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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7) 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에서
주님의 탄생 예고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본문]
일반적으로 믿음을 요구하는 사람이 그 믿음을 북돋아주는 것이 윤리적인 통념입니다. 그리하여 천사 가브리엘이 신비를 전할 때, 동정 마리아에게 한 가지 예를 들음으로써 그 믿음이 북돋아지도록, 한 나이 많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잉태한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자, 전갈을 불신했거나, 천사의 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거나, 증거로 든 예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에 대한 기쁨에 넘쳐서, 봉사하려는 경건한 마음에 차서, 그리고 그 기쁨에 이끌려 급히 유다 산골마을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마리아가 높은 곳 말고 어디로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겠습니까? 성령의 은총은 느린 노력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부녀들이여! 여러분도 임신한 친척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할 근면함을 배우십시오. 전에는 가장 깊은 내면의 방에서 머물던 마리아를, 동정녀의 부끄러워함도 군중 앞에 나타나는 일에서 붙잡지 못했고, 산악의 험난함도 마리아의 열정을 저지하지 못했고, 여행의 먼 길도 마리아의 의무수행을 지연시키지 못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본분을 생각하면서, 손해는 생각지 않고,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성별을 생각지 않고, 급히 집을 떠나서 산골로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 2장 19∼20절
[해설]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몇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자.
1) 주님은 믿음을 갖도록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당신의 구원사업의 계획을 알려주신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믿음을 도와주시고 북돋아 주시기 위해서 친척 엘리사벳이 주님이 베푸신 기적의 은혜로 아기,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주신다.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사실이 마리아에게 믿음을 갖도록 마음을 준비시켜 주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먼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도움을 주신 것을 언급한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은혜를 간직하도록 도움을 베푸는 주님이시다.
2) 동정 마리아의 방문은 엘리사벳과 그 가족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는 방문이었다.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는 방문은 언제나 천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마리아의 방문은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를 뛰놀게 만들었고, 엘리사벳의 입에서 찬미의 기도가 나오게 도와주었고, 마리아도 기쁨에 넘쳐 찬미의 노래를 주님께 불렀다. 이처럼 은혜로운 방문은 여러 사람에게 기쁨과 축복을 안겨다 줌을 알 수 있다.
3) 성령께서는 지체함과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마리아는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분이시다.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길을 서둘렀다. 사실을 확인하러 가려는 것이 아니라, 믿는 마음으로 주님의 놀라우신 업적을 찬양하러 길을 서두른다.
산위로 이끄심은 암브로시우스의 설명을 따르자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뜻한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거룩한 곳이며, 예수께서도 기도하시러 자주 산에 올라가셨다.
산에 오른다는 말은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설명에 의하면, 주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심을 믿는 것,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낳으신 것을 믿는 것,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던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승리자가 되신 것을 믿는 것,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산으로 올라감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천주의 모친 마리아는 믿음의 눈으로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신 은혜의 어머니가 되셨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6) 암브로시우스의 ‘죽음의 복됨’에서
죽음을 본받는 자
[본문]
사도는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복된 죽음이 있음을 압니다. 사도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생명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생명이 활동하려면 죽음이 먼저 작용해야 합니다. 죽음 후의 복된 생명이란 승리 후의 복된 생명, 곧 온갖 투쟁을 종식시키는 복된 생명을 말합니다.
영적인 법에 대항하는 육적인 법의 세력이 사라지고, 죽어야 할 육신 안에 모든 격정이 소멸되어 마침내 승리가 자리 하는 생명을 말합니다. 이러한 죽음은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의 권위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 활동하고 여러분 안에는 생명이 활동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지상 장막의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열리도록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도는 현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하라고 권고합니다.
암브로시우스, ‘죽음의 복됨’(De bono mortis) 3장 9절
[해설]
암브로시우스(339∼397) 교부는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함께 서방 교회의 위대한 네 명의 교부에 속한다. 그의 생애에 관해 좀 더 알고자 한다면 ‘내가 사랑한 교부들’(분도출판사, 2005)을 참조하면 충분할 것이다.
