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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3월 9일 목요일
[(백)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배척당하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바꾸셨다고 깨우쳐 준다(제1독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평화를 기원하시며 당신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보여 주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26
그 무렵 치유받은 불구자가 11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12 베드로는 백성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20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21 물론 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
22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야 한다.
23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
24 그리고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 말씀을 전한 모든 예언자도
지금의 이때를 예고하였습니다.
25 여러분은 그 예언자들의 자손이고, 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희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어 주신 계약의 자손입니다.
2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부활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현실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희망이 되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의혹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환상처럼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직접 만져 보라고 하셨으며, 심지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도 풀이해 주셨습니다. 곧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신비로우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존을 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본다’라는 말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곧 단순히 눈으로 보는 단계, 주의 깊게 바라보는 단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뜻까지 깨닫는 단계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놀라서 보고, 이어서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마침내 믿음으로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 돌아봅시다. 부활은 단순히 과거의 기적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내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라고 하셨듯이 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증인으로서 우리가 전할 것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십자가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죄의 용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우리 삶 안에서 열매 맺어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때, 부활은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 앞에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감사와 찬미, 경탄과 기쁨의 마음으로 부활을 경축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의심과 의혹 속에서 끝까지 그분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까지도 그랬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안쓰러웠던 부활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의 진실성과 참됨을 확증시키기 위해 보여주신 노력은 눈물겹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 지셨을 때 받으셨던 깊은 상흔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먹을 것을 청하셔서 제자들 보는 앞에서 맛있게 드십니다.
팔뚝만한 물고기를 막 잡아 올렸을 때, 싱싱한 상태에서 즉석 회를 떠먹는 것도 맛있지만, 소금 간을 해서 구워 먹는 맛도 일품입니다. 재수가 좋던 날, 해변가에 둘러앉아 젊은 수사님들에게 구워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방법도 아주 간단합니다. 우선 내장을 제거하고, 비늘을 쳐낸 다음, 몸통 부위에다 비스듬하게 칼집을 냅니다. 칼집 사이에 굵은 소금을 뿌린 다음, 숯불에 천천히 구우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른 양념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노릇노릇하게 익힌 다음 접시에 담으면, 임금님 수라상 올라가던 요리 저리가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큼지막한 우럭 소금구이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 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 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 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성경을 읽어야 진리에 도달한다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24,45) 부활하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팔일 축제의 목요일을 지내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먼저 만났기 때문에 성경이 이해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성경 강의를 하다 보면 많이 항의를 받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여전히 가톨릭 안에서도 성경을 공부해야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여깁니다. 저는 성경 연구는 개신교나 사이비처럼 잘못된 해석으로 교회가 갈라지는 원인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성체와 같습니다. 우리가 현미경으로 성체를 분석한다고 해서 그 안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성체는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만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입니다. 오늘은 이 '인식의 순서'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먼저 만나고 그분이 마음을 열어주어 성경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이 재밌어집니다.
우리는 기록이나 글을 연구하는 자아가 어떻게 실제 인격을 밀어내는지, 그 비극적인 지적 자폐의 사례를 보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기 드 모파상의 일화에는 이와 유사한 인간의 어리석음이 묘사됩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수만 장의 편지와 일기를 연구하며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필체, 문체, 자주 쓰는 단어의 빈도수까지 분석하여 『내 아버지의 모든 것』이라는 완벽한 평전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우주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전문가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안으려 했습니다. "아들아, 보고 싶었다! 한 번만 안아보자!"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거칠게 밀쳐냈습니다. "당신은 내 연구 결과와 다릅니다. 내 책에 따르면 아버지는 이런 투박한 말투를 쓰지 않고, 이런 낡은 옷을 입지도 않으십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일 수 없습니다. 가짜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랬습니다. 그들은 성경이라는 기록은 달달 외웠지만, 정작 그 성경을 뚫고 살아나신 당사자가 나타나 안아주려 하자 "당신은 우리 율법 해석과 다르다"라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실체를 만나는 것보다 자기가 분석한 지식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젠 더 심각하게 성경을 연구할수록 왜 더 우상숭배자가 되기 쉬운지 하나의 예도 들어드리겠습니다. 20세기 초,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실체를 찾겠다며 이른바 '역사적 예수 탐구'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배제하고 오직 과학적 연구로만 성경을 분석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위대한 사상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그의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 (1906)에서 이 연구자들을 향해 통렬한 일침을 가했습니다. "수많은 학자가 성경이라는 깊은 우물 속에서 예수의 진짜 얼굴을 찾으려 들여다보았지만, 결국 그들이 본 것은 우물 바닥에 비친 '자기 자신의 얼굴'뿐이었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없는 연구는 결국 '내가 믿고 싶은 예수', '내 입맛에 맞는 하느님'이라는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자기를 신격화하는 사이비 교주가 되거나, 자기 정치적 성향에 맞게 성경을 가위질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거세된 연구는 결국 '자기 숭배'로 귀결될 뿐입니다. 자기 숭배가 우상숭배의 원형입니다.
