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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김만중의 심정으로, 벼랑 끝의 동박새 울음
- 최옥연 유배수필 <노도 가는 길>을 중심으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저마다 가슴에 자기만의 섬 하나를 만들어 두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든 나에게로 오는 길이든. 이제 당신의 섬처럼 유배의 땅이 아니라 자유로이 유영하여 들고나는 우리의 섬이었으면 좋겠다. 내게 섬이었던 당신, 대숲 어딘가에서 저 새처럼 내 이름 불러 줄 것 같은 아버지가 그립다. 태화강은 말없이 흘러간다. 내 아버지의 섬으로...
- 최옥연의 <아버지의 섬>
Ⅰ.
최옥연 수필가는 남해 유배의 섬 노도 출신이다. 그녀의 작품을 빼고 유배문학을 논할 수 없는 이유다. 남해는 경남에서도 거제도 다음으로 유배객이 많은 곳으로 무엇보다도 전국 최초로 유배문학관이 문을 연 곳이다. 유배가 단순히 사람을 연고지에서 추방하는 형벌의 한 형식이 아니라 유배를 통해 중앙의 문화가 지방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지방의 토착적이고 개성적인 문화가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유배문학 연구는 의의가 크다. 이번 연구에는 서포 김만중이 남해로 유배와서 생을 보냈던 유배의 섬 노도 출신 최옥연의 수필 <노도 가는 길>을 통해 유배에 투영된 작가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여, 유배수필의 내포와 외연을 확장하고 유배수필에 대한 문학성을 더 한층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하겠다.
Ⅱ.
인연의 바깥쪽을 떠돌며 피해가고자 해도 언젠가는 다시 그 속에 스며들어가서 맨얼굴로 만나게 되고 마는 것을 필연이며 숙명으로 생각하는 최옥연에게 있어서 남해의 작은 섬, 노도가 그렇다. 최옥연은 이 수필의 발단부에서 노도와의 인연을 숙명으로 풀어내며, ‘섬 가장자리의 바윗돌도 그렇고, 누구보다 자유롭기를 원했던 영혼들의 가슴을 쓸어주는 앵강만의 한결같이 맑은 물길’도 귀소본능의 구심력적 속성에 지배된다고 적고 있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그녀가 <노도 가는 길>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회귀’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섬’으로부터 얻은 세상사의 진리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 수필을 읽고 나면, 거친 주름의 파도를 넘어 작가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제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노도로의 회귀적 삶임을 알 수 있다.
서산의 오래된 나무들이 묵묵하고 세월도 비켜간 앵강만은 여정히 섬에게는 냉정하다. 삿갓처럼 생겼다고 하여 삿갓섬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노도는 계절 없이 품안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벽련에서 배로 십여 분 거리, 한 눈에 쏙 담기고도 앵강만을 커다란 여백으로 둔 섬, 그 노도가 내 영혼의 유배지가 된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지 못한 정신의 한 모서리가 끝내 달려가서 유배되기를 자청하는 것은 내 유년의 보드라운 발자국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리라. 훌훌 떠나서도 자유롭지 못한 나는 잠깐씩 거쳐가는 방문객들처럼 편안한 여행객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최옥연의 <노도 가는 길> 중에서
작가는 <노도 가는 길>의 발단부에서 ‘앵강만’과 ‘섬’을 두 행위소로 해서 풀어나간다. 삿갓처럼 생겼다고 해서 삿갓섬으로 불린다는 연유에서 유배객의 이미지를 살짝 입힌다. 죽장에 삿갓은 정처없이 맴도는 선비나 나그네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이 섬으로 유배를 온 서포 김만중하고도 매칭이 된다. 계절에 관계없이 흡인력을 가지는 섬이기에 최옥연의 아버지는 평생을 노도에서 살았고, 노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배자 서포 김만중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속에 섬 하나를 만들어 두고 산다는 생각을 한다. 섬이란 참 묘한 데가 있다. 원심력을 가지는 반면에 구심력을 가진다. 그래서 작가는 ‘끝내 달려가서 유배되기를 자청한다. 과연 서포는 그랬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끔찍이도 아들을 사랑했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글을 썼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남해를 벗어나고 싶어했겠는가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 대목은 노도를 떠난 자탄의 정서를 절절하게 나타내면서도 힘든 생활 속에서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근심으로 잠 못 드는 인간 최옥연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서포 선생의 유배가 세속의 욕망과 갈등들의 엉킴을 풀지 못하고 현실에서 밀려난 운명이라면, 내가 노도에서 태어난 것은 숙명이다. 선생이 차갑고도 어두운 긴 밤의 가슴앓이를 서책에 풀어낸 것처럼 나는 잃어버린 기억들을 풀어낼 화두를 찾기 위해 어머니를 찾아간다. 어머니는 노도에 뿌리를 박고 사는 나무이며 바위이고, 날개 꺾인 새이며 앵강만의 물고기이고 미역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평생 불러야할 노래이며 흔들림 없이 서 있게 하는 단단한 땅이다. 오늘도 부세밑의 가파른 바위 끝에서 방금 따온 돌미역을 대나무 발에 줄 맞추어 널고 있을 어머니. 당신의 발끝이 언제나 벼랑과 수평을 이루고 있었음은 굳은살 박인 발바닥을 보면 안다. 벼랑은 해초를 키우는 바위 끝에만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 최옥연 <노도 가는 길> 중에서
