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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7월17일(월)흐린 후 비
삭발하는 날이다. 진주선원에서 소식이 왔다. 수련이 사랑하던 개를 떠나보내고 상심에 빠져 있으니 스님께서 위안의 말씀을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이에 문자를 보냈다.
수련, 도반에게서 키우던 개가 죽어 슬픔에 잠겨있다는 소식 듣고 이 문자 보낸다. 사랑에는 언제나 이별이 따른다고 우리가 배웠건만 자신에게 닥쳤을 때는 얼마나 그 상실의 슬픔이 깊은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내 사랑의 대상이 동물이냐 사람이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 가슴의 한 부분이 잘려나간 느낌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항상 내 가슴에 상처처럼 남아있다. 그렇다. 우리는 슬픔을 씨앗처럼 가진 존재이다. 세상에 슬퍼할 일이 많다. 그 많은 슬픔을 감당하기엔 내 가슴은 너무나 연약하고 섬세하다.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은 많고, 아직 내게 는 다시 사랑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나의 사랑이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야한다. 슬픔에 빠진 내 몸과 마음에 사랑을 주어야하고,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을 사랑해야하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해야하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한다. 나는 숲을 스치는 바람을 아직 사랑할 수 있고, 구름 사이로 나타난 별빛을 아직 사랑할 수 있다. 수련, 너에게는 아직 사랑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고, 또 다시 사랑할 대상이 나타날 것이다. 너는 잃어버린 만큼 얻을 것이요, 슬퍼한 만큼 위로받을 것이다. 너의 사랑은 헛된 것이 아니어서 세상 밖에서 새로운 선물이 날아올 것이다. 어둠의 터널이 끝나면 새벽이 밝아오듯 너의 정신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수련, 슬픔이 물밀 듯이 쳐들어와 너를 감싸면 벗어나오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기다려라. 슬픔의 파도가 너를 관통하고 지나갈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려라. 흙탕물을 그대로 두면 저절로 가라앉듯 너의 슬픔도 가만히 지켜보면 저절로 깨끗해질 것이다. 여기에 너와 슬픔을 함께 나눌 스승과 도반이 있음을 기억하라. 너 홀로 슬픔에 빠져 고립을 일부러 만들지 말라. 그건 스스로의 감정에 갇히는 것이라, 치유가 더디고 상처를 깊게 할 우려가 있다. 이럴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서 슬픔을 넘어가는 지혜를 키우라. 호흡명상을 실천하여 슬픔을 벗어난 오묘한 기쁨을 맛보라. 내면에서 솟아나는 기쁨만이 슬픔을 이겨내게 하리라. 괴로움으로는 괴로움을 이겨낼 수 없다. 즐거운 시작과 즐거운 과정으로만 즐거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여기 슬픔을 넘어가는 기쁨을 얻는 법과 괴로움을 벗어나는 즐거움을 가르치는 진주선원을 잊지 말라. 선원은 지금 방학했다가 8월14일(월)에 개학한다. 곧 좋은 소식 오기를 바란다. 원담 합장
2017년7월18일(화)맑음
자신이 비판받기를 원하지 않듯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비판하는 사람의 눈을 피하려 한다. 사람들은 도끼눈을 가진 사람과 눈길이 마주치는 걸 꺼린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AN.75.전재성님>
남을 비판하는 논리를 자기 자신에 먼저 적용해보자. 다른 사람의 허물은 적어도 크게 잘 보이고 자기의 허물은 크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자기의 허물을 볼 수 있는 눈이 귀하다. 다른 사람에게서 허물이 보이면 그런 허물이 내게 이미 있기에 내 눈에 쉽게 띈 것이라고 알아야한다. 내 눈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찾아내는 데는 귀신같지만 자기 허물을 보는 데에는 돌처럼 무식하다. 밖을 향해 찌르는 바늘로 자기를 먼저 찔러야 한다. 밖을 향해 지적 질하는 손가락을 굽혀 자신을 먼저 가리켜라. 이놈에게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모든 잘못과 허물이 다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루 종일 후덥지근하다. 저녁 예불 후 상판스님들이 다각실에 모여서 다음번 동안거를 위해 방부를 들인 지원자 스님들을 심사하여 여섯 명을 선택하여 방부에 합격했음을 통보해 주어야한다. 이것이 ‘榜付방부 羯磨갈마를 한다.’는 절차이다.
