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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들의 봄 소풍
김선구
젊은 시절 나의 일과는 소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 출근하면 먼저 축사로 가서 소들의 모습을 둘러
보고 나서 본 업무를 시작했다. 소들의 행동과 표정 속에서 그들의 처한 사정을 읽어내고 적당한 조치를 취
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아픈 놈은 외모가 까칠하고 기력이 없어 보이고, 발정 온 암컷은 수컷이 그리워 안
달이 났고, 임신한 놈은 몸가짐을 신중히 하였다. 개체마다 성질도 제각각이다. 온순한 놈이 있는가 하면 포
악한 놈이 있다. 또 대범한 형이 있고 신경질 형이 있는가 하면, 우둔한 놈이 있고 약삭빠른 얌체도 있다.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새색시처럼 우미한 체형을 한 개체가 있고, 산적처럼 둔중한 몸집의 개체도 있다. 이들
하나하나의 특성을 고려하여 적절한 대접을 해야 했다.
제주도의 C시험장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봄철이 되어 소들을 방목지로 내보내는 일이 하나의 과제였다. 방목
지가 축사에서 8km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소 떼를 이끌고 방목지까지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울
한철을 지내고나면 준비해 두었던 사료가 소진되어 없어진다. 방목지로 내 보내면 사료도 해결되고, 소들이 자
연 속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더 잘 자라고 건강해진다. 한라산 기슭에 위치한 방목지가 연구실 유리창 너머 멀
리 보였다. 아직 한파가 기승을 부리지만 목초지에 풀들이 푸릇푸릇 돋아나며 봄이 왔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내
목초들이 성장하여 초록빛이 완연하다. 겨울동안 축사에 가두어져 지내던 소 들이 바람결을 타고 풍겨오는 풀
내움에 봄소식을 전해 듣는다. 어린 학생들이 소풍날을 기다리 듯 소들도 풀밭으로 나갈 꿈을 꾸기 시작한다.
풀밭은 소들의 요람이다. 그 옛날 인간에게 동화되기 전부터 소들은 초원을 마음껏 달리며 살았다. 풀밭에서
태어나 풀을 뜯어먹으며 자랐다. 들판을 마음껏 질주하기도 하고, 목이 마르면 계곡에서 목을 축이고, 바람이
불면 산등성이에 서 바람을 피했다. 비오는 날이면 숲 속에 들어가 나무들 밑에서 비를 피했고, 눈이 오면 서로
가 모여서 몸을 비벼대며 추위를 녹였다. 해가 지면 밤이슬을 맞으며 밤을 지새웠고, 날이 새면 부스스 일어나
서 기지개를 켰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열심히 풀을 뜯어 먹으며 생명을 영위하였다. 초원은 소들의 고향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원초적인 영감이 그들의 유전자 속에 존재하고 있다.
소들은 인간에게 포획되어 가축화 되면서 인간의 보호 속에 안주하기 시작하였다. 농업이 정착되면서 소들은
축력(畜力)을 제공하였다. 이어서 우유를 제공하고 죽어서는 고기를 제공하였다. 사람들은 소들로부터 보다 많
은 이득을 착취하기 위하여 그 이용가치를 연구하였다. 유럽에서는 풍부한 초지를 이용하여 소들을 사육하면서
여러 면으로 개량하였다. 젖소는 유방을 크게 하여 젖을 많이 생산토록 하였고 고기소는 허리는 길게, 엉덩이는
넓게 하여 고기생산량을 많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밭을 갈고 마차를 끄는 농업용으로만 그 가치를 부여
하였다. 집에서 여물을 끓여 주기도 하고 털도 빗겨 주면서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왔다.
농업이 기계화되면서 일소로서의 용도가 폐기되자 고기로서 개량을 시도하였다. 천해의 목장지대인 제주도에
미국에서 브라만과 산타라는 고기용 소를 도입하여 한우와 교배시켜 개량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때 우리 시험
장에서는 시험연구용으로 수백 마리의 소를 사육하고 있었다. 모두가 텍사스 초원을 주름잡던 소의 후예들로서
행동이 날렵하고 거친 편이었다.
소들이 방목을 내 보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었다. 뿔 자르기와 낙인(烙印)작업이었다. 성깔이
고약한 소들은 이유 없이 옆 동료들을 머리고 쳐 받아서 상처를 주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는 임신한 소를 유산
을 시키기도 하고, 관리인에게 엄포를 주며 달려들기도 하였다. 마치 심보가 궂고, 말썽을 잘 부리는 어린애와
같았다. 이러한 버릇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생존욕구에서 비롯되었지만 사육가의 입장에서는 이를 경감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소들을 한 마리씩 붙들어 매고는 뿔 자르는 기계를 이용하여 사정없이 뿔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불에 달군 인두로 뿔 자른 자리를 지져댄 후 바세린을 발라 주고 끝내었다. 다음은 낙인작업이다. 소의
엉덩이에 부여받은 번호를 새기는 일이다. 그래야 존재를 확인하고 관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수자
가 새겨진 인두를 불에 달구어 엉덩이를 지져 번호를 낙인 했다. 갑자기 쇠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소풍
을 위한 도시락 반찬 냄새가 아니었다. 소들의 비명과 고통이 어우러진 절규가 서려있는 냄새였다. 애처로운
일이지만 소로 태어난 운명이다. 갑자기 회교율법에 따라 할레당하는 어린이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하는 의문
이 스쳐갔다.
