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머리)
추자도에서/작가 미상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춥고 쓸쓸할 때
깨끗한 외로움 하나 만을 데불고 추자도에 가라
바닷가 조개껍질처럼 엎어진 민박집에 들러
아무도 몰래 꼭꼭 숨어 한 철을 견디리
밤낮으로 바람소리,파도소리만 듣다 질리면
혼자서 사무치는 객수감에 모서리치리.
나라 안에서 제일 힘센 바람과
제일 사나운 파도가 산다는 추자바다
거기에 풍랑과 맞서는 섬들이 점점이 놓여잇지
그래서 추자도의 옛이름은 후풍도
모진 풍랑을 피해 숨어들기 좋은곳
배도 사람도 바닷새도 물고기도
모두 이곳을 기항지로 삼아 숨을 골랐다지
때로는 유배객들이 제주에 이르기 전
이곳에서 갓을 벗고 절명하기도 했으니
저 눈섭처럼 떠 있는 마흔 두개의 섬들이
어쩌면 그들의 억울한 영혼은 아니냐.
(중략)
(바람이 머무는 섬,추자도의 본 이야기)
1271년 (고려 원종12년)까지 후풍도(候風島, 순풍을 기다리는 섬)로 불리웠으며,
추자도라는 지명으로 불리운 것은 조선 태조 5년에 섬에 추자나무가 무성하여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있다.
추자도로 들어오는 교통편은 제주항에서 쾌속선이,진도 우수영에서 여객선이
하루에 각각 한편씩 있으며 풍랑이나 바람등의 변수에 따라 수시로 배편이
열리고 닫힌다.
제주 올레길은 총21개코스에 플러스로 x-1로 나뉘어진 4개의 코스를 포함하여
25개의 코스가 있다.전체 제주올레길을 3회나 완보한 박종무님도 18-1코스의
추자도만은 여러가지 기상여건으로 번번히 입도에 실패하여 4수만에 성공했고
나는 미답의 코스중 1코스와 추자도만 남겨진 상태에서,문희님은 첫여정에서
이렇에 재수 좋게 입도에 성공하였다.
제주감귤마라톤 뛰고 맛기행에 추자도 올래까지 1타3피의 대박을 터뜨린 뜻밖의 여정이다.
코스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는 배의 기항지인 상추자항이다.
출발지를 벗어나면 바로 숲길로 들어선다.
11월 중순의 이섬에서는 육지의 10월 말쯤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추자도에서는 보름 이상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
최영장군 사당.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제주도에서 원의 목호(牧胡)인 석칠리등 3인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장군으로 하여금 진압케 하였다.
장군은 원정도중 심한 풍랑으로 이곳에서 한달여를 기다리는 도중에 주민들에게
어망편법을 가르쳐 생활에 변혁을 가져 왔다고 한다.
이러한 장군의 위덕을 기려 사당이 지어졌다는.
최영장군 위패.
올래 7코스, 외돌개와 그앞 범섬.
석칠리와 3인의 장수가 이끄는 몽고군의 전력은 기병 3천에 상당한 전력을
보유했다고 한다.최영장군의 병력은 전함 314척에 정예병 2만5천으로 당시
제주도 인구와 맞먹는 병력이 동원되었을 정도로 고려조정에서는 몽고군에
대하여 공포감이 대단했다고 한다.고려말 위화도 회군을 이끈 이성계의
요동반도 원정군의 전투병이 39000명 이었는데 반해 조그만 제주도를 치기 위한
병력규모는 엄청 났다고 볼수있다.
첫전투에서 참패한 고려군은 심기일전하여 새별오름 평원에서 한달여에 걸쳐 밀고 밀리는
대접전 끝에 힘들게 승리하였고 외돌개 앞 범섬에서 농성하던 잔당을 물리쳐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100년간 몽고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제주도민들의 희생된 숫자는
제주 4.3사태 희생자와 비슷했다고 한다.
최영장군 사당에서 내려다 본 상추자항과 당포포구.
예전에는 육지곡식을 제주로 수송하는 수참(水站)이 있었던 해상 요충지였다.
추자도에는 쌍룡사라는 불교사찰과 천주교 성당이 각각 하나씩 있다.