2017년7월19일(수)맑음
아침에 울력하다. 도량주변의 잡초를 돌보고 썩은 나무 등걸을 옮겨서 도량을 깨끗이 하다. 환경이 깨끗하면 마음도 저절로 깨끗해진다. 그래서 숲속 수행자는 먼저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청소를 하라고 했다. 폭염주의보가 울린다. 매일 숲속으로 산책 나가든 스님들도 방에 틀어박혀 정진하든지 그늘에서 경행할 뿐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스님들은 주로 좌선과 경행이었던 것을 상기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행주좌와어묵동정에 일관되게 正念을 상속해가는 것이 수행일진대 아무리 수행법이 달라진다한들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다. 한낮 더위에는 매미도 울지 않는다.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그래서 山寺 오후의 고요 속으로 천지가 침몰한다는 詩도 나올만하다. 索居閒處색거한처하고 沈默寂寥침묵적요라는 말이 千字文천자문에 나온다. 홀로 떨어져 살고 한가롭게 머무니, 잠긴 듯 말이 없고 고요하구나. 은거하는 선비의 일상을 형용한 말이다. 스님들은 그런 한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正念相續정념상속하는 정진이 평소의 멋이다. 그러기에 선비들은 吟風弄月음풍농월하나 淸風衲子청풍납자는 정사유와 四梵住사범주를 護念호념한다. 산속에서 일없이 한가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스님이나 자연인이나, 도사나 선비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스님들은 세상의 족보를 버리고 아예 釋氏석씨로 다시 태어난 佛種性불종성이다. 그런데 朱子가 산에 은거하면서 儒道를 닦던 시절 좌우명으로 삼았던 글귀가 있었다. 隱居復何求, 無言道心長. 은거부하구, 무언도심장. 이 對句대구가 어디서 연유했는지 알았는지, 몰랐는지 어떤 큰 스님은 이 말을 애호하여 자기가 사는 암자에 주련으로 붙여놓았으니 불교와 유교를 혼동했던가, 아니면 유생들에게 호감을 사서 排佛을 막아보려는 계책에서 그렇게 했던가? 자고로 독서를 깊고도 넓어야 실수를 하지 않는 법인데, 견문이 짧으면 ㄱ 과 ㄴ을 혼동하고 ㅌ 과 E를 분간하지 못한다. 예전 스님네들이야 해외에 나가보지도 못해 세계불교에 대한 눈이 어두웠기에 그렇다손 치더라도 지금 젊은 스님들조차 승가교육이 부실하여 교학과 수행이 체계적으로 정합되지 않고 불교와 외도사상과의 차이를 선명하게 분별하지 못하니 같은 불제자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참고: 隱求齋(은구재) -朱子 지음
晨窓林影開, 夜枕山泉響; 隱居復何求, 無言道心長.
신창림영개 야침산천향 은거부하구 무언도심장
새벽 창문은 숲 속에 열리고,
밤이면 산속 샘물 소리로 베개를 삼네.
은둔하고 살면서 다시 무얼 구할까?
말없는 가운데 道의 마음 자라네.
2017년7월20일(목)맑음
금년더러 최고로 무덥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른다. 스님들이 모두 바위처럼 될 수 있으면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장애가 나타나면 맞서서 싸우거나 돌아가기 보다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물론 그런 장애란 심리적인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작을 천천히, 몸가짐을 진중히 한다. 중부지역엔 비가 넘치게 내렸으나 남쪽에는 비가 적게 내려 덥다는 소식이다. 강우량조차 불평등하여 한 쪽에는 고통을 주고 다른 쪽에는 기쁨을 준다. 비가 오면 우산 장수가 좋고, 해가 나면 부채 장수가 좋다는 식으로 생각해야할까? 그래도 고통을 당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연민은 멈추어지지 않는다.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중생의 업이 차별이 있기에 그들이 감당하는 고락은 천차만별이다. 일체 중생 안락과 안락의 원인 갖게 되소서. 일체 중생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단절되소서. 저녁 정진마치고 이렇게 기원한다.
