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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씨 가문에도 이런 후손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아무나 쉽게 할수가 없는 성의를 다해 조상님들의 영전에 바치는 성의가 대단하여 소개 한다.혹시 틀린곳이 있는곳이 있으면 댓글로 지적하고, 공유하여 후손들의 정신문화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부산 삼절사 문중의 남원양씨는 병부공후 문양공의 자손이며 선영은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이다.
문양공 양성지는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공조판서, 중추원사, 춘추관사를 지내시고 숭정대부에 책록되시고 남원군에 봉해지셨다. 그 자손들은 김포의 통진에 세거하였는데 부산 삼절사 문중의 남원양씨는 문양공의 2子 정선공 양수의 자손이다.
첫째 아들 양원은 양지현감을 지내시고 종친부에서 활동하신 후 이조참의에 증직되셨다. 손자 양치는 한성판관을 지내시고 석성현감을 지내시고 금성현령을 지내시고 삭녕군수를 지내시고 군기시제조를 지내시고 원종공신이 되셨고 손자 양제는 해군판관을 지내시고 신창현감을 지내시고 의빈부경력을 지내셨고 손서 송질은 영의정을 지내시고 여원군(礪原君)에 봉해지셨다
둘째 아들 양수는 충익부 도사를 지내시고 낭천현감을 지내신 후 통정대부에 책록되시고 정선군수를 지내셨다. 손자 양윤은 맹산현감을 지내시고 통정대부에 책록 되셨다.
셋째 아들 양찬은 삼척부사를 지내시고 웅천부사를 지내시고 제주목사를 지내신 후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내시고 영해부사를 지내시고 수원도호부사를 지내시고 포도장을 역임하셨다. 손자 양형은 숙척도호부사를 지내시고 통정대부에 책록되셨고 손자 양숙은 양근군수를 지내시고 이천부사를 지내시고 정주목사를 지내시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셨다.
넷째 아들 양호는 증산현감을 지내시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에 증직되셨다. 손자 양결은 호군을 지내셨고 손자 양활은 오위도총부 사과를 지내셨고 손자 양연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시고 홍문관 대제학을 지내시고 춘추관사를 지내시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내시고 이조판서를 지내시고 병조판서를 지내시고 의정부 좌찬성을 지내시고 판의금부사를 지내셨고 손자 양담은 의금부도사를 지내시고 가선대부에 증직되셨다.
문양공께서는 부모 생전에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슬프게 생각해 오다가 벼슬과 명망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자 조정에 청하여 맏아들 양원은 양지 현감이 되게 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받들게 하였고 둘째 아들 양수는 횡성 현감이 되게 하여 어머니의 묘소를 받들게 하였다. 정선공 양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6년 동안 지방관으로 나아가서 조모의 묘소를 받들었으며 효를 실천하였다. 배위 반남박씨와의 사이에서 1子 양윤을 두었으나 이후 자손들은 혼맥으로 인해 사화의 영향을 받았고 그 인연으로 세거지를 이거한 것으로 보여진다.
맹산현감을 지낸 양윤의 배위는 예조판서 이세좌의 셋째 따님이신데 장인이신 이세좌는 연산군의 생모가 사사될 때 형방 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역을 전하였다. 연산군이 생모의 원한으로 갑자사화를 일으킬 때 연산군은 이세자의 형제와 아들과 사위 모두에게 장을 때려서 외딴 곳에 유배를 보냈으며 사면할 기회가 있더라도 놓아주지 말라고 하였다. 양윤은 평안도로 귀양을 갔으며 유배되어 안치되는 날 박천군수가 쌀 15두를 가져다 주었는데 이 일이 알려지자 박천군수 이명필은 형벌을 받았다. 물론 중종반정 이후에 양윤은 신원을 회복하였지만 이후에도 그 자손들은 사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중종의 장자는 인종이며 인종의 외숙은 윤임으로 대윤파라 하였고 중종의 차자는 명종이며 명종의 외숙은 윤원형으로 소윤파라 하였다. 인종의 외숙과 명종의 외숙은 파평윤씨 일가이었지만 인종이 일찍 승하하자 명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소윤파는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대윤파를 제거하였다. 문양공의 자손들은 인종의 인척으로 양윤의 종질 양윤신과 양윤온은 을사사화의 화를 당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양윤의 외조부 박병중은 인종 정비의 재종조부이었고 양윤의 종형제 양숙의 외손이 인종의 후비이었다. 또한 양윤의 종질 양윤온이 대윤파의 사돈이었다.
맹산현감 양윤은 연산군 때 사화의 피해를 입어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중종반정으로 신원을 회복하였으나 중종의 아들인 인종의 인척이었으므로 그 자손들은 인종과 명종 시대에 사화의 영향을 받았고 그로인해 도성과 먼 지역으로 이른 시기에 세거지를 이거한 것으로 보여진다.
양윤의 장자는 평창군수를 지낸 양희증이며 차자는 사포서 사포를 지낸 양희삼인데 부산 삼절사 문중의 밀양 입향조 양사원은 양희증의 아들이다. 양사원은 주공(周公)의 청대무왕(請代武王)을 논하여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유방(劉邦)의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논하여 생원시에서 장원을 하였을 만큼 학문이 깊었다고 진해지고 있지만 사화의 시대를 피해서 밀양의 무안지역으로 이거하셨다.
소재지 : 안동시 풍천면 구호리 산3번지. 의성군 신평면 청운리와 접하는 행정구역으로 청운리에 세거한 큰아들 양사우의 자손이 세웠다.
소재지 : 보은군 회남면 산수리
보은군 회남면 산수리는 평창공의 둘째 아들 양사필이 세거하였고 그 자손이 세웠다.
평창공 양희증은 선대 외조부의 집안이 사화의 영향을 가장 깊게 받았고 그로인해 아버지는 귀양까지 가게 되었으며 인종의 인척으로 혈족들이 을사사화의 화를 입게 되자 그 자손들은 충청 이남 지역으로 세거지를 이거하였다. 아들 양사원은 밀양의 무안지역으로 세거지를 이거하였는데 무안지역은 임진왜란의 충신을 배출한 고장이었다. 손자 양조한과 함께 순절한 동래향교의 교수 노개방이 무안지역 출신이었고 승병으로 큰 공을 세웠던 사명대사의 생가가 무안지역이었다.
3.진사공양사원의 장자손제단(진성단:금정구 체육공원로399번길197)
부산시 노포동 대룡마을에는 양부하의 묘하에 양사원과 그 자손의 제단이 설치된 진성단이 있다. 양사원은 1子 양겸을 낳았는데 밀양 대안마을에서 부산 동래 부곡으로 이거하였다. 양겸은 3子를 낳았는데 양조한, 양근한, 양통한이다. 큰 아들 양조한은 노포동으로 이거하였고 1子 양홍을 두었다. 둘째 아들 양근한은 양정동으로 이거하였다. 셋째 아들 양통한은 2子 양의와 양숙을 두었고 양의의 아들 양취일이 반송동으로 입향하였다. 그 인연으로 반송동에 삼절사를 건립하였다. 양조한과 양통한이 삼절사에 배향된 임진왜란의 충신이다.