봉두산 전망대
순효각.
지극한 효성을 실천한 박명래의 행실을 기려 세워 졌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므로 슬피 울면서 하늘에
빌자 다음날 꿩고기를 얻게 되었다.
그후 어머니도 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면서 목숨을 연장했다고
전해진다.
처사각.
태인 박씨의 입도선조로 조선중기에 유배되었다.
주민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불교교리를 가르치면서 살았다고 한다.
문희님과 나는 알바하고 박종무님은 성당애 잠시 들리면서 잠시 헤어 졌다가
급히 서둘러 전망대로 향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오금이 저리다는 나바론 절벽을 패스하고 바로 등대 전망대
표지판이 나온다.
위험해서 잠시 올래길을 폐쇄한 것인지 아니면 길을 잘못 잡은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길이 없다.다음에 한번 더 오게되면 알 수 있으려나?
갈림길에서는 나바론절벽길의 끝부분만 보인다.
나바론 절벽 길(모셔 온 사진)
등대 전망대에서 본 상추자항.
고요함을 넘어 적막감이 감돌 정도로 조용하다.
가끔 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친구가 되고 포구의 아늑함이 온몸을 휘 감는다.
등대 전망대 산책로.
등대 전망대를 뒤로 하고 추자교로 내려간다.
이계절의 추자도는 꽃송이는 작지만 향기가 짙은 해국과~
육지에 비해 잎이 짧고 많지않은 남구절초가 한창이다.
어디에서 온지도 모르는 쓰레기가 점점 많아지는 제주의 해안가에 비해
이곳은 아직은 마지막 남은 청정해역이다.티끌 한점없이 깊고 푸르다.
제주에 속한 섬이지만 독자적인 특성을 간직한 섬속의 또다른 섬이다.
유배형 중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은 도성 3000리 밖에 위리안치 시키는 것이었다.
이거리를 맞추기 위하여 동서남해를 일주후 제주나 추자에 귀양보냈다.
추자는 이제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통한의 섬이 아닌 새로운 개념의 피안처로
떠 오르고 있다.역사의 아이러니~
동대산 정상의 전망대에 바라 본 추자교와 하추자도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추자교.
다리를 건너면 바로 돈대산으로 오르다가 잠시 묵리 어촌마을에 들린다.
모진이 해수욕장이 있는 어촌마을에서 오수를 즐기는 멍이 형제.
"주인님이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우리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턱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ㅎ ㅎ ㅎ
어린 시절의 동요가 생각나고 멍멍이의 잠든 모습에는 세상의 모든 평화로움이 감돈다.
추자 10경중 9경인 관탈섬, 곽개의 창파.
관탈섬 부근의 푸른 물결이 세상의 모든 인연을 지워 버릴듯 무심히 너울 거리며
흐르는 모습.
추자도는 4개의 유인도를 포함해서 42개의 부속도서를 거느리고 있다.
추자도는 제주의 부속도서에 속하지만 제주올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있다.
아직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아서 발밑에 풀들이 우거져 있고 발바닥 감촉이
푹신하고 길이 한가로우면서 무수한 야생화도 함께 한다는 점이다.
완도 우수영에서 떠나는 추자도행 여객선은 하추자도 신양항으로 들어온다.
여객선이 접안하는 것으로 보아 오후4시가 조금 넘은듯~
모진이 해수욕장을 거쳐 잠시 알바한 후에 신양1리로 올라 붙는다.
추자도의 모든 올래길은 바다를 조망하면서 산간과 해변을 오르락내리락 한다.
황경한의 묘.
원래 손문희님과 나는 약3시간 코스의 상추자도만을 쉴멍놀멍으로 트래킹 예정
이었으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박종무님이 성지순례를 겸한 빡신 트래킹을
고수하는 바람에 자의반타의반으로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어영부영하며 걷는 우리를 따돌리고 숨 가쁘게 달아난 박종무님이 여기에 엎드려
울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미 예초리 눈물의 십자가를 거쳐 다음 행선지로 떠난
직후에 우리가 도착했다.
황경한 묘역 앞, 추자 10경중 하나인 신대어유.
