자, 정의 아내가 방금 술상을 차려왔다.
“밥을 지을 동안 우선 이거라두 드세요.”
설 끝 음식이 아직 남았던지 유과며 강정, 전 따위 안주와 함께 주전자가 놓인 술상을 방으로 들이밀며 정의 아내가 수줍게 웃었다.
“이거 귀한 술이구먼.”
먼저 잔을 들이켠 이 선배가 손으로 입을 홈치며 정을 건너다보았다.
“설이라구 농주* 좀 담궜시유.”
“여간 솜씨가 좋구랴. 잘 먹겠소.”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께 맘 놓구 자셔유.”
이 선배가 거푸 잔을 비웠고, 나도 이 선배 못지않았다. 그렇게 몇 순배 잔을 비운 다음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어딜 갈려구?”
정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몇 군데 인사를 다녀올려구…….”
내 말에 정 대신 이 선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려, 갔다 오는 게 좋을 껴.”
내가 방문을 나서자 정이 내 등에다 대고 말했다.
“빨리 다녀와여. 점심 식사 늦지 않게.”
나는 정의 집을 나와 바로 마을 조합장네 집으로 갔다. 조합장은 마침 툇마루에 걸터앉아 쟁기며 보습 따위 농기구를 꺼내놓고 손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대문에 들어서자 조합장이 일어서며 반색을 했다.
“아니, 이게 누구여? 송씨 아녀?”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고생하구 나왔단 소리는 들었지만 일에 얽매이다 보니 한번 찾아가지도 못하고…… 이거, 농촌에서 살다 보믄 사람 노릇도 못혀. 뭐라구 헐 말이 없구먼.”
“진작 찾아뵈야 할 덴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머님 장례식 때는 애를 많이 쓰셨다는데 인사도 못 드리고…….”
조합장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팔을 저었다.
“그런 소리 말어. 장례야 우리 계에서 살았던 분이니께 당연히 치루어드린 것뿐이여. 그보다두, 자, 누추하지만 좀 들어와여.”
조합장이 툇마루에 늘어놓았던 농기구들을 한켠으로 치우며 방문을 열었다. 나는 조합장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습니까?”
“응, 안사람은 마실 간 모양이구…… 아이들은 학교에 갔어.”
내가 앉자 조합장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댕기더니 깊게 한 모금을 들이마신 다음에 새삼스러운 눈길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송씨 어머님 말이여. 그 노인네는 제명에 돌아가신 거여. 자살한 게 아녀.”
“예? 자살이라니요?”
내가 조합장의 말을 거꾸로 뒤집으며 경악을 하자,
“아니, 여태 몰랐나? 이거 내가 공연한 소릴 헌 모양일세…….”
조합장이 오히려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애써 표정을 가라앉히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만…….”
나의 거짓말에 조합장은 비로소 안심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렇게 돌아가실려고 해도 못 돌아가실 거여. 아, 방문 밖 출입도 못 해서 대소변을 받아내던 노인네가 어떻게 대문께까지 기어 나와서 고리에다 목을 매달어? 다 돌아가실려구 뭐가 씌웠던 겨. 우리 집 안사람이 집 앞을 지나다가 노인네롤 발견하고 기겁을 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길 래 뛰어가 봤더니, 아, 그 얕은 문고리에 줄을 매서는 목에 걸구 몸을 뒤로 버팅겨 돌아가신 거여. 사람이 목을 매어 죽을 때는 이렇게 목울대가 막혀서 죽는 법인디 노인네는 그게 아니여. 목이 뒤로 꺾인 채 돌아가셨어. 노인네 명이 그때 돌아가시게 되어 있었으니께 그렇게 돌아가신 것이지, 절대로 자살한 게 아녀. 나중에 알고 보니께 함께 살면서 병 수발하던 노인네는 발안장으로 찬거리 사러 보내놓고 그 틈에 일을 벌이셨던 모양인디…… 송씨 앞에서 이런 말 해서 어떨지는 모르지만 송씨 어머님이 독하긴 독하신 분이여.”
조합장은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져 보이면서까지 나에게 어머니의 자살을 극구 부인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왜? 벌써 가게? 좀 앉아서 놀다가 안사람이 오면 술이나 한 잔하고 가지?”
