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구속사 강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
출애굽기 23장 4-5절에는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면 반드시 그 주인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였고 원수의 나귀가 짐을 싣고 가다가 무거워서 넘어지면 그것을 도와 그 짐을 풀어주라고 함을 볼 수 있다. 소나 나귀라는 것은 사람의 소유물이지만 여기에서는 재산권을 인정하거나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간의 법도를 상징하는 말이기보다는 짐승에 대해서라도 긍휼을 베풀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비록 길 잃은 원수의 짐승일지라도 다시 그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것은 주인의 재산권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그 짐승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긍휼이다.
짐승이 주인의 손에서 떠났다는 것은 안정이 없고 생명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의미이다. 길을 잃은 짐승이 어디에서 마음껏 음식을 먹거나 생명의 보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의 길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언제든지 들짐승이나 뱀이나 혹은 독초 등의 위험에 빠져 있으며 심지어 굶어 죽을 수 있는 처지에 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짐승을 보거든 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한다는 것은 짐승의 생존권까지라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재산권의 가치로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짐승에 대해서 긍휼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1. 하나님 나라 통치의 기본 원칙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 각각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고 존재적인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이점을 생각하라고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귀가 짐을 너무 많이 실어서 넘어지게 되면 그 짐을 부리어 주라는 말씀 역시 그 나귀가 짐을 질 수 있을 만큼의 무게를 지워 주는 것이 그 나귀에 대한 긍휼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것들을 놓고 볼 때에 그저 짐승 하나가 길을 잃었으니까 그 주인에게 돌려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특별히 원수의 짐승에게까지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원수의 짐승이 길을 잃어서 헤매고 있는데 못 본체하고 지나가 버린다면 죽든지 아니면 그 주인이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 원수가 자기의 짐승을 잃어 버렸으니 속이 다 후련하다'는 마음이 쉽게 들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원수의 짐승을 찾아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에는 단순히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뿐 아니라 그 원수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마땅한 도리가 그 안에 숨겨져 있다. 잃어버린 짐승을 못 본체 하는 식으로 원수를 갚는 치사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 원수가 나쁜 처지에 빠져 있는데 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하고 쾌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돌려 줄 것은 돌려주고 긍휼을 베풀 것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는 사람을 악용해서 마음을 즐기는 저급한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행사하실 만한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격을 내 안에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각박한 사회에서 원수의 짐승을 그 주인에게 돌려준다면 그 사회가 얼마든지 변화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부드러움이 내 안에서 발동하여 원수의 마음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또한 출애굽기 23장 10절 이하에 보면 '안식년에는 땅을 갈지 말고 그 땅에서 나는 소산은 가난한 자가 먹고 그 나머지는 들짐승이 먹게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들짐승에게까지도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안식일에는 '너뿐만 아니라 종과 짐승도 같이 쉴 것'이라고 하신 말씀 역시 짐승들까지도 사람과 같이 동등하게 취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존권에 대한 보장과 진정한 안식에 대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안식일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쉬게 하고 안식년에는 들짐승들이 밭에서 양식을 얻도록 하고 추수할 경우에는 밭의 네 모퉁이는 그대로 두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나 과부나 고아의 양식이 되게 한 것 등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근원이 왔고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주시고 보장해 주신다는 신뢰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네 모퉁이를 추수하지 않고 흘린 곡식을 다시 줍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누려야 할 참된 안식은 하나님 품안에서 누려야 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곡식이나 많이 추수해서 많은 재물을 모아야 편히 살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록 추수를 다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진정한 풍요는 하나님 품안에서 누려야 할 것을 여기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긍휼을 베풀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이 땅에서 나에게 진정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거룩한 안식에 참여한 자로서 이 땅에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나에게 원수 된 자에게 또 내가 알지 못하는 불쌍한 자에게 심지어는 들짐승에게까지 긍휼을 베푸는 것은 내가 이 땅에서 천 년 만 년 살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안식처가 있고 그 나라에 들어가야 될 사람으로서 충분한 여유를 갖고 살아야 될 이유를 알고 있다.
2.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피조 세계
긍휼의 정신에 대하여 또 다른 가르침은 출애굽기 23장 19절에서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젖이라는 것은 어미가 새끼를 양육하기 위해 생산되는 것으로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새끼를 삶아 죽이는데 사용된다는 것은 자연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악질적인 것으로 저주스러운 상태이다. 이와 비슷한 용례를 신명기 22장 5-7절을 보면 길을 가다가 어미 새와 새끼나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 동시에 취하지 말고 그 어미는 놓아주고 새끼나 알만을 취하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어미 새는 다시 알을 낳고 새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놓아주되 새끼나 알을 양식으로 취하도록 하였다. 레위기 22장 28절에 보면 어미와 새를 동시에 한 날에 잡지 말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미젖으로 새끼를 삼지 말고 새와 알을 동시에 취하지 말고 어미와 새끼를 한꺼번에 잡지 말라는 말들은 가볍게 넘길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각각의 짐승들을 내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위치에 두셨는데 이것은 짐승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 하나 하나까지도 다스려야 할 것을 의미한다. 다스린다는 것은 그저 통치하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의무도 그 안에 있다. 피조물들을 인간이 다스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땅을 정복하고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짐승들에게 온정을 베풀고 어미젖으로 새끼를 삼지 않고 어미와 함께 새끼를 취하지 않는 것도 온정을 베푸는 것이다. 이런 작은 일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가는 것이며 이런 일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은혜라고 한다면 그 은혜는 사람을 통해 짐승들에게도 임하여야 할 것이며 그러한 위치에 우리가 서 있을 때 책임을 다한다. 이러한 위치에 바로 서 있지 못하고 사람이 범죄한 결과 자연 질서가 깨져서 짐승들이 포악해지고 서로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젖으로 짐승을 삶아 먹는다든지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취한다든지 한 날에 어미와 새끼를 잡는다는 것은 사람이 포악하고 흉악해져서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러한 악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경영이 무시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에서는 긍휼이 있을 뿐이지 그처럼 포악과 잔인(殘忍)은 없어야 한다.
이처럼 진정한 긍휼이라는 것은 신(神)의지의 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점에서 긍휼은 신적 의지의 표현이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긍휼을 입은 자유인으로서 인격을 발현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긍휼의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본분을 완성하는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 자연을 다스리고 피조 세계를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한다.
출처: 기독신학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송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