운명과 숙명은 다르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온다고도 한다. 운명은 피할 수 있고 숙명은 피할 수 없다는 말도 있다. 서포가 노도에 유배 온 것이 운명이라고 하고, 최옥연이 노도에서 태어나 노도를 그리워하는 건 숙명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면 인생의 중요한 터닝포인트에서 어떤 해는 운이 좋아 뭘 해도 잘풀렸던 기억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이상할 정도로 일이 안 풀려 우울한 기억도 있을 것이다 고민과 방황. 실패와 성공. 사랑과 이별. 이런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땐 왜 그랬을까 이렇게 했어야 하는건데 하는 후회가 찾아오는 게 인생이다. 운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에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과도 같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데 사람이 많이 운집하는 장소나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장소는 피하는 게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 즉 나쁜 운을 비켜가는 길이다. 서포 김만중은 자신을 향해서 날아드는 화살을 피할 수가 없었다. 굳이 피하려고 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실을 고하지 않고, 임금의 비위나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순치를 보면서 보신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면 남해까지 유배를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유배자의 고독과 곤궁함 속에서도 삶의 성찰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김만중의 몸과 마음, 정신을 그리고 있는 <노도 가느 길>은 병자호란 와중에 퇴각하던 병선에서 태어나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고 자라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면서 임금에게 숱한 간언을 하다 유배객이 되어 강원도 금성, 평안도 선천, 남해의 노도 등 낯선 유배지를 떠도는 김만중의 시간을 최옥연은 운명으로 정박시키고 있다.
이런 자신의 운명을 최옥연은 ’벼랑‘이라는 구체어에 의지해서 잘 묘파하고 있는데, 변화에 대한 물리적인 거리와, 그 거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고통에서 오는 절망도 벼랑과 다를 게 없다는 인식이다. 그녀는 노도는 슬픈 절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내려놓을 방법을 찾으러 오기도 한다고 하면서, 유배지로서의 포지션을 다시 확인한다. 그들은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몸과 마음이 유리되어 떠돌게 되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과 갈 수 있는 곳이 다른 노도는 그냥 이름뿐인 섬이 아니라 그 앞에 선 것만으로 마음이 먼저 섬이 된다고 한다. 극복해야 할 벼랑은 까마득한 발아래 짙푸른 파도를 풀어놓기도 하고, 발끝을 대고 있기도 벅차게 각을 세우기도 한다. 작가에게도 큰 벼랑이 있어서 절망을 안고 그 절망을 내려놓고 싶어서 섬을 찾은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작가의 인식이다.
서포 선생이 유배되었던 초옥은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은 곳에 있다. 마음은 깎아지른 벼랑 끝에 서 있었을 테지만 기거하던 곳은 숲으로 폭 쌓여 있다. 유배지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동백나무도 많다. 마음에 칼날 같이 깎아지른 벼랑을 안고 노도에 닿을 때는 동백나무 숲이 그믐날 앵강만의 밤바다처럼 검푸르다. 장승 앞에 선 것처럼 키 큰 동백나무 앞에 서면 두고 온 아픔들이 언제 왔는지 먼저 와서 붉게 엎드려 있다. 욱신거리던 아픔들을 동백나무 통꽃 지우듯이 가슴에서 툭툭 떨궈내면 동박새 울음 같은 흐느낌도 붉게 번지는 것이다. 외롭다는 말은 덜 외로울 때 쓰는 말이다.
- 최옥연 <노도 가는 길> 중에서
도회지의 막막한 삶도, 헐어내지 못해 고통스러운 현실도, 이곳 노도에 서면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녀는 고향에 온다. 어머니는 동백꽃 지는 소리가 바람결에 전해오면 하던 일도 미뤄놓고 선혈 낭자한 동백나무 밑의 꽃 무덤을 보러 갔다고 한다. 펄펄 끓는 나이에 툭 져버린 동생이 떨구는 그 붉은 말들을 나누고 돌아오는 걸음은 느리다고 한다. 그리고 벽면 가득히 걸린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며 “동생아, 내 아직 살아있는 것 너는 다 보고 있제?”하며 말을 건낸다고 한다. 이 수필의 가장 압권은 칼날캍이 깍아지른 벼랑을 안고 섬을 싸고 있는 동백나무와 그믐날 앵강만의 검푸른 밤바다에 먼저 와서 붉게 엎드린 어머니 동생의 슬픔들, 아픔들의 동박새 울음 같은 흐느낌으로 붉게 번진다는 표현이다. 궁벽한 처소에서 밤마다 꿈결에 젖어드는 천리 고향길, 꿈결도 고달프고 몸은 고목이요 머리는 쑥대인 채로 한시도 어머니 생각을 잊지 못하고,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 초승달 바라보며 밤새 모래톱을 거니는 효자 김만중, 젊은 나이에 저 멀리 천국으로 가버린 동기를 그리워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슬픔을 삼키는 작가의 심상과 모습이 절묘하게 와 닿는다.
