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를 위한 만가
카프카 50주기에 부쳐
그는 약속된 땅을 향해 방황한다. 다시 말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멈출 것을 꿈꾼다. 이 멈추고자 하는 욕망이 그를 사로잡고 또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기 매문에,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방황한다. 다시 말해 그 어느 곳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이 조금도 없이 방황하는 것이다.
그는 결코 그 어느 곳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끊임없이 가고 있다. 그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육체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그를 인도하지 않으려는 어떤 것의 흔적을 따라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 같다. 이처럼 자기 의지에 반해 맹목적으로 길을 선택하기 때문에, 샛길, 우회로, 회귀로가 생겨나게 되고, 그리하여 그가 정처 없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그가 밟아 나간 길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그의 길, 그만의 길이다. 하지만 이 길 위에서 그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뒤에 남겨 놓은 모든 것들이 여전히 그를 출발 지점에 묶어 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첫걸음을 뗀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 그 출발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가 출발 지점으로부터 멀리 나아갈수록 의심은 점점 더 커진다. 그의 회의는 발걸음과 발걸음 사이의 호흡처럼 그를 따라붙는다. 그 발작적이고 압제적인 호흡 때문에 일정한 리듬이나 속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의 의심이 그와 함께 더 멀리 갈수록, 그는 그 의심의 근원에 도달한 것처럼 느낀다. 그리하여 그가 서 있는 곳과, 그가 뒤에 남겨 두고 온 것 사이의 아득한 거리가, 그로 하여금 그의 등 뒤에 있는 것(그가 될 수 없었던 어떤 것 혹은 그가 될 수도 있었던 어떤 것)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에게 위안이나 희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가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왔다는 사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제 부재와 그 부재에 의해 생겨나는 동경 속에 함몰되어 버린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율법을 충실히 지켰더라면 그런 뒤에 두고 온 것들 속에서 그 자신을 성취할 수도 있었으련만, 이제 그것들로부터 떠나옴으로써 그 율법을 위반해 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가 길을 나서는 순간마다, 그의 앞에 하나의 유혹처럼 아득하게 펼쳐진 저 먼 거리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들여, 나타나는가 하면 사라지는 자신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싶어진다. 그는 다시 그 길, 그 먼지와 그 돌들을 내려다보고 그것들을 밟고 가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그는 마치 하나의 참회 행위인 양 그 느낌에 순종한다. 그 앞의 아득한 거리를 얼마든지 건너갈 의지가 있었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혹은 자기의 의지에 반해 가까이 있는 모든 것들의 친구가 된다. 그의 손길이 머무르는 것들 마다 자세히 살펴보고 조사하고 완벽하게 묘사한다. 그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매 순간이 그를 피곤하게 하고 그를 압도해 온다. 그래서 길을 걸어가면서도 과연 이 길이 옳은 길인가 의심하고, 자신이 떼어놓으려는 모든 걸음을 의심스럽게 여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만나기 위해 살고 있는 카프카 자신이 보이는 것의 도구가 된다. 땅속을 탐구하려고 하는 카프카는 땅 표면의 대변인이 되고, 땅 그림자의 측량사가 된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 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자신을 전복시키고, 자신의 힘을 침식하는 것이다. 만약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면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한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앞으로 나아간다. 제자리걸음만 하지만 그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휴식을 취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문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여행에 끝이 있다면, 결국 그가 여행을 시작했던 지점에 되돌아갈 때 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방황한다. 길 아닌 길 위에서, 땅 아닌 땅에서. 그는 자신의 육체 속으로 유배된 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는 거절할 것이다. 자신의 앞에 펼쳐진 것이 무엇이든 그는 등을 돌릴 것이다. 그가 그처럼 거부하는 까닭은, 그가 거부했던 것을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속된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땅에 가까이 다가감에 절망하는 것,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한평생을 운영해 나간다. 자신의 목적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실은 그 목적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나아간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그가 발견하는 것은 자신뿐. 심지어 자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가 앞으로 될 수 있는 어떤 것의 그림자일 뿐. 그는 자신이 만져 보는 가장 미소(微少)한 돌멩이 속에서도 약속된 땅의 편린을 알아본다. 하지만 아직 그것은 약속된 땅이 아니다. 다만 약속된 땅의 그림자일 뿐. 그리고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에서 빛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빛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빛이기 때문이다. 그가 길을 갈 때마다 조금씩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살아나는 빛.
(1974년)
“폴 오스터의 뉴욕 통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