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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미술대회 입선을 한 소년은 화가를 꿈꿨다. 그로부터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미친듯이 붓질을 했다.그의 나이 52살에서야 인사동에서 첫 초대전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의 그림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40년의 세월을 세상과 그리고 자신과 싸워 이겨내야 했기때문이다. 그가 바로 장창익(59)화백이다. 장 화백은 최근 GS칼텍스 예울마루에서 지역 작가 최초로 초대전을 열고 있다. 총 83점을 통해 8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그의 작품 세계를 엿 볼 수 있다.여수를 상징하는 '물꽃바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오는 2월8일까지 진행된다.작가와의 대화는 오는 31일(토) 예울마루 제2 전시실에서 오후 2시부터 90분간 열릴 예정이다.19일 여수시 율촌면 상봉리에 위치한 작업실을 찾아 장 화백의 삶과 예술에 대해 들어봤다.<편집자 주>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존경하는 강종래,강종열 선배님들이 저에게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예울마루측에 감사한다.큰 틀에서보면 대형 전시를 처음으로 했다는 내 개인적인 영광에 앞서 지역 문화예술 활성화와 창작 지원에 첫 테이프를 끊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전시장은 워낙 전시 공간이 넓어 작가로서도 부담이 상당하다. 평소 붓질밖에 할 줄 아는게 없어 열심히 그린 탓에 대형작품 83점을 전시하게 됐다.
-그림만 그리다 보니까 너무 힘들어 90년도 후반 거문도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젊은 친구들이 물꽃 바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게 귀에 확 들어왔다. 바람에 출렁이는 파도를 말하는 데 흔히 햇살 좋은 날 여수 바다 어디서나 볼 수 있지 않는가. 여수 사람이면 이 물꽃을 보면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여수를 상징하는 한 단어가 물꽃 바다라고 생각한다.
-그림만 그리다보니까 너무 힘들어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일주일 간게 횟수로 4년 살았다. 여수말로 뱃놈이 됐다. 군 시절 지뢰를 밟아 한 쪽 다리와 눈을 잃은 나를 거문도에서는 가짜 뱃놈이라 그랬다. 사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 민중미술 하던 사람들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었다. 내 나름대로 탈출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것을 찾아 보자는 시도를 하면서 전통적인 민화, 단청, 탱화에 주목하고 작품으로 표현했다. 거문도 바다를 보면서 나 자신이 정화됐다. 가슴에 있던 분노와 사회적 현실이 뒤엉켜 있던 것이 정화됐다. 거문도는 죽으러 왔다가 살아나가는 곳이 하지 않는가. 누구나 거문도에 한달만 살면 시인이된다. 4년의 거문도 생활은 내 미술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 99년도에 여수에 나와 '장지'라는 전통 종이를 접하면서 수묵화를 버리고 채색화를 시작하게 됐다. 그때부터 야생화 꽃이 작품의 주를 이뤘다.
-생각해보면 맨날 나를 그렸다는 생각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내가 바라보는 역사 를 그렸다.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내가 주체라는 것이다.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표현했다. 투쟁 현장을 그리면서도 내 안의 분노, 저항 심리를 그렸다. 꽃을 그리는데도 사람이 관리하지 않은 야생화를 그린다. 내가 그렇다. 들꽃 그림은 잎이 하나가 없거나 벌레가 먹은 완성되지 않은 것을 그린다. 왜? 나 스스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꽃이 없다. '민들레 영토'로 잘 알려진 지승용 목사님은 제 작품을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그렸다"고 한다.
오늘의 장 화백이 있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 있다면. -남농 선생님에게 배웠다. 사군자와 기초 산수화를 목포로 가서 하숙하면서 배웠다. 남농 선생님도 작품 활동하시다가 동상에 걸려 다리 하나가 의족인데 다리 하나가 없는 나에게 동병상련을 느끼신거 같다. 처음에 거절하시다가 2번째에 받아주셨는데 특별히 이뻐해 주셨다. 지금 제 작품 의 소재가 매난국죽을 채색화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인데 그 뿌리는 남농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다. 전업 작가의 시작은 여수 동초등학교 4학년때 미술대회에서 입선한 게 계기가됐다. 동초등학교 화가가 꿈을 가졌다.그후 독학으로 학창시절 서양화를 공부했다, 혼자하니까 너무 힘들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군 제대 후에 알파약국 큰 형님이 동양화를 해보라고 권유해 남농 선생님을 소개 시켜줬다. 82년 추계에술대학 동양화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여기서 지금 제주서 활동하고 계시는 이왈종 교수님을 만나 사사받았다. 또 한 분을 꼽으라면 제 자신의 롤모델로 생각하는 분은 채색화의 대가이신 고 박생광 화백이다. -제 나이 52살 그러니까 지난 2008년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초대전을 갖게됐다. 평생 미친듯이 그림을 그렸지만 작품이 익은 다음에 해야겠다는 생각에 못하게 됐다. 감개무량했다. 믿기지 않아 아내랑 꼬집어보기도 했다. 돈 하나 없던 시절이였다. 후배 박치호 작가랑 지인들이 십시일반 걷어 전시 팜플렛을 만들어 줬다. 그런데 무명 작가의 작품이 대박이 난 거 아닌가. 총 30점에서 15점이 팔렸다. 이로인해 인사동에서 주목하는 작가가 됐고, 미술계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난생 처음으로 만져보는 작품 값으로 가장 사고 싶었던 것이 카메라였다. 그래서 캐논 5D를 바로 샀다.
특별히 아끼는 작품이 있다면. -사실 몇 점 있는데 이번 전시에 보여주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진주 기생 산홍이라고 있는데 을사오적 중 한 명이 숙청을 들라고 하자 거절한 여자다. 구한 말 기생 사진 자료를 찾아 300호 정도로 그렸다. 또 하나는 80년대 민주화항쟁 시절 전경 방패 앞에 서 있는 꼬마 아이를 그린 것 등이 있다. 고 손상기 화가와도 인연이 두터웠다고 들었다. -상기 형 작품 전시때 나오는 사진을 내가 찍은 것이다. 상기 형이 서울 아현동에 살때 그린 작품에 등장하는 목발 짚은 사람이 바로 나다. 78년 군에서 지뢰 사고로 한 쪽 다리와 왼쪽 눈을 실명했다. 이런 나를 곱추였던 상기 형이 그린 것이다. 상기 형은 정말 그림에 미친 사람이다. 그리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었다. 곱추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 그림때문에 이겨낸 분이다. 예술적인 감각이 예리하고 탁월한 분인데 한 10년만 더 사셨다면 더 좋은 작품을 많이 그렸을텐데 안타깝다. 먹고 살면서 그림 그리는 게 정말 엄청 힘들다. 생활고 때문에 나처럼 그림만 그리고 살아라고 후배들에게 말 못한다. 먹고 사는 것 다 제치고 그림만 그려라고 못한다. 그래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시는 강종래, 강종열 선배분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
기사원문: http://www.yeosu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79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