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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30일
말씀: 마13:31-32
제목: 하나님의 나라 (4)
하늘나라 신비함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이 부분이 보이지 않은 영역, 설교대로 하면 천국이 희미하게 나약하게 와 있어서,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갈 정도로, 세상에 더 좋아서 세상으로 떠날 정도로 보이지 않게 와 있는 부분이라 설교를 이해하고 인지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번 주에 이어서 계속 하나님나라 현재성에 대해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저번 주에 씨 뿌리는 비유가 천국의 현재성을 설명해 주는 비유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땅에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기대에 의하면 그리고 침례요한의 기대에 의하면 힘과 심판과 능력으로 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번 주에도 끊임없이 이 문제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깨닫고 아는 자만이 소유될 수 있을 정도로 와 있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신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고 발견한 자는 100배의 생명력 있는 소생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밀이 ‘mystery’라고 했지요. 드러나 있지만 모르는 것, 보이는데 알지 못하는 것, 듣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 그런데 발견하고 알면 전 생애를 바쳐 주를 위해 사는 삶,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신비입니다.
마13:24-30절까지 말씀은 계속해서 강조했던 말씀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말씀은 알곡과 가라지에 관한 내용인데요,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좋은 곡식을 뿌렸는데 뭐가 나옵니까? 가라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지를 뿌렸습니까? 아니요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밭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 밭은 세상입니까? 교회입니까? 뒤에 이렇게 나옵니다. 36-40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서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세상 끝까지 이 세상에는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유입니다. 왜 하필 가라지 비유이니까? 저는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아버님이 논에서 일하는 모습은 보았습니다마는 저는 농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벼와 피를 어떻게 구별하느냐하면 무조건 잘 자란 놈을 뽑으면 그것이 피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잡초가 잘 자라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없어서 그렇지 자라는데는 피를 당할 제주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누가 더 잘 자란다고요, 세상적인 삶에 순간적인 기쁨과 쾌락과 자랑과 편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나 거기에는 열매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헛된 삶이며, 무가치한 삶이며, 냉소적이며, 허무한 삶입니다. 결론이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것처럼 행복한 것처럼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비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그대로 둔다고 합니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불평하지 마세요. 만일 그대로 두지 않으면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런데 피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아직까지 기회가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나라 상급과 보상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말이며,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언제 쯤 하나님나라가 임할까? 왜 하나님은 심판을 보류하고 계실까? 여기에 해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보류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심판을 보류하고 있기에 가라지를 뽑지 않으셨기에 내 형제 내 부모를 구원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불러 모으지 않으셨다는 증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직까지 우리의 사명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 하나님이 존귀와 영광으로 천국을 다 나타내시지 않으냐?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구원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중보자적 사명을 가지고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시는 사역이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 오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이 날 정도로 세상이 힘들고 고달픕니다. 산다는 자체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될 인생인지 까마득한 세월이라 낙심도 되고 좌절도 됩니다. 그래서 이참에 주님 오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이 든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과 아픔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하면 이 고난과 아픔으로 인해 심판이 연장되고, 내가 인내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많이 나 같은 사람을 죄 가운데 거두실 것인가를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을 가져서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비유를 좀 봅시다. 13:31절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주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여기 비유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앞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나라는 겨자씨로 출발하지만 모든 새가 깃들이는 큰 나무로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겨자씨만큼 적은 무리들이 모였지만 복음의 열정으로 큰 나무로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의도하는 것은 좋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만들자고 구호를 외치며 전도하지만 이 땅이 그리스도의 나라로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칭찬과 상급으로 마무리 짓도록 되어 있지 않고 이 세상은 심판으로 마무리 짓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묘사된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중에 ‘그 발은 빛난 주석 같으니’(요계1:15)주석은 놋입니다. 성경에서 놋, 구리는 언제나 심판의 대명사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리는 빛난 주석 같으니.’ 이 뜻은 얼마나 대단한 심판을 하실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가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는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계19:15)옛날에는 포도즙을 내기 위해 큰 틀에다가 포도를 갖다 놓고 사람들이 들어가 밟아 으깨서 즙을 내었습니다. 얼마나 피 튀기는 모습과 흡사한지를 보십시오.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시리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뭘 의미합니까? 이 세대가 결단코 하나님의 원리 쪽으로 가지 않은 다는 뜻이고 성경에서 보여주는 이 세상의 진정한 끝의 모습니다.
