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2년 9개월째(10월)로 접어들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손실 병력을 보충하거나 늘어난 전선에 투입될 예비 병력의 확보를 위한 인력 동원 경쟁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복역 중인 중범죄자들을 우크라이나 전장에 내보낸 러시아는 2일 형사사건의 피고인들도 자원 입대하면 재판을 중단하기로 형사소송법을 개정했다. 푸틴 대통령은 의회에서 넘어온 관련 법안 개정안에 이날 서명했다.
이에 따라 형사 사건에 연루된 러시아인은 경찰 조사를 받는 피의자이든, 재판중인 피고인이든, 복역중인 죄수이든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하기로 동의하면 사건의 법적 진행이 중단된다. 당사자는 건강 검진을 거쳐 군 훈련소로 간다.
러시아의 계약 군인 모집 사무소/사진출처:텔레그램
이 법안은 러시아가 2022년 9월 부분 동원령의 발령을 계기로 남성들의 '엑소더스' 등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 찾아낸 병력 보충을 위한 해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는 국내는 물론, 인도와 네팔 등 아시아 빈곤국에서 돈으로 참전 용병을 모집하는 한편, 형사사건에 연루된 용의자들을 구슬려 전장으로 보내왔다. 그러나 이같은 편법이 언론의 질타를 받자, 이를 합법화했다고 보면 된다.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코메르산트는 지난 6월 22일 내무부(경찰)와 연방보안국(FSB)이 특수 군사작전에 참전할 형사 피고인을 모집하는 데 관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경찰과 FSB 수사관, (중대사건을 수사하는) 연방수사위원회 수사관, 연방관세청의 법집행관 등이 18~65세 용의자(피의자)와 피고인들을 대상으로 입대 계약을 체결하면, 형사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수사관들은 "피의자 징집, 피고인 기소 중단 및 종료 문제를 군부대 사령부과 협의, 연구하고 시행해 달라는 지침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수사관들은 형사사건 관련자들에게 국방부와 계약을 맺고 입대하면 형사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으며, 관심을 보이는 용의자들로부터 신청을 받고 서류를 군 등록 및 입대 사무소(우리 식으로는 병무청)로 보냈다.
러시아의 수감 시설(교도소)/현지 매체 영상 캡처
기소된 피고인들도 입대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단, 테러와 반역, 간첩 행위, 소아성애와 관련된 범인은 제외됐다. 이들은 국방부와 계약을 체결하면, 형사 기소가 중단되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거나, 사망 혹은 부상하면 형사문제가 종료된다. 복무 중인 죄수가 한때 치열한 전쟁터에서 6개월간 살아남으면 특별 사면되는 것과는 좀 달랐다.
죄수(수감자) 동원은, 군사기업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전쟁 발발 이후 암암리에 교도소를 다니며 수감자들을 용병으로 데려오는 관행을 2022년 11월 합법화한 경우다. 또 이듬해(2023년) 여름에는 전과자들도 국방부와 입영 계약을 가능하도록 길을 텄고, 올 3월에는 '프리고진 식의 죄수 동원법'을 일부 개정해 수감자들의 입대시 형사책임을 면제하기로 했다.
개정안은 6개월이라는 참전 의무 연한을 채우고 풀려난 중범죄자들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국가두마(하원)의 가족, 여성및 출산, 아동 문제에 관한 상임위원회 위원장인 니나 오스타니나는 사면받은 수감자들에 대한 법 집행 기관의 지속적인 모니터링에 관한 법률 채택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녀는 지난 6월 "살인혐의로 복역중 참전한 뒤 케메로보로 돌아온 참전 용사가 또다시 12세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며 "이들이 다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 통제및 감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는 참전병들의 사기 올리기도 적극적으로 진행중이다. 지난해 12월 푸틴 대통령의 대선 출마 선언을 이끈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소속 스파르타 대대 지휘관 아르촘 조가가 (참전병들의) '영웅 만들기 프로그램'을 이수한 뒤 지난 2일 우랄 연방지구 대통령 전권 특사로 임명됐다.
푸틴 대통령에게 대선 출마를 권한 조가 DPR 대대장/사진출처:크렘린.ru
뒤이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3일 참전 군인이 푸틴 대통령의 뒤를 잇는 차기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참전군인에 대한 사회적 지위를 한껏 높여주는 차원의 발언이다.
사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국가 최고지도자에 오른 사례는 미국에서도 여러차례 찾아볼 수 있다. 가장 가깝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 대통령, 또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이끌고 승리한 율리세스 그랜트(1822~1885년) 총사령관도 '전쟁 영웅'이라는 신화를 업고 제 18, 19대 미국 대통령에 연속 당선됐다. 50달러 짜리 지폐에도 그의 얼굴이 담겨 있을 정도다.