미국인 불자 맥스에게서 편지 오다.
2017년 7월 19일 오후 9:04
Dear Sunim, How are you? I think of you often and am wishing you the best in every way. Very much looking forward to when we can be together again. I am taking your guidance seriously to BOTH be in the world and fulfil spiritual path, though it is not simple to do both. Sometimes I dream of taking 9 months to fully focus on spiritual practice. Hope you and the team master and all of your students are well in Jinju. Sending lots of love. In the dharma, Max
스님께, 안녕하세요? 때때로 당신을 생각하면서 여러 면으로 당신의 일이 잘 되길 빌어요. 우리가 다시 함께 할 때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어요. 저는 세상 속에 살면서 영적인 길을 완성하라는 양방향에 대해 당신이 주신 지침을 진지하게 받아드리고 있어요. 양쪽의 길을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가끔은 9개월 동안 수행에 몰입하는 꿈을 꿉니다. 당신과 다도 선생과 진주에 있는 당신의 제자들 모두 평안하길 바랍니다. 많은 사랑을 보내면서, 불법 안에 있는 맥스올림.
맥스에게 답장 하다.
오후 8:48
Max, how are you doing theses hot summer days? I know your contributions in the Paris climate change which resulted unsatisfactorily due to Trump`s withdrawal, which should have made you frustrated. And relations with Goh is not going smooth, which I vaguely estimate hopeless. And for the time being you feel going astray. Yes, everyone in the world live that way, something lost and something gained, somewhat clear somewhat unclear in the direction one is forwarding. But one never questions whether one is on or off the track. Now you are aware of the track and unclear stance of making a choice torn between the worldly engagement and the spiritual apprenticeship. Do you feel wholeheartedly an innermost need to do a long term intensive practice? If so, do you want the practice under my guide or the other qualified master? If you do under my guide, I have a problem that I have no temple or a quiet place for you to stay during your practice. If you want to stay with the tea-master in the mountain, probably you can afford to stay as long as the master accepts you as his student. And Korea is not the only place to practice Buddhism, there are some good places in Thailand and Myanmar, or in Sri Lanka. You can be ordained as a Theravadin monk in Thai or Burma and practice Vipassana meditation as I did Vipassana in Panditarama Meditation Center in 1997 and in Chanmay Center in 1998. I participated in Tibentan 3year retreat in Karmeling Center, KTD in NY. Now I am in a summer retreat in a Zen center. These days one had better learn and practice the synthetic and systematic approach to Buddhism rather than commit oneself solely in an ethnic or sectarian Buddhism. I mean at first one should experience Vipassana way, Zen way, and Tibetan way, then one can unite the ways and put pieces in one`s own way tailored to one`s karma. So one`s spiritual journey goes on lifelong. It is the way how I have carried out my journey until now. I don`t know this letter might ease your anxiety and comfort your feeling, but wishing you a heartful cheer-up for your awakening. You are always welcomed to my residence. The door is open to you all the time. Wondam from Korea.
