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타임 캡슐을 타고
난주로 부터 열차로 돈황으로 옮겨가야 한다.
12시간의 밤 열차여행이다.
<생각보다 쾌적했던 12시간의 열차여행>
옛날 기차타고 수학여행이라도 간다하면
우리는 얼마나 설레었나?
50을 넘어 6-70을 육박하는 이 노년들의 수학여행.
4인 일실(一室)의 침대칸.
배정된 차 칸에 짐을 올려놓기 바쁘게
서로를 쳐다보며 마음 설레이고 있다.
나의 동침자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그 옛날 이랬을 때 우리는 무엇을 했지?
어디서인가 터져 나올 엉뚱한 짓거리를 기대했다.
누구라도 좋고 어떤 우스꽝스런 행태라도 좋았다.
우리는 웃을 준비가 되어있었고
어떤 짓거리이건 즐거움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나도 공범자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4인실에 옹기종기 모인 발들>
졸지에 인솔단장이 된 이영환 선생.
그러나 갑작스런 바뀜이 아니다.
이미 전생부터 내정되어 있은 듯
아니면 주역의 괘가 그렇게 말했는데 우리가 잘못 해석을 했을 뿐이다.
<이영환 단장님>
4인실의 이 단장 칸에 무려 10여명이 밀고 들어와 자축연을 시작한다.
여행은 지금 부터이라는 듯.
우리의 향토 분위기를 띄울 1박스의 여행용
소주를 밀수입한(?) 이선생의 자업자득이다.
이때 또 하나의 화두어가 만들어졌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은 무릇 주경야독(晝/酒輕夜毒,
낮술은 가볍게 저녁술은 독한 것)으로 읽어야한다고.
우리 동양고전연구원들의 해석학적 풀이이다.
그리고 근엄한 한학자 이장우소장의 표정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랬다.
<현벽장성에서 이민용 교수님>
이미 밖은 칠흙같은 어두움이다.
간간히 찻간 불빛으로 비쳐 보이는 찻길주변은
희끗희끗한 잔설이 반사될 뿐, 멀리 마을의 불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다행이 보름달이 따라오며 작은 물 웅덩이며 호수에서 달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옛날 난주에서 돈황,
아니 옥문관이나 가욕관으로 향하는 장건(張騫)이나 현장(玄裝)법사
혹은 이노우에의 상상적 서생은 무엇을 생각하며 이곳을 지났을까?
이런 나의 상상력에 도움을 주려는 듯 침대칸 문짝 하나하나에
옛 사찰과 유적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비단길을 오가던 대상들이 돌에 새긴 그림이 아닐까...>
내 침대 칸의 유적사진은 복원된 나집사(羅什寺)이었다.
내가 이 칸에 머물리라는 것을 예견했던 것일까?
불경의 번역역사는 현장(玄裝, 602-664)에게 이르러
구역(舊譯)과 신역(新譯)의 역사로 구분되고 있지만
초기의 불교경전 번역의 역사를 대변했던 구역(舊譯)의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rajiva, 344 -413)을 기념하는 사찰인 나집사.
언제 창건이 됐을까?
내 불교사 지식 속에는 등재되지 않은 사찰이름이다.
<현벽장성 아래서 만난 현장법사>
현장은 엄연한 명문 출신의 한족(漢族), 그는 천축(인도)에 12년간 머물며 막대한 싼스크릿 불전들을 수집하여 실크로드를 거쳐 당나라로 가져왔다 .
당태종이 번역 장소로 지정한 대자은사(大慈恩寺)의 번경원(飜経院)에 머물며 무려 1347권에 달하는 경전을 번역했다 한다. 거의 번역기계에 가까웠다. 그를 기리는 사찰이 설립된 것은 당연하다.
<옥문관 내부>
그러나 나집은 구자(龜玆), 곧 쿠차(Kucha)인으로 호족(胡族)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던가? 우리의 일정의 최서단 지점인 옥문관을 넘어 천산북로를 따라 하미(伊吾, 高昌 Hami)를 거쳐 툴판(吐魯番, Turfan)을 지나 당도하는 천산북로상의 가장 큰 도시이자 당시의 이 지역의 제일 큰 나라가 구자국이었다. 현장이전의 한문번역 불경들은 거의 이 옥문관을 넘어 거주하던 이민 호족들의 실적이었다. 누가 이들을 대상(隊商)을 끌고 장사에만 몰두한 장사꾼이라고 했는가? 문화의 담지자들이며 문화와 사상의 전파자들이었다.
