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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채플 강연 원고) 2022. 9. 28(수) 김근수
예수 삶의 변화(마가 1,1)
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수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마가복음 1장 1절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전체 내용을 요약한 표현 같습니다. 소유격 단어‘예수 그리수도의’ 그리스어 소유격 단어는 주어로 번역할 수 있고 목적어로도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수도는 복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고, ‘예수 그리수도가 전하는 복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둘 다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은 예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음을 선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 삶에서 커다란 변화가 여러 차례 있었고, 그런 변화는 예수가 커다란 위기를 겪은 후에 생겼다는 사실을 저는 오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는 자기 삶에서 어떤 위기를 경험했고, 위기에서 어떤 변화를 했을까요?
30세 넘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예수는 하루도 맘 편히 잠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유다인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두 질문 앞에 예수는 많이 고뇌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는 오랜 침묵과 은둔을 떨치고, 생애 말년에야 대중 앞에 비로소 나타났습니다. 삶의 첫 번째 전환을 앞두고, 예수 심정은 어땠을까요? 제가 상상으로 편지를 한번 써보았습니다.
<사과문>
존경하는 유다인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나자렛 산골에 사는 예수라고 합니다. 그동안 목수로 일하면서 평범하게 살아왔습니다. 성경 공부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조용히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우리 유다인과 선물하신 우리 땅을 식민지로 장악한 로마군대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용기가 부족했고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생각은 많았고, 행동은 적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제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과거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이제 새 길을 걸으려 합니다. 나자렛 예수 올림.
1. 예수 삶의 첫 번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소시민의 안락한 삶을 떨치고 공적 인간 예수로서 고난의 길을 자처합니다. 예수는 가족을 떠나고, 자발적으로 실업자가 됩니다. 가족을 떠났다는 말은 경제적으로 가족 부양 책임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유다 사회에서 크게 비난받을 처신입니다.
2. 예수 삶의 두 번째 변화입니다. 예수는 단독으로 자기 깃발을 걸었을까요? 아니면 스승이나 다른 그룹을 찾았을까요? 예수는 어느 길을 택했을까요? 당시 유다교에 여러 그룹이 있었습니다. 귀족 출신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예수는 지배층 사두가이파에 속할 자격이 아예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중산층 중심의 바리사이파를 예수는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은둔 생활을 하며 조용히 집단 생활을 하는 에세네파도 예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로마군대에 무력으로 저항한 젤로데파가 예수 당시 실제로 있었는지 성서학자들은 여전히 토론하고 있습니다. 젤로데파가 있었든지 없었든지, 로마군대에 무력으로 투쟁한 유다인들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다인의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 심판이 곧 다가온다고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는 감동받았습니다. 예수는 먼 길을 걸어 세례자 요한을 찾고 그 제자가 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 활동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습니다. 여성, 노인, 어린이들은 며칠씩 걸어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기는 어려웠습니다. 당시 유다인 인구의 90%가 넘는 가난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찾아 오가는데 드는 돈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찾아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세례자 요한과 달리,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경고한 두려운 심판보다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예수는 더 강조하고도 싶었습니다.