3-2. 양태수 공과 묘하 재실 사모재(밀양시 무안면 덕암리)
양조한 공은 밀양 무안 덕암마을로 입향하신 양사원의 장손이며 아버지 양겸께서 동래부 부곡리로 이거하시어 양조한은 젊어서 동래향교에 입거하였고 문덕겸과는 친한 사이이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이 동래로 쳐들어왔을 때 양조한과 문덕겸은 동래향교에 모셔진 성현의 위패를 동래읍성 안으로 옮긴 후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과 함께 동래부사 송상현을 따라 순절하였다. 양조한은 1子 양홍을 낳았는데 동래성 전투에서 양조한의 아들 양홍도 함께 전사하였다. 양홍은 2子를 낳았는데 양부하와 양태수이다.
양부하는 임진왜란 때 할아버지 양조한과 아버지 양홍이 순절하고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서 일본으로 끌려갔고 동생 양태수는 증조부 양사원의 입향지인 밀양 무안 덕암마을로 피난을 갔고 그 인연으로 자손 세거지가 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양부하는 이후에 중국사신 심유경과 도모하여 토요토미히데요시를 독살하였고 그로인해 왜란의 종결되었다.
이 사실은 염헌집 연려실기술 성호사설 등에 실려있다. 양조한의 동생 양통한은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양부하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형 양조한의 손자임을 확인하고 재산과 노비를 주고 장가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양부하는 경주이씨 이종택의 따님과 결혼을 하고 부산 노포동 대룡마을에서 천수를 누렸고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다. 양조한의 충절을 지역 사림이 흠모하여 반송 삼절사, 복천 송공단, 안락 충렬사에 배향하였다.
반송 삼절사(盤松 三節祠)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양지·양조한·양통한 등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씨 일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1986년 5월 29일 부산광역시의 有形文化財(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삼절사는 임진왜란때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양씨 일문 3인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3인 중 양지는 경기도 파주인으로 적성현감을 거쳐 경기도 광주군수로 부임하여 임진왜란때 성을 지키다 순절하여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839년 삼절사 건립후 합사하였다. 양조한(1555-1592)은 동래향고 유생으로 동래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 위패를 성내의 정원루에 봉안한 후 순절하여 호조정랑에 증직되었다. 양통한(1559-미상)은 양조한의 아우로서 난을 피하여 두아들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활동 중 순절하여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이들 임진왜란때 순절하신 삼공신의 넋을 위로하고 그 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약 300여년간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매년 봄 가을에 향사를 이어왔으며, 향토방위를 통한 호국정신과 당시의 사회윤리관 확립을 위한 정신사적 측면, 그리고 이를 기념하는 현장임을 감안,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839년 동래부사 이명적에 의해 약 400평의 경역에 사당 1동, 재실 1동, 관리사 1동의 목조건물이 건립된 후 몇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1990년 현재의 모습으로 정화하였다.
시조(始祖) 량 을나(良 乙那) - 碧浪國(벽랑국) 공주(公主).
1世祖(세조) 양능양(梁能讓) - 配位(배위)는 開城王氏(개성왕씨) 左僕射(좌복사) 琳(림)의 따님이시고, 孝隱太子(효은태자) 東陽君(동양군) 垣(원)의 손자이시며, 高麗(고려) 太祖(태조)의 曾孫女(증손녀)이시다.
2世祖(세조) 양득겸(梁得謙) - 奉議大夫(봉의대부) 工部郎中(공부낭중)
- 配位(배위)는 어느 문헌에도 없다.
3世祖(세조) 양득황(梁得璜) - 國子進士中顯大夫 兵部議郎(국자진사중현대부병부의낭)
- 配(배) 경주설씨(慶州薛氏) 父(부) 書史儒令縉(서사유령진)
4世祖(세조) 양탁영(梁卓英) - 文科史部典書戶長正(문과사부전서호장정)
- 配(배) 하음봉씨(河陰奉氏) 父(부) 監門尉佑(감문위우)
5世祖(세조) 양 견(梁 堅) - 號(호) 月亭(월정)
- 文科(문과) 匡靖大夫(광정대부) 判密直(판밀직)
- 同事近賢館(동사근현관) 知春秋館事(지춘추관사)
- 配(배)이천서씨(利川徐氏) 父(부) 掌治署令俸(당치서령봉)
6世祖(세조) 양이승(梁利升) - 匡靖大夫(광정대부)僉議評理(첨의평리)上護軍(상호군)
- 配(배) 수원공씨(水原貢氏) 父(부) 護軍有全(호군유전)
7世祖(세조) 양충립(梁忠立) - 陪戎校尉(배융교위) 副戶長正(부호장정)
- 修文殿大學士수문전대학사)
- 配(배)장사유씨(長沙兪氏) 父(부) 萬里(만리)
8世祖(세조) 양당취(梁唐就) - 奉議大夫(봉의대부) 兵部郎中(병부낭중) 兼(겸)
- 政堂文學(정당문학)
- 配(배) 안동권씨(安東權氏) 父散員育(육)(부산원육)
- 後配(후배)鄭氏(정씨)
- 父(부)左右尉(좌우위)保勝別將(보승별장) 瑞春(서춘)
9世祖(세조) 양 준(梁 俊) - 字(자) 仲燦(중찬) 文科(문과) 中顯大夫(중현대부)
- 成均(성균)祭酒(제주) 翰林學士(한림학사)
- 賜紫金魚帶知製敎(사자금어대지제교)
- 配(배)남원윤씨(南原尹氏) 父(부)將士郎仲恭(장사낭중공)
10世祖(세조) 1子(자) 양 동필(梁 東弼) - 判事(판사)
10世祖(세조) 2子(자) 양 동수(梁 東秀)
10世祖(세조) 3子(자) 양 우(梁 祐) - 字(자) 求仁(구인) 號(호) 默齋(묵재)
- 配(배) 朔寧郡夫人(삭녕군부인) 양 씨(梁 氏).
父(부) 興議政(흥의정) 光粹(광수)의 따님으로 筆者(필자:양방수)의 直系(직계) 할머님이시다.
- 後配(후배) 청주이씨(淸州李氏).
父(부) 長沙(장사) 朝宗監務子虛(조종감무자허)
10世祖(세조) 4子(자) 양 서(梁 瑞) - 경주이씨(慶州李氏)
10世祖(세조) 4子(자) 양 윤유(梁 允儒)
釜山(부산) 東萊(동래) 北面(북면) 大龍洞(대용동) 梁敷河(양부하) 선조님께서는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을 당하여 12살에 捕虜(포로)로 잡혀가 九死一生(구사일생)으로 살아 오신 梁敷河(양부하) 선조님의 勇猛(용맹)은 우리 梁門(양문)의 龜鑑(귀감)으로 삼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랑중의 자랑이 될 수 있는 世系(세계)를 밝힌다.