‘죽음의 복됨’은 죽음에 관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강론이다. 불행하게도 이 강론이 언제 행해졌는지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암브로시우스 교부가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적 용어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 철학과 가톨릭 신학에 정통함을 반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의 복됨’에서 세 가지 종류의 죽음을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죽음. 둘째, 신비적인 죽음. 셋째, 육적인 죽음. 영적인 죽음은 죄이며 육적인 죽음은 물리적인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적인 죽음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란 신앙의 핵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앙인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에서 찾는다.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슬을 깨뜨리는 사람은 죽음을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사야는 ‘온갖 불의의 사슬을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 주어라. 압박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려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이 우리 인간 세계에 들어옴을 허락하신 것은 죄가 끝장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죽음의 복됨’ 3, 9)
암브로시우스 교부에 의하면,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려면 죽음을 본받아야 한다. 죽음을 본받는 것은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 사슬을 깨뜨리는 것이다. 위의 본문은 죽음을 본받는 삶을 죽음이 작용하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 삶에 작용하는 죽음을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비적인 죽음으로 간주하며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죽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신앙인은 삶의 가치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은총의 사순시기를 잘 보내기 위한 지혜를 찾고 있다. 현실 속의 불의를 외면하고 삶을 압박하는 멍에를 그대로 간직한 채 부활의 희망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죽음을 본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외면한고 있다면, 먼저 신비적인 죽음이 작용할 영적 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해 인간 생명이 끝나지 않도록 주님께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신비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가 없어지고 부활을 통해 인간 생명이 영원히 남게 되도록 배려하셨기 때문이다.(참조: ‘죽음의 복됨’ 3, 9) 결국 신비적인 죽음은 우리의 시각을 이웃에게로 향하게 한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 6∼7) 아직도 사순시기가 그저 습관적인 전례의 일부분으로만 다가온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면서 신비적인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가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 부활에로 다가 설 수 없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을 징검다리에 비유한다.
“죽음이란 만인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징검다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영속적인 ‘건너감’이어야 합니다. 즉 부패에서 비 부패에로, 필멸에서 불멸에로, 혼돈에서 평온에로 ‘건너감’에 따라오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꺼워해야 합니다. 실상 죽음이란 악의 매장이요, 덕의 일어남이 아니겠습니까?”(‘죽음의 복됨’ 3, 9)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해보자!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5)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편지’에서
“기도의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기도의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 안에 머무르시고 거니실 수 있는 안식처를 마련해 드린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내적 자아가 천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비록 골고타 언덕이나 올리브 동산이나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우리가 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맞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단 한 번도 주님을 고백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편지’ 2
[해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한 이 말은 최후심판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다녀왔느냐 하고 물으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성지순례가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지순례를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지순례 지상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성지순례가 오히려 도덕적으로 위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나 지금이나 열심한 신자들은 순수한 신앙심에 가득 차서 성지순례를 간다. 그레고리우스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때에도 성지순례에 대한 부작용이 많았나 보다.
오늘날에 비해서, 그때에는 성지순례를 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고, 또 돈 많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지순례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마치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것이 구원의 보증인 양 착각하거나 성지순례를 신앙심의 척도로 간주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성지순례를 가서 기도해야만 주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이 같은 세태를 비판하면서, 자신도 성지순례를 다녀왔지만 성지순례가 자신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성지순례를 가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자신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거닐어보았지만, 자신의 신앙이 성지순례를 가기 전보다도 더 나아지거나 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사셨던 그 장소, 주님께서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가서 기도를 해야만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한다.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기도하는 이의 마음 자세가 훨씬 더 중요하다.
