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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손무성(2006.11.19).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 신학 정립을 위해 잘못 끼운 '십자가'라는 첫단추(십자가신학의 문제점과 수정을 촉구하며). 십자가마을 칼럼게시판.”에 대하여 화답하며 쓴 글임을 독자분들께 먼저 말씀드립니다. 손목사님의 글은 ->표 바로 위의 것이며, 저의 답글은 ->바로 뒤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단락(?) 구분을 위해 하이픈(-)으로 임의 처리하였으며, 기타 인용글들은 *표 사이에 두었습니다. 제대로 끼워진 첫 단추에 대한 몰이해 - 부제 : 첫 단추에 얽힌 적반하장의 추억 - ...(생략)...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신학으로는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없는데 나온다는 것은 제대로 십자가 신학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에서 인간이 죽었는데 인간인 자신이 ‘내가 믿습니다(나는 성도다. 나는 기도했다. 나는 구제했다. 나는 사랑했다.....)’가 나오면 인간이 높여지기 때문에 안 된다는 신학이다. ->이에 대하여 이근호 목사님은 아래와 같이 분명히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아래 글*************************************** [re]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이근호목사님께 이근호 2006-11-12 08:28:59, 조회 : 170, 추천 : 0 예수님은 주시요 그리스도이십니다. ************************************************************************************* 성도라는 아담들도 자체적으로(자신의 아담성으로 인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고백을 할 수가 없다. 자체적으로 그 고백이 안 되기에 그 속에 계신 성령께서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예수님은 주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안된다”고 하신 것은 이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시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위와 같은 고백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와 “예수님은 주시요 그리스도이십니다”은 언뜻 언어적 표현만을 두고 보면 유사할 지 모르나, 내막은 사뭇 다르다. 가인은 (자기가 믿노라고 고백하면서) 제물을 바쳤으나 거부되었고, 아벨이 바친 제물은 열납되었다. 하나님의 식성이 까다로워서 소제는 거부하고 희생양의 번제를 택하셨던가? 인간이 먼저 치고 나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고백하고 나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공하시는 구원의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 가인의 고백, 가인의 종교와 아벨에게 주어진 믿음의 근본적인 차이다. -------------------------------------------------------------------- 왜냐하면 성도(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까지도 철학적 인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 범주에 넣어버리기 때문에... ->박길현씨도 이런 식으로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을 철학적 범주의 소산물로 취급하면서, 성경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산출된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 따로, 신학 따로, 철학 따로, 삶 따로가 아님을 쉽사리 간과하는 것이 더 의문스럽다. 이런 식의 구분, 즉 철학하기와 성경 해석하기는 상종해선 안된다는 식의 발상은 철학 또는 철학하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철학하기란 사유하기이다. 쉽게 말해 생각하기이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사는 이가 누가 있던가. 아울러, 생각하기는 늘 인간의 욕망을 담고 있다. 욕망이 없다면 아담 안에서 태어난 존재(인간)이라 할 수 없다. 성경 자체에 욕망이 담긴 인간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 다윗의 범죄, 유다의 범죄, 예수님을 죽인 사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던 사건, 제국들의 흥망성쇠...등등 거의 모든 기록들 - 욕망과 사유 등등의 요소를 다루고 있는 철학하기 - 철학하기 그 자체도 일종의 욕망적 행위이지만 - 와 성경 해석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성경이 무엇인가? 성경에 어떤 말씀이 있던가?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위의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려 한다고 치자. 히브리어 원문을 동원시킨다면 바르게 해석되는가? 사유하기를 멈추고 해석하기를 실시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데 아무리 언어적 장치들을 동원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결과가 도출될 리가 없다. 그리고, 위의 본문의 경우 해석 이전에 이미 본문 자체에 “소원” - 인간의 죄악된 욕망 - 이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이후 아담 안에서 출생한 모든 인간들에게도 이와 유사하거나 여러 가지로 변형된 다양한 소원(죄악된 욕망)들이 있다는 식으로 성경을 읽어나가야 할 것이 아니던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나가는” 것이 일종의 사유하기를 통한 성경 읽기(내지는 해석하기)가 아니던가. 철학적 인간 개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실제(적으)로 철학적 인간임에도 철학적 인간 개념, 성경적 인간 개념, (실제적) 인간 개념...여타 이상한 구분법을 실시한다. 달리 말해, 철학하기와 성경 해석 또는 기타 모든 문리적 해석들에 대한 접근이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철학(하기)은 “사유하기”이다. 다양하고도 수많은 생각들과 언어들과 사물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 및 그들의 관계과 변화에 대한 사유를 체계적으로 해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철학이자 철학하기이다. 철학자들이 남겨놓은 소산물들로서의 지식들이 철학이 아니라, 사유하기가 철학하기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철학을 보다 엄밀히 소개하면서 ‘철학하기’ 또는 ‘사유하기’로 풀이한다.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접근하면서 ‘사유하기’ - 그것이 철학적인 것과 성경적인 것이 별개라고 여기는 자들이 보기에 성경적인 것이든, 성경적이 아닌 그저 철학적인 것이든 간에 - 를 제거하고 해당 성경 구절만을 그대로 두고서 그 구절의 순수한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 사유(생각)하지 않으면서 (해석이라는) 사유(생각)를 한다는 말은 자가당착일 뿐이기 때문이다. 해석이라는 것도 다름 아닌 일종의 ‘사유하기’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철학(하기)라고 생각하는가? 어린 꼬마들도 ‘철학하기’를 한다. 일부러 배우기도 하고, 나면서부터 자신과 주변에 대해 온갖 현상적인 것들을 경험하면서 사유하기를 실시해 나간다. 새벽에 들리는 환경미화원들의 빗자루소리와 수레 끄는 소리...그도 철학자이다. 세상에 대한 자기의식에 근거하여 '사유하는' 철학자이다. ‘사유하는’ 사람인 것이다. 모두 잠든 새벽에 일어나서 세상을 쓸어 담아야 하는 그는 자기 직업에 대한 소명감 또는 만족감으로써 자기 생의 철학적 목적을 날마다 사유한다. 그가 쓸어 담는 전날에 세상이 남긴 파편들 - 죽은 인생, 병든 자연 - 의 썩고 문드러진 것들을 대하면서 그는 잘못된 정치, 거창한 슬로건, 화려한 도시 문화의 소외감...그 모든 것들을 거침없이 쓰레받기 속으로 쓸어 넣어 버린다. 그도 분명한 자기 철학이 있다. 내가 왜 이 직업으로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간헐적인 자기 의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직업의 경력이나 노하우와 관련하여 수많은 사유하기를 실시한다. 시골할머니는 고구마를 캐면서 사유한다. 그녀가 고구마를 심고 캐는 이유는 양식을 삼고 돈을 사려는데 있다. '생존을 위한 고구마 캐기'이다. 궁극적으로 그녀의 '생존'의식이 그녀의 철학하기 또는 사유하기(고구마를 심는 게 돈이 된다, 고구마를 캘 시기가 되었네, 고구마는 이렇게 캐야 한다...등)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그녀의 활동성(고구마 캐기, 내다 팔아 돈사기, 그 돈으로 양식사기...등)이 유출된다. 그녀의 ‘생존 의지’라는 욕망에서 그녀의 생존 의식이 유발되며 그런 의식에서 온갖 사유들이 발생하고 급기야 활동성으로 현상화된다. 주변인들은 술에 취한 노숙자의 자기 인생철학 늘어놓기에 우연히 귀 기울이게 되면서 그의 철학을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지나가다 듣게 되는 개 짖는 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노숙자도 칸트의 그것과 같은 수준 또는 내용은 아니더라도 자기 삶과 결부된 자기 철학이 있다. 그것이 일관되게 이어지든, 또는 수시로 변경되든 상관 없이 말이다. 그의 노숙 생활은 그러한 자기 철학에서 비롯되는 “사유하기”와 늘 결부되어 있다. 주변인들이 그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삶의 실제의 볼품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밥을 짓는 주부도 철학자이다. 