3. 조용한 삶을 떨쳐버리고 세상에 나타난 예수,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된 예수에 이어, 예수 삶에서 세 번째 전환이 왔습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활동했던 요르단 강가를 떠나 고향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사람들과 함께 밥 먹고,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를 결국 떠나버립니다. 그렇게 암시하는 요한복음 6장 66절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계속 토론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가난한 사람들과 예수의 접촉은 갈릴리에서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를 버리고 떠났을까요. 예수는 자신의 공식 활동에서 처음으로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예수 행동과 말씀에 무엇인가 모자란 데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좋은 사람이긴 한데, 이스라엘 민족이 희망을 걸 수 있는 인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로마군대 식민지에서 조국을 해방하려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예수가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구세주라고 보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갈릴리 활동에서 예수는 절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한 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행동과 말씀으로 보여준 예수는 환영받았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희망이요 구세주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4. 예수 삶의 네 번째 전환입니다. 예수는 갈릴리 활동을 마감하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기로 결단합니다. 갈릴리 예수 활동에서 주인공이 둘 있었습니다.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주인공은 예수와 제자들로 바뀝니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민중노선을 포기하고, 소수의 제자들을 집중하여 가르치는 엘리트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갈릴리 예수 활동에서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주제는 제자 교육으로 바뀝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죽으러 간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권력을 욕심내지 말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합니다.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신다니, 이게 왠 말입니까. 예수가 잘 되면, 한 자리 얻을 것이라 기대했던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옷깃을 잡고 몸싸움에 말싸움까지 합니다. 예수 생각과 제자들의 욕심이 충돌하는 위기의 시간입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펼친 제자교육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5. 예수 삶의 다섯 번째 전환입니다. 예수는 갈릴리 활동에서도 위기를 겪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갈릴리에서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 예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스승 예수와 노선 투쟁을 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제자들을 설득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생애 마지막 1주일을 보냅니다. 주인공은 둘입니다. 예수와 반대자들입니다.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조연배우입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여러 반대자들과 충돌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먼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수동적으로 고난에 부닥친 것은 아니고, 적극적으로 반대자들에게 저항했습니다. 예수는 일부러, 의도적으로, 반대자들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경제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는 성전 항쟁을 결행합니다. 제자들과 미리 모의한 것 같지는 않고, 제자들이 성전항쟁에 동참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유다 권력층에 저항했던 이 난동은 로마군대에게 정치적으로 위험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유다교 지배층과 식민지 지배세력 로마군대 모두에게 예수는 위험한 인물로 인정됩니다.
예수는 체포되고 심문받고 로마군대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만일 예수가 성전항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예수는 체포되거나 처형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정치범으로서 노예나 반란군에게 해당하는 십자가 처형을 당합니다. 예수 갈릴리 활동은 유다인 권력층과 로마 군대에게 직접적으로 커다란 위협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갈릴리 활동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집중되었고, 억압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행동은 아직 아니었습니다. 예수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 예수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 세력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예루살렘 활동은 유다인 권력층과 로마 군대에게 직접적으로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억압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6.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 삶을 위기와 전환이라는 구도로 지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 삶을 어떻게 소개하고 싶었을까요?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공식 활동을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한다면, 크게 3부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 예루살렘에서 예수입니다. 좀더 알기 쉽게, 2부작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 예루살렘에서 예수입니다. 오늘 저는 갈릴리 예수와 예루살렘 예수를 여러 모로 대조하고 비교하고 싶습니다.
갈릴리에서 주연배우는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는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주연배우는 예수와 반대자들입니다.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고 싸웁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예수는 정확히 알았습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억압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고 싸웠습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 억압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억압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이 더 위험하게 생각될까요?
