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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용서의 빛
마태복음 4장 16절 / 차명권 목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흑암에 앉아 있었을 때에는 그런대로 그럭저럭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였고, 눈이 가려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생명을 얻고 보니, 예수님 없는 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내 인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멀리 멀리 떠나 흑암에 앉아 있었을 때 조차도 예수님께서 나를 긍휼히 보시고, 함께 하여 주셨다는 것을 우리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세상에 많은 복이 있지만, 근원적인 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빛으로 오셔서 가난한 우리에게 복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가난한 영혼이 부요하게 되었고, 실의와 절망과 헛된 것에 묶여 있었던 영혼이 자유를 얻게 되었고, 사라질 것들을 본질로 생각하며 쫓아가다가 영원한 사랑과 용서를 보게 되면서 억눌린 삶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지으신 분이 엣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잊지 말고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수명을 다하는 지점에 가 있게 됩니다. 내가 왜 이 땅에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흑암에 앉아 있는 백성들처럼 살면 안 됩니다. 내가 왜 이 땅에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는 나를 만드신 분이 정하셨습니다.
내가 평생을 다해 추론해도 바른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 그 목적, 그 지혜는 나를 창세전에 이미 계획하시고 만드시고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해를 시작하지만, 이 한 해는 우리의 일생에 들어 있는 한 해이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관통하는 예수님과 복음의 관점 앞에 내 인생을 비추이며 살아가지 아니하면, 광야를 헤매듯 정처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서른 즈음에 복음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두루마리 구약성경을 펴시고, 당시는 신약성경이 없었죠.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펼치시고 그 이사야서에 예언 되어 있었던 일이 나를 통해 이제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7-19절입니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친히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 고통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구해주시고, 그들을 실의와 절망에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쁜 소식을 먼저 부자들에게, 권세 있는 자들에게, 똑똑하고 지위 있는 자들에게 전하신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없는 사람들에게, 병들고 약한 사람들에게 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만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난한 자들, 마음이 상하고 찢기고 갈길 잃어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울며 버림 받은 자들, 병들고 소외된 자들, 불쌍한 처지에 주저 앉은 모든 사람들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생명이 필요한 사람들,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시고, 그들의 고통과 슬픔, 외로움과 아픔, 실의와 낙심, 죽음의 어둠에서 그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어쩌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명이 필요한 가난하고 병든 자들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배척의 대상이 되고,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도 잘 살 수 있고, 나는 이 지위와 이 명성과 이 돈과 힘으로 잘 살고 있으니 가난한 자가 아니고, 그래서 예수 따위는 필요가 없다라면서 예수님을 내 인생의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그들에게는 더 기쁜 소식이 많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온 산과 들을 헤맵니다. 그리고 결국 찾아냅니다. 그리고 찾아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의 의인됨도 하나님께는 물론 기쁨이지만, 아직 흑암에 앉아 있는 잃어버린 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아버지의 품에 돌아오는 그 기쁨을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열 명의 자녀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중에 한 아이가 감옥에 들어가 있다면, 나머지 아홉 명의 자녀로 인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한 아이가 풀려났을 때 기쁨이 어떤 기쁨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 받은 우리들로 인해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지만, 또한 주님은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을 향한 마음을 언제가 가지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품기 원하십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사랑하고, 돕고, 용서하는 구원의 마음을 우리가 삶에서 품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그 잃어버린 한 영혼이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은 뭐 그 한 마리는 대단한 것 아니야, 네가 너무 오래 기다리고, 너무 오래 참고, 너무 네가 손해 보는 것 아니냐 라면서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가치를 아흔 아홉 마리와 비교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열 드라크마 비유를 하십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하나를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부지런히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리고 결국 찾아내고서는 기뻐하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 비유 뒤에 예수님은 똑같이 덧붙이십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으신 주님의 끝없는 기쁨입니다.