아래 10세조 우 판도판서공의 아드님이 7형제로 아래와 같다.
첫째가 11世祖(세조) 양 우룡(梁 友龍) - 가덕 이씨(嘉德 李氏) - 梁芳秀(양방수) 직계 선조이시다.
둘째가 11世祖(세조) 양 천룡(梁 天龍) - 밀양 박씨(密陽 朴氏)
셋째가 11世祖(세조) 양 인룡(梁 仁龍) -
넷째가 11世祖(세조) 양 득용(梁 得龍) - 덕수 이씨(德水 李氏)
다섯째 11世祖(세조) 양 석륭(梁 碩隆) - 려흥 민씨(驪興 閔氏)
여섯째 11世祖(세조) 양 지석(梁 之碩) -
일곱째 11世祖(세조) 양 천기(梁 天褀) -
아래는 釜山(부산) 東萊(동래) 北面(북면) 大龍洞(대용동) 梁敷河(양부하) 선조님께서는
다섯째11世祖(세조) 양 석륭(梁 碩隆) - 려흥 민씨(驪興 閔氏)의 후손이시다.
12世祖(세조) 梁九疇(양구주) 선조님의 아드님들은 어래 와 같다
13世祖(세조) 첫째 梁敬之(양경지) 둘째
13世祖(세조) 梁誠之(양성지) 公(공)의
14世孫(세손) 첫째 梁瑗(양원) 둘째이신
14世孫(세손) 梁琇(양수) 셋째 梁瓚(양찬) 넷째 梁琥(양호) 큰사위 壻(서) 李世蕃(이세번) 둘째사위 壻(서) 孫灌(손관) 6남매중의 둘째이신 梁琇(양수)의
15世孫(세손)이신 첫째 梁潤(양윤) 둘째 梁浻(양형) 셋째 梁淑(양숙),사위 壻(서)이신 河應淡(하응담), 3남 1여중에 長子(장자)이신 梁潤(양윤)의 아드님이신
16世孫(세손) 梁希曾(양희증), 梁希參(양희삼), 사위 洪彦光(홍언광), 李思誠(이사성), 李覬(이기), 金(김) 金鏘(김장), 2남 4녀중 長子(장자)이신 梁希曾(양희증)이신 平昌公派(평창공파) 派祖(파조)이신 후손이시다.16세손 梁希曾(양희증)공은 6남 4녀를 낳으고,그 중에 셋째 梁思源(양사원)의 후손이시다.
16세손 梁希曾(양희증) 公(공)의 자제분들은 梁思佑(양사우), 梁思弼(양사필),
17世孫(세손) 梁思源(양사원), 梁思贊(양사찬), 女兄弟(여형제), 朴忠佑(박충우), 元俊良(원준량), 韓潾(한린), 柳宗洛(유종낙),중에 셋째이신 17世孫(세손) 梁思源(양사원) 선조님의 曾孫子(증손자)이시다.
17世孫(세손) 梁思源(양사원) 公(공)께서는
18世孫(세손) 梁謙(양겸)을 두셨는데, 梁謙(양겸) 선조님께서는
19世孫(세손) 梁潮漢(양조한), 梁近漢(양근한), 梁通漢(양통한), 세자제분을 두셨는데,
19世孫(세손)이신 梁潮漢(양조한) 公(공)은 梁鴻(양홍)을 두셨고,
20世祖(세조)이신 梁鴻(양홍) 선조님께서는
21世孫(세손)이신, 梁敷河(양부하), 梁泰洙(양태수)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오늘의 주인공으로 기록하시는 19世孫(세손)이신 梁潮漢(양조한) 公(공),
20世孫(세손)이신 梁鴻(양홍),
21世孫(세손)이신 梁敷河(양부하) 선조님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송공단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공 229-78번지에 소재하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제단이며 7개의 단에 15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송공단에는 중앙에 송상현 부사의 비가 있고 왼쪽에 조영규, 노개방의 비가 있다. 오른쪽에 김희수, 송봉수, 양조한, 문덕겸의 비가 있고, 그 옆에 한 단을 낮추어 김상, 송백, 신여로의 비가 있으며, 그 옆으로 한 단을 더 낮추어 동시사란민인위(同時死亂民人位) 비석이 있으며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고 부산광역시 동래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충렬사는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번지(충렬대로345)에 소재하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92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며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음력2월과 8월 중정일에는 안락서원에서 제향을 봉행하고 5월25일에는 부산광역시에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양통한은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양조한의 동생으로 2子를 두었는데 양의와 양숙이며 3부자가 모두 임란의병에 참여하였다. 큰 형님 양조한과 장조카 양홍이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양통한 3부자가 임란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양조한의 장손 양부하가 토요토미히데요시를 독살하니 임진왜란 제1의 충절의 가문으로 꼽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
양통한은 형님과 장조카가 순절하고 동래성이 무너지자 스스로 일어나서 의병이 되었으며 북상하는 왜적을 쫒았다. 임진왜란 당해년도 6월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비밀리에 통문을 받아든 양통한은 경주의 문천 강가인 반월성 남쪽에서 경주성의 탈환을 위한 결사항쟁의 맹서를 다지게 된다. 이 맹세가 문천회맹인데 12개 고을의 132명의 의병이 모여 짐승의 피를 마시고 서약을 지키자고 의지를 표명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혈맹이다. 이후 7월에 영천 복성 전투에 참전하여 성을 탈환하였고 8월에 서천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9월에 경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무엇보다 문천회맹이 위대한 것은 이후에 다른 회맹을 맺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양통한은 경주 임난 의사 추모회가 주관하여 문천회맹에 참여하고 경주성을 회복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임란창의공원에 추향하였다. 문천회맹 당시에는 양통한의 아들들은 나이가 어렸던 것으로 보여지며 4년이 지난 후 팔공산 회맹에서는 큰아들 양의와 함께 참여하였다.
1596년 3월에 팔공산에서 영남의 의병장이 모여서 결성한 팔공산 회맹에는 양통한과 양의가 참여하였는데 양통한의 큰 아들 양의 또한 의병장이 되었던 것이다. 양통한과 양의가 영남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대구 망우공원에 조성된 임란 호국영남 충의단에 두 부자를 함께 추향하였다. 1597년 정유래란이 일어났을 때는 두 아들 양의와 양숙을 데리고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화왕산성 동고록에는 큰아들 양의와 함께 그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양통한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부하가 형 양조한의 손자인 것을 알아보고 재산과 노비를 주고 장가를 보내서 대를 잇도록 하였으며 그로인해 구족이 번성하게 되었다.