즉, 어디에서 기도를 하느냐 하는 기도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고 거니실 수 있도록 우리 영혼 안에 안식처를 마련해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기도의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나치게 성지순례를 강조하는 세태를 지양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성전건립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모아 아름다운 성전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마음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커다란 성전을 짓는 데에만 온 정성을 다하고 우리 안에 ‘마음의 성전’을 짓는 데에는 소홀히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에 빗대어, 오늘날의 성지순례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성지순례가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순교 장소나 순교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떠나는 성지순례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신자들은 마치 야유회를 가는 것처럼 약간 들뜬 기분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성지순례를 갈 때에는 미리 준비한 유인물과 기도서 등으로 마음의 준비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성지순례의 분위기와 마음가짐을 갖지만, 돌아올 때의 모습에서는 성지순례를 다녀온다는 분위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돌아올 때에는 대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떠들면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버스마저 휘청거리는 것 같다. 그야말로 야유회를 다녀오는 분위기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갈 때만큼은 성지순례를 가는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간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지만, 성지순례의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목숨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으러 간다면, 적어도 그 날 하루만큼은 기도와 묵상, 감사와 찬미 속에서 지내야 하지 않을까? 경건한 마음으로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 않을까?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4) ‘사막 교부들의 생애’에서
“6일 동안 단식을 한 형제가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병자들을 돌본 형제와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본문]
어떤 형제가 노인에게 물음을 던졌다.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한 형제는 독방에서 6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힘든 노동을 했습니다. 또 다른 형제는 비록 단식은 하지 않았지만,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떤 형제의 일이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릴까요?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6일 동안 단식을 한 형제가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병자들을 돌본 형제와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사막 교부들의 생애’(De vitis patrum) 17, 18
[해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해주는 것, 곧 그리스도인의 삶과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근본은 바로 기도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인과 무신론자들도 기도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날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 매일 매일 기도를 드린다. 자녀들을 위해 바치는 어머니들의 기도는 가히 눈물겹도록 헌신적이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자녀의 대학 합격을 기원하며 바치는 청원기도도 중요하고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결코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올바른 기도는 아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기도가 기도로서만 끝나버린다면 즉, 입으로만 바치는 기도로서만 끝나버린다면, 그 기도는 결코 올바른 기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바쳐야 할 올바른 기도란 무엇일까? 그 해답을 교부들의 가르침 안에서 찾아보자.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는 올바른 기도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선행 실천을 강조하였다. 올바른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선행이 기도에 수반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선행이 기도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카이사레아의 주교였던 바실리우스도 같은 맥락에서 말한다. “만일 그대가 혼자 산다면, 그대는 누구의 발을 씻어줄 수 있으며, 누구를 돌봐줄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한다 할지라도, 비교할 대상이 누가 있겠습니까?”(대 바실리우스, ‘규칙서’ 7)
혼자 사는 은수자는 비록 혼자서 바치는 기도의 기쁨은 만끽할 수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은수자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바실리우스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수도자들의 삶이 혼자 사는 은수자들의 삶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교부들은 한결같이 섬김과 봉사에 담긴 사랑과 애덕의 소명이 기도의 소명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집트 사막의 교부의 가르침도 역시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선행과 자선을 그 기도에 더해야만 할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설교’ 3, 2) 교부들은 자선과 선행이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정당성을 보증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시도록 만들어준다고 강조하였다.
교회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종합해보면,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입으로만 바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 기도가 선행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고 드러나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식과 가족들만을 위해서 기도를 바친다거나,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청원기도만을 바친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다. 기도의 힘으로 선행을 실천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만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기도에는 두 축이 있다. 한 축은 기도이고 다른 한 축은 사랑과 자선과 선행의 실천이다. 이 두 축이 완전히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부들은 기도와 선행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 같은 가르침을 말씀하셨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 37∼40)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43) 교회의 일치와 평화
치프리아누스의 ‘가톨릭 교회 일치’에서
[본문]
“우리가 그리스도의 상속자라면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 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해 일하고 마음이 온순하며, 솔직한 말을 하고 사랑으로 화목하며, 일치의 고리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는 이러한 일치가 있었고 새로운 백성인 신자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 그러나 우리 안에는 이러한 일치 정신이 약해지고, 관대한 활동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치프리아누스 ‘가톨릭 교회 일치’ 24∼26.