맥스, 이 더운 여름날을 어떻게 보내느냐?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파리 기후 협정에서 네가 쏟았던 노력이 불만족스럽게 끝난 것에 대해 너는 좌절감을 느꼈겠구나. 크리스탈과의 관계도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 같지 않는데 나는 둘 사이의 관계에 희망이 없다고 어렴풋이 여기고 있다. 당분간 길을 잃은 것 같이 느낌이 들겠지. 그래,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지. 어떤 것은 잃었고 어떤 것을 얻었고, 앞으로 나갈 길에 어떤 것은 분명하고 어떤 것을 불투명하기도 하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길에서 벗어났는지 아닌지를 의심해보지 않는다. 이제 너는 네가 가고 있는 길을 의식하면서, 세상에 참여하는 삶과 수행자로서의 수련기간을 가지는 것 사이에서 결정해야하는 불분명한 위치에 서있다. 너는 장기간의 집중수련을 해야 할 내적인 필요성을 진지하게 느끼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나의 지도아래에서 수행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어떤 자격을 갖춘 스승 밑에서 수행하길 원하는가? 네가 나의 지도아래 수행하길 바란다면 나에게는 네가 수행할 동안 머물 수 있는 절이나 조용한 장소가 없는 것이 문제다. 네가 산속의 다도 스님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면 아마도 그분의 제자로서 머물 수 있는 장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를 수행할 수 있는 곳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태국이나 미얀마, 스리랑카에도 좋은 곳들이 있다. 내가 1997년에 미얀마 빤띠타라마 센터에서, 1998년에는 찬메 수행센터에서 수행했듯이 너도 미얀마에 가서 상좌부불교의 스님으로 출가하여 위빠사나를 수행할 수 있다. 나는 뉴욕 티베트불교 카규파의 본부 부속 카멜링 센터에서 3년 결사를 마쳤다. 현재는 한국의 선원에서 하안거를 지내고 있다. 요즘은 어느 하나의 민족불교나 한 종파의 불교에 몰두하기 보다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접근 방법이 좋을 것 같다. 무슨 말이냐 하면, 먼저 위파사나식으로, 선의 방식대로, 티베트불교식으로 수행을 해본다음 종합하여 자기의 성향에 맞는 맞춤형 불교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영적인 여행은 일생동안 가는 길이 된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해온 이제까지의 내 방식이다. 이 편지가 너의 불안을 안정시키고 네 감정에 무슨 위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너의 영적인 각성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싶다. 내 거처에 언제든 와도 환영한다. 내 집의 문은 네게 항상 열려있다. 한국에서 원담.
2017년7월21일(금)비
錦海금해스님이 몸이 아파 退榜퇴방했다. 선방에서 자기 앉는 좌복을 치우고 결제에서 빠지는 것을 퇴방한다고 한다. 결제를 한 스님들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는 거의 퇴방하는 경우가 없는데, 몸이 아파서 좌선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대중에게 고하고 결제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면 대중스님들을 그 스님이 한적한 곳에서 여유를 가지고 심신을 요양해 빨리 회복하기를 바란다.
선방스님들은 모두 各自圖生각자도생이라, 제 수단껏, 자기 재주껏 살아가야 한다. 종단에서 일체의 후원이나 보장을 받을 수 없다.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다니며 그럭저럭 건강을 지키며 수행하다가 어느 날 어떤 계기로 병이 들게 되면 아무 대책이 없다. 유력한 후원자가 있던지, 돈을 모아둔 게 있으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정이라면 병든 몸으로 홀로 병마와 싸워야 한다. 수행력으로 병고를 이겨내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불우한 처지에 놓인 스님들이 자취 없이 홀연히 사라지는 수도 있다. 누구도 볼 수 없는 깊은 숲에 들어가 죽음을 맞든지, 외진 산간 토굴에서 아무도 몰래 죽음을 만난다. 물속으로 들어간 스님도 있었고, 불 속으로 들어간 스님도 있었다. 스님들이 구차한 모습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죽고 싶다는 소박한 원을 실행한 것이라 하겠다. 모름지기 스님들은 수행을 지속할 정도의 건강은 어찌됐던 유지해야한다.
2017년7월22일(토)中伏 흐림
소슬 비 오다가 그치니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는 숲에서 내뿜는 나무들의 입김이다. 기압이 낮아진 것인지 하루 종일 착 가라앉은 분위기다. 바다 밑으로 떨어진 돌처럼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자. 움직여 봤자 땀만 난다.