방목장은 해발 60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소떼를 몰고 여기에 이르기 까지는 계곡과 들판을 끼고 난
목장길이 유일했다. 행군도중에 시내를 건너기도 하고 언덕 빼기도 넘기도 하였다. 포장이 안 된 들판 길을
소떼들이 지나가면 마치 폭풍이 지나가는 듯 흙먼지를 날렸다. 축사를 벗어난 소들은 신이 난 듯 들판을 질주
하였다. 교정을 벗어나 소풍 길에 오른 초등학생들의 마음도 이와 별다름 없으리라. 차이가 있다면 학생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행진하지만, 소들은 관리자들을 우롱하는 듯 제 멋 데로 행동하였다. 마치 뿔 자르기와
낙인으로 당한 고통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막무가내로 내 달렸다.
드디어 방목지에 이르렀다. 나는 땀과 먼지에 뒤범벅이 되어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소들은 그들의 천국에나
온 것처럼 행동하였다. 속박에서 풀려났다는 행방감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대하는 풀 맛에 제 정신이 아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기서 한 번 뜯고, 저기서 한 번 뜯어 먹는다. 먹는 것보다 밟아서 망가지는 풀들이
많다. 제발 소들이 풀밭 한쪽부터 차근차근 뜯어먹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소들은 주인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마치 부폐식에서 음식을 즐기는 듯 이곳에서 조금 저곳에서 조금 풀 맛을 즐겼다. 진정
소들에게는 즐거운 소풍날이었다.
이제 소들은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원시적인 생활에 젖어들었다. 날이 새면 초원을 누비고,
더우면 언덕 위로, 목마르면 계곡으로 이동하며 긴 방목기간을 즐길 것이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고, 또 겨울
을 맞이하여 초목이 삭으러 지고 초원이 황량한 들판으로 변할 때 까지 그들은 방목지에서 생활 하게 된다.
이제 나의 일과는 보름에 한 번씩 방목지에 올라와서 그들을 대하게 되었다. 보름 마다 목부들에게 식량을 실
어다 주고 소들에게는 진드기 구충약을 살포해 주어야하기 때문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대면하던 인사가 보름
후를 기약하게 되었다. 아쉽고 후련한 마음을 안고 방목지를 내려왔다.
소들아! 잘 있어라. 보름 후에 다시보자.(2015. 4. 10)
첫댓글 재밌게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소들의 봄소풍. 어쩌면 인간들의 소풍하고는 차원이 다른 해방과 자유를 뜻하는 방목지로 가는 길인것 같습니다.
뿔자르기와 낙인 찍기라는 고통의 수업료를 지불하고서.....잘 읽고 갑니다.
소의 뿔자르기와 낙인은 미국식 축산기술의 한 방편입니다. 소로 태어나면 한 번은 겪어야 할 수난이었습니다.
구청 산업부서장 시절 처음으로 송아지를 대상으로 귀에 바코드를 달았습니다. 수의사 들에게 의뢰하여 하였지만 귀를 뚫고 번호가 부착된것을 달때 안스럽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목장의 소들을 보는것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소에 낙인하여 개체표시하던 기술이 발전하여 바코드로 대체 되었습니다. 바 코드는 소들에게 귀걸이인 셈입니다.
소들의 소풍을 비유적으로 자세히 묘사한 글 참 잘 읽었습니다. 시험장 근무시절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소를 연구하려면 그 정도의 수고는 당연합니다. 소들이 탈 없이 잘 크고 시험성적을 높혀주면 더 바랄것이 없습니다.
불까기(거세)와 뿔자르기를 하므로 성질이 온순해진다고 배운 적이 있습니다. 소의 뿔이 사람에게 위협적일 수는 있어도 무기일수는 없고 오직 소를 다른 동물과 구분지워주는 표지에 불과하지요. 소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하는데도 사나운 놈은 뿔로 사람을 들이받아 생명을 앗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걸 방지하는 차원에서 뿔자르기를 하여 사나운 성질을 없애줘야겠지요. 직업에서 체득하신 '소'를 소재로하여 쓰셨네요. 소재의 참신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글입니다.
소들에게 뿔은 무기입니다. 그러나 한우인 경우 고삐를 감을 수 있는 도구입니다. 소를 공부하면서 소의 성질을 유순하게 뿔은 쓸모있게 육성해 낸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감탄하게 됩니다
푸른초원으로 달리는 소들의 봄소풍은 아마 사람들보다 더 신바람이 날지도 모르지요.
서부 활극에서나 볼 수 있는 소 떼의 움직임은 제주 시험장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어릴적에 소를 먹이러 다니고 정감을 나눴는데 덕분에 상세한 것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제가 소띠입니다. 소를 위한 석염님의
간곡지성의 배려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소재의 특이성과 참신성이 매우 돋보입니다
간결하고 깔끔한 사유(思維)의 처리가
멍하게 저를 황홀하게 합니다.
좋은 글을 자주 보는 제 삶이 풍요로워 집니다.
모든 분들의 글월 받잡고 기가 팍 꺾여서 노트에서 습작할렵니다.읽는 공부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