서포 선생은 밤이면 깜깜한 허공에다 시를 썼다가 지우며 울분과 그리움을 참지 않았을까. 그가 멀리 떨어져서 애를 태우고 계실 어머니를 위해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가슴속에서 꺼내놓았다면, 나는 그리움을 품고도 내색하지 않는 어머니를 실타래처럼 풀어내었다. 어머니 닷 마지기 밭의 보리이랑처럼 흔들리고 휘어지는 곡절들은 끝이 없다. 그 마디들을 제대로 풀어내지도 못하여 아프고 답답하다. 꽃처럼 환하고 물빛처럼 푸르른 이야기, 옹이로 마디진 삶과 피멍처럼 남아 있는 가슴 속의 흔적들을... 그리하여 모름지기 나는 어머니를 팔며 살고 있다. 제 값을 쳐서 받아도 가슴 저릿저릿한 어머니의 애환을 판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동백꽃 속으로 숨어들고 싶다.
- 최옥연 <노도 가는 길> 중에서
작가의 남다른 직관력은 김만중이 남해의 환경과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동네 사람들과 만나고 다른 유배객들과의 문학적 교감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구운몽』이라는 주옥같은 작품을 창조해가는 과정을 몸짓, 호흡 같은 단절의 순간순간을 통해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더욱 더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세상과의 갈등을 노도 방문을 통해 조화롭게 해결해 가면서 마침내 성찰과 순명, 그리고 진실의 발견에 이르는 남해의 고독한 성자 김만중의 노정을 구도자의 자세로 뛰어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노도는 자칫하면 자기를 잃을 수 있는 무수한 자기 부정과 자기 긍정의 곡절을 겪고 마침내 ‘절대정신’의 경지인 ‘구운몽’을 피워낸 값진 ‘유배의 섬’이다. 김만중은 그 섬에서 자신이 마주한 경지의 순간을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지 않고, <구운몽> 등 여러 저작을 통해 간접적으로 깨닫게 한다. 섬에 어머니를 두고 떨어져 살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그녀는 ‘어머니를 팔며 살고 있다’고 하면서 절제된 정서를 잘 객관화하고 있다.
노도에 오면 나는 초옥과 서포 선생의 허묘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노도로 가는 길은 이야기 보자기를 가지고 가는 길이다. 종래 나는 속에 있는 것들을 품고 살 수가 없다. 앉아서 한 해를 보내고 뜬 눈으로 또 천년 같은 긴 해를 넘기고도 모자랐다. 체념의 남은 해는 밤마다 억겁의 시간을 읽으며 보냈을, 선생의 유린당한 생의 종지부가 노도였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래서 나는 다시 초옥에 앉았다. 서포 선생의 호흡법을 찾아보고 싶어서다.
- 최옥연 <노도 가는 길> 중에서
생각했던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머리가 무거울 때면 나는 노도를 찾는다. 그것은 모성의 힘이다. 벼랑 끝에서 바위를 잡고 있는 부채손처럼 팔순을 넘은 어머니의 남은 생이 아슬아슬하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최옥연의 마음도 때때로 벼랑이다. 봄 씨앗을 뿌려 채소를 거두다가도 넋두리처럼 내려놓는 어머니의 “내년에도 이 채소 키워서 네게 먹일 수 있겠나”하는 아슬아슬한 그 말의 벼랑이 작가에게 가장 크고 두려운 벼랑이 된다. 청산은 날로 짙어지는데 섬 안에서 시간만 죽이고 사는 것이 마땅히 사람으로 견딜만한 일인가. 안으로 안으로는만 쟁여온 모진 시련을 자작나무 수액처럼 뼛속으로 밀어 넣고 살았어도, 삿갓 등에 생을 담보로 사는 섬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서포는 놀고먹는 노인이라 터부시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바다가 보이는 초옥에 앉아 서포의 호흡법을 생각한다. 갈등하던 시간을 가라앉히려 들이쉬었을 숨줄에 체념이라는 미끼를 달고 큰 골 너럭바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웠으리라. 시간을 낚는다는 것은 살아 있는 시간을 임의로 죽이는 것처럼 잔인한 일이다. 장풍이 석 달 열흘을 불어와서 시시때때 붉어지는 그리움을 씻어 내리고 고요해지기까지 내쉬었을 숨, 어디쯤에서 들이쉬고 또 어디쯤에서 내쉴 것인가. 냉랭하던 돌담 안으로 동백이 하염없이 어우러지고 있다.