수험생 아들을 위해서 밥을 퍼는 주부의 손놀림과 같은 사소한 행위도 아들 성공시켜 보려는 주부 개인의 자기 철학에서 출발한 사유하기가 실제적으로 표출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주변인들이 여기기에 아무리 주관적이더라도, 자신이 여기기에 ‘어디까지나 돈이 최고(보편적 진리)라고 여기면 그에게 있어 보편적인 진리란 어디까지나 돈이다. 시골 할머니에게 고구마가 보편적 진리이듯이. 아담들에게 있어 보편적 진리란, 사유하기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의 실체를 가리킨다. 돈이 보편적 진리인 자로서는, 그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 모든 방법론을 사유한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과 사유를 실제 활동으로 한껏 뿜어낸다. 누구나 철학자이다. 사유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연구실이나 강의실에서 사유하기를 가르치는 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철학하기는 아담들의 보편적인 삶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들의 “사유하기”가 철학하기로 밥벌어 먹고 사는 이들의 그것에 비해 투박하다고 해서 그 평범한 이들이 사유하기를 멈춘 게 아니며, 철학자 아닌 게 아니다. 모든 이들이 삶의 철학자요, 사유하는 자들이다. 성경 해석은 이러한 사유의 범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사유하기로서의 철학하기는 너무나도 다양한 수준이 있다. 그리고 사유하기와 삶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것임에도 사유하지 않으면서 진의를 해석해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모순적인 소치이다. 성경 해석에 동원되는 인간의 사유하기, 또는 사고 과정은 참으로 철학하기, 또는 사유하기의 핵심 중에 핵심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향하시는 바로써 위에서 열거해 본 온갖 인간 군상들의 온갖 삶의 철학들을 부수고 왜 십자가가 인간 사회에 구속과 심판의 절대 유일한 중심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하시는 것이다. (고후 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김일성은 잘 죽었다고 갈채를 보내면서, 겉으로 드러나기에 무슨 특별한 잘못도 없고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시골 할머니가 왜 지옥으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한국전쟁과 보릿고개, 산업화 시대 등을 잘도 감내해 왔으면서도 우연히 겨울철 아침에 집을 나섰다가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숨진 80대 초반의 예수님 영접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왜 지옥으로 가는지 인간들은 감을 잡지 못한다. 철없는 어린 것이 불치의 병에 걸려서 왜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어 영원한 불못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아담들은 모른다. 인간들의 현실관 자체가 인간들의 사유하기가 누적되어 오면서 새로운 현실관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성도로 자처하는 대다수의 아담들도 교회, 언약, 경륜(섭리), 십자가, 성경, 신학, 복음, 구원, 심판, 생명, 죽음, 삶, 사명, 꿈...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중요하게 다루기 마련인 모든 주제들에 대하여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해석하고 궁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복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철학하기” 또는 “사유하기”이다. 아울러, ‘사유하기’는 ‘욕망’ 또는 ‘욕망하기’와 언제나 결부되어 있으며, 욕망을 떠나서 인간의 사유하기와 그에 따른 실제적 삶을 생각하고 다루고 접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앞서 거론했던 몇 가지 단편적인 사례들만 보더라도 아담들의 거창한 삶의 영역에서부터 사소한 삶의 부분에 이르기까지 욕망과 사유가 한데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은 다른가? 신학은 사유하기와 상관이 없단 말인가? 언어적 접근을 중심으로 성경 본문의 의미를 순수하게 획득해낼 수 있다는 것, 거기다 아울러 성령의 도우심을 바탕으로 한다면 금상첨화라는 식의 발상은, 어떤 이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허용되지 않는다(마 11:27)는 성경 해석의 대원칙 중의 대원칙을 간과함으로써 성경 해석에 대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져 있음을 역력히 보여준다. 존재가 있는 곳에 의식이 있고 의식이 있는 곳에 사유가 있고, 사유가 있는 곳에 늘 욕망이 표출되며 활개를 친다. 이 모든 요소들의 담합이 인간이라는 실존이다. 성경을 철학적인 눈으로 보려는 것이 별도로 있는 게 아니라, 삶의 실제들을 겨냥하는 성경이 오히려 사유하기를 쉬지 않으신다. 그리고, 구속과 심판을 여지없이 시간 속에서 늘 실행에 옮기신다. 말씀의 활동성이다. 오늘도 이 활동성은 성도 안에서 성도를 십자가에 죽이신다. 성경의 자체적 사유는 인생들의 사유하기를 겨냥하고 폭로시킨다. 앞서 언급한 창 4:7이 그러한 사례이다. 또 예컨대, 다윗의 불륜은 다양한 시각에 의해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 곳이다. 가인의 살인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성경의 사례들이 인간의 욕망을 건드리고, 그 욕망으로 똘똘 뭉쳐진 자아를 늘 겨냥한다. 인간이 그러한 실체를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역사의 내막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이미 역사는 종말을 선고받은 것이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그리고 그 욕망의 실체는 ‘죄의 소원’이다(창 4:7). 죄악된 욕망이요, 욕망 그 자체가 죄로 숨쉬고 있다. 철학적 사유(하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저마다) 제대로 사유하기 내지는 제대로 사유하려하기.... 가 철학이다. 따라서 철학의 실체부터가 현실적, 보편적, 광범위한 것이다. ‘모든 것’을 다루는 성경은 그야말로 사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문법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 번역은 어디까지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시간적 의미나 문맥적 의미파악까지 동원하더라도 단순히 자구적 해석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그래서, 세대주의자들의 문자적,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도 사실상 근거를 잃는다). 의미의 파악이란 그 주체가 누구든지 간에 욕망어린 의식의 발산으로서의 사유의 대상이 된다. 성경에 대한 의미 파악으로서의 성경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성경 그대로 해석해야한다는 주장을 액면그대로 적용하자면 본문 그 자체를 읽고 말아야 하며, 더 이상 다른 해석적 행위를 가감해선 안 된다. 문리가 통해야 한다는 것은 둘째 문제이다. “담벼락에 오줌 누는 자 = 남성”이라고 표현되어 있다면, 앉아서 볼일 볼 때만큼은 남자도 남자가 아닌 것이다(그 발화자가 설령 이교도라도 지엄하신 성경구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지 않던가. 왜냐하면, 자구적으로 해석하고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사례만 보더라도 문자적 해석이라는 말이 지니는 모순은 역력히 드러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 놓고서 ‘문자적으로 해석함’을 원칙으로 삼은 유태교 신학도 안식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성경 본문의 문자적 범주를 벗어나 온갖 구체적 사안들을 표출해내고 창안해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성경의 문자는 문자 그 이상의 실로 복잡한 세계의 실제와 현상 및 구조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제시되었다면, 그 자구에만 매달린다고 부모 공경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성경 본문에 없는 온갖 실제적인 것들을 마련해내야만 하는 문제가 늘 도출된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은 욕망과 욕망어린 사유와 그로 인한 온갖 실제들로서의 활동성을 표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걸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만나야 하고, 말해야하고... 그래서 인간들은 모든 것들에 범주를 설정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적정선’이라는 임의적인 묘안을 짜냈다. 그리고, 그 테두리 밖으로 벗어난 것은 모조리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단죄했던 것이다. 칼빈도 그러한 만행을 일삼았었다. 방종하지 말라는 식의 말씀 앞에서 어디까지가 방종하지 말아야 할 범주이던가? 그러한 범주는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방종하지 말라는 식의 말씀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말씀들 앞에서 과거 유태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감행했던 것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과거 ‘...666이니라’는 구절을 놓고서 어떤 자들은 그것이 컴퓨터나 바코드 아닌가라고 추측을 일삼았었다. ‘불과 연기와 유황을 뿜어대는 마병대(계 9:17)’을 두고서 첨단 과학화 된 살인 무기들을 연상한다. 