‘교회의 위기와 하나님나라’를 쓴 서우재목사님이 이런 말을 카톡에 남겼습니다. ‘죽음이란? 나는 10년 전만 해도 죽음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죽는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갑자기 쓰러지고 토하고 어지럽고 힘이 다 빠지는 경험을 한 번 당했다. 그때마다 혈압이라고 생각하고 혈압 약만 먹고 넘어갔다. 어느 날 또 다시 이런 증상이 와서 침례병원에 가 M. R. I를 찍어 보니 뇌경색이 온 것을 알고 약을 먹었다. 그래도 어지럽고 토해서 가까운 부산의료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 신근경색이라고 해서 시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때 늦었으면 나도 천국에 있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죽음이 남의 예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심각히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눈물과 회개가 나왔다. 나는 목사니까 죽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죽음을 맞닿아보니 겁이 났고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날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한다. 그때에 쓴 책이 한국교회의 위기와 하나님나라였다.’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시리라’그날이 오고, 그 날에 분명히 하나님이 변함없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날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준비해야합니까? 바로 이 땅에서입니다.
다니엘서에서도 나타난 신상 얘기에서도 마지막에 ‘뜨인 돌’이 와서 신상을 부서트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러니까 전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와 오는 시대가 원리적 차원에서 어떻게 연관성이 있습니까? 이 땅의 삶이 그대로 오는 세대에 평가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의 삶이 일회성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이 그 나라와 연결되어 있고 이 땅의 것으로 오는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상이 결정되어 집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삶이 그런 차원에서 그 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되고 준비된 삶이 바로 그 나라에 초점을 맞춘 삶입니다.
겨자씨 비유에서 무엇을 비유로 하는 것인지 잘 들어보십시오.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심어서 키우면 새들이 집을 지을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집을 질 만큼이라면 꾀 큰 나무입니다. 씨는 얼마만큼 적어냐? 제 기억으로는 담배씨 정도되지 않을까하는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아주 적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겨자나무와 그 씨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겨자나무와 겨자씨의 차이를 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려서 겨자씨만 보면 겨자나무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이 적을 씨로 이런 큰 나무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가 만발 할 텐데 코스모스 ‘씨’는 손톱 깎아 놓은 것처럼 길죽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씨를 보고 우리는 코스모스 ‘씨’다 해서 그냥 무심코 생각해서 그렇지 코스모스 씨를 보고 코스모스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상상할 수없는 변형입니다. 여러분 호박씨 아시죠. 호박씨 까먹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씨에 호박꽃이 핀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 호박씨에서 수많은 호박이 주렁주렁 열린다는 것조차 우리는 상상할 수없는 것입니다.
경찰서 앞에 버려졌던 한국입양아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1974년 성탄절에 뉴옥주 페어포트 시에 사는 랠프 커부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46년이 지난 지금은 미국프로풋볼 팀인 버펄로 빌스의 공동구단주가 되었습니다. 상상이 갑니까? 경찰서 앞에 버려진 아이와 풋볼팀의 구단주가 상상이 가느냐 말입니다. 이런 일이 자연에서만이 아니라 삶속에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땅의 삶과 천국의 변형된 모습이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말씀도 되지만, 천국은 가장 큰 나무가 가장 작은 ‘씨’의 모습으로 이 땅에 들어온 것만큼 차이라는 것입니다. 누구 이 ‘씨’를 보고 알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나약함과 연약함으로 이 땅에 들어 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땅에서 믿는 자들마저 세상에 끌러 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고 그 환경과 조건이 불리하고 장벽이 크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길 힘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요즘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은 그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취업난에 시달리고 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리는 청년은 ‘88만원 세대’로 불렸습니다. 이어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3포 세대’라고도 했습니다.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5포 세대’, 여기에 꿈과 희망마저 포기하는 ‘7포 세대’가 등장했습니다. 최근 청년들은 다른 것도 다 포기해야 할 상황이란 뜻에서 스스로를 ‘n포 세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n세대는 가상공간을 무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인터넷세대입니다. n은 부정수, 즉 아직 정해지지 않은 수를 뜻하는 수학기호입니다. 몇 명이 되었던 함께 쓴 비용을 뜩같이 나눈다는 의미에서 n분의 1이라고 할 때 n이 이것입니다.
