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약사암
일 시 : 2023.03.02(목) 10시,
참 가 : 김상문 김영부 김재일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정원길 등 11명
불 참 : 강공수(국책 프로그램 참가)
회 비 : 110,000원
식 대 : 88,000원(장어탕 8, 애호박찌개 1, 김치찌개 1, 청국장 1)
잔 액 : 22,000원
이월 잔액 : 461,000원
총 잔액 : 483,000원
부곡정에 모인 회원 8명이 10시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강공수가 오늘 국책 사업인 치매프로그램에 가야 하여 불참하였다.
포근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씨치고는 바람 끝이 매서워 조금 쌀쌀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춥다고까지는 할 수 없는 날씨였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요즘의 여야의 정치상황에 대한 이야기나,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였다. 서로가 열변을 토하면서 서로 공감하기도 하고 자기 의견과 맞지 않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반감을 나타내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문빈정사 앞 너른 잔디밭에는 무슨 공연장 시설을 만들고 있었다. 무대의 배경에 <제3회 국립공원의 날 기념>이라 쓰여 있었다. 날짜가 쓰여 있지 않아서 언제가 그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내일 3월 3일이 그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려동물 중 개와 고양이를 키우면서 사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내가 아는 바는 수의학을 전공한 박남용교수가 주로 대동물인 소나 돼지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대동물을 집에서 가족처럼 대리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작은 강아지를 한 마리를 입양하여 기르고 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한번 반려동물을 권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저께 그가 보내온 카톡 내용이 <반려동물이 주는 위로>라는 제목이 있어서 열어 보았더니 의학기자 홍혜걸이 개인 방송으로 송출하는 유투브였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이 반려동물을 인간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반려동물이 인간을 동물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구나!>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사랑하지만 배신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동물은 그 주인을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오로지 죽을 때까지 충성만으로 일관하다가 죽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인간이 반려동물로부터 위로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풍습은 조상 때부터 개를 기르면서 집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다가 경우에 따라 잡아 먹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주인이 몽둥이를 들고 개를 뚜드려 잡는데 그 개가 뚜드려 맞으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깽깽거리는 모습을 흔히 보아왔지 않았는가! 그토록 개는 그 주인(인간)에게 충성스러웠다.
그런데 우리 회원 윤상윤이, 우리 목요산우회 단체 카톡방에 글을 올리면서, 평소 집에서 특히 아파트에서 큰개를 키우는 사람들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반감에서 그런 사람들은 싫어한다는 소견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또 장휘부 역시 평소의 소견으로 동감을 표하니까, 또 김상문이 그것을 거들게 되었다.
작은 애완견을 키우고 있는 박남용이 마음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넌지시 윤상윤에게 <박교수가 지금 반려동물과 살고 있는데 눈치 없이 그것을 지적하면 어떠한가?>하였더니, <아! 그래!> 자기가 주장한 것은 큰개를 공동주택에서 키우는 것에 대한 의견이라고 하면서, 잠시 후에 박교수에게 다가가서 자기의 진의를 전하면서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려동물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 조율되어 오해 없이 무사히 반려동물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이해하게 되었다.
약사암 뒤 곁의 석등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음양탕을 만들어 마셨다. 그 옆에는 매화 꽃망울이 분홍빛 꽃잎을 막 터뜨리고 있었다. 앞마당 오른쪽 구석지에 핀 수양매실의 하얀 꽃망울에 이어서 2주쯤 뒤에 핀 것이다. 이제 확실한 봄소식이 매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음악정자에는 정원길과 김상문이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서 역시 암기한 <향수> 노랫말을 입을 모아 두 번 암송하고 식당으로 갔다. 점심을 먹으면서 2월 28일 십오야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 내용을 공지하였다.
일시 : 4월 6일(목) 십오야 합동 봄나들이 여행.
목적지 : 논산 탑정호 출렁다리
출발장소 : 광주역 8시 30분 출발
회비 : 1만원
그리고 강공수회원이 건의한 우리 목요산우회 야외나들이에 대하여 운을 띄웠다. 3월 16일(목) 구례 산수유축제에 가는 문제를 논의하였더니, 작년 봄 영광불갑사 꽃무릇 축제처럼 복잡한 시기는 피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많았다. 대신에 목포에 가서 회나 먹고 오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 문제는 더 논의해 보기로 하였다.