이 번역자들의 이름은 중국인들에게도 낯설다.
< 명사산에서 낙타행진>
그러나 최초의 한문불전을 번역한 사람은 안세고(安世高)이다. 중국 한족이겠지. 안(安)씨가 성인 3자 이름이 아닌가? 아니다.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Partia, 현재의 이란지방)의 왕족 출신이어서 지방 명을 성으로 붙여 주었을 뿐이다. 세고(世高)는 아마 세상에서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스크릿의 ‘lokkottama’를 의역했을 듯. 그러면 “세상에서 뛰어난 파르티아 출신인 불경 번역자”란 뜻이 된다.
<이른 아침의 가욕관>
축법호(竺法護)는 누구일까? 초기의 중요한 경전을 번역한 불전 번역사에 이름을 남긴 승려이다. 돈황에서 살고 있던 월씨(月支)족 집안 출신이다. 본래 박트리아 지역이 월씨족의 영역이었으나 감숙성 서부로 옮겨와 소월씨족이 되어 대대로 살아온 것이다. 돈황이 그의 현주소이었고 거기 앉아 카슈미르(인도) 지역에서 들어오는 불전들을 거침없이 번역했다. 그의 번역능력은 “手執胡本口宣” 인도원본을 손에 들고 입으로 구술할 정도의 동시 통역이 가능한 거의 천재적 번역기계.
또 있다.
支婁迦讖(지루가참, Lokasema)은 누구일까? 기독교하면 바이블(聖書)를 떠올리듯 불교하면 떠올리는 경전인 반야경(般若経)을 최초로 한역한 사람. 이때의 것을 도행반야경(道行般若経)이라 했고, 짧고 간략하게 번역했다고 해서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이란 이름도 덧붙여 두었다. 이 지역 월씨국 출신의 루가참. 월지국의 (支)婁迦讖이다.
구마라집 때까지의 번역자들의 이름은 이렇게 이상한 이름들이다. 나 더러 당장 호명하라 해도 삽시간에 거의 10여명을 리스트에 올릴 수 있다. 물론 내 능력 과시가 아니라 그렇게 많은 호승번역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 이동하는 버스 뒷칸에서 손흔드시는 이민용 교수님 내외분과 단장님>
이란에서 소그디아, 사마르칸드, 카슈가르(疎勒)를 경유하며 천산북로와 남로를 거쳐 구자국이거나 코탄(Khotan, 于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분포된 이 호족들이 초기 불전 번역의 장본인들인 셈이다..
그 가운데서도 뛰어난 인물이 바로 이 나집! 그런데 그 나집을 추념하는 사찰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다니. 혹 이렇게 떠도는 사연 때문이 아닐까?
구자국 왕녀의 아들로 출중한 자질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어머니와 함께 카슈밀(罽賓)로 옮겨가 아함경을 배운다. 고향인 구자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카슈가르(疏勒)에서 1년간 불교의 이론서들인 아비담(阿鼻曇, Abhidharma)을 배우고 그곳의 왕에게 중용되어 불전강의(轉法輪経)을 강의한다. 그는 불전뿐 아니라 인도의 4 베다(Veda)를 연구하고 음양(陰陽)학 등의 광범위한 지식체계를 갖춘다. 중론(中論)과 백론(百論)등의 대승이론은 물론 확장된 반야경(放光般若経)을 배운다. 그의 명성은 서역 여러 나라에 널리 퍼진다. 이때 중국은 전진(前秦)왕 부견이 팽창하고 있었으며 382.A.D에 여광(呂光)으로 하여금 변경인 구자국과 주변을 공략하고 나집을 사로잡아오라고 명한다. 대단한 신불자(信佛者)였으나 방법은 비불교적. 여하간 부견에게서 우리의 삼국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이는 기록이 남는다. 삼국유사에 전진왕 부견이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하간 나집이 호송되는 도중 전진은 멸망하고 후량(後凉)이 뜬다. 다시 후진(後秦)이 후량을 멸망시키고(401 A.D) 나집은 드디어 장안에 안착했고 후진왕 요흥(姚興)은 그를 국사로 모시며 불교경전들을 번역하게끔 한다.