예초리와 신양리 사이 천혜의 황금어장인 신대에서 물고기가 뛰면서 노는
모습을 관망할 수있다.
고려말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서 이곳 주민을 제주도로 소개하였으나
추자도의 황금어장을 못잊는 어민들이 한두 가구씩 다시 스며 들어서
큰 어촌으로 발전하였다.
황경한의 눈물샘.
황경한의 아버지 황사영은 백서사건으로 투옥후 서소문 저자거리에서 스스로 하늘을
보고 누워서 칼을 받았고 어머니 정난주는 제주도 관노로 37년간의 세월을 살다가
소천하였고 아들인 황경한은 항상 제주도 고깃배를 통해 어머니 안부를
물어 보면서 그리워 했다고 전해진다.
어미(정난주)를 그리워 하는 아들(황경한)의 애끊는 소망에 하늘이 탄복하여 내리는
황경한의 눈물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늘 흐르는 기적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스토리 텔링은 종교적 신앙심을 발현하면서 추자 올레길과 함께 트래커들에게
잔잔한 감흥을 불어 넣어준다.
눈물의 십자가(모셔 온 사진)
실학사상의 거두이면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고 수원 화성의 실제적인 설계와
축조 책임자였던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친족들은 근대사회에서
천주교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시대의 선각자들이 당하는 희생양들이었다.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남긴 둘째형이 정약전이고 황사영백서사건으로
피의 숙청을 당한 황사영은 첫째형인 정약현의 사위이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평생을
관노로 생애를 마감한 정난주(정마리아)는 그의 딸이었다.
정난주가 제주 유배길에 생후 두살된 아들을 강보에 싸서 내려 놓은 것이 이곳의 갯바위였다.
동쪽으로 바위가 튀어 나온 곳이 황경한이 버려져 울던 장소이다.
지금 제주교구에서는 이곳을 새로 단장하여 성역화 할 계획을 세우고
한창 공사 중이다.
예초리 바닷가 마을에 오니 이섬에 한대밖에 없는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다
그냥 가버린다.후에 알았지만 이버스가 상추자로 가는 오늘의 마지막 버스라고 한다.
마을 벗어나 20여분 걸으니 엄바위 장승이 나타난다.
옛날 엄바위에 억발장사가 있었다.그는 장사공돌이라는 바위 다섯개로 공기놀이를
즐겼는데 어느 날 횡간도로 건너 뛰다가 미끄러 넘어져 죽었다.
그 이후로 예초리와 횡간도 사람들은 서로 결혼하지 않는다.
결혼하면 청성과부가 된다는 속설때문이다.
해 뜰때마다 아름다운 은빛 비단무늬가 생기고,해질 무렵이면 저녁노을이
금빛처럼 튀어 오르는 곳,지금 이곳은 추자 앞바다이다.
오후 5시30분.어느덧 바다 끝으로 해가 기울어 진다.
문희님과 나는 예초리 편의점에서 우유와 빵 한조각으로 시장기를 때우고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니 아무 생각도 없다.막차버스는 떠나고 박종무님은 숙소까지 20여분
거리의 추자교에 이르렀다는 소식이다. 숙소까지 1시간20분이 걸린다는 길을 무작정
걷는데 펜션을 운영한다는 분이 친절하게 숙소까지 차를 태워서 내려준다.
이제 부터는 분위기를 바꾸어 첫날이자 마지막 밤인 추자섬에서 썸타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숙소에서 대충 씻고 저녁식사를 하러왔다.
아까 우리를 태워다 준 펜션사장님이 추자도에서 가장 음식을 싸고 맛있게 요리한다는
실내포장마차다.지금은 무었보다 술이 시급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만 막상 길을 떠나면 "사랑은 짧고 맛은 길다"는
말에 공감이 더 진하고 절실하다.
자신을 찾는 것도,새로운 멋진 경험을 하는 것도,숨이 멎을듯한 아름다운 풍경 앞에
다가서는 것도 좋지만 여행은 일단은 식도락이 기본이다.
참여행은 무었보다 먹고 노는 일이기 때문이다.거기에 술은 금상첨화.