형사 사건 연루자들을 전쟁터로 끌어들인 것은 오히려 우크라이나가 먼저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의회는 지난 5월 러시아와 비슷한 수감자 동원법을 채택했다. 이 법안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전쟁 초기부터 논의되기 시작했으나 후폭풍을 우려해 미뤄졌다.
대신,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첫해(2022년) 4월 계엄령에 따른 수색및 체포, 구금에 관한 법 집행기관들의 권한을 강화하는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면서, 형사 사건 연루자가 자원 입대할 경우, 사건 진행 절차를 유예하는 형조항을 포함시켰다. 그 결과, 그해 구치소에 수감된 많은 미결수들이 이 법 조항을 이용해 전장으로 떠났다. 그때는 자원입대 바람이 거세게 불 때였다. 하지만 입대하면 형사사건이 종결되는 관행은 그후 우크라이나에서 일반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현지에서는 2022년 2월부터 지난 5월까지 자원 입대로 1만1천여건의 형사사건에 대한 수사가 중단됐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한 언론이 400건의 형사 사건을 분석한 결과, 약 100명(25%)만이 군복무 중에도 기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300건의 경우, 군 입대 후 95%가 법원에 의해 무혐의 처리 혹은 기각됐다.
실제로 탈영한 한 우크라이나 동원병(세르게이,43세 가명)은 탈영 이유를 묻는 스트라나.ua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입대 동기를 이같이 말했다.
"2023년 술에 취해 사고를 쳤는데, 감옥에 가서 전과를 남기는 것보다는 입대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군에 갔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중략)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2024년 2월 두 번째 부상을 당한 뒤 병원을 탈출해 루마니아 국경을 넘었다."
우크라이나의 죄수 동원법은, 선수를 친 러시아 '바그너 그룹'의 중범죄자 동원에 대한 비판 여론이 우크라이나와 서방에서 비등하자, 논의 자체가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2024년 들이 최전선에서 병력 부족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자, 우크라이나 의회는 새 동원법을 채택(5월)한 뒤 수감자 동원을 위한 법안의 심의에 본격적으로 돌입해 한 달만에 결론을 내놨다. 당연히 우크라이나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행태에 비판이 적잖이 쏟아졌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푸틴 대통령의 서명으로 최근 확정된, 자원입대 피고인에 대한 형사사건 면책 법안이 확정되기 전에, 모든 형사 사건 연루자들은 입대하기만 하면 형사 사건의 법적 진행이나 형 집행이 중단되는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졌다고 봐야 한다. 전쟁통이라, 러시아와 같이 법률적 보완조치를 명시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인 우크라이나의 예비역 동원은 지난해 말이후 서방 언론에 자주 거론됐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2023년 11월 "미국 관리들은 우크라이나군의 손실을 19만 명(최소 7만명 사망, 12만명 부상)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이 손실을 보충하고 교대 병력(예비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제징집에 나섰다"고 썼다.
우크라이나의 길거리 강제동원 모습/텔레그램 영상 캡처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2023년 여름-가을의 반격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병력 보충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동원 대상자를 식별해 건강검진을 거쳐 군대로 징집하면 그만이지만, 절차적 정당성을 지켜려니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동원 대상자를 향해 폭력이 가해지기 시작했고, 그 행태는 '폭력적인 강제 동원'이라는 영상으로 인터넷에 숱하게 나돌아 다녔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2024년 4월 동원 연령을 25세로 낮추고, 새로운 동원법을 채택해 병력 충원의 효율성을 꾀했다. 하지만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즉각(4월 12일) "새 동원 법안이 수십만 명의 우크라이나 남성들을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도록 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회에 공황상태를 조성할 위험도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그렇게 동원된 예비역들은 주로 40대 이상이라는 점이었다. 서방 일각에서 우크라이나가 동원 연령을 20세로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이유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블라디미르 오멜리안 전 인프라부 장관도 지난 9월 5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 전쟁은 배불뚝이들(40대 이상)이 승리할 것이라는 자랑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며 "적절한 수의 젊은이들이 전장에 투입될 때까지 우리는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20~25세 젊은이들이 해야할 일은 조국을 위한 헌신뿐"이라고 동원 연령의 하향을 촉구했다.
키릴 부다노프 우크라이나군 정보총국(GUR) 국장은 "우크라이나가 지금이라도 18세 이상의 청년들을 동원하면 2033년까지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끝없는 동원 전쟁을 예고한 것인데,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