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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여호와께
시편 3편
다윗은 그의 생애 중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쓴 시가 14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로서 평생을 영웅답게 살던 다윗이 노년에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주해야 했던 심경을 그린 것으로 환난을 당한 성도의 간구를 말하고 있다.
이 시는 환난을 비탄하는 것으로 끝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한 승리의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1. 다윗이 당하는 고난(1-2)
① 많은 사람이 대적한다.
다윗은 이 짧은 구절에서 많다는 말을 3번이나 쓰고 있다. 다윗을 둘러싸고 있던 많은 무리들이 이제 다윗에게서 돌아서서 다윗의 대적이 되었다. 다윗이 지금 처한 위기는 심각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자기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②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쫓겨다니는 다윗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말하고 있다. 이 2절은 다윗의 친구들의 말이라고 한다. 즉 다윗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믿음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많은 대적들과 또 자기의 믿음을 흔드는 무리들로 둘러싸인 다윗의 고난을 봅니다.
믿는 이에게 이런 고난이 따릅니다. 우리의 신앙을 대적하는 많은 불신자들과 또 믿음을 흔드는 무리들이 있습니다(신앙의 불필요성과 신앙의 무가치에 대하여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2. 하나님에 대한 고백(3)
그런 고난 가운데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의 믿음은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① 나의 방패. - 하나님은 보호자이시며 어떠한 위험에서도 건져줄 구원이시다.
인간의 방패는 단지 한면만을 막지만 여호와는 모든 면을 막아주신다.
다윗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대적들을 막으시는 방패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② 나의 영광이시요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영광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믿음을 흔드는 말로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고 하지만 다윗은 고백하기를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나의 영광이시며, 그만이 나를 높이실 것이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환난 가운데도 믿음을 잃지않고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고백하며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3. 고백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행위(4-6)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그런 고백을 하기까지 다윗에게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경험, 하나님의 하신 일에 다윗의 신앙간증을 말하고 있다.
① 성산에서 응답(4)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다. 다윗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간음한 죄인인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던 그 하나님, 그는 분명한 기도의 체험이 있었고 그 사실이 그의 믿음의 바탕이 되었다.
살아있는 믿음은 체험되는 믿음이고, 체험이 바탕이 된 믿음이 주님이 원하시는 살아있는 믿음이다. 주님은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믿음이란 역사, 즉 나타남을 가르치셨다.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기에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②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간증(5)
내가 자고 깨었으나 - 즉 지난 밤을 생각해보니 그렇게 많은 대적이 둘러 있는 가운데서 한 밤을 자고 깨었지만 무사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음을 체험으로 확신하고 있다.
③ 그러므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두려워 할것이 없다.
기도응답의 체험과 보호하심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 두려워 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날마다 기도응답의 체험과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에서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고 승리하는 신앙인 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함(7-8)
① 구원의 간절한 기도
이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하며, 그의 은혜를 돌아본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부르짖는 것이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하나님의 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② 백성을 향하여 복을 비는 다윗
이제 다윗은 더 넓은 마음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 그들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다윗은 이 고난은 전부 자기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자기를 배반하고 압살롬을 따랐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의 복으로 함께할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성품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의 체험이 있는 사람은 어떤 위험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며 그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하며 넓게하고 사랑하게 한다.
고난 중에 필요한 성도의 믿음 : 한태완 목사
그 무시무시한 로마황제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믿음의 생활을 했던 무리들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입니다.