5-3. 의병장 양통한 장군을 추모하며
삼절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지, 양조한, 양통한 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양지는 경기도 장단 사람으로 양조한과 양통한의 족숙이며 모두 문양공의 후손이다. 양지는 무예가 출중하여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왕의 경호부대인 겸사복으로 출사하였고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적성현감이었다. 경기도 관군이 무너졌을 때는 적성현에서 병사를 정비하였고 한양수복의 명이 떨어지자 경기도 첨절제사가 되셨고 삭령군에 관군이 결집할 때 삭령군수가 되셨다. 적의 야습을 받은 후 경기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종사관 모두가 전사하실 때 함께 순절하셨다.
그 충절을 숭상하기 위해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삭령의 표절사에 배향하였다. 삼절사는 1839년 동래부사 이명적이 건립하였고 동래부 사림의 제의로 삼절사라고 칭하게 되었고 1840년 사림의 요청으로 경상도 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일문 삼절의 합사를 조정으로 부터 윤허받았다. 제반 비용은 동래부에서 제공하였고 제향은 향내 유림이 주관하였다. 사당의 강당인 세한당은 절도사부터 목재 일체의 사용권을 허락받고 완공하였다. 삼절사는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호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義兵(의병)을 일으키시고 率家童(솔가동)을 거느리고, 戰地(전지)에 나아가 공을 세워 宣祖(선조) 임금으로부터 사재감(司宰監) 僉正(첨정)을 除授(제수) 받으신 梁浩(양호) 선조님의 家系(가계)를 整理(정리) 한다.
시조(始祖) 량 을나(良 乙那) - 碧浪國(벽랑국) 공주(公主).
1世祖(세조) 양 능양(梁 能讓) - 配位(배위)는 開城王氏(개성왕씨) 左僕射(좌복사) 琳(림)의 따님이시고, 孝隱太子(효은태자) 東陽君(동양군) 垣(원)의 손자이시며, 高麗(고려) 太祖(태조)의 曾孫女(증손녀) 사위이시다.
2世祖(세조) 양 득겸(梁 得謙) - 奉議大夫(봉의대부) 工部郎中(공부낭중)
- 配位(배위)는 어느 문헌에도 없다.
3世祖(세조) 양 득황(梁 得璜) - 國子進士中顯大夫 兵部議郎(국자진사중현대부병부의낭)
- 配(배) 경주설씨(慶州薛氏) 父(부) 書史儒令縉(서사유령진)
4世祖(세조) 양 탁영(梁 卓英) - 文科史部典書戶長正(문과사부전서호장정)
- 配(배) 하음봉씨(河陰奉氏) 父(부) 監門尉佑(감문위우)
5世祖(세조) 양 견(梁 堅) - 號(호) 月亭(월정)
- 文科(문과) 匡靖大夫(광정대부) 判密直(판밀직)
- 同事近賢館(동사근현관) 知春秋館事(지춘추관사)
- 配(배)이천서씨(利川徐氏) 父(부) 掌治署令俸(당치서령봉)
6世祖(세조) 양 이승(梁 利升) - 匡靖大夫(광정대부)僉議評理(첨의평리)上護軍(상호군)
- 配(배) 수원공씨(水原貢氏) 父(부) 護軍有全(호군유전)
7世祖(세조) 양 충립(梁 忠立) - 陪戎校尉(배융교위) 副戶長正(부호장정)
- 修文殿大學士수문전대학사)
- 配(배)장사유씨(長沙兪氏) 父(부) 萬里(만리)
8世祖(세조) 양 당취(梁 唐就) - 奉議大夫(봉의대부) 兵部郎中(병부낭중) 兼(겸)
- 政堂文學(정당문학)
- 配(배) 안동권씨(安東權氏) 父散員育(육)(부산원육)
- 後配(후배)鄭氏(정씨)
- 父(부)左右尉(좌우위)保勝別將(보승별장) 瑞春(서춘)
9世祖(세조) 양 준(梁 俊) - 字(자) 仲燦(중찬) 文科(문과) 中顯大夫(중현대부)
- 成均(성균)祭酒(제주) 翰林學士(한림학사)
- 賜紫金魚帶知製敎(사자금어대지제교)
- 配(배)- 남원윤씨(南原尹氏) 父(부) 將士郎 仲恭(장사낭 중공)
10世祖(세조) 1子(자) 양 동필(梁 東弼) - 判事(판사)
10世祖(세조) 2子(자) 양 동수(梁 東秀)
10世祖(세조) 3子(자) 양 우(梁 祐) - 字(자) 求仁(구인) 號(호) 默齋(묵재)
- 配(배) 朔寧郡夫人(삭녕군부인) 양 씨(梁 氏).
父(부) 興議政(흥의정) 光粹(광수)의 따님으로 筆者(필자:양방수)의 直系(직계) 할머님이시다.
- 後配(후배) 청주이씨(淸州李氏).
- 父(부) 長沙(장사) 朝宗監務子虛(조종감무자허)
10世祖(세조) 4子(자) 양 서(梁 瑞) - 경주이씨(慶州李氏)
10世祖(세조) 4子(자) 양 윤유(梁 允儒)
11世祖(세조) 양 우룡(梁 友龍) - 가덕 이씨(嘉德 李氏)의 자녀
12世祖(세조) 양 사귀(梁 思貴) -
12世祖(세조) 양 사도(梁 思道) -
12世祖(세조)
12世祖(세조) 양 사귀(梁 思貴) - 진양강씨(晋陽姜氏)의 자녀.
13世祖(세조) 양 결(梁 결) -
13世祖(세조) 양 민(梁 岷) -
13世祖(세조) 양 역(梁 嶧) -
13世祖(세조) 양 기(梁 岐) -
13世祖(세조) 양 교(梁 嶠) -
13世祖(세조) 양 준(梁 峻) -
13世祖(세조) 양 준(梁 峻) - 상산김씨(商山金氏)의 자녀.
14世祖(세조) 양 보(梁 普) - 용성양씨(龍城梁氏).
14世祖(세조) 장녀- 최 린(崔璘)-海州人 世祖庚辰(세조경진:1460년 세조 5년)에公職者(공직자)
14世祖(세조) 차녀- 김 효문(金孝文) - 만호(萬戶).
14世祖(세조) 양 보(梁 普) - 용성양씨(龍城梁氏)의 자녀.
15世祖(세조) 장남 - 梁 龜壽(양 구수) - 慶州金氏(경주김씨).
15世祖(세조) 차남 - 梁 鳳壽(양 봉수) - 錦山余氏(금산여씨).
15世祖(세조) 장녀 - 이 명견(李 命堅) - 전주인(全州人)
15世祖(세조) 차녀 - 김 준손(金 駿孫) - 김해인(金海人) 直提學(직제학) 馹孫之兄(일손지형)
- 濯號三足堂大有(탁호삼족당대유)
15世祖(세조) 삼녀 - 유 팽종(柳 彭宗) - 郡守(군수)子(자) 忠謙(충겸)
15世祖(세조) 사녀 - 신극충(愼克忠). 縣監(현감) -子(자) 濠(호) 濂(렴)
- 1984년 甲子譜(갑자보)는 子(자)를 濂(렴)으로
- 1986년 丙寅譜(병인보)는 子(자)를 濠(호) 제각기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15世祖(세조) 梁 龜壽(양 구수)의 慶州金氏(경주김씨)의 자녀.