<돈황의 역사 비교연대표>
현장이 번역하기 이전의 실적으로는 최대의 양의 불전인 74부 384권을 번역했다 한다. 문제는 여광장군의 안내를 받으며 중국으로 향할 때 이 장수는 호의를 베푼답시고 구자국 왕녀를 처로 맞아들이게 한다. 한 술 더 떠서 요흥왕은 그에게 10여인의 기녀를 준다. 그리고 그의 제자는 3천인에 이른다고 기록됐다. 계속되는 기록은 불교의 현실 해석의 탁월한 수사학을 만들고 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연꽃을 취할 뿐 진흙을 취하지 않음과 같다“는 절묘한 해석이다. 나집은 왜 이런 자기 변명이 필요했었던가? 경전속의 청정비구행을 위한 해석상의 안전장치는 왜 필요했던가? 통치자를 위한 유교적 전통을 지탱시킬 정치적 발언이었을까? 그러나 나의 질문은 모두 우문(愚問)에 속한다. 여행 내내 나는 우문만을 제기했다. 그래야 현실속의 현답(賢答)이 돌아올 터이니 말이다.
< 타클라마칸 지도 >
실제로 호족의 풍속과 현지의 불교는 우리가 경전 속에서 이해하는 불교 현장과는 큰 간격이 있었다. 불승이 결혼하는 것이 이상할 것 없는 풍습이었다. 아니 인접의 티벳 불교를 보라. 승려가 결혼을 하건 말건 상관없다. 불도만 터득하면 된다. 일본은 개화를 명목으로 대처승을 발족시켰다. 그래서 우리를 잘못되게 감염시켰다고 우리는 민족주의를 내세운다. 우리는 청정(淸淨)한 비구/비구니의 불교라고. 그러나 정작 오늘 우리의 불교의 현장은 어떤가? 무처(無妻), 대처(帶妻), 은처(隱妻)의 혼성불교가 아닌가. 현장은 항시 온갖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 있다. 돈황은 결코 간단한 지역이 아니다. 타임캡슐 속에 밀폐된 돈황은 온갖 삶의 형태가 압축되어있다. 내가 탄 이 침대차만이 시간을 단축시키는 타임캡슐이 아니다.
아 , 어떻건 내가 12시간 머문 침대칸의 사진은 분명 복원된 나집사 사진이었다. 떠나면서 급히 가방에 넣은 예일대학의 발레리 한센(Valerie Hansen)의 “실크로드:새로 쓴 역사(Silk Road: A New History)”란 책에 나오는 타클라마칸 지도와 돈황의 역사 비교연대표를 들여다보며 타임캡슐 속으로 빠져 들었다.
To be continued......
첫댓글 감사합니다.
대가분들 앞에서 무슨 썰을 풀고 있는지 고추장 멸치 맛에 취해 술 몇잔 축낸 탓으로 돌려야겠습니다.
아... 이 사진이 영희씨한테 있었군요. 옹기종기 모인 발 장면에 들어가면 딱 좋은 사진... 아쉽다. ㅋㅋ
이민용 : 단장님 칸은 사랑채, 모든 이야기와 즐거움이 넘쳐흐르던 곳^^ 근데 고추장멸치에 취하고 술을 안주삼았다니!
다시 만나 그 비법을 전수받았음!! 민용합장
ㅎㅎ 재미있어요~
이민용 : 맹물마시고 취한다는 이야기 들어봤지만 고추장멸치에 취한 사람, 아니 이건 외계인이지요! 어느 별나라일까?
혹 그곳으로 가는 비방은? 아, 모든게 궁금???? 합장_()_
@솔바람 이영환샘 사모님께서 담그신 고추장..멸치에 찍어 ...예술이여요..
멸치가 떨어져 고기(새끼손가락)로 찍어 먹었어요.
이런 중계방송은 현장이 중요한디....
내 고기 사용하신 분도 계셔서리...
@솔바람 ㅋㅋ 열차안에서 고추장멸치라? 상상만 해도 즐겁네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