네로황제가 시를 쓰기 위하여 로마 시에 불을 질렀습니다. 6일 간의 화재로 인하여 로마 시의 삼분의 이가 타버립니다. 그 죄를 기독교인들에게 전부 뒤집어씌운 네로황제는 죄가 전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네로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밀납을 온 몸에 입히고 그 육신에 불을 붙여 황제의 정원을 밝히는 등으로 썼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네로황제는 원형경기장에 그리스도인들을 몰아놓고 굶긴 사자들을 풀어놓았습니다. 그 원형경기장에는 로마인들과 네로황제는 사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뜯어먹는 것을 즐겁게 관람했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빈정거리면서 비웃음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네로황제는 밤에 사자 밥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합니다. 공포에 질려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황홀한 얼굴로 웃으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자 밥이 되는 공포의 순간에서도 저토록 밝게 웃을 수 있는가? 도대체 저들이 믿는 종교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종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리면서 네로황제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네로황제는 정신병자가 되어 자살로 그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 황제 이후로 9명이나 되는 악한 로마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지속적으로 찔러죽이고 화형을 시켰으며 온갖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며 그들을 저주했습니다. 6번째 황제인 맥시무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은 집단으로 50명 이상씩 한꺼번에 합장했습니다. 그는 지독하게 기독교인들을 핍박을 한 악명 높은 황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7번째 데리우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가장 강도 높은 상상초월의 방법으로 소름끼치는 고통을 가한 자입니다. 심지어는 독사와 전갈이 가득한 가죽부대에 기독교인을 넣어 바닷물에 던져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환란과 핍박을 받을수록 강해지고 놀라울 정도로 활성화됩니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이 배가될수록 더욱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핍박이 오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오히려 주님을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합시다.
위 본문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로서 당시 다윗이 자신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부터 도망 나와 유리방황하는 중에 지은 당시 처절한 상황을 대변해 주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아들이었고,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배신하고 반역하여 아들은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의 자리를 침탈하였고, 부하들은 힘 있는 압살롬의 편에서 이전의 주군을 죽이려 함께 칼과 창으로 잡으러 쫓아오는 상황은 그야말로 가장 처참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 아꼈던 자신의 부하들이 이렇게 하루 아침에 배신과 반역을 하리라 다윗인들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왕의 자리를 노리고 아버지마저 죽이려 달려들기에 부리나케 도망 나와 유리방황하고 현재 어려움을 겪으며 어찌 보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광야의 도피생활, 자신을 광야까지 내몰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다윗의 간절한 마음은 오늘 현재 어려움을 당하고 어려움이라는 고난 앞에서 힘들어하는 많은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1절에서는 다윗이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하나님께 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은 멀리 있는 블레셋이나 앗수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인근 친척 자식 그리고 사랑하고 아꼈던 충성스러웠던 부하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윗을 배반하고 반역하여 대적하려 하는 상황입니다. 어찌보면 다윗은 그 어느 적들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완전한 대적자들(예를 들면, 블레셋이나 아말렉 또는 그 외 가나안 족속들)이었다면 도리어 쉬웠을 지도 모릅니다. 대적자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자기 인근에 자신의 자리나 이권 그리고 탐욕 때문에 그 자리를 노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2절에서 그들은 쫓기고 있는 다윗을 보며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자신들에게 힘과 권력이 온 것을 보니 말입니다. 그 힘과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 그들의 욕망과 탐욕으로 이루어진 것인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2절에서 다윗을 향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 말은 자신들에게 권력이 있으니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그들에게는 착각이자 모순이자 자기 도취였음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후 그들은 삼하16장 이하에 일어날 일들을 아직 여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3절 이하의 모든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교훈을 삼습니다. 이러한 처절한 배신과 배반 반역 속에서 자신의 목을 향하여 창과 칼을 겨누고 있는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모습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방패라 인정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방패로 삼고 눈에 보이는 창과 칼을 막으려 하는 모습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자신에게 있는 영광이라 찬양까지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머리라 인정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물리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힘앞에 무기력하게 놓여져 있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그 상황 안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뢰하는 모습은 오늘 우리개개인의 어려움 삶이 놓여져 있을 때 그것을 포기하거나 놓지 않고 끝까지 그분을 인정하는 모습은 우리의 신앙의 삶을 본받게 만듭니다. 극한 상황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져 있을 지라도 다윗의 시편 3편의 고백을 오늘 우리도 한 번 되뇌여 보면 어떨까 감히 추천해 봅니다. 그 안에서 찬양해보십시오. 그 안에서 기도해 보세요, 그 안에서 자신을 목을 내놓고 그 목을 하나님의 신뢰의 방패로 한 번 막아보십시오.. 어찌 되는가? 잠잠히 지켜 볼 일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의 역사하심을 기대해 봅시다.
