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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각 사람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사 프쉬케'로 직역하면 '모든 영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모든 사람이나 '모든 성도'라고 표현하지 않고 '모든 영혼'으로 표현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 혹 여기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의 권력에 대해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의 질서에 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각 사람'이라는 표현이 모든 사람 개개인을 표시하는 구약적 용법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의문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본문의 '각 사람'은 몸과 다른 것으로 구분되는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본문은 소위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울의 이 서신을 읽게 되는 로마의 기독교인 각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 있는 권세들 - '위에 있는 권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대체로는 국가의 정치적 권세, 인간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로마의 권력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벧리우스에 의해 제기되어 오스카 쿨만에 의해 결정적으로 주장된 다른 견해도 있다. 쿨만에 의하면 본문의 '권세들'은 인간의 권세와 천사적 권세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바울이 '권세' 복수형을 사용했을 때 그것이 악한 천사나 선한 천사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됐던 사례가 있다는 데 있다.
이 주장이 어느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1-7절의 맥락에서 볼 때 '권세'라는 말에 인간적인 것 외에 천사적인 존재가 내포된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세금'에 관한 언급은 이것이 세상의 인간적인 통치 권세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굴복하라 - 굴복이라는 말은 순종이라는 말보다 더 범위가 넓고 엄격한 관계를 표현해준다.
머레이는 이 굴복의 의미가 정부 관리들의 재판권과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즉 독자들은 그들 각자가 정부관리들의 재판권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 그들의 권위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브루스는 본문으로 부터 쿨만의 견해 즉 '권세들'이 천사적 세력 악한 천사을 가리킨다고 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브루스의 주장의 요지는 바울이 천사적인 세력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에게 굴복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천사적 세력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창조주이자 모든 악한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권세는...모든 권세는 - 전자는 대표 단수형이고 후자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전자는 세상에 인간적 질서를 세우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일반 원칙임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개의 구체적인 권력이 다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 권력에 대해 굴복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는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한다.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원리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보편화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적용시키려고 하거나, 신앙인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를 규정짓는 말로 확립하고자 할 때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다. 만약 어떤 권세가 악을 징벌하고 선을 장려하며, 선한 양심에 반하는 방식으로 그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세가 '사랑과 정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율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행사되고 불의를 조장하며 악을 도모한다면 그때에는 그 권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 여기서는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바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바울은 후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며 전자의 가능성 즉 이상적인 국가 권력과 그것의 집행에 대해서만 원칙적인 언급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국가의 권세에 대해서 그와 같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법치주의에 근거한 로마의 권력이 그의 선교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이 작용했을 수 있다. (2) 모든 국가의 권력이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다는 것은 구약 성경적 배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바로'라는 애굽의 왕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악명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로를 왕좌에 오르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이고 또한 바울이 취한 신앙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라는 안목으로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력 그 자체의 정당성 보다는 모든 권력 위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하나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유대교 또는 유대주의와의 관계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를 싫어했고 그들로부터 자기들의 나라를 독립시키는 것을 소원했으며 더 나아가 반 로마적인 행동도 불사했다.
이런 사정을 로마 권력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로마의 권력자들이 기독교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롬 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심판을 자취하리라 - 논리는 매우 간단하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므로 그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니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사자들로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상과 벌을 준다면 이 말은 수긍할 수 있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브루스(F.F. Bruce)가 제기한 질문처럼 만일 가이사가 자기 권세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영역을 주장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어떠한 권력이나 위정자가 하나님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 가령 가이사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부여해준 권세의 범위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에서 경배받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이런 경우 우리는, 즉 사람과 하나님이 대립되는 경우, 그리고 반드시 양자 택일을 해야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 본문이 시간과 공간, 조건을 초월하여 적용되는 불변의 원리라면 이것은 공의와 정의에 반하는 각종 전제 정치 체재와 독재체재를 정당화해주는 구실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 혹자는 넓은 의미 즉 하나님의 섭리의 면에서 본문을 이해하려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바로'라고 하는 악한 왕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워졌던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높으신 뜻과 경륜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어떤 권력은 하나님의 정의에 합당하지 않으나 그것은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질서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이다. 반면 혹자는 본문을 사도들의 서신 전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럴 경우 어떠한 권력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세의 목적과(3, 4) 범위 내에서만 복종을 요구할 수 있고 기독교인 역시 그러한 범위 안에서만 복종의 의무를 질 뿐, 정도를 벗어나 하나님께 돌려야 할 충성마저도 권력이 요구할 때는 저항할 수 있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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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개인이나 국가가 정권이나 권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하는 바와 상관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세를 오용하거나 남용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할 때 후자의 견해가, 권력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를 바로 세우는데 타당한 견해라고 여겨진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심판'은 더이상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료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가령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받게 될 궁극적인 심판을 뜻하는지 아니면 지상의 권력에 의한 형벌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 그런데 3, 4절에 나타난 관원에 대한 언급과 '두려움의 동기'는 후자의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일단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간에 사람이 지상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면 그에 상응하는 법적 제재 및 보복적인 조치가 뒤따르는 것이 상례이다. 