난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수행이라고? 죽지 않았으니 살아있는 거라고? 속편한 소리 집어치우자. 최소한 숨은 쉬고 있지 않느냐?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반응을 하지 않느냐? 그러니 살아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거다. 죽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거지. 그런데 뭐 하러 살아있지? 바로 팍 꼬꾸라져 죽어도 되는데 죽지 않는 것이 희한하다. 더 이상 숨 쉬기를 멈추고 영원히 쉬어도 되는데 해야 할 일이 남은 사람처럼 다시 숨을 쉰다. 무슨 죽지 못할 필연성이라도 있나? 지금 죽으면 안 되는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라도 있나? 꼭 살아 있어야할 이유가 충분하냐? 네가 살아있어도 괜찮다고 너 자신을 완전히 설득할 수 있는가? 살아갈 이유를 자신에게 충분히 설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생명을 구걸하여 연명하는 짓이다. 그건 비열하고 구차하며 가치가 없고 인류의 공동재산을 낭비할 뿐이다. 왜 살아있지? 뭐 하러 살아있지? 지금 죽으면 억울하냐? 언제까지 살래? 그래서 지금 뭐 하고 있니? 날카롭게 벼른 칼끝으로 자신을 찔러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간다는 이유로 정신이 무디어지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은 ‘살아간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살아간다.’는 게 무슨 대단한 벼슬한 것처럼 귀하게 여겨 보호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듯이 여긴다. ‘살아간다.’는 어떤 의미도 내포되지 않은 그냥 맹목적인 생존욕구일 뿐이다. 그것은 동물적 본능이요, 무지이며, 고집이고, 고집불통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이며 我執아집덩어리이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죽는 것보다 못하다. 나는 사라짐을 원하지 ‘죽치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날이 사라져간다면 좋으리. 그림자가 점점 사라져 빛 속으로 사라지듯 완전한 사라짐은 지극한 즐거움이라.
2017년7월23일(일)비
새벽부터 구즐구즐하게 비 온다. 비 오면 오는 것이지, 비 오는데 무슨 이유가 있고 설명이 필요하랴만 인간들은 별별 이유와 설명을 갖다 붙인다. 그러나 비는 올뿐. 비는 오고가지도 않는다. 그냥 비다. 오전 정진 마치고 돌아오니 선진 보살에게서 문자가 와서 답장하다.
선진보살, 우중에 반가운 소식 들려오니 비가 그친 듯 마음이 밝아져 의성 쪽을 바라보게 되는군요. 선도와 선진을 만난 지 10년 가까이 되는 듯합니다. 자주 못 보지만 두 분은 내가 금생에 오직 한 번 주지 소임을 맡았던 기회에 만난 인연이라 각별한 사이였다고 기억되어요. 선도는 군민들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고 있고, 선진은 정치인의 부인이 감당해야할 내조와 가정사에 묶여 넓은 세상을 두루 다니지 못하고 지방에 붙박여있지요. 세상이란 뜻대로 되지 않고, 사람들 끼리 서로 엮이고 묶여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苦海라고 했어요. 뜻대로 안 될 때는 받아드리고 가만히 기다리라고 하였어요. 전생에 쌓아놓았던 인연의 묶임이 풀리려면 가만히 기다리면 저절로 풀어져 훨훨 놓여날 때가 와요. 사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내 뜻대로 된 것이 아니며, 묶이고 엮여서 끌려온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기에 속박이요, 덧없이 반복되는 윤회라고 하지요. 진실로 세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일념을 간직하세요. 그것은 윤회로부터 해탈하기를 염원하는 보리심을 발하는 것입니다.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감옥같은 세상에 있을 때 나에게 맡겨진 일을 흠 없이 처리하고 탈출의 일념을 불태우면서 살아가세요. 그것이 수행하는 사람의 태도이죠. 이생을 마칠 때 최후의 일념을 자신합니까? 그러려면 눈 뜨자 딱 떠오르는 최초의 일념이 부처님 생각이어야 하고, 보리심이어야 합니다. 최초의 일념에 자신이 있으면 임종 때의 최후의 일념에도 자신을 가질 수 있어요. 히말라야 설산이 아무리 높고 험하다 해도 날아서 넘어가는 독수리가 있다고 해요. 선진보살은 설산을 날아 넘어가는 독수리처럼 시선을 먼 곳에 두고 멀리 바라보며 지금 여기 오늘을 당당하게 살아가세요. 선도와 선진의 앞길이 밝아져 여유로운 삶이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가을엔 진주선원을 한 번 다녀가세요. 스님은 언제나 선도와 선진을 생각하면서 자애를 보냅니다.
보림선원에서 여름을 보내며 원담 합장
2017년7월24일(월)느즐느즐 비 오다
한 스님이 질문해왔다.