본문 1, 2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우리의 대적은 보이는 대적과 보이지 않는 대적이 있습니다. 보이는 대적은 사람일수도 있고 사회적 구조일수도 있지만 성도에게는 보이지 않는 대적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적과 싸우는 전투적 교회입니다. 우리의 대적이 많은데 그 대적들이 하는 치명적인 말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들에게 쫓길 때는 버림받은 자처럼 취급을 당했습니다. 즉 사울과 아들과 비류배들로 부터 조롱을 당할 때 버림을 받는 자 같았으나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을 욕하고 때리고 침 뱉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기적으로 살리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예언된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되고 무덤이 열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비방과 핍박을 받을 때 우리가 신앙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잡아야 할 중심사상은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는 것입니다.(3절) 이것이 보이지 않는 대적들이 나를 치는 현장에서 중심을 잡는 방법입니다. 어떠한 환난이 몰아쳐도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주의 충만하시고 역사의 주인이 되셔서 하나님이 영원한 영광이 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중심만 잡고 있을 게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4절에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살아계시고 나의 방패와 영광과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만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토의와 계획이과 기획을 세워도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승리는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기 바랍니다. 모세는 모든 사역 가운데 기도하였고 예수님도 어떠한 일에도 부르짖으심으로 하나님의 이적과 기적을 나타내신 것같이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응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성도의 자세는 ‘네기 누워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수많은 대적이 에워싸고 진을 쳐도 평안히 누워자고 쉴 수 있는 것은 내가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지들아 다 내개로 오라 내 짐은 쉽고 내 명에는 가볍다고 하셨고(마11:28)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하셨습니다. 진리와 평안을 누리는 추수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화와의 중심과 영혼과 인생을 붙드셔서 전진과 발전과 성장만 있을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와 동물원에 갔습니다. 사자 굴 앞을 지나갈 때, 포효를 지르며 어슬렁거리는 사자에 놀라서 그 남자아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이 있니?" 새파랗게 질린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빠, 저 사자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철장도 함께 보고 있단다." 당신은 사자를 보고 무서워하는가? 아니면 철장을 보고서 마음을 편안히 가지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재판을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아서 패배한 사탄을 감금하고 다룰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서양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누구나 불화살을 압니다. 인디언들의 불화살은 건물과 창고와 건초 더미 등에 불을 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전술의 의도는 적진에 불을 놓아 정신없게 함으로 방어를 소홀히 하게 하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사탄은 우리가 정면적인 맹공격에 관심을 쏟지 못하게 하려고 불화살을 쏘면서 공격합니다. 우리가 불에 마음이 다 빼앗긴다면 공격하기에 쉬운 표적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잊지 마십시오. 방패는 든든하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빗발치는 화살을 방패로 쉽게 막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께 똑바로 집중되었다면, 이 믿음이 아무리 작더라도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다면, 설사 사탄이 불을 놓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계속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소화기를 열어서 던져주실 것입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119:114)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을 지키시며 모든 어려움 가운데 방패이시며 영광이 되시며 모든 곤경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에게 쫒겨 가는 그 참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대하며 그분의 역사하심을 기도했을 때 놀라우신 주의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 주의 응답이 없었지만 다윗의 믿음의 고백은 주의 응답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러한 다윗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방패와 영광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나의 목소리로 간절하게 주께 부르짖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국민일보에 실린 이광호 목사의 글입니다.
24년 전인 1986년 경기도 반월공단의 지하 59㎡(18평) 작은 교회에서 처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창이 없는 지하이다 보니 모든 생활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단의 많은 노동자들이 교회에 등록하면서 장소가 매우 협소해졌습니다. 그러나 400만원의 전세금을 가지고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가 예배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고 오히려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독재 시절 많은 사람이 고난에 신음할 때 나 역시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교인들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돕는 이들의 손길들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나의 통장에는 2000만원이 넘는 위로금이 모였고 우리는 교회를 이전해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준비하신 하나님은 오히려 그 고난을 응답의 기회가 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호2:21)
본문 6 ~ 7절을 읽겠습니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로마의 네로 황제 밑에는 ‘황제의 투사 씨름꾼’이라는 정예부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 베스파시안이 이끄는 그 부대에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황제는 베스파시안에게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처형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백부장이 부대원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인들은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무려 40명이나 되는 투사들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베스파시안은 천막 앞에 큰 불을 피워놓고는 40명의 군인들에게 옷과 신발을 벗게 한 후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로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불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면 용서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늘 황제 앞에서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고쳐 이렇게 합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40명의 투사! 주 예수를 위해 싸우고 주님이 주실 면류관을 받아 쓸 40명의 투사!’ 밤이 지난 후에야 한 명의 군인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불 곁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때 백부장 베스파시안은 지휘관의 옷을 벗고 장하게 죽음을 맞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하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고통보다 큰 영광을 이미 맛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롬 8:17-18).