[해설]
베네딕토 16세와 함께 튀빙겐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한 한스 큉은 “종교간 평화 없이 국가간 평화 없고, 종교간 대화 없이 종교간 평화 없으며, 종교들의 근본 탐구 없이 종교간 대화 없다”고 말하였다. 세상이 그렇게 말랑말랑하고 부드럽지 않은지 종교간의 평화를 이루고자하는 한스 큉의 희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꿈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한국의 여러 종교는 황금 분할이라 할 정도로 고르게 분포되어서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이 포괄적인 종교성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우리는 한스 큉이 이처럼 절박하게 말한 내용을 심각하게 느끼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속살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그렇지도 않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의 보이지 않는 서로 뿌리 깊은 선입관, 적대감과 갈등으로 표출되는 비방은 유치찬란할 정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와의 일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공의회 문헌이 불교나 이슬람교를 대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반면,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개신교)를 일치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을 공유하며,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사로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개신교 신자들을 갈라진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종교간의 화해와 일치를 강조한 이후 개신교와의 협력을 모색하면서 기존의 배타적 입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 결과 화해 노력은 여러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상황은 이러한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 듯 하다.
교회 일치에 대한 접근 방법이나 노력은 교회 일치 운동을 소개하거나 교회 문헌을 이해시키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더구나 교회가 일치를 위한 규범을 실천하도록 촉구하고 있음에도 실제로 신자들은 일치 운동에 대해 관심과 이해가 거의 없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상대방의 티끌이 아닌데도 티끌로 여겨 침튀겨가며 서로 비방하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개신교와 가톨릭은 교의 문제를 비롯하여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관점이 있다. 이는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기에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외의 인간적인 결점으로 생겨난 모든 요소에 관해서는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교황 바오로 6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둘째 회기 때 개신교 신자들에게 한 말에서 스스로를 낮춘 포용적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교회 분열의 책임이 있다면, 우리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갈라진 형제들에게도 용서를 청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선언을 받아주시고 우리 모두가 참다운 형제적 평화를 되찾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낮은 아니 십자가를 지는 자세를, 자체에도 여러 교파가 있는 개신교에 기대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조금 무리인 듯 하다. 또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보수적 배타성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가톨릭교회에 기대를 걸고 싶다. 여하튼 이 기대에는 자기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많은 것을 내놓고 기득권을 포기하는 뼈 깎는 고통과 불편이 수반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한국 그리스도교는 남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사랑을 가르치기 전에 형제끼리 먼저 대화하고 화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일치에 관한 추상적인 거대 담론이 아니라 구체적 대안을 가지고 어떻게 일치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 예를 들어보겠다. 지금도 우리는 같은 하느님/하나님을 믿는 타 교파에서 출간한 책을 읽을 때 껄끄러운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더구나 몇 년 전 가톨릭 연구소에서 일할 때 개신교 동료 학자가 타르굼 성서를 번역하면서 하느님/하나님을 사용하지 못하고 ‘엘로힘’이나 ‘주님’으로 사용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니 용어라도 일치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나라의 가톨릭과 개신교는 신명(하나님/하느님)을 비롯하여 성서의 명칭, 신학 용어, 심지어 인명과 지명도 서로 다르게 사용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서로 상대 교파의 용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러한 배타심은 그리스도인의 일치 정신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인간 정신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작지만 엄청난 문제에 일치를 이룬다면, 이는 이 보다 더 큰 문제를 일치시킬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한 사람의 바람은 그냥 꿈이다. 그러나 수천 사람이 같은 꿈을 꾼다면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두 교파의 신자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도 일치를 위한 꿈을 함께 꿀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고대 교회에도 분열이 있었고 교부들은 교회를 일치시키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교부들의 지혜를 흉내내어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