스님? 가피란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부처님 가피를 입었다라고 말하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요? 부처님은 어떤 작용으로 우리에게 작용하시나요? 열반에 드셨다라고 표현하는데 열반에 드셨다면 완전한 적정에 들었다라고 생각하면 거기는 어떤 작용도 없다는 뜻인가요?
이에 답했다.
①加被가피: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문제를 부처님과 보살님께 기도를 드림으로써 불가사의하게 해결되는 체험을 했을 때 ‘가피를 입었다, 가피를 받았다.’라고 표현한다. 일종의 종교심리적인 현상으로 靈驗영험이라고도 한다. 이는 기도하는 당사자만이 느끼는 것이지 증명가능하거나 반복 가능한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에서 가피는 삼보에 대한 신심으로 계를 지키며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굳게 세우고, 열의를 내어 염불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온다고 가르친다. 이는 신통을 바라는 것이 아닌 염불정진이란 因을 심어 그에 합당한 결과가 온다는 인과법을 따른 것이다. 念佛buddhanusati이란 마음속에 부처님을 새겨 넣는 것이다. 눈 뜨자 최초의 일념이 염불이 되도록 하며, 잠들기 직전까지 염불이 이어지면 가피가 있다.
②열반: 열반을 擇滅無爲택멸무위라고도 한다. 無爲무위란 절대로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 것이 확정된 상태이다. 번뇌가 가라앉아 다시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경지이다. 성자의 지위에 이른 분들의 정신내부의 평온함이다. 擇滅택멸은 하나의 존재라기보다는 ‘작용이 정지된 특정 상태’이며 수행의 최종목표이다. 택멸은 물질도 정신도 에너지도 아니며 어떠한 작용에도 관계하지 않는 不活性불활성 상태이다. ‘번뇌의 완전한 단멸’이기에 이는 ‘열반’과 같은 의미를 띤 말이다. 이상은 초기불교에서 보는 열반의 개념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열반에 들어 사바세계 중생과 소통하지 않아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고 영원히 사라져 버렸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대승불교에서는 답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無住處涅槃무주처열반이라고. 부처님과 보살들은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윤회에도 머물지 않아 양쪽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어, 열반에 머물되 중생을 버리지 아니하고, 중생을 교화하되 열반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80세 이상 오래 사실 수 있는데 왜 열반에 들기로 선택하셨을까? 이에 대한 답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나온다. 부처님은 중생에게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열반에 들기를 택하셨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지 않고 오래 동안 계신다면 중생이 나태해져서 보리심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제자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소멸하고야 만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마침내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지 않고 우리 옆에 영원히 계신다면 부처님께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 공부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부처님이 그 곳에 계시고 아쉬울 때마다 부처님을 찾을 수 있으니 우리는 게으름에 빠지고 가르침을 소중한 줄 모르며, 감사할 줄 몰라 은혜를 모르는 철없는 중생이 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유훈하시길 먼저 게으름 없는 정진을 강조하였으며, 그렇게 정진한 후에는 반드시 이웃들에게 널리 가르침을 전하라고 부탁한 것이다. 부처님 없는 곳에 가서 부처님 가르침을 당신을 대신하여 많은 사람들께 전하기를 바랐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
불자여,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심 내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사모함을 내게 하려고 열반함을 보이지만,
여래는 참으로 세상에 출현함도 없고 열반함도 없다.
여래는 청정한 법계에 항상 계시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라 열반함을 나타내신다.
비유하면 해가 떠서 세간에 두루 비치되
무릇 청정한 물이 있는 곳마다 그림자가 나타나듯
여러 곳에 두루 하지만 오거나 가는 일이 없으며,
그릇이 깨지면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二諦說 즉 진실제와 세속제로 법을 볼 때, 진실제와 세속제는 상호불연속이고 불가역적이어서 서로 단절됨을 강조하는 경향이 초기불교이다. 반면 진실제와 세속제가 상호연속적이어서 호환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대승불교이다. 그래서 二諦圓融이제원융을 이야기한다. 그런 맥락에서 화엄경 여래출현품이 설해진다. 이제원융은 반야중관에 기반을 둔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불교라는 큰 집의 두 형제이다. 형제란 서로 우애 있게 지내거나 아니면 불화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불교라는 큰 집의 두 형제가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우애 있게 지낼 것인지는 불교를 보는 각자의 안목에 달려있다.