대부분 대학생들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졸업 후 취직이나 결혼 같은 미래 문제에 걱정이 없다면 어려움도 웃으며 견디겠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졸업을 앞두고는 취직이 문제이고, 취직한 친구들을 보니 결혼을 걱정하고, 결혼한 선배들은 내 집 마련을 고민합니다. 우리는 가치를 부여할 만 한건 뭐든 포기하도록 내몰리는 n포 세대”라고 말했습니다.
좌절한 청춘은 우리나라를 지옥에 비유한 ‘헬(hell)조선’이라는 말을 즐겨 쓰고, 탈출을 위해 ‘이민계(契)’를 만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북유럽이나 호주 뉴질랜드로 이민가는데 필요한 목돈을 만들고 정보도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현상이 왜 생기느냐? 쉽게 좌절하고 꿈을 잃을 정도로 못사는 것도 아닌데, 기성세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잘 살아보겠다고 어떤 환경과 여건도 이겨냈는데, 그래서 중동노동자로도 서슴없이 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는데, 왜 요즘은 이런 자조의 언어가 양산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젊은 이들이 하는 ‘흙수저 빙고‘ 게임이라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흙수저란 없는 집에 태어나 기댈 언덕도 없는 청년이란 뜻이다.
‘알바 해본 적 있음’ ‘집에 비데 없음’ ‘집에 차 없거나 연식 7년 이상’ ‘부모님이 정기 건강검진을 안 받음’ ‘가계부채 있음’ ‘중고나라에서 거래해본 적 있음’…. 가로 세로 5칸의 빙고 판에 이런 문장 25개를 채워 넣고 자신에게 해당되는 항목에 동그라미를 칩니다. 동그라미가 가로·세로·대각선 등 일직선으로 5개 연결될 만큼 많으면 “나는 흙수저네!” 하고 자조하는 놀입니다. 이 놀이는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하겠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제산을 물러 받아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편하게 살수 있다는 즉, 상대적 빈곤시대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시대가 성공 지향적이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형편이 내 자유로운 삶을 억압한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은 하나님나라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삶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이 땅에서 말씀이 사라지고,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희석되고, 이 땅의 소유와 이 땅에서의 자랑과 이 땅에서의 힘이 목적이 되는 삶을 살아가니까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30, 60, 100배의 결실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n세대들이 마음에 천국을 심으면 그것이 싹이 나면, 다시 말해서 생명이 소생하고 이 땅의 가치를 결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복음의 삶을 이 땅에 심어나가고, 하는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인데, 이것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천국이 나약하게 와 있는 것으로 인해 세상으로 흘러 간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것입니다.
마13:31절을 보시면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겨자씨로도 상상할 수 없는 나약함이 어디에 심어졌다고 했습니까? 밭에다 파묻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천국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천국을 이처럼 신비한 모습으로 이 땅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십니까? 그래서 원통하십니까? 하나님이 손 좀 봐주어야할 사람이 그토록 많은데 그냥 넘어 가야합니까?
그 영광과 힘과 권세를 보류하고 단지 초대만을 위해, 설득하기 위하여 들어와 있는 가장 대표적인 분이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기 위해서도 아니요, 설득과 초대를 위해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배워야할 이유이며 결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오, 오직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만이 유일 하나님이시며,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대단한 자녀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설득을 위해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쫓기로 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아버지께 구하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낼 수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지금 설득하시려 오셨기에 그 권세를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이 지금 들어와 있는 현재성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초대를 받아서 그 모습과 그 간증을 위해서 주께서 걸어 셨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없는 변형된 씨를 품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생명의 삶, 영혼소생의 삶, 중보자적 삶을 통해 그 나라의 상급과 면류관을 소유할 수 있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