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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역사가들은 삼국 통일에 대한 아쉬움을 말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통일될 때에 통일신라가 아니라 고구려 중심으로 통일이 되었다면 우리 민족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합니다. 통일 신라는 3국을 통일했지만 결국은 고구려의 지역을 다 중국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다윗은 남쪽과 북쪽을 아울려는 통일 왕국을 세웁니다. 이전 사울 때만 해도 이스라엘의 일부인 북쪽을 다스렸습니다. 사울 왕이 죽고 나서 다윗이 통일왕국을 이루어 내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통일 왕이 되고나서 먼저 한 일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말씀에 나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이전의 왕가의 자손이 살아있는지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아직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왕조가 바뀌면 왕조를 확실하게 세우기 위해서 이전의 왕가를 완전히 멸절 시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적대관계에 있던 왕이 죽고 새로운 왕가가 성립되었을 때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미래의 역모의 씨앗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자손을 찾아 므비보셋을 데려오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를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무엇 때문입니까?
다윗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떠했을 지 상상해 보십시오.
‘아, 이제 나는 죽었구나.’
얼마나 두려운 마음으로 다윗에게로 나아갔겠습니까? 그런데 므비보셋이 다윗 왕 앞에 나아왔을 때에 다윗은 뜻밖에도 환대해 주었습니다.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의 땅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왕궁에 거하면서 왕자들과 함께 왕의 식탁에서 먹을 수 있는 특권을 베풀어주었습니다(7).
이것을 정리해 보면
(1) 므비보셋은 죽음에서 생명을 건진 것입니다.
(2) 두려움에 떨었는데 ‘무서워말라’고 하면서 평화를 준 것입니다.
(3) 빈털털이로 나그네처럼 살아야 하는데 사울의 기업을 물러받았습니다.
(4) 왕의 식탁에서 항상 먹으니 놀라운 (왕자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보를 두고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참으로 교묘하게 사울 왕가를 짓밟았다고 주장합니다. 사울 왕가를 다시 세우자는 저항세력에 대한 불씨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왕궁에 인질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백성들에게는 관대하게 보이려는 탕평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베푼 것은 계산된 정치적인 수완이기나 탕평책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므비보셋을 향한 자비였습니다.
우리는 동양 문화권 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비’하면 대개 부처님의 마음을 떠올립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시고 인자하신 모습을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불교에서는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예수님을 말할 때에 ‘자비로우신 예수님’이라고 부릅니다. 자비는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한 용어입니다. 특별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다섯 번째가 바로 ‘자비’입니다.
신약성경의 헬라어에서는 자비를 ‘크레스토테스’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는 ‘헤세드’(은총, 은혜)로 나옵니다. 이 단어는 신약의 ‘아가페’라는 단어와 상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어성경에서는 ‘kindness' 'gentleness'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식으로 해석하자면 ‘친절’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윗왕이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말은 친절을 베풀었다. 은혜를 베풀었다. 아가페적인 사랑을 했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으로 하여금 무엇이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했겠습니까? 이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해 봅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자비를 베풀 수 있게 하겠습니까?”
1. 첫째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이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 혹은 자비를 경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여기서 다윗 왕은 자기 자신의 은총을 베풀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베풀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총”를 베풀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은총’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실성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상대가 저주를 받아 마땅하지만 그를 불쌍히 여겨 저주 대신에 오히려 선대하고 친절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 자비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한 두 번은 즐거움으로 베풀 수 있습니다. 나보다 못한 것 같고, 불쌍하게 보이므로 한 두 번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일을 되풀이하게 되면 재미가 없어지고, 시들해집니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반응이나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만 하는 것 같고, 주변 사람은 냉담하게 보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계속적으로 자비를 베풀기는 불가능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어떤 말하거나 봉사를 할 때에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말이나 행동을 할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과 힘을 공급받아서 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에 내가 먼저 빠져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8에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것은 나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선물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앞 절 7절에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7)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고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체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는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시골 베들레헴 골짜기에 근거를 둔 이름없는 이새의 아들입니다. 그것도 여덟째 별 볼일 없는, 아버지로부터도 별 관심을 받지 못하던 무명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 그이기에 블레셋의 위대한 장군 골리앗과 싸울 때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서 나아가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이후에 사울 왕의 시기로 인해서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극한적인 어려움도 만나기도 했지만 때마다 피할 길을 주시고, 주변에 사람을 붙여 주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임을 깨닫았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런 은총을 받은 경험을 누린 자이기에 므비보셋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기를 소원했습니다.