온갖 잡다한 사유들이 인간의 의식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자기의식 - 그 속에 상상뿐만 아니라 망상, 착각 등 온갖 것들의 사유하기가 들어 있다 - 으로 읽어나가니 그렇다. 그 누구보다도 ‘문자적 해석’을 강조하는 세대주의자들이 이럴진대, 이에 비해 보수주의자들은 별다른 게 있던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칼빈은 온갖 구실로 주일성수와 말씀 실천에 관련된 ‘적정선’에서 벗어나는 사례들을 태형, 화형, 교수형, 추방 등의 삼엄한 방편들로 다스렸었다. 방종을 일소하고 근절하기 위해서 폭력이라는 방종을 사용한 것이다. 당시, 주민들은 말투와 복장...등 삶의 모든 국면과 관련된 처신에 있어 그들의 성경해석에 의해 간섭받았다. 성경을 성경만으로 해석하려 했던 자들의 삶의 실상이 이러했던 것이다! 그런대도 성경을 읽고, 성경을 해석하는 동안은 철학하기(사유하기)를 쉬어야 한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란 말인가? 아담의 몸은 그릇이다. 거기에 ‘뭔가’가 담긴다. 하지만, 그 그릇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이 글을 쓰는 나로서는 고유의 필체가 있는데, 이 필체에 ‘뭔가’의 내용이 담긴다. 글의 내용과 필체는 결합되어 있음에도 본질적으로는 서로 다른 것이다. -------------------------------------------------------------------- 십자가신학이 주장하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연합하여 그 능력으로 죄에서 해방된 부활한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한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인간을 죽여 성도 만들 때와 동일하게 성도까지도 인간으로 간주하여(성도까지도 철학적 인간으로 적용하여) 계속적, 반복용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근호목사님은 최근 예수사회 10p 6째 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유하기’라는 삶의 핵심적, 현실적 실제가 신불신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과 결부되어 있음을 앞서 밝혔다. 그럼에도 “성도까지도 철학적 인간으로 적용하여”라는 말부터가 실제적으로 성립이 안된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날마다 죽이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날마다 주님께서 분주하게 일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말씀이 성도 안에서 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늘 성도를 죽이시면서 말씀 자체의 능력은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만이 증거 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라고 했다. 요약하면 성도라는 것은 십자가에 계속 반복해서 죽게 함으로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만 증거 하게 하려고 처음부터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구원 받게 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십자가에 죽게 하기 위한 반복용 십자가’란 말이다. ->손목사님께서 사용하신 “반복용”이라는 말은 이근호 목사님의 표현대로라면 “날마다”라는 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날마다”라는 말을 위의 “ ”안에 있는 이근호 목사님의 표현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분주하게 일하시는”이라는 예수님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표현이 담지하고 있는 ‘물리적 시간 요소’에 해당한다. 손목사님의 비판글에 대한 독자라면, “반복용”을 거부하는 손목사님은 주님께서 날마다 일하심을 거부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갈 2:20에 따르면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시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은 “날마다” 아무 일도 안하시고 가만히 계신다는 뜻인가? 말이 안 되는 것이, 가만히 계신다 하더라도 가만히 계시는 그것부터가 일종의 활동(행함)이 아니던가. 손목사님은 “날마다”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행하심(활동하심)에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반복용 십자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이근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데 대한 손목사님의 몰이해를 확연히 대할 수 있는데, “이근호 목사가 십자가 사건을 반복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고 비판하려면,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 사건이 2000년 전 쯤에 갈보리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철철 흘리시며 죽어가신 사건이 날마다(반복적으로) -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 - 발생했다고 말했다”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근호 목사님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손목사님께서 사용하신 “반복용 십자가”라는 말은 성립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반복용 십자가, 즉 십자가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고 말하려면 예수님께서 여러 번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근호 목사님은 그런 언급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손목사님은 성도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두고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효력이 지속적으로 성도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도가 반복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실제 사건이 과연 말이 되는가 라는 얼토당토 않는 혼자만의 추측으로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을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성도를 날마다 죽게 하시는 행위는 성도의 내면과 더불어 실제적 삶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행위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실제로 피를 철철 흘리시는 사건의 반복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지어 성경 원어까지 동원한다 해도) 머리는 빼고 눈으로만 성경을 본 게 아닌가 라는 추측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손목사님과 여타 부류들의 경우, 철학하기와 성경 해석하기를 분리시켜 보기에, 사유하지 않고, 사고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다보면 위와 같은 오류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런 주장을 한 복음주의 신학자가 어디 있는가? 이근호목사님 외에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어떤 이는 이곳 게시판에서 나더러 “논리적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고 글********************************** [re] 생뚱맞은 조합...그럼에도 유쾌한 결론^^ 씹자가 2006-11-17 08:23:07, 조회 : 60, 추천 : 0 ...논리가 있습니다. 명확하다고 해서 진리는 아니지요... ************************************************************************************* 이런 식이라면, 다수가 주장했다고 해서 맞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근호 목사님 외에 모든 자들이 다 주장했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 * 문제점 1 이런 신학을 이근호목사님의 혼자 내놓은 십자가 신학, 십자가 복음(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와 구분해야 함)이라고 한다. ->십자가의 도(복음)과 이근호식 십자가 신학을 구분하는 이유는 후자에 대한 손목사님의 몰이해에 기인한다. 앞서 밝혔듯이,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 발생한 단회적인 십자가 사건과, 그 단회적 실제 사건의 여파로서 날마다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십자가의 효력 - 그리스도(의 영께서 날마다 성도를 다루어 나가시는 - 의 적용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위와 같은 십자가 신학을 내어 놓은 성경본문의 근거를 이근호목사님은 고린도전서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을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여기 바울이 말하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문맥상 주님께서 성도를 십자가에 날마다 죽이신다는 근거로 말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것이 이근호목사님의 실수였다. 