본문 8절을 읽겠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온 땅에 주의 복을 내리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방편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시67: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우리는 악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찾아오는 그 수많은 고난들은 우리를 살로 힘겹게 하고 낙심케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이기고 믿음과 의를 지키며 끝까지 나아갈 때만이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을 수 있기에 우리는 결코 그 고난들 가운데에서 지쳐 쓰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에게는 고난을 이기고 끝내 소망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위대한 능력, 그리고 그분의 철저한 공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끝까지 소유하고 더욱 공고히 할 때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 어떤 고난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을 보다 가볍게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진정 여러분 모두 이러한 믿음위에 굳게 서서 모든 고난을 능히 이기고, 영원한 승리의 기쁨에 참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시3:1-2 여호와여 : 칼빈
다윗은 고국에서 쫓기는 몸이었고 모든 지상적인 위로를 전혀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께 애원을 계속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원수들의 조롱과 잔인한 공격, 그리고 자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을 대항하여 부르짖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시편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과 전체교회의 모든 문제가 만사형통하도록 최종적인 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 시편 3편의 주제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입니다.
다윗이 친 자식의 반역을 통해서 일어난 집 안의 음모 때문에 그가 얼마나 비통해 했겠는가 하는 점을 모든 인간들의 인지상정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다윗은 자신이 남의 아내를 욕보이고 무고한 피를 흘린 잘못에 대한 보응으로 하나님께서 이 끔찍한 재앙을 주셨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만약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격려받지 않았더라면 또 사망 가운데서 생명에 대한 소망을 품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절망과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자신의 죄악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본 시편에 그의 기도의 일부만이 담겨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곧 다윗의 간통죄와 우리아에 대한 사악한 배신행위에 대하여 철저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우선 마음의 고통과 두려움의 갈등으로 번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한 다음에 용기를 얻었고 사죄함을 확인하고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 편에 서 계신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서 자기 왕국을 주도해 주실 것이고 그 보호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실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의 아들과 함께 음모에 가담한 전체 족속을 두고 불평을 토론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훼방할 목적으로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다윗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악하고 심술궂은 사람을 들어서 우리를 채찍질하는 매로 사용하실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채찍의 원인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 대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각오하고 또 그러한 반성함으로 회개에 이르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만약 적들이 우리를 핍박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해 올 경우 우리에게 약속된 은혜를 무시하고 짓밟아오는 원수들의 행동을 철저히 봉쇄해야 될 것입니다.
시편 3 편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의 안전까지도 위태롭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1-2절은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 가 많소이다
(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 다" 입니다.
1) 신의 역사에서 다윗은 폐위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버림을 받았으며 그 결과로 그는 자신이 거느리던 신하들과 맞먹는 숫자의 원수들을 맞이해 대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물론 다윗에게 몇몇 충실한 친구들이 함께 싸워주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도움과 보호 때문이 아니라 광야의 은신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대적하는 무리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두고 다윗이 몹시 괴로워했다는 사실은 이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러한 갑작스런 적의 침입은 도저히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경황 중에서도 거침없이 하나님께 자신의 하소연을 아뢰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품에 다 쏟아 놓으려는 의도는 비상한 신앙의 표적입니다.
