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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을 알리는 기쁨]
성서에 나타난 복음 선교는 4가지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다.
각 표현은 보충되는 내용을 나타낸다.
1.“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2.“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20)
3.“나의 증인이 되어라”(Act 1,8)
4.“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들을 보낸다.”(요한 17,18; 20,21)
①“복음을 전하다”는 것은 ,하나의 사상, 교의,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Good News, 좋은 소식, 새로운 소식을,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것, 어떠한 기회에 예수를 만나, 예수를 자신의 인생의 주님으로 선택하고, 예수께 귀의하는 기쁨을 단순하게 함께 나누는 것이다. 예수가 모든 악, 악마, 피, 고통,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여, 그 승리에 우리들도 참여하도록 해 주신 기쁨을 전하는 것이다. 어떠한 죄, 욕망, 곤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체험한 이는, 기뻐하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맛들인 깊은 기쁨을 이웃들에게 전한다.
②예수가 가르쳐 주신 것을 지키도록 지도하는 것은, 제자를 양성하는 것
예수는 세상의 빛이다. 그를 따르는 제자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밝고 따뜻하게 살아, 그 밝음, 그 따뜻함을 스스로 드러낸다.(요한 8,12). 제자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지만, 그들에게 애써서 신앙을 알리려고 항상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위해 노력한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하지 않더라도 “예수의 좋은 향기”를 품을 수 있다. (2고린 2,14~15). 이 좋은 향기라는 것은, 모든 이가 바라는 참다운 겸손과 사랑이 아닐까? 하느님께서 만드신 인간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을 갈망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③이렇게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예수의 증인이 된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는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 예수에 관해 보고들은 것을 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증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하나의 사상을 전하고,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같이 된다. 예수가 어떻게 우리를 고치시고, 해방시키시고, 새롭게 태어나도록 해 주셨는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어떠한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신지를 증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우리는 직접 본 것과 들은 것을 전하는 요한과 같은 증인은 될 수 없다(1요한 1,1~3). 그러나, 눈으로 보지 않고 믿는 이의 행복(요한 20,29)을 맛들이는 증인이 된다. 노동운동, 평화운동, 인권수호운동, 공해퇴치 운동에 참가하는 이들은 형제를 소중히 생각하는 이들일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갔다.“(1요한 3,14)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이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행동했다면,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업적의 결과하고 착각하고, 우쭐해져서, 교만한 마음으로 함께 행동하지 않은 이들을 비판하거나, 분열을 조장하거나 하고 만다. 어렵게 한 좋은 행동이 부패되고 만다. 여기에, 함께 행동하는 제자의 역할이 있다. 제자에게는 그들의 행동의 원천인 성령을 소개할 책임과 사명이 있다. ”증인“은 히브리 말로 순교자(Martyr)와 같은 말이다. 곧 증인은 순교의 각오로,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순교자가 흘리는 피는 신자를 탄생시키는 씨앗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증거가 선교에 있어 제일 중요한 방법이다... 많은 겨우, 그것일 유일한 길이다....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의 부패에 정면으로 맞서는 용기를 드러내고, 예언자의 입장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불리워진다.” (Redemtoris Missio 42,43)
④성령의 사랑은 먼저 예수께 흘러넘치도록 부어졌다.