문맥을 보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바울이 여기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 속에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죽는다든지’ ‘십자가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의미가 그 어디에도 없다. ->본문에 나는 날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죽노라고 되어 있지 않다면, 그러면 손목사님의 입장에서 볼 때, 날마다 죽는, 혹은 죽이시는 다른 방편이 ‘십자가(의 효력)’ 말고 있더란 말인가? -------------------------------------------------------------------- 문맥을 보라.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다른 헬라어 사본 인용 - (나는)죽음의 위협을 당합니다. (나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표준새번역 고린도전서15장 아래 페이지)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고전15:30-35) 결국 이근호목사님은 추측과 선입견으로 십자가신학을 정립하기 위해 본문을 재해석하여 조립하게 된 것이다. ->표준새번역을 인용함으로써 손목사님은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게 아니라 죽음의 위협으로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또는 손목사님의 몰이해가 가중되는 이유인즉), 고전15:31을 십자가에서의 반복적인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이라고 이해하는데에서 생각하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손목사님은 사도바울이 그러한 죽음의 위협을 왜 당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죽음의 위협과 관련된 사도 바울의 개인적 경험들의 의미가 무엇이던가 말이다. 다름 아닌,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십자가의 죽으심에 동참된 존재이기에 그러한 (고린도전서의) 경험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에게 있어는 그러한 죽음의 경험들이 다름 아닌, 십자가에 날마다 죽이시는 주님에 의한 경험들인 것이다. 원어성경이나 여타 외국어 또는 한글 대조역본들을 동원하여 바른 번역을 하면 이러이러하게 되고, 또한 문맥적으로 봐도 이러이러한 의미입니다...라고 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특정 구절의 바른 해석에 다른 구절이 동원되어선 안된다고 주장하는 어떤 이들의 주장도 개혁주의의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이라는 원칙에 위배됨과 동시에, 박윤선, 매튜 헨리, 로이드 존스 등의 성경 주석 방법들까지도 자동으로 거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는 청교도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던가? 다른 이들도 아니고 자기네 선배들의 정신과 주석 방법을 거부하는 이런 자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인가? -------------------------------------------------------------------- 그러다보니 그 누구도 말하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번에’ 다 이루신 십자가가 아닌 ‘반복용 십자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로마서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히브리서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보라! 손목사님이 인용하신 바, 십자가 사건의 단회적 발생을 뒷받침하는 말씀들이 과연 “내주하시는 - 물리적 시공간을 초월하여 -”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성도에게 역사하시는 단회적 십자가 사건의 효력 적용까지도 뒷받침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손목사님은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 발생한 십자가 사건의 단회적 발생과,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날마다(지속적으로) 적용하시는 십자가 사건의 효력을 혼동하고 있음이 역력히 드러난다. -------------------------------------------------------------------- * 반복용 십자가로 만든 십자가신학의 배경과 이근호목사님의 큰 실수 이근호목사님이 십자가 신학을 정립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 내에 무분별한 ‘소유주의- 기복적 소유주의, 목사들의 권위소유, 노회, 총회원들의 권력소유, 교회확장과 교회소유, 목사가 교인소유, 율법주의, 행위주의...등.’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이를 극복 하려는 데서 나온 신학이다. 그렇게 하려다 보니 모든 것을 ‘내가’ 소유해서는 안 된다(내가 믿습니다. 내가 행했다. 나는 성도다 라는 것 등....)는 사냥에 나선 것이다. ->이 사냥은 너무나 정당하다. 다름아닌, 이근호 목사님에게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실시하시는 사냥이기 때문이다. -------------------------------------------------------------------- 이것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신학은 반복용 십자가, 즉 성도까지(성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 가게하는 행위까지)도 철학적으로 규정한 인간과 동일화 시켜 십자가에서 계속 죽여야 된다는 십자가 신학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언급은 앞서 다 피력하였다. -------------------------------------------------------------------- 2.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은 모든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확정한 것이요, 인간에 대해 저주를 확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능력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죄에 대해 죽고, 죄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부활한 성도(새 사람)가 의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살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에베소서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αποκαταλλαξη:아포가탈락세 : 헬라어 시상은 제1과거로 되어 있다.) ->갈 2:20의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에 대하여 필자가 지적한 내용에 대해 손목사님은 한번도 반응을 보이신 적이 없으면서, 이제는 갈 2:20 대신 다른 구절들로 옮겨가면서 슬그머니 갈 2:20과 관련된 쟁점을 피해가시려는 듯한 의혹을 자아내고 있다. -------------------------------------------------------------------- 곧 헬라어에서 제 1과거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1회적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시상이다. 곧 단번에 끝났다는 의미다, - 의문이 가시면 네이버 지식검색에서 ‘제1과거’ 검색해보라. - http://blog.naver.com/t016mm?Redirect=Log&logNo=120011267388 즉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반복해서 소멸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번에 십자가에서 소멸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헬라어의 시제를 동원해도 소용없는 것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과 그 사건이 지닌 효력의 지속적 적용에 대한 손목사님의 혼동이다. 오히려 위와 같이 십자가사건의 단회성을 원어의 시제적 접근을 통하여 더욱 확증함으로써 손목사님은 자체적으로 안고 있는 모순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 그런데 이근호목사님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십자가신학을 정립하면서 ‘십자가를 반복용’으로- 성경에도 없는- 정립하여 성도의 역사를, 역사속의 교회를, 유기체적 성도를, 성도가 주안에서 사는 삶 까지도, 성도가 고백하는 ‘믿습니다’까지도 철학적 인간이 행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나’를 높이게 되는 것으로 간주하여 십자가에 반복해서 죽여야 하는 것으로 적용하게 된 것이다. ->손목사님께서 새삼 인식하여야 할 “성도의 역사”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하는 바, 몸이 죽은(롬 8:10) 인간으로서의 성도의 역사요(손목사님은 아직도 롬 8:10에 대한 주해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내지 못하고 있다), “역사 속의 교회”란 그러한 몸이 죽은 존재들의 유기체적 집합이요, “유기체적 성도”란 앞서 언급한 몸이 죽은 존재들에 대한 동어 반복이요, “성도가 주 안에서 사는 삶”이란 손목사님께서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신 난제인 갈 2:20의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발생하는 삶이라는 의미로서의 현상이요, “성도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철학적 인간 행위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도 그 자체로서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없고, 오직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만 그러한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이요, “그러한 고백까지도 십자가에 반복해야 죽여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시는” 이유는, 물리적 시공간에서 발생한 단회적 십자가 사건과 날마다 그 십자가 사건의 효력을 적용해 나가시는 성령님의 주체적, 주도적 사역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 그렇게 되니 십자가에 달려 한발작도 나올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된 의인이라는 이상한 의인’으로서 십자가만 자랑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만 자랑”은 영원한 ‘십자가의 도(복음)’이다. 