맛있는 음식과 술이 입안에 가득 들어 오면서 혓바닥에 느껴지는 식감은 황홀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 들어가는 순간,드디어 관능적이고 에스터시한 절정감을
맞이한다.
그 기대욕구를 만족시켜 줄 첫번째 메뉴는 추자도산 자연산 홍합전골이다.
홍합전골이 미쳐 끓기도 전에 참이슬 두병에 제주 암반수로 만든 하이트 맥주가
쏘맥이라는 이름으로 바로 사라진다.
문희님에게 주량을 물어 보면 "저는 술을 별로 못 하구여~이슬만 두 모금 정도해요"
라고 한다.아무래도 내가 말을 잘 못 들은듯하다.
이슬이는 참이슬,두모금은 두병인 것같다.
그러니까 이슬 두모금이 아니고 식전거리로 참이슬 두병 이상 이라는 뜻.
나이가 들어 가니까 눈도 귀도 다 어두어지고 이해력도 떨어진다.
벽에 붙어있는 낚시에 걸려서 바로 술 5병 마시고 야관문을 득템한다.
우리에게 이정도야 식은 죽 먹기인 줄을 주인장이 모르시는가 보다.
득템에 대한 보답으로 반건조 농어구이를 하나 더 주문한다.
이계절의 추자도는 참돔,돌돔과 벵어돔이 낚시에 잘 걸리고 조기와 뿔소라도
알아준다고.추자도 멸치액젖은 전국최고다.
우리가 입맛이 좋은 건지 농어가 맛이 좋은 건지 구별이 안된다.
셋이 생선 가지고 싸우지 말자며 사이좋게 나눈다.
다시 또 한병의 야관문 도전을 위하여 술병은 쌓여만 가고 안주도 추가된다.
夜關門(밤에 빚장을 연다)
야관문을 복용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여인이 그다음날 부터 밤새 문을 열어
놓았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그러나 문희님의 주장은 이러하다.
門의 주인공은 여자이고 문을 열어야 거시기 하지않고 술이 술술 잘 풀린다는
억지주장에 두남자의 야관문 두병째 도전에 흥이 살아난다.
주량은 누가 손에 술을 쥐고 있느냐가 아니라 술옆에 누가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이번에 깨닫게 되었다.
우리 지금 몇살?
술병은 점점 늘어 나고 급기야는 안주 쟁탈전까지 벌어진다.
이전투구로 달려드는 안주싸움을 수습차 급기야 여사장님까지 달려 오셨다.
이렇게 오랜 시간 한자리에 앉아 술마시면서 시종일관 화기애애,재미있게
마시는 사람들은 처음 본다고 하시면서 수습책을 내 놓는다.
수습책은 야관문이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고 하면서 5천원에 별도로
사 먹으라고 한다.쾌도난마.명쾌한 해결책이다.
왜 지금까지 이방법을 몰랐을까?
두병째 야관문의 첫째 시음자는 당연히 문희님이다.
어촌에 단 하나뿐인 실내포차의 밤은 깊어만 가는데 심야까지 포차의 불빛은 꺼질 줄을 모른다.
추자도의 새날이 밝았다.우리가 이제는 떠나가야 할 시간.
추자도 어부 아저씨 안녕히~! 어젯 밤에 생선 잘 먹었습니다.
(날머리)
추자도에서(계속)/작가미상
몽돌들이 자갈자갈 우는 짝지에 앉아
춥고 눅눅한 마음을 널어 말리며 바다를 본다
오늘도 파도는 기슭을 하얗게 물어뜯지만
섬은 끝끝내 견고한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굴복하지 않은 것들이 섬들로 떠 있는 추자바다
나는 그 차가운 물속에 몸을 담근 섬이 되어
깨끗한 외로움 하나를 담금질 하고 있다.
(팁)
추자도에서 완도 우수영까지 여객선은 1시간30분이 걸린다.
우수영에서 목포역까지 무료로 셔틀버스를 운행하는데 30분 걸리고
다시 목포에서 영통까지 2시간이 소요되는 SRT가 바로 연결된다.
목포역 옆에는 건어물을 중심으로 파는 수산시장도 있어 자투리 시간에 쇼핑도 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