조합장이 다시 놀란 얼굴로 나를 따라 일어섰다. 나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우물거리며 조확장네를 나섰다. 그러면서 나는 비로소 주위 사람들을 만나 어쩌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들이 나에게 보냈던 무언가 숨기는 듯하던 표정과 망설이는 듯하던 말투를 이해했다. 아니, 그런 표정과 말투를 보낸 것은 주위 사람들만이 아니라 처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처에 대해서는, 나는 예전부터 편치 않았던 고부간의 갈등에서 온 죄책감의 일종이려니 어림짐작하고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나는 거칠게 짚더미며 건초더미를 밀치며 대문께로 갔다. 대문의 바깥 고리에는 녹슨 철사가 동여매어져 있었다. 두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어서 철사줄의 매듭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렵게 철사줄을 벗겨내고 대문을 밀친 순간이었다. 나는 삐그덕이며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놈아!”
또한 나는 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후려치는 어머니의 마디진 두 손의 감촉을 느꼈다. 비틀거리며 대문에 기대선 나를 감전과도 같은 전율이 꿰뚫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대문에 기댄 채 이를 악물고 안마당이며 안채를 노려보았다. 안마당은 물론 토방에 이르기까지 내 키를 웃도는 망초꽃이며 엉겅퀴, 쑥부쟁이 따위 잡초들의 시든 대궁이가 건들거리고 있었고, 바로 어머니가 기거하던 안채는 방문이 떨어져 나가 마루 위에 나뒹굴며 찢어진 창호지를 너풀대고 있었다. 그렇게 안마당이며 안채를 노려보며 나는 어느 순간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난 후 내가 그토록 애써 이루었던 어머니와 나 사이의 화해가 이미 산산이 부서져버린 것을 깨달았다. 문득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분노와 치욕감이 방금 어머니가 외친 질타와 후려친 마디진 두 손의 감촉과 더불어 나를 또다시 전율케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분노와 치욕감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의 두 눈에서 새롭게 눈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울면서 시든 잡초 대궁이들을 헤치며 안마당을 지나 뒤울안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뒤울안이며 장독대 그리고 부뚜막이 내려앉아 무쇠솥이 거꾸로 뒤집혀 있는 부엌 따위를 둘러보며 나는 또다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결코 저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바로 내가 둘러보고 있는 안마당의 망초꽃이며 엉겅퀴, 쑥부쟁이 따위 잡초들의 시든 대궁에서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루 위에 나뒹구는 방문의 찢어진 창호지에서, 뒤울안에서, 장독대에서, 무쇠솥이 뒤집혀 있는 부엌에서 마디진 두 손을 갈퀴처럼 휘두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다. 어머니는 바로 내가 오는 순간을 위하여 이곳에서 중음신(中陰身)*으로 떠돌며 살아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다시 안마당을 지나쳐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가 목을 매달았던 대문의 고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거기에 이마를 댄 채 오래 울었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부터 나의 생활은 무질서해져서 나는 며칠을 두고 폭음을 계속하고, 폭음 끝에는 으레껏 누구에게든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해댔다. 그런 나에게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서슴지 않고 말하곤 했다.
“네 눈에는 광기가 있어.”
폭음이라는 것도, 옛날의 퇴폐적 이거나 허무적인 태도에서 오는 무언가 끝 모를 밑바닥에까지 이르러버렸다는 식의 한 가닥 사치도 없이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폭음을 하고 싸움을 해대면서도 끊임없이 나에게 달라붙는 어머니의 질타와 후려치는 마디진 두 손의 감촉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월문리에서 돌아온 후로 나는 봄이 다 가도록 다시 월문리에 가지 못했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이제 집 전체가 아니 월문리 전체가 바로 어머니의 중음신이었다.
늦봄이 될 무렵 나는 더 이상 한 잔의 술도 마실 수 없으리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쇠약해진 것은 몸뿐만이 아니고 정신 또한 마찬가지여서 나는 차츰 죽음에 대한 유혹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죽더라도 거기 가서 죽자.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어머니에게 부딪쳐보자. 오월이 다 간 어느 날 나는 다시 월문리로 내려갔다.
대문을 여는 나의 손은 이제 떨리지 않았다. 안마당에는 잡초들의 시든 대궁 아래서 또다시 새롭게 솟아오른 대궁들이 조그만 꽃들을 무더기로 매달고 있었다. 나는 헛간으로 가서 녹슨 호미며 삽을 꺼내와 안마당의 잡초를 뽑고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내 손에 뿌리 뽑히는 시든 대궁들의 하나하나에는 아직까지도 어머니의 중음신이 살아있었고,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질타와 갈퀴처럼 나를 후려치는 마디진 두 손의 감촉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어머니와 맞서 싸웠다. 더 이상 어머니한테 질 수는 없수. 난 이제 어머니한테서 벗어나겠수. 어느덧 내 얼굴은 땀과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늦봄의 해가 서쪽 야산으로 비스듬히 기울 무렵에는 나는 안마당을 모두 고르고 뒤울안으로 옮겨 가 있었다. 그때 대문께에서 인기척이 났다.