예수는 위기에서 변화를 찾은 사람입니다. 예수 생각은 계속 바뀌고 발전했습니다. 예수는 유다교 전통에 있던 하나님 나라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삼았습니다. 유다교 전통에 있었던 메시아 사상을 받아들이고 또 새롭게 확장했습니다. 메시아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억압하는 사람들과 싸우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새로운 메시아 사상은 예수가 인류 역사에 선사한 놀라운 생각이요 선물입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 삶은 두 단어로 요약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입니다. 갈릴리 하나님 나라는 예루살렘 십자가를 해설합니다. 예루살렘 십자가는 갈릴리 하나님 나라를 해설합니다. 십자가 없는 하나님 나라만으로는 예수 삶을 충분히 해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 없는 십자가만으로는 예수 삶을 충분히 해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는 서로를 연결하고 해석하여 상승시킵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강조했다면, 마가복음 저자는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를 처음으로 잘 연결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구약성서와도 잘 연결됩니다. 구약성서 창세기는 천지창조 사건을 6일 시간 구도로 설정합니다. 신약성서 마가복음은 예수 갈릴리 등장에서 예루살렘 도착까지 예수 활동을 6주간으로, 예루살렘 활동을 1주간으로 설정합니다. 예수 갈릴리 활동은 천지창조 사건과 호응합니다. 예수 예루살렘 활동은 천지창조 역사를 최종적으로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의 신학 구조, 즉 패러다임이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은 역사 다큐가 아니라 신학 다큐라고 저는 표현하고 싶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의 새로운 메시아 사상, 구약성서에 없는 예수만의 메시아 사상을 인류에게 처음 소개한 위대한 신학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가복음에 중요한 장소가 다섯 군데 있습니다. 광야, 갈릴리 호수, 예루살렘 가는 길, 예루살렘 성전, 빈 무덤입니다. 광야와 빈 무덤이 호응하고, 갈릴리 호수와 예루살렘 성전이 호응합니다. 광야에서 돈 권력 명예라는 세 가지 유혹이 있었고, 빈 무덤에 죽음과 절망이라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 이쪽에서 유다인을 만나고, 갈릴리 호수 저쪽에서 유다인 아닌 사람들을 만납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낮에 반대자들과 논쟁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예수는 밤에는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지냅니다. 마가복음 다섯 장소의 중심에, 양파 한가운데처럼, 예루살렘 가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예수를 따라 걷는 길입니다.
존경하는 연세대 동문 여러분, 예수와 함께 걷는 길, 예수를 따라 걷는 길을, 형제자매들 손에 손 잡고, 함께 걷고 싶지 않으십니까?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과거를 반성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편들려 세상에 나타난 예수를, 좀더 알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극 정성으로 잘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예수, 그러나 평생 단 한번도 가난한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예수를, 좀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몸소 선택한 제자들에게 수없이 배신 당하고도,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으로 감싸고 위로한 예수를, 좀더 알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억압하는 사람들과 싸우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예수를, 한 평생 우리 삶의 스승으로, 동지로, 친구로, 대화 상대로 생각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를 받아들이기 주저하거나 예수와는 다르게 살고 싶은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남미 혁명가 체 게바라는 스물 몇 살 때 어머님께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는 예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도록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20대 한국 청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정치고 종교고 나발이고, 나는 관심 없습니다. 이웃사랑이니 십자가니 책임감이니 쓸데없는 것들에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조금만 비굴하게 산다면,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내 멋대로 즐기고 살다가, 병원 6인실 아닌 1인실에서 나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제게도 삶의 변화가 없지 않았습니다. 신약 성서를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방법은 8년간 독일에서 익혔지만, 무엇인가 빈 곳을 실감했습니다. 백인 중산층 성서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알아가는데 그치지 않고, 제3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관점을 느끼고 배워서, 성서를 좀더 깊이 알아가고 싶었습니다. 제1세계 성서신학과 제3세계 해방신학을 연결하여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을 떠나 남미 엘살바도르로 갔습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 농민들, 20명이 넘는 가톨릭 신부들, 로메로 대주교가 군사정권에 살해된 곳입니다. 3년후 귀국할 때, 제게 해방신학을 가르쳐주신 혼 소브리노 스승께서 편지에 제게 이렇게 썼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세요.”
존경하는 동문 여러분께 저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세요.” 우리 연세대학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않는 동문들이 많이 나오기를 빕니다. “참된 지식인은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사람”이라고 브라질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말했습니다. 우리 연세대학교에서 참된 지식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 삶의 여러 위기와 변화를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결국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할 것인가? 나는 억압하는 사람들과 싸울 것인가?” 못들은 체 할 수도 있고, 예수처럼 변화해서 언젠가 응답하고 나설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여러 번 위기를 겪었고, 여러 번 삶의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위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 이끌어주시도록, 하나님 뜻에 맞는 삶의 전환이 우리에게 있도록,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긴 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