16世祖(세조) 梁 弘濟(양 홍제) - 咸陽朴氏(함양박씨).
15世祖(세조) 梁 鳳壽(양 봉수) - 錦山余氏(금산여씨)의 자녀.
16世祖(세조) 梁 弘澤(양 홍택) - 瑞山柳氏(서산유씨).
- 後嗣(후사)가 없어 梁浩(양호) 선조님께서 系子(계자)로 入籍(입적).
16世祖(세조) 梁 弘漑(양 홍개) - 庶子(서자).
16世祖(세조) 양 홍제(梁 弘濟) - 咸陽朴氏(함양박씨)의 자녀.
17世祖(세조) 장남 - 양 주(梁 澍) - 해주오씨(海州吳氏).
17세조(世祖) 차남 - 양 발(梁 潑) - 延安金氏(연안김씨).
17세조(世祖) 삼남 - 양 호(梁 浩) - 長水黃氏(장수황씨).
17世祖(세조) 양 호(梁 浩) - 長水黃氏(장수황씨)의 자녀.
18세조(世祖) 장남 - 양 사준(梁 士俊) - 驪陽陳氏(여양진씨).
- 驪陽陳氏(여양진씨).
- 義昌丁氏(의창정씨).
18世祖(세조) 차남 - 양 사의(梁 士儀) - 蓮城金氏(연성김씨).
18世祖(세조) 장녀 - 한 극탁(韓 克㤞)에게 출가.
18世祖(세조) 차녀 - 곽 유번(郭 維蕃)에게 출가.
參考(참고) : 임진왜란을 당하신 세분 형제와 직계 조상님들은 빨간글로 標示(표시)하였다.
17世祖(세조) 장남 - 양 주(梁 澍) - 해주오씨(海州吳氏).
17세조(世祖) 차남 - 양 발(梁 潑) - 延安金氏(연안김씨).
17세조(世祖) 삼남 - 양 호(梁 浩) - 長水黃氏(장수황씨).선조님들의 직계 선조님들은 빨간 標示(표시)를 하였다.
그때 정유재란 때 남원성(南原城)을 지키다 순절한 지사들의 무덤이, 사적 제272호로 남아있다.
소재지(所在地)-남원읍-남원성에서 전사한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基遠) 등 8명의 충신과 병사 2,000 여명 및 주민 1만여명을 묻은 만인(萬人) 의총(義塚) - 아래는 교룡산성 지도
시대-삼국시대(백제)-교룡산성(蛟龍山城)-전라북도 기념물 제 9호소재지-남원시 산곡동 16-1번지
교룡산성은 만인의총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교룡산 중턱에 위치한다.(지방 기념물 제9호) 남원지역 20여개의 산성중 그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성으로 백제때 신라와 대적하여 처음 쌓았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다.
조선조 선조때 임진왜란시 금산사에서 의거한 승병장 처영이 크게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교룡산성은 518m의 교룡산 중턱을 둘러싼 약 3km의 규모로 높이 4.5m 성안에 99개의 우물과 작은 골짜기와 군창등이 있었고 동, 서, 남, 북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문(홍예문)과 동서간 남벽이 안아 있다. 후손들이여 ! 이 산성을 가 보아라 ! 우리를 낳아주신 양호(梁浩) 선조님의 발자취가 아직 남아있는 거룩한 곳이다. 남원지역 20여개의 城(성)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백제시대 때 신라와의 접전을 위해 쌓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 처영이 크게 고쳐 쌓았으며, 높이 4.5m, 길이 약 4km에 달한다. 마면 7개소, 샘 99개소, 치첩 1,016개소, 그 밖에 군창과 무기고가 있었고,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으며 현재 동문인 홍예문과 동서간 남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별장청(別將廳), 장대(將坮), 곡성창(谷城倉), 구례창(求禮倉), 염고(鹽庫), 장고(奬庫), 군기(軍器), 산창(山倉), 선국사(善國寺)등이 있었고, 정유재란 때 이곳에 곡식과 무기, 소금, 장을 보관하고 많은 승병이 있었다.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어 운봉과 여원치 전투를 벌였던 김개남 장군이 이곳에 주둔하여 군사 훈련을 하기도 했다. 교룡산을 중심으로 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각종 체육 시설, 캠프장 등이 갖추어져 있다. 앞으로 교룡산 유적공원을 조성할 계획으로 있어, 민속 시설물과 성곽 및 성문 복원 등이 추진되면 시내권에서는 가장 전망 좋은 시민 휴양지로 변모할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남원성곽조를 보면, 교룡산성은 石築周(석축주) 5717尺(척) 高(고-높이) 10尺(척) 內有(내유) 99井(정), 小溪(소계) 又有軍倉(우군창) 이라 하였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在西北(재서북) 周圍(주위) 1,125步(보) 石城內有泉六(석성내유천육) 又有小溪冬夏不渴(우유소계동하불갈) 有軍倉(유군창) 이라 기록되어 있다.
또 「문헌비고」에는, 在府北(재부북) 石築(석축) 周(주)5717尺척) 高(고) 11尺(척) 宣祖朝(선조조) 倭亂時重修(왜란시중수) 舊有(구유) 存(존) 99井(정) 今存(금존) 8井(정)이라 기록 하고 있다. = 풀이하면 교룡산성은 석축 주위가 5717척이고, 높이는 10척이고, 산성안에 우물이 99곳이나 있다. 그리고 작은 시내와 또 군대의 창고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서북쪽에 주위가 1,125보이며, 석성안에 우물샘이 6곳이나 있다. 또 작은 시냇물은 여름,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 군대의 창고가 있다. 문헌비고에는 북쪽에 있고, 석축의 주위는 5717척이고, 높이는 11척인데, 선조때 임진왜란때에 수리하여 우물이 99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8곳이다라고 기록 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들로 보아 교룡산성의 처음 축조 년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조 선조때에 중수한 것만은 틀림없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11월조를 보면 도원수 권율이 승병장 처영에게 명하여 교룡산성을 수축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처영은 당시 의령에 있다가 이곳 남원으로 옮겨와 교룡산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변사정이 교룡산성 수어장이 되었다고 한다. 「태종실록」 10년조에는 경상 전라 제주의 요지산성의 수축을 명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전라도 관내에는 담양 금성산성, 정읍 입암산성, 고산 이흘산성, 도강 수인산성 나주 금성산성 등과 함께 남원 교룡산성은 첫 손가락을 꼽혔던 곳이다. 또 숙종 30년 때에 순찰사 민진원이 산성의 수축을 상계하여 부사 김창석과 영장 박창윤이 일을 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원읍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면 해발 518m 고지인 교룡산이 평지에서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를듯하는 이 교룡산의 중턱을 둘러 성이 쌓여있는데 이를 교룡산성,이라 한다.