실제 성도들 가운데는 바르지 않은 권력에 저항하여 목숨까지 잃은 경우도 많은데, 목숨을 잃은 것은 말하자면 권력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인간의 심판을 받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구약의 선지자적 정신의 구현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사도들의 신앙정신과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다가 당하는 숭고한 믿음의 결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세를 거스려 '심판'을 자취하는 자는 정당한 신앙적 이유를 떠나서 권세자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이 세원 권위에 반항하여 불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롬 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관원들은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복수형은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통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통치자들'로 표현되는 대상은 권력의 상충부 즉 최고 통지권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로마의 관리들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 속에서 바울은 아마 자기가 겪었던 로마의 관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 공동번역은 '악한 일', '선한 일'을 '악을 행하는 자',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본문의 '악한일...선한일'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편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1, 2절에 나오는 권세의 개념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권세는 선을 보장하고 악을 규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만약 어떤 권세가 이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선을 담보하거나 악을 제어하는 기능에서 이탈하여 애초의 전제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권세가 행사될 때 그 권세는 권세의 수여자인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아마 이것은 바울의 경험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로마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에 의한 질서 유지가 여러차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네가...아니하려느냐 - 공동번역은 본문을 의문문으로 보지 않고 서술문으로 보아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선을 행하십시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의문문으로 표현한 개역성경의 번역이 바울이 강조한 바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 보여준다고 본다. 바울은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너'라는 2인칭 대표단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복수를 써서 표현하는 것보다 강한 인상을 주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는 표현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수사적 표현이다.
사실 권력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대상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막강한 힘으로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타격을 주거나 제한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기서의 '악'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악, 즉 법에 위반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통치자들의 권한이, 궁극적인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허락된 권력과 그 권력의 효력이 미치는 영역 내에서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 즉 실정법을 위반하는 행위만을 처벌하는 것으로 한정됨을 의미한다. 선을 행하라...칭찬을 받으리라 - 본문에서 '그에게'는 물론 통치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칭찬을 받는다'는 말은 어떤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여기에는 보상의 개념이 없으며 단지 인정을 받는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선을 행해야 하는 동기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세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상당히 현실적인 동기이다.
[롬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선을 이루는 자'라는 표현보다는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심부름꾼'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권세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다만 악을 제거하고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그 본질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현상적 고찰에서부터 얻어진 결론일 뿐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 위에 모든 제도, 특히 통치 권력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천지 창조에서도 나타나듯 질서와 조직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다. (2) 또한 그 질서와 조직을 통하여서만이 교회와 성도가 이 땅 위에서 보호받으며 원래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다).
실로 모든 권위와 통치의 모체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러한 뜻을 이 땅위에서 실제로 구현시키기 위하여 파생적으로 그 권력의 일부를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자는 그 통치권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범위내에 있을 때 그 권세의 신적인 기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을 월권할 때는 이미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며 단지 성도를 단련시키는 하나의 악한 도구로 전락될 뿐이다.
따라서 성도는 원 권력이자 모법인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라 마음으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선지자적 경고를 부단히 해야 한다. 이러한 통치자와 성도간의 관계성은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는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메시지와 일맥 상통한다.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 여기서는 '두려움'의 동기가 강조되고 있다.
본문에서 '공연히'는 '근거없이', '목적없이'의 뜻이다. 그리고 '칼'은 헬라어 '마카이라'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로마의 단검을 가리키는 말로 시민을 사형시킬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칼'이 구체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힘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사소한 잘못에서부터 극형에 이르기까지 그 형벌을 부과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총체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합법적인 권세이며, 목적없이 임의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노하심 - 여기서의 '진노'는 헬라어 '오르게'의 번역인데 이 말이 신적 진노 곧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세속적 진노 곧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진노'라는 말이 본서에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근거로 하여 전자, 즉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학자는 3-5절의 문맥상 후자, 즉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킨다고 본다. 원칙적인 면에서 보면 지상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기능,
즉 선을 도모하고 악을 징벌하는 기능에 충실하다고 할 때 이 권세에 의한 진노는 곧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통치자가 선을 금하는 법을 만들고 악을 도모한다고 할 때 그 법에 저항하다가 당하는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문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이자 그것의 대행자인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통치자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하는 자로서 선을 추구하고 악을 제거해야 하는 본연의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계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칼'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