2017년7월25일(화)맑음
아침에 구름 많아 흐릴 줄 알았는데 해가 높이 뜨자 화창하게 갠다. 간만에 나온 햇살이 좋아 선방 주변과 마당을 정리하는 울력하다. 밀린 빨래를 하여 빨래 줄에 걸어놓으니 햇볕을 받아 건조된 미역처럼 바삭바삭해진다. 숲길을 한 바퀴 돌아오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목이 말라 차를 찾으니 선덕스님께서 중국 홍차를 우려 주시네. 한 사발을 들이키고 바짝 마른 빨래를 걷어 물을 풍기고 잘 접어서 밟는다. 고루 잘 밟아야 옷에 좍 펴져서 다림질하기에 좋다. 다림질을 마치고 햇볕에 다시 널어서 완전히 말린다.
흰 구름 여유롭게 떠있다. 하늘에 뜬 흰 구름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리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흰 구름 타고 산 너머 먼 나라로 날아가 넓은 세계를 보고 싶어라, 하늘 밖 먼 미지의 것에 대한 향수가 있었던 게다. 내가 속한 세계의 밖은 어떠할까? 세계의 끝은 어디인가? 내가 있는 곳은 세계 가운데 어떤 위치를 점유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늘 높은 곳에서 내가 있는 곳을 내려다보면 어떻게 보일까? 어린아이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다 해봤을 것이다. 미지의 것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이 종교적 방황으로 이어져 구도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전생부터 쌓아온 나의 업이라 할까, 부처님의 가피라 할까.
참매미가 울기 시작한다. 고추잠자리가 날고 참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한여름은 이미 지났다는 뜻. 가을은 여름 가운데 이미 싹이 터서 자라고 있다.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나
이 매미 허물은 -바쇼
여름 날 매미는
나무 껴안고 운다
마지막 울음 -이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1644~1694)의 하이쿠는 텅 빈 충만을 노래했다. 매미 소리 허공에 가득한데 매미는 허물만 남긴 채 사라졌으니. 들음-앎만 가득한데 주관과 객관은 사라져. 人法이 空한 가운데 正念正知 뚜렷하니. sati가 sunnata고, sati가 saunnata다.
고바야시 이싸(小林一茶,1763~1827)의 하이쿠는 죽을 때가 가까운 줄 아는 중생의 마지막 발악-마지막 울음을 노래한다. 죽어야 할 존재와 자신을 향한 연민이다. 그러면서 인간들이여, 나무를 껴안고 마지막 울음을 우는 매미와 같은 신세가 되리라고 경책한다. 우리들 인간 매미는 마지막 울음을 울기(죽지 않으려고 발악하기) 전에 너무 울어서(열심히 정진해서) 텅 비워버려야 한다. 蟬脫선탈은 解脫해탈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는 것을 蟬脫이라한다. 탐진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해탈은 열반을 체험한 것을 말한다. 매미는 껍질은 벗지만 열반을 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선탈은 해탈이 아니다. 모든 매미는 선탈한다. 그러나 해탈은 정진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첫댓글 스님!
스님 글에는 휼륭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상상도 못했던 서슬퍼런 구도자의 힘이 있고, 봄날같은 따뜻 한 사랑이 있고 ,쌉쌀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고,집,멸,도! 저에게 고통으로 와 닿는 모든것들이 무뎌져 느끼지 못함이 아니라 부처님법 공부로 벗어나고 싶습니다!
미약한 존재가 가길은 멀고 의지처는 스님 이오니 부디 건강하시어 무지랭이가 이런 저런 고뇌에서 벗어남을 지켜보아주시길 기원합니다()()()
7월 22일자 수행일기를 보고 감명 받아 글 하나 썼습니다.
싫어하여 사라지기 위해 애써야
http://m.blog.daum.net/bolee591/16157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