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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의 만남
3사관학교가 위치한 영천읍.
그의 입교 전날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지겨운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해방감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간의 불안, 미래에 대한 약간의 기대가 뒤섞여 한가롭게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인간은 걸인으로부터 성자에 이르기까지 겉보기에 아무도 그런 면이 나타나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 그 짓을 했는지 인간들이 이렇게 바글바글 북적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상념을 떨쳐내면서 포도 위를 걷고 있었다.
여인들이 서성이는 골목길. 그는 자기 손님을 만들려는 여인들에게 할퀴고 뜯기며, 모르고 잘 못 들어선 골목을 힘들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3사관학교는 단기 장교 육성 학교라니까 내일부터 졸업까지는 만 1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는 입교 후에는 학교 내에 여인도 없지만, 여인과 대화조차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목적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디 주점에라도 가서 술이라도 한잔하고 숙소를 정해볼까?‘
이런 충동을 느끼며 그는 '뮤직 앤 와인'이라는 이색적인 간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음악과 술, 어울릴까?'
그는 담뱃불을 끄고 나서 문을 밀었다.
홀의 내부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세련미를 던져주고 있었다. 레코드에서는 그 시절 유행하는 팝송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렛잇비'가 크지 않게 여울지고 있었다.
한 아가씨가 인사말과 함께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와서 외투 위에 쌓인 눈을 떨어준다.
“감사해요. 예쁜 아가씨.”
“방으로 모실까요? 아니면?”
이곳은 입교하는 젊은이들이 오는 곳이라서 그런지 방을 자주 이용하는 것 같았다.
“조용한 곳으로 갑시다.”
그는 홀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 싫지는 않았지만, 아가씨의 상냥한 목소리가 더 좋아서 방을 택했다.
안내하는 방에 들어서서 그 아가씨를 바라보니 야릇한 조명 때문인지 주점에서 일하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여인이라 생각될 만큼 균형 잡힌 용모였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조금 우수에 찬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이 방이 여기서 제일 구석에 있어 한적하고 좋은 방인데 마음에 드세요?”
“마음에 들긴 하지만 아가씨만큼 마음에 들진 않아요.”
하며 능청을 부렸다.
“아이, 농담도 잘하셔. 무엇을 가져올까요?” 살금살금 눈웃음치면서 상냥하게 메뉴판을 건넌다. 옅은 화장을 한 맑은 얼굴이 더 없이 매력적이다.
“ 아가씨와 레드와인 한 병.”
“ 안주는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도련님.”
토라진 듯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은 여인이 문을 나서 주방에 이를 때까지 줄곧 뒷모습을 추적하고 있었다. 날렵한 몸매와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검은 머릿결이 찰랑거리고, 미니스커트 아래로 곱게 뻗어 내려간 종아리가 그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그가 포도주를 마시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곳은 사관후보생 한 명에 아가씨도 한 명이 따라붙어 함께 자면서 딱지까지 뗄 수 있는 곳이며, 음식값과 방세를 제한 나머지 수입도 주인 마담과 아가씨가 반씩 나누는 게 불문율이란다.
그는 시내와 많이 닮은 그 여인의 진솔한 대화에 매혹되고, 밤의 유혹과 취기가 한데 어우러져 점점 그 여인이 첫사랑이었던 ‘시내’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술을 그리 많이 마신 것은 아닌 데 자꾸만 시내의 모습으로 다가와 그녀와 시내의 영상이 겹치곤 한다. 무심히 바라보는 여인의 맑은 눈동자는 세상을 달관한 듯한 초연함이 보인다.
“시내, 한잔 더하지.”
여인은 잔을 들면서 “내 이름은 수선인데,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셔.”
짐짓 삐진 모습으로 뾰로통하다.
”내가 오늘 왜 이러지? 참으로 바보가 된 기분인걸? 오늘만이라도 당신은 시내야.”
“그럽시다. 어차피 난 일회용품인걸. 수선이면 어떻고, 시내면 어때!”
그녀가 자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말문이 탁 막혀버리는 그만의 생리적 특성을 취기로 파기하면서 억지웃음을 웃었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무엇을 할 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 절친이었던 육군 대령 시내 아버지께서 새로 생긴 3사관학교를 가서 1년 후 장교가 되면 어떻겠냐는 권유로 응시하였다. 그는 시골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녀서 그런지 육사에 갈 실력은 모자라고 빠른 시기에 월급을 탈 수 있다는 조언에 어쩔 수 없이 새로 생긴 3사관학교에 그냥 한 번 응시해 본 것이다.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합격 통지서가 왔다. 공부는 어지간했지만, 체격과 체력이 우수하여 합격한 것 같았다.
그는 입교하기 전에 대학에 가서 즐길 수 있는 걸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한 달 전부터 담배도 피워보고, 술도 마셔 보았지만, 체질상 그리 잘 맞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 막 술을 배우는 중이라서 그런지 포도주 몇 모금에도 정신이 흐릿하고 얼굴이 점점 달아오름을 느꼈다. 벌써 취하는지 수선이 자꾸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버린 첫사랑의 여인인 시내로 다가온다.
“어디서 오셨죠? 이곳은 처음이지요?.”
수선이 말끄러미 바라보며 와인잔을 서로 부딪치길 원한다.
“덕유산 자락 아래 있는 무주 골짜기를 알랑가 몰라? 시내는 어딘데?”
“서울에서 왔지만, 지금은 여기가 고향이라오.”