그렇다면 실로 우리의 공포를 달래는 유일한 길은 사실상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염려를 그분께 내맡기는 일뿐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떨어지는 여러 재앙을 보고 쓰러지고 압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세번째 구절에서는 다윗이 버림받은 자요 소망이 전혀 없는 인간으로 그를 조롱하는 원수들의 교만이 더욱더 뚜렷하게 강조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호소하는 의미는 원수들이 자기가 하나님께 배척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오만이 증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워 보호하시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말씀에는 아마 그들의 불경건이 간접적으로 암시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의 견해가 더욱더 가능한 것은 압살롬이 하나님의 가호에 의한 소망으로 의기양양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을 멸시한 나머지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소개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상대로 그처럼 악의에 찬 분노를 퍼부은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가증스럽고 포악스런 멸시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뜻에서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수차에 걸쳐서 엄청난 위험에서 기적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않고 한 이야기나 다름없습니다.
시편 3 편
불경건한 자들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획책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선의에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할 정도로 주제넘게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만사를 우연으로 돌리거나 인간의 성공이 인간 자신의 힘에 비례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시시비비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무조건 잔인하게 달성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한 하나님의 은택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신자들을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염려를 아무 쓸데없는 무용지물로 여깁니다.
3) '내 영혼을 두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구절의 참된 의미가 아닙니다.
(라멧)이라는 문자가 때때로 히브리어에 있어서 of 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윗의 의도는 더 깊은 뜻을 가집니다.
다윗의 마음은 원수들의 조롱에 심하게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영혼'은 그리워하는 마음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시35:3)라는 말씀은 다른 곳에서도 그대로 일치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자신의 예를 들어서 비록 온 세상이 똑같은 말로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으려고 시도한다 해도 그 소리를 듣는 대신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귀를 기울이며 항상 그가 우리에게 약속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 악인들이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더라도 우리의 기도로 그것을 방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셀라'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간에 의견이 구구합니다.
그것을 확증의 표로 보는데 그것이 '참으로' 나 '아멘'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영원히'라는 뜻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원인 (쎌로)의 의미는 '들어 올리다' 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노래의 화음을 더 높이려고 내는 높은 음성으로 보는 견해를 타당하게 봅니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음악이 감정과 일치하고 그 결과 이 화음은 그 노래의 특성이나 주제와 일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의 원수들이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고 이미 버려진 물건처럼 소망이 끊긴 자로서 그들의 무자비한 조롱을 받는다는 사실을 들어 하소연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준 이 모독의 말에 '셀라'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그 말에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그 다음 자신의 안전에 대한 새로운 확신의 근거를 더하기 위하여 동일한 단어를 반복합니다.
시편 3 편
시3:3-4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이 시편에서 시인 다윗은 많은 원수들의 거짓 선전 때문에 질식(窒息)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진리 신념(眞理信念)을 파수합니다.
곧 많은 원수들이 말한 바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거짓 선전(삼하16:8에 기록된 시므이의 선전 같은 것) 가운데서도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서 동요없이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확신합니다.
다윗의 신앙은 대중의 악선전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세미(細微)한 음성에 견고히 서 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계속하여 하나님을 자기의 구주로 알고 확신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늘 가까이 계셔서 말씀해 주시고 또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4절에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하였는데 "응답하시는도다"란 말( =야아네니 =내게 응답하심)은 히브리어 문법으로 보아 상습성(常習性)을 나타내는 바 언제든지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1. 본문 3절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연결사 '그리고'(칼빈은 3절을 'and'로 시작했음)는 분리 접속사인 '그러나' 의 뜻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다윗이 여기서 그의 원수들의 강퍅성과 저속한 조소에 대항하기 위한 확신에 찬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들의 주장에 구애받음이 없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다윗은 자기가 당하는 현재의 재난을 하나님의 손으로 내려치시는 채찍으로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신령한 도우심으로 신뢰하려는 것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용기 백배해서 쳐들어올 때 그들의 의도는 그들의 합법적인 왕을 그 왕좌에서 전복시키려는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윗은 자기에게 도전해 오는 불경건하고 사악한 전쟁을 펴고 있는 원수들을 담대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다윗은 그보다 앞서 구원에 대한 확신한 소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인정했던 만큼 여기서는 당면한 문제의 공적인 적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공적인 적은 악인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적절한 저항이 있어야 함을 언급합니다.