龍城誌(용성지)의 기록에는 산성의 둘레는 7천 600척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현행 척수로는 1만 400척이고. 미터로는 3,120m 이다.
성벽은 깍은듯이 손질하여 정밀하고, 성벽의 높이는 15척이니 4-5m가 된다. 성안에는 馬面(마면)이 7개소, 샘이 99개소, 雉堞(치첩=성가퀴)이 1천 16개소 軍倉(군창)과 武器庫(무기고)가 있다. 동서남북 사대문중 東門(동문)은 霓文(홍예문)이고, 西門(서문) 南門(남문) 北門(북문)은 남원읍성의 경우와 같다. 오랜 세월 風雨(풍우)에 시달려 西(서),南(남),北(북), 三門(삼문)은 흔적이 없다.
동쪽의 虹霓文(홍예문)은 그나마 그대로 남아있어 귀중한 史學(사학) 연구의 자료가 된다. 교룡산은 2개의 봉우리로 북쪽은 密德峰(밀덕봉) 남쪽은 福德峰(복덕봉)이라 하여 북의 密德(밀덕)이 남의 密德(밀덕)보다 약간 높아 마치 兄弟峰(형제봉)처럼 友愛(우애)있게 서있어 보이고, 夫婦峰(부부봉)처럼 금술좋게 서 있어 보인다.
교룡산성은 唐(당)나라 劉仁軌(유인궤) 장군이 쌓은 것이라 하나 訛傳(와전) 되었다는 견해다. 百濟(백제) 시대의 축성으로 보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시대의 南原(남원)은 百濟(백제)의 영역이였고, 雲峰(운봉)은 신라의 領土(영토)였다. 양국의 국경인 남원을 신라의 침략으로 부터 방비하기 위하여, 백제는 이곳에 蛟龍山城(교룡산성)을 쌓았을 것으로 본다.
둘째 신라는 양국의 국경 충돌이 잦음에 따라 백제의 來襲(래습)을 막기 위하여 雲峰面(운봉면) 準香里(준향리)에 準香山城(준향산성)을 쌓고, 佳庄村(가장촌)에 水晶山城(수정산성)을 쌓고, 城里(성리)에 城里山城(성리산성)을 쌓았으며, 또 백제의 기습을 대비하기 위하여 佳山里(가산리)에서 鄭嶺峙(정령치)에 이르기 까지 상하 이중으로 巡羅路(순라로)를 만들어 수시로 순시를 돌며, 국경 경비를 엄중히 하였으니, 이는 백제가 南原(남원-당시는 帶方郡(대방군)이라 하였음)을 신라를 침범하는 군사 기지로 要塞化(요새화)하였다는 것을 방증 할수있는 史的(사적) 근거가 된다.
셋째 新羅(신라)가 雲峰(운봉)지구에 여러 城(성)을 쌓았으니 百濟(백제)도 이에 도전하여 雲峰(운봉)과 가장 가까운 帶方郡(대방군)의 蛟龍山城(교룡산성)을 이 때 百濟(백제)에서 쌓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넷째 沿革(연혁)편에서 이미 기술한바와 같이 백제 武王(무왕)은 신라의 眞平王(진평왕)때인 서기 602년 阿莫山城[아막산성=雲峰(운봉)의 古號(고호)가 阿莫山城(아막산성)임]을 첬으나,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616년에 다시 母山城(모산성=모산성은 雲峰(운봉)의 古號(고호)을 재침하였다는 史記(사기)가 있으,니, 이때에 백제가 阿莫山城(아막산성)이나 母山城(모산성)을 칠려면 반드시 대방(남원)에서 상주한 兵力(병력)을 동원하였을 것이므로 이곳에 堅固(견고)한 城址(성지)가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그리고 산성을 축성한 정확한 연대는 알수 없으나, 이는 신라 백제가 충돌이 가장 자주 일어나던 무렵인 서기 600년으로 추정 할 수가 있다.
그 후 新羅(신라)가 統一(통일)하고 高麗(고려)를 거쳐 朝鮮(조선)조에 와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11월에 都元帥(도원수) 權慄(권율)이 義兵(의병) 僧將(승장) 處英(처영)에게 명하여 이 城(성)을 대대적으로 修築(수축)하게 하였던 바 (처영)은 慶尙南道(경상남도) 宜寧(의령)의 僧兵(승병)을 모조리 이끌어 蛟龍山城(교룡산성)에 주둔하고 동원된 南原(남원) 백성들과 협력하여 5개월 후인 이듬해 4월에 공사를 마쳤다.
이때에 本府(본부) 出身(출신)인 義兵將(의병장) 邊士貞(변사정)은 연세가 70세 高齡(고령)인데도 여러차례 왜적과 싸워 항상 전승하여 사람들은 그를 敵愾將軍(적개장군)이라 애칭하였는데 命(명)에 의하여 蛟龍山城(교룡산성)의 守禦將(수어장)이 되었다.
그 때에 筆者(필자)의 선조님이신 梁澍(양주), 梁潑(양발), 梁浩(양호) 삼형제가 뜻을 같이 하시고, 열심히 싸우다가 맏형 梁澍[=1550년 庚戌年(경술년) 3월 16일생]선조님은 1597년 정유재란 때인 11월 13일에 48세의 나이에 戰死(전사)를 당하셨다. 동생 梁潑[양발= 1553년 癸丑年(계축년) 생] 선조님께서는 45세 때에 정유재란을 당하셨고, 梁浩[양호= 1569년 己巳年(기사년) 생] 선조님께서는 29세의 나이에 정유재란을 당하여 싸우시고 戰功(전공)을 많이 세워서 송강 정철이 임금님에게 상소하여 司宰監僉正(사재감첨정)의 벼슬을 제수 받으셨다.
1986년 丙寅譜(병인보)에 筆者(필자)가 정리한 僉正公(첨정공)님의 行狀(행장)을 옮겨 적는다.
府君(부군)의 이름은 浩(호)요, 字(자)가 養直(양직)이시고, 奉正大夫(봉정대부)이신 17세 先祖(선조)이시다. 府君(부군)은 1569년 己巳年(기사년-宣祖(선조) 2년) 5월 4일에 태어나셔서, 1592(선조 25년)년23세의 어린 나이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킨 형님을 따라 남원 고을을 死守(사수)하신 憂國之士(우국지사)이시다.