“어이, 언제 내려왔남?”
동갑내기 정의 목소리였다. 정욱 내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뒤울 안으로 돌아왔다. 정은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나를 보고 잠깐 놀라는 눈치더니,
“풀 뽑는 거여?”
하고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내게서 삽을 빼앗았다.
“이리 줘. 거기처럼 하다가는 밤중까지 해도 다 못 끝낼 껴.”
정은 전혀 힘들이는 기색도 없이 능숙한 솜씨로 삽질을 해나갔다. 정의 삽질에 뿌리째 뽑혀 넘어지는 잡초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자칫 입 밖에 내어 소리칠 뻔했다.
“보시우, 어머니.”
여태껏 시든 대궁 하나를 뽑아낼 때마다 이를 악물고 어머니와 싸워야 했던 나로서는 정의 서걱서걱 능숙한 삽질이 거의 불가사의한 느낌이었다. 정은 뒤에 서 있는 나를 힐끔 돌아보더니,
“저녁에 올라갈 껴?”
하고 물었다.
“아니.”
“그럼 여기서 자구 갈려구?”
“응, 자야지.”
“그럼 그러구 서 있지 말구 가서 문간방이나 치워. 그 방은 아직 쓸만할 껴.”
나는 정의 말에 따라 뒤울안을 돌아 나왔다. 정이 뒤에서 소리쳤다.
“불도 좀 때야 할 껴.”
내가 돌아서서 물었다.
“불은 왜?”
“아, 오래 비워두었던 집이니께 아궁이 속에 짐승들이라도 살지 모르잖여?”
정이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를 냈다. 나는 문간방의: 청소를 대충 마치고 나뭇간에서 오래된 솔가지 몇 낱을 안아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돌아 안채의 허물어진 부엌으로 가서 그 아궁이에도 불을 지피고 있자 정이 일을 마치고 부엌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거긴 뭣 하러 때는 겨?”
정의 물음에 나는 마치 못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냥……”
내가 애매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리자 정은 알 만하다는 듯이 씨익 웃음을 내밀어 보였다.
“사람이 싱겁기는…… 대충 하구 집에 가여. 저녁 먹게.”
나는 수돗가에서 몸을 씻고 정을 따라나섰다. 정의 집에서 정과 겸상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내가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어. 이제 그만 가볼께.”
정이 엉거주춤 나를 따라 일어섰다.
“가만있어. 나두 함께 갈 테여.
“낮에 밭일 허구 피곤할 텐데 그만 쉬지그래.”
“피곤하긴. 맨날 하는 일인데.”
정은 부득불 따라나설 눈치였다. 나는 그런 정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정은 내 집으로 오자 나부다 던저 문간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벌렁 자리에 누웠다.
“어, 따끈따끈한 게 여간 좋잖여. 아직까진 따뜻한 게 역시 좋구먼.”
내가 문을 닫고 벽에 기대어 앉자 정이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이 집을 어떻게 할 껴?”
“어떻게 하다니?”
“팔 생각인 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런 생각은 없지만…….”
“적당한 사람만 나서면 파는 게 나을 겨. 아무래도 어머니도 그렇게 되셨구……”
정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런 집을…… 누가 살려구 들겠어?”
“그려, 것도 그렇지만 동네에 워낙 빈집이 많어야지. 가만있자, 이렇게 빈집이 다섯 채나 되여.”
“그렇게 많은가?”
“다들 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에이 그런 것 집어치우구, 어뗘? 술이나 좀 마시지?”
정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나를 마주 보았다.
“글쎄·……”
내가 애매하게 대답을 흐리자 정은 대뜸 방문을 열고 나섰다.
“금시 갔다 올 테니께 조금만 기다려. 거기두 맘이 좋지 않을 테구……”
정은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술병을 들고 왔다. 정과 나는 잠자코 몇 잔의 막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자 정이 친근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긴 좋은 사람이여.”
“무슨 소리야?”
“아, 그래두 어머니가 살던 집이라구 찾아와서 청소두 하니께 허는 말이여.”
정의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구먼.”
“그런 게 아녀. 한번 집을 비우구 떠나면 죄다 그만이여.”