마지막 비유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어느날 유신을 먼저 달라고 하여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찢어지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아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은 타국에 가서 잘 살 줄 알았는데, 헛되이 그 돈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빈털터리가 되고, 타국에서 버려진 자가 되었습니다. 흑암에 앉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거지 신세에다 흉년까지 들었으니 먹을 것이 더 없었습니다. 돼지 치는데 가서 얻어먹을게 없나 보았는데, 거기서도 먹을 게 없었습니다. 정처 없는 시간, 그제서 이 아들은 아버지의 집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가면 먹을 것이 있을텐데, 아버지의 집에서는 집의 종들까지도 잘 먹는다는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생명이 가득한 아버지의 집이 생각이 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가던 삶의 방향을 그제서야 돌립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떠나간 그날부터 매일같이 그 아들을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방탕하게 살면서도 아버지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을 거에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날 때에도 예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 아들이 나가서 탕진하고 좋아 보이던 세상으로부터 배반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려도 떠나갔던 아들. 어느 날 거지가 되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을 저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매일같이 아들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들의 윤곽만으로 아들을 알아보고 아버지 편에서 달려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옷을 걷어 올리고 달렸습니다. 옷을 걷어 올리는 것은 수치였지만, 사람들의 수치와 조롱에도 상관없이 아들을 향했습니다.
아들을 만난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기뻐하면서 외쳤습니다. 죽었던 내 아들이 살아 왔다고 외쳤습니다. 하인들에게 시켜서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이 아들에게 입혀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잔치를 베풀자. 이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냐? 이비유를 보면 놀라운 것은 그 아버지가 단 한 마디도 아들을 향하여 그 죄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죠. 자식이 어머어마한 돈을 가지고 나가서 탕진을 하고 돌아오면, 그 얼굴을 보고 호통을 쳤겠죠. 속으로는 이 불쌍한 아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아들을 야단쳤을 것입니다. 바로 받아주지 않고, 며칠을 용서를 빌게 할 것입니다. 그냥 받아주면 또 그럴테니까 버릇을 고쳐놔야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복음을 통해 한 마디도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를 막 지어도 좋다고 용인하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모릅니다. 죄가 괜찮았다면 죄를 정복하시기 위해 아들을 희생시킬 필요도 없으셨겠죠. 하나님에게는 죄보다 더 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 죄로 인해 우리가 죽어야 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고 안으셨습니다. 우리의 어떤 죄가 있을지라도,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그 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죄 많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아들로 회복시키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 하시고, 포도주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시며 귀를 기울이시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계명과 율법을 들이대면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지만, 예수님 주변에는 죄인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빛이었고, 용서의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용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할 때에는 나름대로 칭찬을 들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일곱 번 용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를 한 번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말이죠. 베드로는 기대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입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의 베드로의 말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용서하기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이게 상상할 수 있는 용서입니까? 일곱 번을 일흔 번이면,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490번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의미는 뭐냐면, 용서에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즉 끝이 없는 사랑은 끝이 없는 용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 바로 다음 구절에 바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기는 사건이 시작됩니다. 무슨 말이죠? 예수님은 자신을 팔아넘긴 가륫 유다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 끝이 없는 사랑과 용서를 가륫 유다는 믿고 받아들이지 못했고, 베드로는 믿고 받아들임으로 살아났을 뿐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는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비교해 보세요. 우리들은 누군가가 잘못하면 한 번 용서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또는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겠어. 이렇게도 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나아가서 이렇게까지도 말씀하셨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라.
이처럼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참 사랑은 어떤 면에는 고통이에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못 박고 죽이려는 악당들, 원수들을 향해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라고 대신 간청하시며, 큰 빛 그리고 참 빛을 흑암에 앉은 자들에게 비추셨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용서로 그 고통의 시간을 넘어서면,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내 삶의 생명이 그것이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한 천국의 행복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지만, 우주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우고 비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시며,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과 용서의 빛을, 이 구원의 빛을 오늘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영광 속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깊이깊이 깨닫고, 그 빛으로 쿠미 오리, 일어나 빛나는 삶을 사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