명(明)청(淸) 교체기(交替期)의 30년을 지켜보면서, 그 동안 정묘호란(丁卯胡亂, 1626)과 병자호란(丙子胡亂,1636)의 격동기(激動期)를 겪어나가는 약소국 조선(朝鮮)이 당한 모습을 간략히 살펴보면,
여진족의 수장이었던 누루하치(努爾哈赤, 1559~1626, 청태조, )가 만주문자(滿洲文字)를 창제하고 여진족을 통일한 다음, 평시에는 <행정단위>이고 전시에는 <군사조직>으로 사용하는 <팔기(八旗) 제도>를 만들어, 1616년에는 후금(後金)이란 나라를 세웠다. 누루하치는 다시 1626년에 명(明)나라를 치려고 13만 대군으로 만리장성의 가장 동쪽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을 뚫고 가려고 하였다. 산해관을 가려면 영원성(寧遠城)을 거쳐야 하였다. 누루하치는 그 영원성을 공격하였다가, 그곳을 지키던 명나라의 장수 원숭환(袁崇煥)의 홍이포(紅夷砲) 공격에 부상을 당하고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다가 부상 후유증으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해(1626년)에 누루하치의 8번째 아들로 후계자가 된 홍 타이지(皇太極, 1592~1643, 청태종, 숭덕제)가 조선을 공격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킨 뒤, 압록강 지역에 3국(조선 일본 명) 교역을 통한 식량을 확보한 다음,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하여 내치에 힘 쓴 다음 명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1634년에 서쪽에 있는 몽고를 제압하였고, 1636년 홍 타이지는 명(明)나라 한족(漢族)의 협조를 받아 후금(後金)의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다음, 1636년 말에 동쪽에 있는 조선을 공격하였다. 바로 병자호란이다.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너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이끄는 300명의 정예기병으로 <장구직도(長驅直擣, 길게 말을 몰아 바로 도성을 찌른다.)의 전략>으로 시속 90km로 진격하여, ⑦일 만인 12월 14일에 한양에 입성하였다. 이때 왕실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가는 길이 침략군으로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남한산성에 웅거한 인조(仁祖)는 나중에 홍 타이지가 이끌고 온 홍이포(紅夷砲)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37일 만인 1637년 1월 21에 화친을 청하였고, ⑨일 후인 1월 30일에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의 의식인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굴욕을 당하고 만다. 적군이 압록강을 건넌지 총 53일만에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나버렸다. 그러나 후유증은 필설로 다 기록할 수 없이 크고 무서웠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볼모사리가 8년이나 계속되었고, 수십만의 노인과 여인(환향녀)들이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다. 인진왜란의 7년 전쟁을 지나고, 38년 후에 또 이런 민족의 고난을 겪게 된 것이다. 1638년 홍 타이지는 아버지가 실패한 만리장성을 넘으려고 이번에는 산해관이 아닌, 몽고평원으로 우회하여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만리장성의 관문(關門)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그때 또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숭환(袁崇煥) 장군이 여기에 원군으로 와 있었다. 홍 타이지는 명나라 환관을 이용한 반간계(反間計)로 명나라 황제(숭정제)가 제 손으로 원숭환을 죽이게 만들었다. 원숭환이 없는 명나라는 점차 기울어져 갔고, 1641년에는 명나라 화북을 점령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기 손으로 원숭환을 죽인 일에서 <의인막용 용인물의(疑人莫用 用人勿疑, 의심하면 쓰지 말고,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교훈(敎訓)을 얻게 된다.
홍 타이지는 1641~1642년 14만 대군을 이끌고 송산전투를 벌여 명나라 군을 전멸시키자 1643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나라의 앞날이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승리한 홍 타이지도 그 전투의 후유증으로 1643년 51세의 나이로 급사하고 만다.
홍타이지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풀린(1638~1661, 順治帝)이 6살의 어린 나이여서 애신각라 도르곤(愛新覺羅多爾袞, 1612~1650, 누루하치의 14번째 아들)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1644년 명나라의 장군 이자성(李自成)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점령해버렸다. 청나라는 섭정 도르곤(多爾袞)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도르곤(多爾袞)은 동갑나기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에게 동행을 요청하였다. 지금까지 도르곤이 참전하는 모든 전투에 동행하였던 소현세자는 이번에도 도르곤의 원정군과의 동행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소현세자는 도르곤과 심양을 출발, 북경을 향하여 동행하고 있었는데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적군 장수 오삼계(吳三桂)가 동맹(同盟)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청(淸)의 원정군은 쉽게 산해관을 통과하여 오삼계와의 동맹군으로 이자성의 반란군을 평정할 수 있었다. 도르곤은 드디어 북경을 접수하고 청나라의 수도를 심양(瀋陽)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김으로써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 것이다.
이 원정군의 북경입성 과정이 소현세자가 쓴 심양일기(瀋陽日記)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청나라에는 그 과정에 대한 바른 기록이 없어서(보여주기 좋은 기록만 있고) 심양일기가 청의 건국과정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보물처럼 소중하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8년간(1637~1645) 청태종 홍 타이지(皇太極)와 섭정 도르곤(多爾袞) 등과 굴욕적 교류하면서,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하는 과정과 정복자(征服者) 청(淸)이 명(明)나라의 유민(遺民)들을 포섭하고 회유하여 한족(漢族)의 협력으로 청나라의 기초를 다져가는 과정을 체험으로 학습하면서, 차기(次期) 국왕으로서의 소양을 차근차근 습득하고 미래에 대한 포부를 넓혀 가면서, 마음속으로 장차 조선의 17대 국왕이 되었을 때, 다시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 것을 굳게 결심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