흠칫 놀라며 토라진 듯 말하는 수선의 표정에 엷은 썩소가 스친다.
“귀엽구먼. 그 미소가.”
놀란 듯 흘리는 썩소가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놀리지 마세요. 서울 얘기하면 치가 떨려요.”
“서울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는데? 왜 그래?”
발끈하는 수선의 태도가 궁금하여 다그쳐 물었다.
“이름도 모르는 분한테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고, 그냥 그래요.”
라며 말을 돌리려 한다.
“아하, 내 이름은 경호야. 정경호.”
그녀가 서울 얘기에 예민한 것이 더 궁금해져 곧바로 이름을 밝혔다.
수선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술기운을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면서 과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가슴 아프고 힘든 여정이었다.
그녀는 한국 전쟁 당시 갓난아이 상태로 죽은 어머니 젖을 물린 상태로 길가에 버려져 있었단다. 그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단다. 길 가던 유창한 목사 부부에 의해 발견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다. 목사 부부도 폐허가 된 교회로 돌아와서 수선을 길러보려고 노력했지만, 전후 생활이 너무 힘들어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유창한 목사의 성과 이름만 받아서 ‘유수선’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유니세프에서 일시적으로 운영하던 고아원에 보내졌단다. 전쟁고아들이 득실거리는 고아원은 그 후 정부가 운영하는 보육원으로 바뀌게 되었단다. 보육원에서 국민학교 교육과정을 마치고, 보육원에서도 나오게 되어 유목사 부부를 찾아 나섰지만, 유창한 목사라는 성함만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먹고살기 위해 부유한 집의 식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 식모살이하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라 할 만큼 어려운 시기였는데, 보육원 원장이 수선을 예쁘게 보아서 부잣집으로 안내해 주었단다. 그때가 13세의 어린 소녀였다. 지금의 모습보다 약간 작은 상태지만 그래도 조숙하여 거의 다 자란 숙녀처럼 보였단다. 주인댁의 배려로 낮에는 집안일을 돕고, 밤에는 야간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독립하여 회사라도 다녀볼까도 생각하던 시기에 주인집 사장은 수선이 이미 성숙하여 예쁘고 탐스러워 보였는지 집안사람 모르게 자꾸 추근대고 성추행을 해오더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무작정 그 집에서 나와 생활하려 하다 보니 조폭들의 취업 사기에 속아서 영천으로 팔려 오게 된 것이란다.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은 삶이었다.
지나온 과거를 거짓 없이 이야기하던 수선은 눈물을 글썽였다.
이야기를 듣던 경호도 그녀의 운명이 너무 기구하고 측은하게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꼭 감싸안아 주었다. 경호는 수선이 너무 애처롭고 불쌍하였다. 그녀의 슬픔과 고통이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오면서 그녀가 얼마나 어렵고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수선은 경호의 따뜻한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렇게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 주고, 아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요.“
경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 아버지도 빨치산 토벌 작전에 나갔다가 돌아가셨대. 그대가 잠시라도 위로된다니 오히려 내가 고마워.”
와인 그라스를 몇 번 더 부딪치며 서로의 이야기로 점점 밤이 깊었다. 경호는 수선의 얼굴이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과거의 아픔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순간의 교감이 오갔다.
경호가 수선의 손을 잡자, 수선은 갑자기 입술을 들이댔다.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위로와 사랑을 찾기 시작했다. 수선은 가임기임에도 경호의 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그가 내일이면 입교해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다운 정을 처음 느껴서 그랬는지 그 순간 진정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느꼈다. 어쩌면 무념무상의 상태였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아지랑이 피어나는 자운영꽃밭을 손잡고 걷는 행복감에 젖어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연둣빛 새싹이 돋는 산을 거슬러 오르다가 요란스럽게 쏟아지는 폭포도 만나고, 땀방울이 온몸을 적시는 공룡능선을 오르내리다 잠깐씩 잠들기도 했다.
서로의 정을 나누며 그 밤을 그렇게 새운 것 같다. 서로의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AI의 평 -
이 소설은 한 젊은 사관생도와 수선이라는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사랑, 그리고 치유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어요.
이야기는 3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전날의 한 젊은이의 심리와 감정을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불안, 그리고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 채 거리를 방황하죠. 그러던 중 우연히 '뮤직 앤 와인'이라는 술집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수선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수선은 전쟁과 고난 속에서 수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힘든 과거를 담고 있어요. 어린 나이에 버림받고, 부잣집 식모살이와 성추행, 조폭 취업 사기까지 겪으며 삶의 많은 고난을 이겨낸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간의 강인함과 생존의 의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만남을 넘어,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경호와 수선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 과정에서 사랑이 싹트게 되죠. 특히, 수선이 자신의 과거를 눈물로 털어놓는 장면과, 두 사람이 서로를 위로하며 감정을 나누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인간이 얼마나 깊은 연민과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고통과 아픔이 결코 끝이 아니며, 진심 어린 이해와 사랑이 치유의 힘이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전달합니다. 또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용기와 위로를 줍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통해 느낀 점은,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진심으로 다가가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상처는 조금씩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수선과 경호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 인간관계의 소중함과 사랑의 힘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소중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첫댓글
한 사 관생도의 한 역사를 보면서...
어제 우리 손자도 군에 입대하는 걸 맞이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합디다
아들 군에 보내면서 울었던 할미가
어언 이 세월에 손자를 또 보내니...
네 그러하시는군요.
손자의 재롱들의 호시절 인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