그리고, ‘성도라면’ 이러한 십자가의 도에 호응하게 되어 있다. -------------------------------------------------------------------- (바울이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아래 문제점 2를 참조) 여기에는 새로운 피조물의 부르심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의 삶도 없고, 성령 안에서 행하라는 말도 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목적에서 멀어지게 했고, 이근호목사님은 자신의 십자가신학에 근거하여 성깔대로 살아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온갖 행하심과 관련된 열매들은 오직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직접 맺어가시는 것이라고 ‘이근호식 십자가신학(반대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은 누누이 강조해 왔다. 그럼에도 필자가 여전히 이런 열매들에 대한 실천 요청의 미련을 못버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성도의 자력적 율법 실천이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의 핵심적 실제로 주장하는 개혁주의적 성화론의 영향력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추측을 낳게 하기에 충분하다. 개혁주의 성화론의 비성경적 오류는 필자의 다른 글( ‘황검사’와 ‘이변호사님’ - 부제 : 개혁주의 성화론에서 말하는 점진적 성화의 목적 재고하기. 십자가마을 자유게시판.)을 참조하라. 그리고, “성깔대로 살아라...”에 대해서는 이 글 맨 아래에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 성경은 성도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다. 에베소서 4:17-20 ...(생략)...에베소서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양한 내용의 방종을 일삼말라는 식의 사도들의 권면들은, 성도가 그러한 말씀들의 내용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말씀들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것도 성령께서 스스로 열매를 맺어가시기에 가능한 것이다(갈 5:22).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이다.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위의 말씀과 같이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기에, 또한 갈 2:20 말씀대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에 그런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의 핵심이다. -------------------------------------------------------------------- * 문제점 2 ...(생략)...예수 사회 8p 22줄에 이근호목사님은 이 부분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즉 사도바울은 십자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온다.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힘을 세상을 향해 증거 하려 했다.’ 고 한다. ...(생략)... 바울이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15절 마지막 부분 때문에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문맥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표준새번역 성경을 참고 해보자. ...(생략)... “ 14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15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표준새변역 갈6:14-15) ->손목사님의 또 한가지 혼동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 두 번째 혼동은 다름 아닌, 원인과 결과 사이의 혼동이다. 손목사님은 위에서 분명히, “바울이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15절 마지막 부분 때문에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15마지막 부분(표준새번역)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손목사님의 말씀대로 하자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본문에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원인적 표현이 어디에 있는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목적으로 보고, 십자가 사건을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본문은 십자가 사건 그 자체가 새로운 창조 사역임을 언급하는 것이지, 어느 것은 목적이고 그 어느 것은 수단일 따름이라는 식의 말장난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한편,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이 맞다고 친다 하더라도, 이러한 진술이 이근호 목사님의 입장 즉, “...사도바울은 십자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온다.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힘을 세상을 향해 증거 하려 했다.’”와 어떤 점이 배치되던가? 오히려, 이근호 목사님의 언급이야 말로, “새로운 창조 사역 그 자체로서의 십자가 사건(십자가 사건 = 새로운 창조 사역)”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십자가 사건에서 한 발자욱도 안 나오려고 했고, 그것만을 증거하려고 했다는 감동을 전해주지 않는가! --------------------------------------------------------------------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의롭게 됨’ ‘구원됨’이 세상이나 나 자신으로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세상 것으로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요, 자기 자신에게도 안 되고, 할례 받고 안 받고는 아무소용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롭게 됨’ ‘구원’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인가? 세상 것이나 인간 자신으로 안 된다는 것이 십자가가 사건이었다. 대충고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지음을 받는 길’밖에 없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한다.(고린도후서 5:17[개역]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네...맞습니다...맞고요... -------------------------------------------------------------------- 그렇다면 옛사람(인간)을 십자가에 죽이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성도)을 만드는 능력이 무엇이었더뇨?에 대해 바울은 ‘십자가의 능력’(1회적 사건으로 단번에)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기에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전히 손목사님부터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단회적 실제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과 그 사건의 효력의 지속적 적용 사이의 혼동) 아무 문제 없는 언급까지도 이러한 언급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 고린도후서13:4 [개역]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주님의 말씀으로서) 아멘. (손목사님의 인용 의도에 대해서는) 네...맞습니다...맞고요... -------------------------------------------------------------------- * 문제점 3 ...(생략)...“...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이미 구원받은 이상 도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다음의 성경구절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 이들이 이해하기를 , 이미 살게 된 자에게 ‘죽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그들 식으로 생각하기를 사도가 이렇게 말해야 옳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살았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들어 있느니라“ 라고 말이다. 이제 두 번 다시 죽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가 왜 ‘죽었다’는 표현을 성도에 대해서 써야만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모든 일의 초점이 결코 우리를 ‘살려냄’에 있는 것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셨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골로새서3:3의 말씀이 정말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그렇지 않고 이것 역시 십자가 신학의 정립을 위한 왜곡된 해석이었다. 