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 | 조온윤
설맹 외
흰 것을 오래 보면 눈이 멀어
우리가 깨어나 밝은 방과 더 밝은 바깥
모든 걸 빼곡 눈에 담아보다가도
밤이면 검정을 덧씌워 지우는 이유지
흰 것을 오래 보면 마음이 멀어
그래서 바보의 이름에는 흰 백이 붙나봐
그의 무구한 표정처럼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노트는 선물이 될 수 있고
선물 같은 하루를 기록할 수도 있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얀 이름을 적고서
언제나 선물처럼 가지고 다닐 수도 있어
우리가 설령 바보라서
하얀 밤과 어두운 낮을 구별할 순 없어도
함께 쓰고 지우는 말들이 검고 희다는 건 알고 있어
눈앞은 깜깜해지는 것
머릿속은 하얘지는 것
온통 분홍빛의 장기와 붉은 핏줄 속에는 사실
흑백의 문장들이 낙서처럼 씌어 있어
백자처럼 깨끗한 마음을 보면
받지 못한 선물 같아
그 마음이 부러워져
그래서 사람들은 검정을 덧씌워 가리곤 하네
숨기고 싶은 진심이 있다면 그곳이 밤의 서랍장
새벽 햇빛이 송곳처럼 내리쬐고
잎사귀 갉듯 어둠을 긁어내면
우리가 품은 빛이 차츰 드러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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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두루미
이 좁은 유리병에
어떻게 사랑이 가득 담길 수 있을까?
형틀이 가지각색인 식기를 식탁 위에 깔아두고서
길쭉한 목을 가진 이웃에게 초대받은 여우처럼
이건 언 손에 입김을 불어주는 입 모양을 본뜬 술병
이건 깨어질 듯 위태로운 불안을
연인에게 마음껏 기울이는 몸을 본뜬 물잔
처음 보는 유리의 형태에
어떻게 사랑이 흘러넘칠 수 있나요?
유리병에 어리둥절 끼어버린 여우처럼 묻는다면
좁은 문틈으로 환한 말소리가 새어 나올 수 있는 건
얼어있던 공기가 모두 녹아내렸기 때문이라고
투명한 식기의 주인은 말하겠지
의심이 많아 바깥에 갇힌 여우야
이제 너의 마음이 녹아
액체와 같이 흐른다면
이리 들어와서 이걸 마셔봐
우리의 시간이 아주 달단다
조온윤 | 광주 출생으로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햇볕 쬐기』가 있으며 문학동인 ‘공통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