머지않은 시간에 또 오게 되리라. 짧은 필력으로나마 풀어내고 싶은 말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내가 노도의 딸인 것이 숙명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마음이 고요하다. 오늘밤에는 나도 시대를 거슬러 서포 선생과 이 외로운 섬에서 유배의 딸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최옥연 <노도 가는 길> 중에서
유배객된 최옥연은 자탄의 정서를 절절하게 나타내면서도 힘든 생활 속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임금이나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근심으로 잠 못 드는 인간 김민중의 모습을 상상력으로 그려보게 한다. 궁벽한 처소에서 밤마다 꿈결에 젖어드는 천리 고향길, 꿈결도 고달프고 몸은 고목이요 머리는 쑥대인 채로 한시도 어머니 생각을 잊지 못하고,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 초승달 바라보며 밤새 모래톱을 거니는 효자 김만중과 효녀 최옥연의 심상과 모습이 뼈에 사무치게 와 닿는다. 이 수필은 산과 들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들꽃과 봄빛과 바람, 비가 만들어내는 무지개, 언덕 위의 각양 각색의 생명, 죽림 위의 둥근 달, 몸을 스치고 지나는 맑은 바람소리, 바다를 비추는 노을은 수필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파도 소리와 물결 속에 취해 시를 쏟아내는 문인 김만중의 선비 같은 기개나 모습은 없다.
그 대신 어머니 닷 마지기 밭의 보리가 흔들리고 휘어지는 곡절들은 끝없이 볼 수 있고, 그 마디들을 제대로 풀어내지도 못하여 아프고 답답해하는 최옥연의 심사를 볼 수가 있다. 꽃처럼 환하고 물빛처럼 푸르른 이야기, 옹이로 마디진 삶과 피멍처럼 남아 있는 가슴 속의 흔적들, 장승 앞에 선 것처럼 키 큰 동백나무 앞에 붉게 엎드려 있는 아픔들, 동백나무 통꽃 지우듯이 가슴에서 욱신거리던 아픔들을 툭툭 떨궈내면 동박새 울음 같은 흐느낌도 붉게 번지는 노도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최옥연의 수필 <노도 가는 길>은 자기 구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어머니를 비롯해 타자를 위해 <구운몸> <사씨남정기> 등 문학작품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불태우고, 56세에 남해의 외지고 허술한 초옥에서 천상의 흰빛으로 돌아간 서포 김만중의 흔적을 자신이 유배객이 된 심경으로 노래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Ⅲ.
‘벼랑’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지배적인 인상을 드러내며 감각화된 세계를 보여주는 이 수필의 쾌미는 ‘탁월한 수사적 표현’에 있다. 좋은 수필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제재에 내재한 기의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미지라는 기표 안에 기의를 감추게 되는 형상화는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 수필은 이 과정을 잘 거치고 있다. 따라서 해석과 형상화는 문학수필이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 하겠다. 작가가 서포의 시름과 자신이 안고 있는 죄의식을 ‘벼랑’에 비유하지 않았더라면 이 수필의 문학적 성과는 많은 부분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벼랑’이 갖는 상징성은 절대적이다. 비유는 기적을 낳는다. 예술적 수필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최옥연의 유배수필에서 우리는 말미잘의 촉수같이 민감한 감각이 그려내는 전이미학의 멋과 맛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필이 갖는 유배문학사적 가치와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이 수필이 문학적 성취가 높은 이유는 서포 김만중의 삶을 서사로 펼치기보다는 최옥연이 노도를 떠나 시집을 와서 객지에 살면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심정을 유배객의 심정으로 읊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서사가 김만중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한에 연관된 행위소로 확장되어 나가면서 유배의 생존무늬가 유배자 김만중과 작가 부모님의 험준하고 눅눅한 삶에 포개져서 나타난 데서 우리는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를 확인할 수가 있다. 삼중구조로 된 유폐도 감동에 기여한다. 그녀는 관습적이지 않은 표현을 구사하고 있으며, 이런 언어의 의외성은 감상에서 읽는 사람의 주목을 이끌어낸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신선한 비유적 표현이 수필의 문학성을 가져왔다. 유배문학의 쾌미는 유배의 정서를 잘 드러내는 데 있다. “오늘밤에는 나도 시대를 거슬러 서포 선생과 이 외로운 섬에서 유배의 딸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마지막은 압권이며 절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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