“알았어. 그만 하고 술이나 들어.”
나는 정의 말머리를 돌려버리고 먼저 잔을 들었다. 이어 술이 떨어지자 정이 다시 벌렁 자리에 누웠다.
“나, 오늘 밤 여기서 자구 갈톄여.”
정의 느닷없는 행동에 나는 일순 당황했으나 무언가 정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잠자코 둘의 잠자리를 깔았다. 술기운인지, 나는 이내 잠이 들었고, 전혀 꿈도 꾸지 않은 채 깊은 잠을 잤다. 새벽에 정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자 정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있었다.
“벌써 갈려구?”
내가 물었다.,
“그려. 쇠죽 좀 써 주구 논이나 한 바퀴 둘러봐야지. 거긴 더 자여.”
정이 방문을 닫으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거기 무서워할까봐서 부러 잔 거여.”
그리고 방문이 닫혔다. 이어 정이 대문의 빗장을 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정에게 부끄러운 느낌이었다. 정이 나간 다음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헛간에서 낫을 챙겨 들고 대문을 나서자 희뿌움한 박명 속에서 새벽일을 나온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들판의 여기저기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마을 어귀를 벗어나 칡골로 향했다. 솔밭을 지나 민둥산을 오르자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슬에 젖은 바짓가랑이에서 김이 오르는 것을 내려다보며 나는 어머니의 산소 앞에 섰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어머닌 그래도 자식보다는 낫수. 자식은 이다음에…… 무덤도 없을 거요.”
나는 이윽고 낫을 들어 벌써부터 웃자란 봉분의 잔디를 치기 시작했다. 봉문이며 산소 일대의 잔디를 치고 잡초들을 뽑고 나자 해는 벌써 중천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잔디를 모두 친 다음에 아카시아며 가시덤불에 낫을 댔을 때였다. 어머니의 산소 앞에 있는 꽤 큰 덩치의 아카시아 숲이 시야를 답답하게 하는 느낌이어서 너무 무리다 싶으면서도 낫을 대었다. 톱이 없이 낫만으로는 역시 무리여서 대충 윗가지나 쳐내고 말려고 했는데 차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좀더 아카시아나무의 밑동에 손을 대자 역시 예감대로 봉분의 형태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나는 기진맥진해가면서도 결국 아카시아 숲을 모두 쳐냈다. 그것이 봉분임을 확인한 순간 나는 너무 지친 나머지 어머니 산소 앞에 벌렁 나자빠져버렸다. 문득 잘했다,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어린애처럼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몸을 뒤집어 어머니의 산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화해 합시다.”
산소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난 무렵이었다. 나는 마치 어머니의 산소 앞 아카시아 숲을 쳐내듯이 집 안팎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안채의 방문을 고쳐서 다시 달고, 창호지를 구해다가 새로 문을 바르고, 마룻바닥에 켜처럼 내려앉은 먼지들을 씻어내고, 뒤주에서 죽어 있는 몇 마리의 쥐새끼들을 꺼내어 파묻고, 안방에 나 있는 쥐구멍들을 막았다. 내가 부엌의 무너진 부뚜막까지 마저 고쳐서 다시 무쇠솥을 올려놓았을 때는 이미 밤이 되어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때 아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문간방에 누워 있었다. 처맛기슭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차츰 무성해지고 있었다. 나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부자리를 들고 안채로 건너갔다. 방 안을 들어서며 내가 말했다.
“이런 밤엔 혼자 자기가 서로 외로운 법 아니우?”
나는 평소에 어머니의 잠자리였던 아랫목 바로 옆에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러자 나는 마치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이 끝까지 와버린 것처럼 깊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자리에 누워서 나는 어느 사이에 자신이 바로 이 폐가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나는 또다시 어머니와 내가 한몸이 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메, 내 새끼야아.
처맛기슭에서는 여전히 낙숫물 소리가 무성 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울었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 망망한 그리움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잠이 들었고, 나는 꿈을 꾸었다.
고향이 장터였다. 장을 보는 사람들로 붐비는 어물전 부근이었다. 서른 언저리의 젊은 여자가 양옆에 어린 남매를 데리고 앉아서 좌판을 벌여놓고 있었다. 좌판에는 갈치며 고등어 몇 마리가 뎅그마니 올려져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에 나는 잠이 깨었다. 여자는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옛 여자였다.
잠이 완연히 깨고 난 다음에 나는 그 여자가 나의 새로운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실천문학』 4호(1983. 12); 『다시 월문리에서』 (창비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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