이제 올바른 성경 읽기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당사자를 인격적으로 조우했을 때 죽은 문자가 어떻게 생명으로 부활하는지에 대한 실화입니다.
우리는 헬렌 켈러가 펌프가에서 'WATER'라는 단어를 깨달은 순간을 잘 압니다. 하지만 헬렌은 이후 '사랑(LOVE)'이라는 추상적인 단어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의 손바닥에 끊임없이 'L-O-V-E'라고 써주었지만, 헬렌에게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진동이었습니다. 헬렌은 "꽃의 향기가 사랑인가요? 태양의 온기가 사랑인가요?"라고 물으며 답답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을 자기 품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겨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헬렌의 손에 "I love Helen(나는 헬렌을 사랑한단다)"이라고 썼습니다. 헬렌은 훗날 자서전 『내가 살아온 이야기』 (1903)에서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선생님이 나를 가까이 끌어당겨 주셨을 때, 저는 비로소 그동안 읽었던 '사랑'에 관한 모든 단어와 시적 표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순간에 깨달았습니다. 그날의 포옹은 제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게 만든 결정적인 열쇠였습니다."
헬렌은 '사랑'에 관한 책을 백 권 읽어서가 아니라, 자기를 안아준 선생님의 인격(만남)을 체험했기에 비로소 종이 위의 글자들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살아있는 현존이라는 품에 안겨보지 못한 이에게 성경은 따분한 언어 유희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포옹을 느끼는 순간, 성경의 모든 구절은 나를 향한 피 섞인 연서로 부활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해 줄 수 있는 성령을 주시는 분께 가야 합니다. 성령은 교회에 내렸습니다. 교회에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가 쓰인 책이 교리서입니다. 교리서는 이미 성경 해설서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는 성경 읽기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그는 높은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이사야서를 읽으며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필립보가 다가가 묻습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내가 나랏일 하는 사람인데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냐"며 무시했겠지만, 그는 겸손하게 답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8,31)
그는 필립보에게 주님의 마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글자가 가리키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고집하지 않고 교회의 가르침(해석자)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삶을 바꾸어 세례를 받고 기쁘게 길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내가' 깨닫는 책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내신 이들'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책입니다. 내 식대로의 오독을 막으려면 교회의 권위 앞에 무릎 꿇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면 성경은 절로 읽힙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믿어지는 것은 신학적 논리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깨달으려면 먼저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그분 품으로 달려드십시오. 교회 품에 달려드십시오. 교리 안에 안기십시오. 성체 품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깨닫게 되고 성경으로 증언할 수 있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부활 대축일이 지나면 ‘엠마오’라는 휴식의 시간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순 시기와 성삼일을 지내면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수고했으니 며칠 쉬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신부님들이 ‘엠마오’라는 걸 생각했습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의 이야기에서 명분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던 제자 둘이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제자 둘은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몰랐습니다. 어쩌면 실망과 절망의 마음을 가지고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사순 시기를 지낸 것도 아니고, 성삼일을 지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고기를 잡으려고 갈릴래아 호수로 갔던 것처럼, 제자 둘도 자기들이 살던 고향으로 갔을 뿐입니다. 그래서 부활 대축일 지내고 며칠 휴가를 가는 ‘엠마오’는 사실 성서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오히려 부활 대축일 이후 ‘부활 팔일 축제’를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더욱 성대하게 지내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교구는 사제들이 지내는 ‘엠마오’의 관행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교구는 그런 관행이 교회의 정신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공문을 보내서 ‘엠마오’ 휴가를 자제하도록 하였습니다. 휴가를 가더라도 부할 팔일 축제를 마친 후에 가도록 하였습니다. 3년 전에 달라스에 왔을 때입니다. 부활 대축일 이후에 ‘엠마오’를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도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해는 성당 문을 닫았습니다. 작년 부활 대축일 이후에도 ‘엠마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성당 문을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교우들이 다른 성당에서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우리 집을 두고 다른 집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 부활 대축일 이후에도 작년처럼 성당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관행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관행도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하고,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하셨습니다. 