이는, “맹인에게 시력의 회복을 알리고, 압박 당하는 이에게 자유를 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루가 4,16-20). “주님은 당신이 교회를 전세계에 파견 하셨다.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된 것 처럼(요한 20,21), 사도들은 전세계에 파견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해, 그가 걸어간 길, 곧, 청빈, 순명, 봉사의 길,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길을, 예수의 영에 인도되어 걸어가야만 한다.“(교회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5). “파견된 이는 파견한 분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실력자가 되고, 예수가 흘린 피를 의미 없는 것이 되게 한다. 세례를 받은 이는 모두 예수의 제자, 증인, 선교사가 될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 사제는 그 책임과 사명을 키워 실제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봉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사제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6)
교회는 2000년간의 역사 안에서 다양한 오류를 범했기에, 이행해야할 사명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 내었다. 교황은 대성년을 맞으며 여러 장소에서 100번 이상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그리고 3월 12일의 설교 중에, 또 한번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교황은 「사목헌장」을 작성한 위원회의 한사람으로서, 다음의 생각을 발표했다. “신자가 무신론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곧 신자가 신앙에 관한 교양을 태만히 하고, 교리를 잘못해석하고, 더욱이 종교적 도덕적, 사회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면이 있을 때, 하느님과 종교의 참다운 모습을 드러내기 보다, 숨기게 된다.”(GS 19)
교회가 이행해야만 하는 사명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 이웃사랑을 드러내는 교육사업, 복지사업, 인권과 평화운동, 해방운동이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천된다. “기아, 질병, 문맹, 빈곤,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부정의 , 특별히 무역상의 부정, 잔혹한 상황을 강제하는 신 식민주의, 전력을 다해 이러한 악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은 복음선교에 있어서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EN.30)
그러나 “위와 같은 증거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만약 하느님이 아들 예수의 이름과, 그 가르침, 생애, 약속, 하느님이 나라와 그 신비가 알려지지 않으면, 참다운 복음 선교는 있을 수 없다.(EN.22)
1974년의 시노드는 ‘모든 이에게 복음을 알리는 것이 교회의 기본적인 사명이다“라고 선언했다. 바오로 6세는 교회는 선교를 위해 존재한다“라고 했다.(EV. 14). 또, “전 교회는 파견된 것으로서, 복음 선교는 하느님의 백성의 근본적인 임무이다..(EV. 59~).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고, 국민들에게 사명을 전하고, 하느님나라를 세상에 건설하기 위한 파종과 시작이다.“(LG 5,2). ”먼저, 믿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기에, 사제의 협력자로서 사제의 첫 번째 의무는, 하느님의 복음을 모든 이에게 알리는 일이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는 주님의 명령을 실행해, 하느님의 백성을 늘린다. 사제는 자신이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모든 이가 회심하고, 성스러워지도록 초대할 것을 계속해서 마음 쓰지 않으면 안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 추상적으로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 환경에 비추어 설명해야 만 한다.“(PO 4)
그런데 최근, 매우 애매한 사고 방식이 나타났다.
-지문날인 폐지운동을 위해 싸우는 것은 복음 선교다(1989.3)
-이건 어쩔 도리 없이 부정이 팽배한 사회 안에서, 적어도 교회라도, 청년이 해방되고, 가지고 있는 힘과 가능성을 드러내, 그것을 충분히 발휘해, 자신들의 외침을 실현해 가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 그것이 젊은이에게 있어서 복음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작은자의 외침에 응답해 연대하고, 함께 걸어감으로써, 그들의 일어섬과 실행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며 하느님 자신이 거기에서 움직이시고 계심을 알리고, 그들을 격려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수확”이며, 기쁨의 소식을 가져다주는 복음 선교가 아닌가(1991.2)
-사회의 저변을 기준으로 하여, 가장 소외받는 이들의 “의식주, 건강, 자유”가 실질적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어떤지를 복음적인 시점에서 판단해, 자원을 이용해 과학기술을 활동하는 한도를 정해 가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때만이, 이 운동이 그대로 복음 선교가 된다는 것을 틀림없다.(1991,3)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은 복음선교 그 자체이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복음의 현대판이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 이외로부터는 얻을 수 없다.”(Act 4,12)
-“하느님은 모든 이가 구원되어, 진리랄 말하게 되도록 바라고 계신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중개자는 예수 한 분뿐이다.“(1디모 2,4)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이들의 모두,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한 6,40)
-“영원한 생명이란,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파견된 예수를 아는 것이다.”(요한 17,3)
-성령의 활동 없이는 복음 선교는 이루어 질 수 없다. 복음선교의 주요한 주역은 성령이다.“(EV 75)
[해방을 알리는 기쁨]
