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19-11-11 03:00
유럽 단풍이 노랗기만 한 이유[서광원의 자연과 삶]〈11〉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가을은 어떤 색일까? 은행나무에겐 노랗고 소나무에게는 파랗고, 대부분의 나무들에겐 울긋불긋하다. 산에 있는 나무들은 대체로 울긋불긋한 색으로 온 산을 불태우며 가을을 겨울로 이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럽의 단풍은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위도와 계절이 비슷한데도 세상을 불태우기보다 주로 노랗게 만든다. 북미 대륙의 단풍도 울긋불긋한데 유럽만 다르다. 왜 그럴까? 알다시피 단풍 색깔은 겨울이 오는 걸 감지한 나무가 잎으로 보내는 영양분과 수분을 차단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안토시아닌과 카로티노이드라는 두 색소가 잎 속에 있는데 안토시아닌이 많으면 붉은색이 나타나고, 카로티노이드가 많으면 노란색이 된다. 그러니까 유럽의 나무에는 대체로 안토시아닌이 없다는 얘기다.
2009년 핀란드 쿠오피오대 연구에 따르면 안토시아닌은 3500만 년 전쯤 나무들이 해충을 퇴치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자연에서 붉은색은 독성이 있다는 신호인 데다 이런 물질을 만들면 영양분이 적어져 진딧물 같은 녀석들에게 썩 좋은 먹잇감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울긋불긋한 단풍이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진딧물을 대상으로 실험해 보니 녀석들은 붉은색보다 노란색 나무를 6배나 더 선호했다(영국 임피리얼대 연구). 왜 유럽 나무들은 이렇게 중요한 안토시아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잊을 만하면 찾아온 빙하기 때문이었다. 온 세상을 얼음으로 만들어버리는 빙하기가 왔을 때 나무들은 씨앗을 이용해 따뜻한 남쪽 나라로 피신했다. 유럽 나무들 역시 그렇게 거대한 알프스산맥을 넘었는데 불행하게도(?) 곤충들은 그렇지 못했다. 덕분에 빙하기가 지난 후 다시 북상했을 때 해충들이 사라져 버려 안토시아닌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가을을 노랗게 물들이는 ‘전통’을 지속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북미의 나무들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해충들과 싸움을 하느라 해마다 가을을 붉게 물들여 왔고 말이다.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단풍의 색깔을 결정짓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의 얼굴과 행동에 어떤 색깔이 나타난다. 올 한 해 동안 이룬 성과가 누군가에게는 밝은 표정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두운 표정으로 나타난다. 삶의 가을을 맞은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젊음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있는 색깔이 그의 온몸에 배어 있다. 나무가 잎으로 색깔을 표현한다면, 우리는 얼굴과 행동으로,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이나 작품 같은 것으로 그렇게 한다. 어떤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지가 그에 맞는 색깔이 되어 나타난다. 황동규 시인이 시집 ‘사는 기쁨’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때깔로 단풍 들거나 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그렇다. 사람은 자신의 때깔로 단풍이 들어야 아름답다. 오늘 우리가 보내는 하루하루가 우리 자신의 때깔을 만든다. 가을이 깊어간다. 나는 어떤 때깔을 만들고 있을까?
* 오늘의 묵상 (221009)
오늘 복음 이야기는 치유자이신 예수님보다 그분께 은혜를 입은 나병 환자 열 사람의 행동을 더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기에, 다른 이들과 교류 없이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였습니다(민수 5,2-3; 레위 13,45-46 참조). 오늘 복음 속 나병 환자 열 사람도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그저 자비를 청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와 다르게 그들을 바로 치유하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병이 다 나았음을 사제에게 공식적으로 확인받는 절차와 관련됩니다. 그들이 그분 말씀대로 떠났다는 것은 그분께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며, 사제에게 가는 동안 열 명 모두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치유의 수혜자는 열 명이었지만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이는 단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머지 아홉 명의 유다인 가운데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명령을 잘 따랐을 뿐이라고 이해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셨고, 그들은 사제들에게 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이유일까요? 그들은 병이 나아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빨리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에 합류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치유되었을 때, 그들에게 예수님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입니까? 사실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자비로 가득합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느 것 하나 지금 있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에 인색한 듯합니다. 크든 작든,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인천가톨릭대신학대교수)
* 어떻게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갔냐고요? (아침공감편지 230223)
어떻게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갔냐고요?
뭐 간단합니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올라갔지요.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이룰 때까지 합니다.
안된다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달리합니다.
방법을 달리해도 안 될 때는 그 원인을 분석합니다.
분석해도 안 될 때는 연구합니다.
이쯤 되면 운명이 손을 들어주기 시작합니다.
-1953년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