시편 3 편
곧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애도하면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의탁하여 그들이 부당하게 악한 대우를 받을 때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혀 의심하지 말고 그들의 역경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즉각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악한 취급을 받고 하나님의 진리가 배척을 받을 경우에도 그들은 참된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은 그러한 위증적이고 소외된 이들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을 견지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자신의 증거로 삼는 가운데 큰 격려를 받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처지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선택해 세우심과 도우심을 스스로 박탈당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이 모든 주장은 무근거한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택에서 완전히 절연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왕으로 삼은 하나님의 선택은 불변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의 현재의 시련에 대한 낙관적인 결과를 내다보면서 자신의 서러운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또 하나님을 '방패'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윗 자신이 그분의 능력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이시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꺼이 허락하신 왕적 권위에 대한 유지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실 것이기에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에서 다윗은 자기가 갈 길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게 걸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언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2. 본문 4절은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기가 제아무리 역경에 직면해서 으스러지고 불신앙적인 조롱에 의해서 짓눌림을 받는다 하더라도 자기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정도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숱한 고통을 받는 가운데 있을지라도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단련했다는 것은 다윗의 확고한 신앙의 증거였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 있다면 우리에게 물려진 재갈을 물어 뜯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재난을 견디지 못하고 끙끙거림을 철회해 달라는 것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는 표현은 결코 중언부언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악인들이 제아무리 자신에게 광기를 부리며 도전해 와도 결코 어안이 벙벙하게 되지 않고 분명하고 큰 소리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었다는 사실을 보다더 잘 표현하는 뜻에서 자신의 음성을 언급합니다. 사실 그처럼 괴롭고 가혹한 시험을 받는 가운데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시편 3 편
다윗은 자신이 기도하는 음성이 운명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과격한 불평에 치우치는 사람들, 즉 너무나 격정적으로 혼란을 야기하면서 무절제한 슬픔을 내쏟는 자들의 소란한 법석과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뜻에서 자신의 음성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지적하는 핵심적인 의미는 원수들이 자신의 신앙을 뒤엎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사용한 여러 가지의 모독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는 침묵을 지킨 것이 아니라 불경건한 자들이 자신의 원수가 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소리질렀다는 사실을 표현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동일한 기도를 권면하는 뜻에서 자신이 공연히 소리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성산' 또는 '그의 거룩의 산에서' 라는 표현을 하늘로 설명하는 것은 부적당합니다.
물론 하늘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윗은 분명히 당시에 시온 산에 있던 언약궤를 두고 언급합니다.
다윗은 비록 광야로 쫓기는 몸이지만 거기서 응답을 받은 사실을 언급합니다.
성스러운 역사는(삼하15:24) 제사장 아비아달이 레위인들에게 언약궤를 옮길 것을 명령할 때 다윗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여기서 이 거룩한 사람의 놀라운 신앙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언약궤의 거처로 정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재가를 받지 않고 어떤 변화를 시도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이 신령한 임재에 대한 상징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편을 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마치 그에게 있어서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나는 것과 같은 아픔이었지만 이제 다윗은 비록 그에게 언약궤를 볼 수 있는 권한이 박탈되고 거기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셔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다윗이 여호와께서 당시의 저급한 시대성을 감안하셔서 정해 놓으셨던 눈에 보이는 상징을 무시하지도 않고 특별한 장소에 미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육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만큼 다윗이 올바른 중용을 지켰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이 기도는 하지만 자신들의 말을 어디로 보내야 할는지 모르는 불신자들처럼 쓸데없는 말을 허공에 흩뿌리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은 몸소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풀겠다고 약속하신 성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기도하게 된 확신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의 기도는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율법의 상징을 통해서 그림자로 드리워졌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알면서 고의적으로 제 길에서 유리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훨씬 더 쉬운 길이 열려 있습니다.
시편 3 편
시3:5-6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이 시편에서 다윗은 많은 대적들 가운데서도 마음의 안정(安定)을 잃지 않고 평안히 자고 깨었습니다(5절). 다윗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6절).
그러나 이 담력은 하나님과 교통하는데서 받은 바 선물입니다.
이런 담력은 말씀과 기도를 제외하고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이 담력은 말씀을 받고 기도응답을 믿는데서 생기는 것이니 어찌 말씀을 멀리하거나 기도하지 않으랴! 말씀을 경히 여기거나 기도하지 않는 담력은 멀지 않은 장래에 다시 공포심으로 바뀌는 법입니다.