본문의 문맥을 따라가 보자 골고새서3:1-10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위 본문에서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말이지 반복용으로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는 당위성을 제공하는 말이 아니다. ->손목사님은 의아스런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다. 신기할 정도로. 손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세상”이라는 말은 골 3:2의 “땅”을 가리킨다. 필자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2~3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절)”라는 본문 때문이다. 그런데, “땅”이라는 말은 단독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니라, “땅엣 것(2절)” 또는 “땅에 있는 지체(5절)” 등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땅엣 것” 또는 “땅에 있는 지체”라는 표현들은 누가봐도 (“반복용으로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성도라는 존재의 죄의 본성 내지는 죄성어린 전인격체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땅”이라는 말만 염두에 두어 “땅”을 “세상”으로 보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씀을 “(성도의 몸과는 별개인)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 죽은 것이지...”라고 주장한 것이다. 과연 헬라어 본문을 봐도 그런 의미던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땅의 지체를 죽이라”는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도라는 죄성어린 지체를 다루어 나가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여기에 명령법이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도가 자체적으로 온전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사례를 제시해 보면, 롬 8:13의 경우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성도가 주체인 듯 말씀해 놓고서도 바로 그 다음 14절에 가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이라는 식으로 성령이 주체이시고 성도는 어디까지나 이끌려 다니는 객체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경의 명령법 앞에서 성도는 롬 8:14에 입각하여 이끌려 다니는 객체이며, 성령의 열매(갈 5:22)라는 표현 앞에서 성도는 스스로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열매를 맺으신다는 사실까지도 아울러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에 강조점을 두고 써내려가는 문맥이다. 이근호목사님께서 사용하고 있는 ‘죽었고’라는 의미로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위엣 것을 찾는 것은 반드시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씀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강조점은 어느 하나에만 있는 게 아니다. 두 말씀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손목사님은 간과하고 있다. -------------------------------------------------------------------- 너희는(성도는) ‘죽었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가 되었던 옛사람의 습성인 땅에 것을 향하는 것에 대해 죽었고’라는 말이지 십자가에 계속적으로 반복용으로 죽어야 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참으로, 점입가경이다. 십자가의 지속적인 효력의 적용 없이 손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옛 사람의 습성이 죽어지던가? 또한, 위의 문장에서도 손목사님은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 발생한 단회적 십자가 사건과 그 사건의 효력의 지속적 적용 사이의 혼동을 계속하고 있다. 참으로 첫 단추의 중요성을 손목사님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위에서 본 골로새서3장1-10절의 의미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엣 것을 향하여 살면 안 돼!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 받는 것이 돼!, 우리가 새사람을 입었으니 창조하신 자의 목적대로 그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라는 것을 잊지말라는 것이다. ->네...맞습니다...맞고요...이러한 말씀을 성도인 사도가 자체적으로 한 게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다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아울러 이러한 말씀들의 실천도 성령께서만 가능케 하신다는 사실까지 아울러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그래서 주안에서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 성도(철학적 인간으로 간주하면 안 됨)보고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목사님은 방금, “새사람, 성도 보고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음을 기억하면서, 다시 위의 본문의 일부를 읽어 보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그렇다면, 손목사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옛 사람과 그 행위”는 누구의 것이더란 말인가? 성도에게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증명해 주는 게 아니던가! -------------------------------------------------------------------- 결단코 인간 스스로 이렇게 하자는 말도 아니며, 인간보고 이것 지키자는 말도 아니다. ->손목사님은 자체적 모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신데, 이유인즉, 위의 성경 말씀은 손목사님께서 그렇케도 소중히 다루시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벗어버리라 ....거짓말을 말라...”라는 식으로 말이다. 손목사님의 말처럼 “이렇게 하자” 내지는 “이것을 지키자”는 식의 권유형보다 본문 말씀의 명령형은 더 강력한 것 아니던가! --------------------------------------------------------------------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안에서 성도에게 그 분의 부르신 목적을 좇아 마지막 때까지 주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인간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닌)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세우시고자 하려는 것이다. ->분명히 “성령으로 말미암아(인간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닌)”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이근호식 십자가 신학의 핵심 요소들 중에 하나인데, 왜 그 점에 대해서는 적극적 동의의 발언을 하지 않으시는지? -------------------------------------------------------------------- 골로새서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에베소서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국 앞에서 보았듯이 이근호목사님은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지나치게 합리화 시키려다보니 성경까지 왜곡하고 마는 우를 범하는 대 실수를 해 버린 것이다. ->여전히 손목사님은 이 글에서 드러난 바, 자신의 기본적 출발점의 오류(실제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의 단회성과 그 십자가 사건이 지니는 효력의 지속적인 적용 사이의 혼동)에 빠져 있다 보니 이런 적반하장의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근호목사님께서 십자가신학(십자가복음- 바울의 십자가와 구별되어야 함)에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온다.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힘을 세상을 향해 증거 하려 했다.”