겉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나라들은 ‘평화’와 ‘안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갈등이 깊어질수록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도 커집니다. 힘의 논리는 빠르고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늘 약한 이들의 고통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길을 여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사제는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 세상의 기준입니까? 효율과 편리함의 논리입니까? 아니면 복음입니까? 우리는 사제가 되면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길을 따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분들은 편리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복음을 선택했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신앙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저는 때때로 묻습니다. 나는 과연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 혹시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논리를 따르려는 것은 아닌가? 편리함을 명분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활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권력의 중심이 아닙니다. 갈릴래아는 일상의 자리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만 일어나는 사건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두려움을 넘어 용기를 낼 때 부활이 시작됩니다. 미움을 넘어 용서를 선택할 때 부활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복음을 선택할 때 부활이 시작됩니다. 우리도 묻습니다. 나는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 세상의 기준인가, 복음의 기준인가?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내는 우리는 아직 축제 한가운데 있습니다. 부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부활입니다. 갈릴래아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가정으로, 일터로, 공동체로 돌아가 회개하고, 용기를 내고,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부활한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오늘의 성인
성녀 마리아 (Mary)
활동년도 : +1세기경
신분 : 신약인물, 예수의제자, 부인
지역
같은 이름 : 메리, 미리암
성 요한(Joannes)이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세 명의 마리아를 언급하는데, 그중의 한 명이 성모의 자매이자 클레오파(Cleophas)의 아내인 성 마리아(Maria, 마태 27,55. 61; 28,1)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예수님의 사후에 성 야고보(7월 25일)를 따라 에스파냐로 가서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 선종하였는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유해는 론느 입구에 있는 생트-마리에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성녀 발데트루다 (Waldetrudis)
활동년도 : +688년경
신분 : 과부
지역 : 몽스(Mons)
같은 이름 : 발데뜨루다, 발데뜨루디스, 발데트루디스
벨기에 몽스의 수호성인인 성녀 발데트루디스(또는 발데트루다)는 보드루라고도 불리는 7세기의 어느 유명한 가문의 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부모인 성 발베르투스(Walbertus, 5월 11일)와 성녀 베르틸리아(Bertilia, 1월 3일), 동생인 모뵈주(Maubeuge)의 성녀 알데군디스(Aldegundis, 1월 30일), 남편인 성 빈첸시오 마델가리우스(Vincentius Madelgarius, 9월 20일) 그리고 그들의 네 자녀들인 성 란데리쿠스(Landericus, 4월 17일)와 성 덴텔리누스(Dentelinus, 3월 16일), 성녀 알데트루디스(Aldetrudis, 2월 25일), 성녀 마델베르타(Madelberta, 9월 7일) 등 온 가족이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발데트루디스는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으며 몽스에 수도원을 세웠다.
성녀 카실다 (Casilda)
활동년도 : +1050년
신분 : 동정 은수자
지역 : 톨레도(Toledo)
같은 이름 : 가실다, 까실다
성녀 카실다는 에스파냐 톨레도에서 무어인 부모에게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은 모두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성녀 카실다는 비밀리에 그리스도인 포로들을 방문하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다가 발각되자 아버지의 진노를 피해 부르고스(Burgos)의 브리비에스카(Briviesca)로 가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병고와 공포 속에서도 기쁨을 간직한 은수자로 살다가 선종하였다.
교회미술에서 성녀 카실다는 장미꽃을 나르는 사라센족의 처녀로 묘사되고 있다. 때때로 그녀는 장미를 든 사라센족의 공주로서 또는 헝가리의 엘리사벳(Elisabeth, 11월 17일)이나 포르투갈의 엘리사벳(7월 4일)처럼 빵이 장미꽃으로 변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녀는 지금도 사라고사(Zaragoza), 톨레도, 부르고스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다.
복자 안토니오 파보니(Anthony Pavoni)
활동년도 : +1374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당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의 사비글리아노(Savigliano) 출신인 안토니우스 파보니(Antonius Pavoni, 또는 안토니오 파보니)는 젊어서 그곳의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의 탁월한 신심과 학덕 때문에 그는 피에몬테와 리구리아(Liguria)의 심문관으로 임명되어 신앙의 반대자들, 특히 보도아파들을 단죄한 결과 많은 적을 만들게 되었다. 1374년 부활절 때 브리라케라시오 소읍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언하였고, 사백주일 미사 중에 미지의 사람들로부터 살해당하였다. 그는 1856년 12월 4일 복자품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