성령은 학대받는 이들을 해방하도록 예수께 불어넣어졌다. “하늘의 아버지의 동정심을 예수의 마음에 불어넣어졌다.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그들의 외침을 들은 하느님이 무관심 할 수 없으셔서, 그들은 해방을 위해 모세를 보내셨다. 예수가 병자, 악령들린 이, 굶고 있는 곤충, 목자 없는 양떼를 보고, 동정심을 느껴 그때마다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행하셨다.. 어느 때는 병자를 고치시고, 어느 때는 악령을 쫓아내고, 어느 때는 빵을 배불리 먹여주셨다. 어느 때는 추수한 일꾼들을 보내도록 기도하라고 지시했다. 몸과 마음을 위로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해방시키셨다. 최종적으로는, 예수의 빠스카에 의해 우리의 모든 악의 근원인 피와 악령의 힘, 죽음의 힘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다. 우리는 같은 성령에 충만해 예수의 사명을 이러 받아 그 사명을 완수하도록 파견되고 있다.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2000년의 교회의 역사 안에서, 교육, 복지, 의료사업, 피의 용서들에 의해 그 해방이 여러 형태로 행해져 왔다. 1960년대에는 개발이 빈곤을 없이했고, 평화를 지향하는 생각들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부유한 나라는 더욱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나라와 더욱 더 가난해 졌다. 그후, 사회구조 악으로부터 그 구조의 피로부터 해방되도록, 특히 남미에서 눈뜨게 되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비유, 마지막 심판의 교훈은 오랫동안, 자선가 복지사업을 장려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물론, 죽어가는 사람들을 간병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강도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의식주가 없는 이에게 이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노동을 통해 얻은 돈으로, 그것을 확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 아닌가? 병자를 간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병에 걸리지 않은 환경, 식생활,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만드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이 아닌가? 나쁜 사회 구조 때문에 생기는 재난을 수습하는 것은 당연한 길이나, 그 재난의 원인이 사회구조 악을 없애려는 활동이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닌가?
다양한 재난의 원인은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이이다. 많은 이들의 협력이 오랫동안 필요하다. 그리고, 그리고 그 원인을 없애는 활동의 성과는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이는 계속 비난받고, 박해받는다. 그리고, 이 활동을 하는 이의 수는 매우 적다. 그러나 재난을 수습하는 이는 그 성과를 확인 할 수 있고, 많은 이로부터 인정받고, 호평을 받는다. 이런 이의 수는 원인을 찾아가는 이들과 비교해서 굉장히 많다. (f) 마더 데레사, 와 김지하(金芝河)
교회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사제들은 해방신학의 요점을 알아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 적인 사랑을 살아가야 한다.(Pastoral guide, nr. 9)
신자 사도직에 관한 교령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정의의 입장에서 당연히 베풀어야만 하는 것을, 사랑의 선물로 생각하고 베풀어서는 안된다.
2. 재난의 결과뿐만 아니라, 그 원인을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3. 도움을 바라는 이들이 , 의존에서 자립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현대세계헌장에서는 “현대인이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모든 고통받는 이들의 것은,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기쁨, 희망, 슬픔이기도 하다. 인간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마음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메델린 회의(1968)는 해방신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푸에블라 회의(1979)와 Santo Domingo 회의(1992)는 그것을 재확인했다. “말 못하는 이들의 음성이 되도록”
라찡거 주교는 몇 가지 비난을 받았지만 남미의 모든 신학자가 지적 받았던 잘못을 하지는 않았다. 이하의 생각들은 예수께서 바라시는 해방에 적합한 것들이다.
1.사회 구조악의 근본적, 최종적 원인은 인간의 피에 있음을 인정함
2.그러나, 동시에 부정한 사회구조는 그 사회악의 하나의 중요한 원인임을 인정함.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죄에 대한 투쟁과, 부정한 사회구조에 대한 투쟁을 떼어놓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부정한 사회구조와 인간의 마음을 동시에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해야만 한다(Instruction on Liberation, 1986, nr. 75). 카마라 주교가 말하길 “내가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줄 때,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하지만, 굶주림의 원인을 찾을 때에는 공산당원이라고들 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상,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사랑과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3.일종의 투쟁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부정, 거짓, 악에 대해 중립을 지키지 않으셨다. 악한 이를 사랑하신 하느님은 악을 용서하지 않고 악과 타협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악, 부정, 죄를 증오하지만, 죄인, 적을 사랑하도록 불리워졌다. 군인에게 뺨을 맞으신 예수의 태도를 떠올리자(요한 18,23). 부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예수의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투쟁은 압박하는 계층을 무너뜨리고,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반성하여 생활 방식을 바꾸도록 항의, 대화 교섭한다(nr. 77). 교황은 자기 방위권을 인정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Joseph Kalinowski와 Adam Chmielewski를 복자품에 올릴 때(1983, 6,23) 설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국의 독립을 얻기 위한 활동에 참가한 것은 , 그들에게 있어서 성인에의 길에 들어서는 발판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주의에 항거한 요셉은 시베리아에 추방되었고, 아담은 다리 한 쪽을 잃었다.