1592년 4월 14일 小西行長(소서행장)을 先鋒(선봉)삼아 제일군이 十五萬 大軍(15만대군)으로 釜山(부산)에 상륙하여 밀양, 대구, 상주, 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加藤淸正(가등청정:가또오)이 이끈 제 이군은 울산, 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일군과 합세하여 서울로 進軍(진군)하는 한편 黑田長政(흑전장정:구로다)의 제 삼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상하고, 九鬼嘉隆(구귀가륭:구끼요시다가)와 藤堂高虎(등당고호:도모도모)가 거느린 구천(9,000)여명의 水軍(수군)은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케 하여 일곱해(칠년)에 걸친 歷史上(역사상)가장 처참한 난리가 일어 났었다.
倭賊(왜적)의 급보를 들은 조정에서는 申 砬(신 립)을 都巡邊使(도순변사)로 李 鎰(이 일)을 巡邊使(순변사)로 삼아 일본군의 進路(진로)를 막게 하였으나, 李 鎰(이 일)은 상주에서 크게 패하고 申砬(신립)은 충주 彈琴臺(탄금대)에서 패하여 죽었다. 申 砬(신립)의 패보는 서울의 상하 인심을 크게 동요시키고 宣祖(선조) 임금은 朝廷(조정)의 모든 臣下(신하)들과 평양으로 蒙塵(몽진=임금이 난리를 만나 피함)하셨다.
倭賊(왜적)의 침노에 대한 급보가 남원에 雄據(웅거=땅을 차지하고 크게 막아 지킴)해 있는 府君(부군)에게도 전해졌다. 府君(부군)께서는 그해 6월 23일 앉아서 있을수가 없서 분연히 일어났다. 府君(부군)께서는 타고난 천성(天性)이 순박하시고 씩씩하시어 長成(장성)한 후에는 보통 사람과 다르셨으며 재주가 뛰어나시고 聰明(총명)하시여서 石磎公(석계공) 형님께 학문을 배우셨는데 배움에 있어서는 번거롭게 하지 않으셨고 스스로 성취함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휼륭한 형이 있으므로 휼륭한 아우가 있다 하였다. 石磎公(석계공) 형님은 眉巖(미암) 柳 希春(유 희춘)의 제자로서 지조와 행실이 굳고 확실하고 지식이 분명하며 품행이 올바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石磎公(석계공)과 벗하여 놀던 친구들은 活溪(활계) 李 大외(이 대외)선생,桃灘(도탄) 邊 士貞(변 사정)선생과 ,晩軒(만헌)丁 焰(정 염)선생과 未能齊(미능제), 崔 尙重(최상중)선생, 前 縣監(전 현감) 楊 士衡(양 사형)이였는데 當世(당세=그 시대의세상)에 학식과 덕행이 높은 인물(인물)들이셨다.
僉正公(첨정공)은 맏형 石磎公(석계공)에게서 친히 가르침을 받으셨고 스승과 벗에게서 見聞(견문)이 自古以來(자고이래=일과 물건의 내력이 예로 부터)로 물들어 있었다.
맏형 石磎公(석계공)이 史記(사기)를 읽고 적에 대한 분개로 절개를 위하여 죽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으시고 몹시 한탄하시고, 아우 僉正公(첨정공)에게 이르시기를 어떤 뜻을 이루려는 의기는 뜻이있고, 재주가 뛰어남에 있어 義氣(의기)가 북받치어 사실을 경험함이 옳다고 힘쓰고, 힘쓰라고 가르치셨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의 노략질로 영남과 호남이 焦土化(초토화)되고 임금이 서울을 떠나 난리를 피하시니, 맏형 石磎公(석계공)이 이 소문을 듣고 痛哭(통곡)하며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고, 아우 첨정공에게 말하기를, 우리집은 양반의 후예로써 나라에서 두터운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고, 지금 이때는 신하된 도리로서 목숨을 바칠때니, 나는 마땅히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이 내 소임이라고 하시고, 너는 中國(중국) 三國時代(삼국시대)의 諸葛孔明(제갈공명)과 梅鶴(매학)의 일을 행하라고 부탁 하시니, 울며 답하시니를 형님이 奮力(분력:힘을 돋우어 일으 킴)하고, 出陣(출진)하는데, 어찌 동생이 그냥 집에 있을수가 있겠읍니까 ? 하고 집안의 모든 재산을 軍糧(군량)으로 갖추고 門下生(문하생)들과 집안에 부리던 모든 종들과 수십 무리를 거느리고 桃灘 邊 士貞(도탄 변사정)의 진영에 이르니 邊 公(변공)도 의병을 일으켜 남원부에 모였다.
僉正公(첨정공) 兄弟(형제)가 적에 대한 분개로 목표를 세우고 곳곳에 檄文(격문)을 내고 의병을 모집하여 旗幟(기치:군중에서 쓰는 온갖 기)를 들고 戰列(전렬)에 나서서 前 光州 牧使 丁焰(전 광주 목사 정염)과 前 縣監 楊 士衡(전 현감 양사형)과 進士 金 得地(진사 김 득지)와 判官 金 汝剛(판관 김 여강)과 여럿이 모여 의논하는 자리에서 石磎公(석계공) 형님이 말씀 하시기를 이 남원부는 남쪽을 보호하는 요충지인데, 남원을 지키지 못한다면 호남 곡창지대는 적의 소굴이 될뿐 아니라 충청도 왜적이 서울의 왜적과 합세하면 회복할수 없으니 빨리 지방의 군사를 일으켜서 중요한 길목을 굳게 지키자고 力說(력설)하셨다.
왜적을 討伐(토벌)하기 위해 邊 公(변공)을 추대해서 대장을 삼고 전략을 세워 싸울곳을 분담하고 장차 10월에 출진 할것을 계획하고 있으니, 體察使 松江 鄭澈(체찰사 송강 정철)이 檄文(격문)을 本道(본도:남원)에 보내어 와서 보니 이제 왜적이 별안간 水原(수원)에 까지 쳐들어 왔으니 우리 군사가 바야흐로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있으니 남원의 의병은 관군과 더불어 빨리 구원하러 가라고 하였다. 변공이 거느린 병사를 이끌고 수원에 도착하고 첨정공께서는 體察使(체찰사)와 軍官 李 潛(군관 이잠)의 副官(부관)이된 사람과 黃澗(황간) 요충지에 들어가 영남에서 왕래하는 적의 길을 끊고 지키다가 伏兵(복병)을 두어 수많은 적을 죽이고 많은 포로와 무기를 노획 했다.
이듬해 1593계사년에 體察使(체찰사)가 각 사람의 功績(공적)을 임금에게 상주하는 글을 올려서 宣祖(선조) 임금이 특별히 僉正公(첨정공)에게는 司宰監僉正(사재감첨정) 또한 石磎公(석계공)에게는 司甕院 參奉(사옹원 참봉)을 除授(제수)하고 褒賞(포상)했다. 1594갑오년 여름에 邊公(변공)이 蛟龍山城(교룡산성)을 지키는 대장을 하니 僉正公(첨정공)도 같이 지켰다. 그해 겨울에 변공이 老衰(노쇠:늙어서 쇠약함)하여 귀향하니 僉正公(첨정공)과 判官 金 騮兼(판관 김류겸)과 더불어 교룡산성을 지키셨고 왜적을 막는 일을 하셨다.