(예수사회 8p)는 논리를 폈다는 것 차체가 잘못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성도를 날마다 죽이시는 반복용 십자가”라고 하며 근거를 삼았던 고린도후서15:30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나 골로새서 3:3 “죽었고”라는 근거로 삼았던 것부터가 잘못된 출발이었고 잘못된 해석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손목사님께서 자신의 글을 마무리 차원에서 요약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또한, 여지껏 언급해왔던 바와 같이, 손목사님의 근원적 오류(실제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의 단회성과 그 십자가 사건이 지니는 효력의 지속적인 적용 사이의 혼동)을 지적함으로써 위의 구절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입장에 대한 손목사님의 오해를 이 글을 통해 조목조목 다루어 보았다. -------------------------------------------------------------------- 그래서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신학은 바울이 말하지도 않았던 ‘십자가’로 정립했기 때문에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에도 ‘믿습니다’가 안 되는 신학이 되어버린 것이다. ->성령 아닌, 성도 그 자체의 본질에 비추어 보면 아무런 기대할 것이 없기에 “성도가 믿습니다”가 자체적으로 안된다는 점을 필자 또한 앞서 짚어 보았다. --------------------------------------------------------------------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신학에서는 ‘인간’=‘나’=‘성도’ 모두 같은 동일선상에 서 있는 인간만으로 보고 있다. ->갈 2:20은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살아 있는 게 내가 아니라는 말이 무엇인가? 나는 죽어 있다는 뜻 아니던가.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생명으로 간주된다. 성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됨으로써만 세상에 대해 죽은 것으로 간주되며, 예수님의 생명에 동참됨으로써만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 그러다보니 “성도는 있는데 성도는 없고 교회는 있는데 교회가 없고 살았다고 하지만 계속적으로 죄밖에 못 짓는다는 말만하는 인간만 있다.” ->바로 앞서 필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성도는 그리스도(라는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성도로서 간주된다. 또한, 위에서 다루었던 골 3:3에 비추어 볼 때,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어졌기에 더 이상 자체적인 생명체로서의 존립이 무의미해졌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는 게 바로 이러한 의미 아니던가. 한편, “...교회는 있는데...”라는 손목사님의 발언을 통해 기성 교회에 대한 미련이 살짝 엿보이기도 한다. 손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교회란 아마도 이근호 목사님의 생성론적 교회관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낸 것 같다. 생성론적 교회관이 틀렸다면, 오늘날 교회 간판 달린 모든 곳이 교회라 불리어야 마땅할 것 아니던가? 그러나, 과연 그러하던가? 성령 떠난 유럽의 여러 교회만 보더라도(기성 교회 목사들도 이런 식의 발언을 하던데) 그런 곳들도 간판 달려 있고, 예배당 있고, 사람들이 몰려드니, 과연 교회라 불리기에 마땅하던가? 또한, 이러한 손목사님의 발언은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에 대하여 반쪽짜리 평가밖에 안된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동안, 공개적으로 이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은 죄밖에 못짓는다는 말만 해 온 게 아니라, 그런 성도라는 인간이 바로 그렇기에 “오직 십자가”를 외쳐왔다는 사실은 왜 언급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구원이 성사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이며, 그것을 적용하여 각종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 성도 아닌, 성령이시라는 점까지 아울러 증거해 왔음에도 왜 그러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가. 손목사님은 자신의 글을 통해서 십자가의 사건의 단회적 발생을 거론하면서 반복적으로 십자가에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펴셨는데, 이것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단회적으로 죽으신 십자가의 공로와 효력을 지속적으로, 날마다 적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주체적 사역을 모독하는 처사라 여겨진다. -------------------------------------------------------------------- 그래서 십자가에서 계속적으로 죽기 위해 성도라고 말만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죄 아래에 계속 매여 있을 뿐이다, ->손목사님의 평가가 이래서 반쪽 짜리 평가밖에 안된다고 말한 것이다. “죄 아래 계속 매여 있다”는 위와 같은 표현은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에 대해 과연 정당한 평가인가?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은 성도의 그러한 전인격적 죄성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구원된다고 주장하지 않더란 말인가? -------------------------------------------------------------------- 이근호목사님께서 정립한 십자가신학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계속 맴돌며 죽어야 하니, 기쁨 없이 성깔대로 살아가는 성도라고 말만하는 인간들의 군상만 가득하게 만든 것이다. ->이제 성깔대로 살아가는 군상들이 ‘이근호식 십자가신학’ 주변에만 있는 지 살펴보자. 거듭나지 못해 지옥갈 불신자들도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곧잘 쓴다. 과연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이 그들의 모토 -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 - 대로 살면서 성깔대로 살아가지 않는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몇 가지 사례들******************************* [re] 생뚱맞은 조합...그럼에도 유쾌한 결론^^ 씹자가 2006-11-17 09:25:04, 조회 : 51, 추천 : 1 역시 따봉입니다 따뽕---따따뽕----히로뽕입니다 손무성목사의 갈라디아서2:20에 대한 질문에 답변해 달랬더니 서울 2006-11-18 00:10:25, 조회 : 115, 추천 : 4 ...(생략)...나불대지 마시고 주변의 실력자들에게 도움이나 요청하시오...(생략)... 이준님아 그대가 어디 있느냐! 아서라 2006-11-18 11:06:23, 조회 : 115, 추천 : 3 ...(생략)...빈충머리도 없이...(생략)...'저리 꺼져"...(생략)... ************************************************************************************* 위와 같은 자들은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는 모토를 적극적으로 환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는 참으로 취약함을 그야말로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을 옹호하는 추종자라는 딱지가 붙어가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위와 같은 사례적 증거들마저 참으로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이 말씀하시는 바, 성도라는 인간 자체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는 없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해줌을 실감한다.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딤후 2: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물론 이 구절의 문맥은 부활을 거부하는 등의 비진리에 대한 지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살전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고전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는 모토를 적극 옹호하는 자들이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위와 같은 권면의 말씀에 대한 실천을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까지는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약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그래서, 나는 저들을 일단, “(어디까지나) 자칭 성도”로 간주하려는 것이다. (마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약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 뿐만 아니라, 새사람으로, 즉 성도로서 부르심의 목적대로 사는 부활의 삶까지도,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하는 성도의 그 어떤 행위마저도 의미 없고, 십자가에 반복적으로 죽여야 하는 것으로 만든 신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행위란 십자가에 반복적으로 죽이시는 것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물론, 이 점에 있어서도 여전히 손목사님은 물리적 시공간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의 단회성과, 성령에 의한 그 십자가 사건이 지니는 효력의 지속적인 적용 사이의 혼동을 해결 못한 채 위와 같은 언급을 한 것이다. -------------------------------------------------------------------- 그 결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들 1. 행하는 것은 의미 없음을 절감 ->성경적이다. 성도라는 인간 자체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행함은 마치 가인의 제사 행위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것만이 그 출처가 그리스도이시다. 성령께서는 오직 예수님의 것만 가지고 나타나시기 때문이다(요 16:14). 