다윗의 전 생애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건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무엘하 11장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신하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탄로 날 것을 두려워서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도록 만드는 살인죄를 범합니다.
결국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죄악을 지적했을 때에 다윗은 자신의 죄를 토해내고 용서를 받고자 깊은 참회를 합니다. 그 모습을 시편 51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1)
다윗은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서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자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자비의 중요성을 알았고, 나누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언제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 십자가 앞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주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젖어보십시오.
어디에서 이런 하나님의 자비가 옵니까? 어디서 옵니까? ‘주의 자비가’를 불러보겠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성령이 임할 때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역사할 때입니다. 주의 자비에 젖어 우리도 자비의 사람으로 자비를 베풀게 될 것입니다. 아멘
2. 둘째로, 누가 자비를 베풀며 살겠습니까? 빚진 자 의식이 있는 자가 자비를 베풉니다.
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1)
여기서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푼다는 말이 있습니다.
7절에도 다윗이 므비보셋을 만나자 말자 말합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으로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푸리라”(7)
다윗과 사울 왕의 관계는 원수 관계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 질투해서 집요하게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은 절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 사울이 비록 왕으로 있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장차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믿음으로 알았습니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생활을 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자신이 왕자로써 다음 정권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수인 친구 다윗을 왕으로 대우해야 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친구 다윗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무엘상 20장에 보면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왕이 친구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지, 살리려고 하는지 상황을 판단해서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판단해서 어떻게 하든지 편안히 가게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합니다(13).
그러면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부탁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자손을 선대해서 끊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14-15). 이렇게 다윗과 요나단은 언약을 맺게 됩니다. 그때에 다윗은 요나단의 배려로 사울 왕의 칼을 피하여 도망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의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후에 다윗은 왕이 되고나서 요나단이 자신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잊지 않고 요나단과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은혜의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아들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빚진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빚진 자로 살아갑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요. 둘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빚진 자로 삽니다.
먼저,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한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의 댓가를 지불토록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백 때문에 어떻게 말합니까?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로다”
자신을 복음의 빚진 자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셨는데, 아니 자기 자신을 내어놓았는데, 거저 받은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빚진 자 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금 같은 복음을 우리도 받았습니다. 이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도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빚진 자의 심정으로 내 주변 사람에게 복음의 빚진 자로 그들을 우리가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아침에 무엇을 드셨습니까? 빵을 드셨습니까? 밥을 드셨습니까? 우리가 먹은 음식은 하나 같이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의해서 생산되었습니다. 그들의 땀과 수고로 인하여 생산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흘린 땀의 대가로 먹고 살며 생명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대한다면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나와 무관한 사람은 없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나아가면 우리의 대인관계는 훨씬 성숙해지고, 넓어지고, 넉넉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왕의 은총을 입은 므비보셋이 어떤 사람입니까?
(1) 그의 이름의 뜻은 “부끄러운 자”라는 의미입니다.
(2) 그는 왕좌를 위협할 수 있는 암적 존재, 원수였습니다.
(3) 그는 ‘풀이 없는 곳’ 즉 황무지라는 뜻을 가진 로드발에서 살았습니다(4).
(4) 그는 두 다리 모두 절뚝이는 장애인입니다(13).
그렇지만 왕의 자비를 받으니 “항상 왕의 상에서” 왕자와 같이 대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므비보셋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자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원수로, 영적인 장애인으로, 황무지와 같은 인생을 부끄럽게 허덕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우리를 택하여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부끄러운 영적인 장애인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그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총에 감격하여 이 땅에 부끄러운 영적인 장애인으로, 황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므비보셋을 찾아가서 만나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의, 우리의 므비보셋에게 우리가 받은 바 하나님의 자비를 빚진 자된 심정으로 나누어 봅시다. 그들에게 우리가 값없이 받은 복음으로 되갚아주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충만하여 자비의 샘이 되고, 흘러 자비의 강물으로 흘러가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자비하신 예수여 395 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