1595乙未년 과 1596丙申년 두해를 계속 지키시다가 1597정유년에 다시 난리가 나자 中國(중국)의 명나라 장수 楊元(양원)이 가 와서 왜놈을 가볍게 보고 戰列(전렬)을 가다듬지 않고, 朝鮮(조선)의 鄕兵(향병)을 모두 解體(해체)시키고 지휘하니 모든 兵使(병사)와 水使(수사)가 陽元(양원)의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僉正公(첨정공)은 말하기를 이곳은 호남과 영남의 중요한 요지이니 소홀히 할수가 없다고 하니 陽 元(양원)이 듣지 않자, 僉正公(첨정공)은 정 만헌과 이 활계와 더불어 도내에 檄文(격문)을 보내고 곡식을 모아 군량을 갖추고 전렬을 가다듬자고 의논하다가 그 계획이 성취하지 못하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왜적은 守喜多秀家(수희다수가:우키타히데이에)등이 지휘하는 5만6천 병력이 求禮縣(구례현)을 거쳐 남원부를 침공하자 당시 전라병사 李 福男(이 복남)과 명나라 장수 양원이 이끈 연합군 4천여명과 이에 가세한 주민 6천여명등 1만여명이 최후까지 抗戰(항전)하다가 결국 陽元(양원)은 도망가고 玉碎(옥쇄)한 사적102호 萬人義塚(만인의총)의 내력은 그때를 말한다.
丁酉年(정유년) 陰曆(음력) 8월 14일에 시작된 전투는 열엿새(16일)까지 약 4일간 치열하게, 전개 되었으며 성이 함락 되었을때는 1만 여명의 軍民(군민) 가운데 목숨을 扶支(부지)한 자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맏형 석계공은 楊 元(양원)이 향병을 해산 시킨것을 분하게 여기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그해 겨울 1592정유년 11월 13일 48세로 戰地(전지)에서 전사하시니 첨정공은 어렸을때부터 형제간에 정이 두텁고 형님을 섬기기를 엄격한 아버지와 같이하시고 비록 싸우는 陳中(진중)에 있을때도 몸소 숙식을 보살피시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있다.
맏형 석계공이 전지에서 전사 하시니 첨정공은 애통한 마음으로 항상 눈물을 흘리시고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고향에 돌아오셔서 집안의 子弟(자제)를 敎導(교도)하시는 法度(법도)를 맏형 석계공의 법도에 따라하시고 사시다가 마침내 1627(인조5년 정묘년)년 10월 23일에 돌아 가시니 춘추(春秋)가 70세 였다.
첨정공(僉正公) 梁 浩(양 호) 墓碣銘(묘갈명:묘앞에 작은 비)
吏曹判書 林 肯洙(이조판서 임긍수 撰(찬:글 지음)
- 이 원문은 국립 도서관과 규장각에 있는 용성지에서 입수한 자료임. 원문 참조 할것. -
墓碣銘(묘갈명) 飜譯文(번역문) 直系孫 梁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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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둔덕 탄방 선영
첨정공(僉正公) 호(浩) - 17세조* - 거제 관포 양씨 직계 선조님 -
묘소(墓所)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둔덕리(屯德里) 탄방(炭坊)
제향일(祭享日) 음력(陰曆) 10월 11일.
배위(配位)는 長水 黃氏(장수황씨) 승지의 벼슬을 증직 받으신 迪(적)의 따님이시고 翼成公 黃憙正丞(익성공,황희정승)의 6세손이시고 武愍公 黃進(무민공 황진)의 姪女(질녀)이시다.
첨정공 형제의 史蹟(사적)은 趙山西 慶南 野史(조산서 경남 야사)와 丁 晩軒 文集(정만헌 문집)과 李 活溪 輓章(이 활계 만장)과 崔 未能齊 自敍錄(최 미능제 자서록)과 宋江 鄭澈(송강 정철) 狀啓(장계)와 高準峰 日記(고준봉 일기) 가운데 나오고 또 金歌川(김가천) 自昆(자곤)의 倡義日記(창의일기)에 상세하게 기록 되어있다. 이같은 不朽(불후)의 많은 行蹟(행적)이 있다. 아 ! 참으로 슬프다.
나라가 어지럽고 위태로운 변란을 당하여, 나라가 태평함이 오래여서 백성들이 兵亂(병란)을 알지 못하고 藩閫將兵[번곤장병=監司(감사) 兵使(병사) 水使(수사) 將卒(장졸)]과 臣下(신하)가 드리는 소문만 듣고 겁을 내어 용감히 나가 싸울자가 없으니. 오직 의병들이 호남에서 많이 나왔고, 의병의 소리가 미치는 곳에 兵勢(병세)가 크게 떨쳤으니 高 敬命(고 경명)과 金 千鎰(김 천일)이가 이들이다.
첨정공 형제가 벼슬없는 선비지만 憂國之心(우국지심)으로 분연히 일어나 몸소 창칼을 무릅쓰고 高 敬命(고 경명)과 金 千鎰(김 천일)과 같이 죽으셨으니 비록 죽음과 삶은 다르나 그 義理(의리)는 같다.
僉正公(첨정공)도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서 처음부터 병기와 군량을 만들어서 6년동안 싸움터에서 호남과 영남을 忠誠(충성)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한 마음으로 분주히 뛰신 보람으로 급하고도 어려운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셨다.
시대(時代)가 불리하여 큰 뜻을 가지고도 큰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참으로 哀惜(애석)하다 ! 사람으로서 떳떳하게 태어나 오직 忠誠(충성)과 節義(절의)를 지키셨으니 의병을 일으켜 한마음으로 盟誓(맹서)하고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했으니 그 아우에 그 형이로다.
의병을 일으켜서 남원부에서 다른城에 까지 미치였으니 하늘이 순조롭게 도우지 않아 마침내 功(공)을 세우는 큰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집으로 돌아 오신후에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조금도 없었다고 吏曹判書(이조판서) 任 肯洙(임 긍수)는 僉正公(청정공)의 墓碑文(묘비문)에 禮讚(예찬)하셨다.
僉正公(첨정공) 후손들이여 이글을 보아라 !
어찌 자손된 道理(도리)로서 先祖(선조)들의 行蹟(행적)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모든 先祖(선조)들의 冥福(명복)을 삼가 빌면서,
西紀(서기) 1986병인년 初春(초춘), 첨정공(僉正公) 13世孫(세손), 芳秀(방수)謹撰(근찬)
兵部公派中(병부공파중) 郡守公派(군수공파) 거제문중 三十世孫(30세손) 芳秀(방수) 謹撰(근찬)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중 군수공파 30세손 양 방수 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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