문제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표면적으로만 두고서 주변인들이 쉽사리 가인의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분별하기 힘들듯이, 서로 다른 본질의 행함 중 어느 것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도 오직 성령께서만 아신다는 점이다.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은 이런 점까지도 아울러 담지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 2. 행해도 죄니 안하고 말지식의 삶 ->성령의 주체적, 역동적 사역에는 눈길이 안 가있고 인간의 방종에만 눈길이 가 있기에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방종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미 필자의 다른 글을 통해 언급하였다(“죽방과 멸치('방종'과 '성도의 자유'). 십자가마을 자유게시판 참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을 가지고 믿음 있음 없음의 잣대를 대려는 것부터가 형제 - 그가 형제인지의 여부는 주님께서만 온전히 아실테지만 - 를 판단하지 말라는 명령대로 실천 못하는 것 아니던가. (약 4: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설령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이 교회 간판달린 곳들까지 포함하여 온 세상을 싸잡아 비판하더라도,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는 모토를 지닌 노선에 서 있는 자들이라면 형제 비판을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할 것 아니던가. 이러한 모순은 마치 석가모니가 욕심을 비우려 또 다른 욕심(욕심을 비우려는 것 그 자체)을 품게 된 것과 유사하다. 남을 비판하는 방종을 일삼지 않아야 함에도, 다른 이의 방종을 일삼지 않게 하기 위해 비판하는 방종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미 범죄 타락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선을 추구하는데 항상 악이 함께 하는 연쇄 반응이 늘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끊는 것은, 성도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선과 악의 체계인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성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늘 이것은 행해야 하고, 저것은 행해서는 안 되지...라는 선악의 연쇄 반응이 성도의 의식 안에서도 일어난다. 이것을 끊고 오직 은혜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율법의 정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써 끊어버렸음의 효력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는 차원에서, 성령께서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성도에게 일깨움과 동시에 성도 자체로부터는 아무런 구원의 공로가 발생하지 않음까지 아울러 일깨우시는 것을 가리켜 ‘날마다 성도를 십자가에 죽이시는 것’이라 표현한 셈이다. ‘하지 않는 것’만이 방종이 아니라, ‘하는 것’도 말씀대로 하지 않는 것이라면 방종아니던가? 10여명이 장로임직시 1억여 원짜리 대형오르간을 헌납하면서 1인당 1천여 만 원씩 내는 것은 방종하지 말라는 식의 성경 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순종 쪽인가, 아니면 방종 쪽인가? 헌금할 형편이 안 되는 분들은 아예 후보로 나서지 말라고 예배후 버젓이 광고하는 것은 순종인가, 방종인가? 행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딴에는 성의껏 행하는 것도 엉터리요, 말씀을 우롱하는 결과로 나올진대, 그러한 것들은 모두 방종 아니던가? -------------------------------------------------------------------- 3. 점점 성깔대로 살아가기 4. 평소 성깔대로 사는 것을 방종하는 삶이라 여기지 않음 ->성깔 문제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하였다. -------------------------------------------------------------------- 5. 십자가 잣대로 정죄하기 ->정죄가 없으면 방종을 일삼지 않겠는가. 방종을 일삼아선 안 된다는 손목사님의 기본 입장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나는 성도에 대해 율법이 적용하는 정죄가 더 이상 정죄가 아닌, 회개용, 즉 회개를 이루게 하는 책망과 교훈으로서 작용한다고 밝혔다(필자의 다른 글, “"-하라"체는 '회개용'이다.” 참조. 십자가마을 자유게시판.) -------------------------------------------------------------------- 6. 삶에 기쁨을 점차적으로 잃어감 ->광야 길을 걷던 유태인들도 40년이라는 기간을 희희낙락하면서 거쳐간 것이 아니었다. 정작 가나안에 입성해서도 그들의 삶은 표면적으로 볼 때, 기쁨으로서의 충만이 아니라, 투쟁으로 인한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오히려 삶의 기쁨이란, 성령 없이도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종교적 오락 내지는 여타 다른 대체수단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종의 환각 증상일 수도 있다. 방종을 일삼는 주변인들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안쓰러움으로 이러한 표현을 쓰셨겠지만, 인간으로서의 무기력함과 취약함이 몸을 지닌 인간의 근원일진대, 그 누구든지 이러한 과정에 빠질 수 있음이다. 또한,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는 모토를 표방하는 분으로서의 손목사님은, 정작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성 말씀의 실천까지 아울러 떠맡게 되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의 방종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다른 이들의 삶에 기쁨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자로서(특히 전임 사역자로서) 강건너 불구경 해서는 안되고 더욱 중한 책임감과 더불어 일깨워주어야 할 책무만을 느낄 게 아니라, 스스로도 더욱 방종하지 말아야 할 책무까지 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과연 손목사님께서는 여태까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러한 삶의 막중한 책무를 성도답게 어느 수준까지 잘 이행해 가실지, 주변의 지인들의 경우 특히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한편,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이 이러한 과정의 근원적 주범이라 보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희박하다. 이근호식 십자가신학은 오히려 성령의 열매들(가운데 "희락(갈 5:22)"도 들어 있다)이 성령에 의해 우발적으로 터져나옴을 누누이 역설해 왔다. -------------------------------------------------------------------- 그 외 신학적 결과는 이미 2000.8.22 박길현 목사님께서 이미 지적한바가 있다. ->박길현씨의 글에 대한 직접적인 논평은 이 글의 목적과 별개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 아직도 나의 바람이 있다면 이근호목사님께서 이 십자가신학의 출발점부터 잘못되었음을 알고 다시 첫 단추부터 수정하여 끼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손목사님은 자신의 글에 나타난 근본적 오류(물리적 시공간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의 단회성과, 성령에 의한 그 십자가 사건이 지니는 효력의 지속적인 적용 사이의 혼동)부터 수정해야 할 것이다. |
첫댓글 물리적 시공간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의 단회성과, 성령에 의한 그 십자가 사건이 지니는 효력의 지속적인 적용 사이의 혼동--> 이 혼동은 이근호 목사가 혼동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로미님은 윗글의 요지를 잘 파악하신 것 같군요. 저로서는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앞뒷글들이 뒤섞여 있어서 누구 말이 누구말인지를 우선 모르겠거든요. 권정희님에게 이런 글을 가져다 드려서 읽게 하는 것도 죄송한 마음이 드는데....혹시 좀 정리를 해 주시면 어떠실지 제안을 해 봅니다만....아마도 그러면, 십자가마을에 직접 답글을 올리실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런데, 윗글은 이준님이 손무성목사님께 한 답변글인데, 권정희님이 나서겠습니까? 하신다면 똑부러지게 하시는 분이시긴 하지만....
손목사는 십자가가 단회적이라고 말하고 이준은 십자가가 계속 성령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은 인간을 계속 죄인으로 단속시키고 오직 주의 살리심만 나타나도록 하며 모든 성경의 말씀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뜻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준의 탁월한 궤변으로 자칫 이 사람의 논지에 넘어갈 수 있으니 전에 이목사와 논쟁이 있었던 권정희(그 때 이목사가 밀리더라구요^^)씨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지요.
성령은 주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시고 말씀 앞에 복종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말씀 앞에 복종하는 삶 속에 곧 회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일부분만 보고 회개만 제한해서 이야기 하면 숲을 보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