4.우리의 생활 방식이나 행동은 가장 약한 처지에 있는 이를 편에 서시는 하느님이 모습을 드러내야만 한다. “교회는, 교회에 맡겨진 복음적 사명에 따라, 약자,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도록 요구되어지고, 사람들의 이러한 정당한 요구를 식별해, 공동선을 지향하며, 약자, 가난한 이들의 충족을 위해 손을 뻗치도록 요구되고 있다(S. R. Soc. nr. 39).
5.“정의에의 투쟁은 복음 선교의 하나의 기본적인 요소이다.”(Synod, 1971; EN. nr. 30-31). “사회교리를 보급하는 것은, 교회의 복음선교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교회는 참다운 개발, 발전의 본성, 저건, 목적 등을 생각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이행한다. 곧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 자신 그리고 인간의 진실을 밝히고 이야기 할 때, 그리고 이 진실을 구체적인 상황에 연결시켜, 적응할 때, 긴급과제인 개발상의 문제 해결에 귀중한 공헌을 하게 된다(S. R. Soc. 41)
6.물론 우리는 손에 무기를 들고, 체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유혹에 지지 않도록 마음 써야 한다. 교회는 정당방위권을 발동해, 동란(투쟁)을 일으킬 정당성의 기준을 명기하고 있다. 많은 학살과 파괴를 체험한 알바니아 인들은 세르비아 인과 평화적으로 공생하는 곤란함에 처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권력자난 부자들은 폭력적인 정책을 꾸려가기에 압박 당하는 시민은 그것을 뒤집으려 한다. 그리고 그들의 해방 운동만이 폭력적이라고 부당하게도 비난받는다. 우리는 간디의 Sayagraha(진리의 힘), Martin Luter King, Cesar CHAVEZ, Lech WALESA등의 투쟁방법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새로운 형태의 압박과 노예제도를 만들어 낸다(EN, nr. 37). 무기, 핵무기, 군대 없이 나라의 안전보장을 꾀할 방법을 연구하고 전 국민에게 가르쳐야만 한다.
7.이상과 같은 선교활동은 정치적인 활동이라고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현상유지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획에 맞지 않는 현상을 비난하고, 항의하고,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과 활동에는 반드시 정치적인 면이 내포된다. 의식하건 안하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활과 활동이 약자 편에 서 있는가 어떤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정치 활동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에, 이웃사랑의 훌륭한 표현이라고 비오11세는 말한다. 선교사가 정치활동을 하고있다고 비난받을 때는, 현 체제를 반대할 때에 한정된다. 내세의 일만을 생각해, 세상의 문제와는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신앙과 관계없이 세상의 문제에 관여해 애쓰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GS, nr. 43).
8.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Sect주의가 아니라, 교회의 보편적인 사명을 실제적으로 행하는 것이다(Instr., nr. 68). 주님의 방법을 자신이 방법으로 한다. 한사람이라도 빠짐없이 최선의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방법을 택한다.
9.해방 신학자들은 때때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용어, 분석을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받는다. 사회의 구조적 악의 원인을 밝히고, 그것을 없애려 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인가? 인간이 정직한 성인처럼 보이더라도, 부정한 사회구조 안에 있으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 부정에 협력하고 가담해 버리게 된다. 그는 그 구조에 따라가게 될 것이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선 이라는 원리를 인정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Laborem Exercens, nr. 12; Il, nr. 87).
“착취하지 마라”라고 가르치는 성서(Deut. 24,14; Lev. 19,13)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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