1. 본문 5-6절은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입니다.
히브리어의 용법에 따를 경우 여기서 '내가 드러누워서 잠을 잤다'는 식의 과거시제로 번역된 말들은 종종 '내가 드러눕고 일어날 것이요' 하는 식의 미래 시제로 여겨지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 시제의 독법을 따른다면 다윗은 마치 자신이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는 식으로, 그리고 그 무수한 죽음 속에서도 곤하게 잠잤다는 사실에서 마음의 신비와 거의 믿을 수 없는 차분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물론 무자비한 불안의 격랑 속에서 이리저리 부대꼈지만 그래도 그들의 횡포는 신앙에 의해서 완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제아무리 동요를 받았어도 하나님께 포근히 기대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이와 같이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모든 공포를 궁극적으로 이겨내는데 결코 실수가 없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악인들은 제아무리 작은 위험에 직면하더라도 절망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혹자는 여기에 시제의 변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동사를 미래형으로 생각해서 곧 '내가 드러누워 잠을 자고 일어날 것이요'라는 식으로 번역하는데 그 이유는 곧이어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라는 말이 덧붙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마지막 말로서 계속적인 행동을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는 첫 번 세동사의 시제를 바꿀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그의 안전에 대한 이 확신은 그가 역경에 처한 시기에만 특별히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3 편
우리가 판단하기에 다윗은 자신이 신앙적인 기도를 통해서 매우 큰 은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으로 동요되지 않은 상태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동요하는 것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계속했다는 말을 통해서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깊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은 그처럼 잘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침대에 누워서 안절부절하지 않고 푹 잤다'는 내용이 바로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우매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자기의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특히 주목해야겠습니다.
물론 악인들도 자기 마음에 도취되면 깊은 잠에 빠져서 죽음과 언약을 맺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부축을 받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호를 받으므로 평안히 쉴 수 있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다윗은 이 확신으로 측량할 수 없는 효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모든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무한한 만큼 그들은 그 능력이 온 세상의 공격과 횡포와 준비태세, 그리고 그들의 힘에 대해서 어떠한 도전에도 무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담력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인간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측량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항해서 벌이는 모든 시도는 보잘 것이 없으며 무가치한 것이므로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공포를 누를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2. 본문 7절은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침착하게 옹호했던 만큼 여기서 그가 여호와께 그의 남은 인생에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곧 "여호와여 주께서는 나의 원수들을 타도하실 만한 분이신 만큼 주의 선하심이 계속 나를 인도하시고 나의 종말까지 계속 인도하여 주소서"라는 식으로 말한 것처럼 생각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간해서 시편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뒤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언급한 다음에 다시 처음과 같이 동일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시편 3 편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가 큰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해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원수들의 뺨을 후려치는 문제"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곧 다윗이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이전의 승리를 기억하는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은 자인만큼 여기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다시 되새기는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이 후자의 견해를 더 택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다윗은 자기가 위험한 때에 하나님께 매달려 도움을 청해야만 구원해 주실 것을 겸손하게 기도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구원이 자기에게 허락된 후에 감사를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얻은 구원의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3. 본문 8절은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라멧)을 때때로 (민)으로 사용한다 해서 이 구절을 '구원은 여호와의 소관이로소이다' 라는 식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부적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만 있다는 식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도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을 암암리에 모든 인간적인 도움과 대조합니다 다윗은 구원과 구원의 칭송을 하나님의 것으로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의 백성에게 어른거리는 수천의 죽음이 엄습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거나 그가 언제나 내보낼 수 있는 구원을 신속하게 내보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본 시편 마지막에 가서 다윗은 이 말씀이 개인으로서의 자기가 아니라 백성 전체에게 베풀어진 것은 그의 왕국의 안전과 번영에 달려 있으므로 바로 그 전체의 안녕은 교회가 파멸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의도였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악한 음모를 깨뜨려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의 안전에 대해서 배려하고 계신 덕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 문단에서 우리는 교회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하나님께서 결코 자신의 은혜와 복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자기에게 떨어지는 여러 재앙으로부터 항상 구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